역사의 오늘
1821년 11월 11일,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소설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 도스토예프시키 / 도스토옙스끼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 1821 ~ 1881) 출생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 1821년 11월 11일/구력 10월 30일 ~ 1881년 2월 9일 / 구력 1월 28일)는 러시아의 소설가이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Фeдор Достоевский, 1821 ~ 1881)는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소설가이다. 반 독자들에게는 언젠가는 읽어야 할 작가, 평론가들에게는 가장 문제적인 작가, 문인들에게는 영감을 주는 작가 제1순위로 꼽히는, 그 영향력에 있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전무후무한 작가이다.
풀 네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 10월 30일 (신력으로는 11월 11일) 군의관이었던 미하일 안드레예비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모스크바 빈민 병원에서 일했으며, 잔인할 정도로 엄격한 성격의 소지주였다. 종교적이고 온화한 성격의 어머니와는 달리, 잔혹한 아버지의 이미지는 도스토옙스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 그의 작품 속 아버지들은 처음부터 부재하거나, 무능하거나, 잔학하여 자신의 자식들을 길거리로 내몰아 몸을 팔게 하거나, 자식들에게 살해당하거나, 아니면 그 자신이 자녀에 대한 육체적, 정신적, 심지어 성적인 폭군으로 등장하거나 한다. 도스토옙스키가 태어나고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은 그의 아버지가 의사로 일하던 모스크바 빈민 병원이었는데, 그 병원의 많은 환자들은 모두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으며, 어린 도스토옙스키는 이들과 대화하기를 즐겼다. 그때의 경험과 배움은 평생의 문학적 자산이 되었다. 가난의 심리학의 대가가 될 씨앗이 여기서부터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작가 스스로도 평생을 가난의 굴레에서 허덕였다.
그는 돈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결코 “현실적”이지 못했던 사람이고, 자신이 감당할 능력이 있건 없건 간에 떠넘겨지는 짐을 사양할 줄 몰랐다. 페테르부르크 공병학교를 졸업했지만 문학의 길을 택한 뒤,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 (1846)로 당시 러시아 문단의 총아가 되었다. 당시 비평계의 거물이던 벨린스키에게 ‘새로운 고골’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어서 『분신』, 『주부』, 『백야』, 『네트치카 네즈바노바』 등을 집필하면서 혁명가들과 교루했다.
–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
.출생: 1821년 11월 11일, 모스크바
.사망: 1881년 2월 9일 (59세),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표작: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백치, 악령, 미성년 등
.배우자: 안나 스니트키나 (1867 ~ 1881년), 마리아 도스토예프스카야 (1857 ~ 1864년)
.직업: 소설가
.종교: 러시아 정교회
.단편: 하얀 밤 슬픈 이야기, 지하생활자의 수기, 너였던 나와의 이별, 우스운 자의 꿈
.영화: Crime and Punishment, 더블: 달콤한 악몽,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The Idiot
도스토옙스키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 (1846년)에는 작가의 가난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가난이 인간 심리와 삶에 끼치는 영향들, 그리고 가난하고 핍박받는 자들에 대한 강한 동정심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소설은 당대 최고의 문학 비평가 베를린스키로부터 “러시아 최초의 사회 소설”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런 젊은 날의 도스토옙스키에게 형제애 속에서 모두가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르치는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의 모임인 페트라솁스키 서클은 목마른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반가운 만남이었다.
하지만 차르 니콜라이 1세의 반동 정치하에서는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뿐만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유토피아 등에 대해 토론하는 것, 금지 서적을 읽는 것들만으로도 총살감이었다. 1849년부터 공상적 사회주의의 경향을 띤 페트라셰프스키 모임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 도스토옙스키는 사형은 간신히 면했으나 시베리아로 끌려갔고, 4년간의 감옥 생활과 또 4년간의 유형이 끝난 후, 도스토옙스키의 인간관 및 세계관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있었다. 1840년대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지향했던 도스토옙스키는 1860년대 완전히 극우 보수주의자(슬라브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유형을 마치고 돌아온 작가는 1861년 러시아의 문화적 정치적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그의 형 미하일과 함께 잡지 [시대 (Время)]를 창간했고, 1863년 [시대]지가 정치적 이유로 발행정지 조치를 받게 되어 폐간된다. 이듬해 형 미하일과 함께 두 번째 잡지, 더욱더 극우적이고 슬라브주의적인 잡지 [세기(Эпоха)]를 발간하여, 그 첫 호에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발표한다. 1861년 『학대받은 사람들』을 발표하면서 문단으로 복귀했다. 1866년, 후에 그의 부인이 된 속기사 안나를 고용하여 『노름꾼』과 『죄와 벌』을 속기하게 하여 발표하고, 1868년 그리스도를 닮은 “긍정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그리고자 한 『백치』를, 1872년 『악령』을, 죽기 한 해 전인 1880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모두 [러시아 통보]에 발표했다.
『죄와 벌』은 가난하고 약한 자의 고통과 굴욕을 리얼하게 묘사한 걸작이며, 만년의 미완성 대작인 『카라마조프의 형제』 (1880) 또한 당시 러시아 사회의 실상을 여실히 그리면서 종교와 인간의 본질을 헤집는다. 그는 세계 문학 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체호프, 헤밍웨이 같은 작가들부터 니체와 후대의 실존주의 사상가들에 이르기까지 후세에 광범위한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해서 세계문학사 중 가장 위대한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1881년 1월 28일, 폐동맥 파열로 사망했으며 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르 네프스카야 대수도원 묘지에 안치되었다.
러시아 철학자 니콜라이 베르댜예프가 말한 것처럼, 도스토옙스키라는 작가를 낳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지구상에 러시아인의 존재 이유는 충분하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제대로 접한 독자라면 베르댜예프의 이 말에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문학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그의 작품을 통해 니체에서 현대의 실존주의로까지 그의 사상적 계보가 이어지고 있다. 선과 악, 성 (聖)과 속 (俗), 과학과 형이상학의 양극단 사이에서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사상가로서 도스또예프스키는 당대에 첨예하게 대립했던 사회적, 철학적 문제들을 진지하게 제기하고 숙고한다. 이러한 그의 자세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도 변치 않는 삶의 영원한 가치를 전해 준다.
‘넋의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정치적·사회적으로 복잡화된 인간의 내면 심리를 그려내며 근대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농노제적 구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들어서는 과도기 러시아의 시대적 모순을 자신의 작품 세계에 투영하면서 20세기의 사상과 문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으로 『지하생활자의 수기』,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이 있다.
○ 생애 및 활동
– 유년시절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이하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 11월 11일 (구력 10월 30일) 모스크바에서 모스크바 마린스키 자선 병원 의사인 미하일 안드레예비치와 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 사이에서 7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나 15살 때까지 생가에서 지냈다. 아버지 쪽이 귀족가문 출신이었지만 당시 러시아에서 의사의 신분은 중인 계급 정도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가부장적이었으며 매우 엄격하고 거친 성격을 가지고 있어 자식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1834년 열세 살 때 형 미하일과 함께 모스크바의 체르마끄 기숙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였다. 1837년 온화하고 자애로운 성격으로 자녀들에게 천사 같은 존재였던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어머니의 죽음은 가족에게 큰 충격이었으며, 1837년 아버지는 장남 미하일과 열여섯 살이 된 차남 도스토옙스키를 공병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보냈다.
1838년 도스토옙스키는 공병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하여 군사 교육을 받게 되었다. 소심하고 예민하며 병약했던 소년 도스토옙스키에게 군사 훈련은 성격에 맞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문학은 유일한 위안으로, 문학에 대한 열정을 가진 친구들을 만나 습작을 서로 평가하고 논쟁을 벌이곤 하였다. 낭만주의 사조가 유행하던 시기로 도스토옙스키도 이 때 프리드리히 실러에 빠져 있었다.
1839년 6월 6일,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가 영지의 농노들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는 도스토옙스키의 어머니가 죽은 후 영지로 내려가 생활했는데, 농노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던 것이 죽음의 원인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페테르부르크에 있던 형제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전기 작가 O. 밀레르에 따르면 이 시기에 도스토옙스키를 평생 괴롭힌 간질 발작이 처음 나타났다고 한다.
1841년 8월, 도스토옙스키는 공병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성 제도국 소위로 임관하였다. 그러나 문학으로 기우는 열정을 저버리지 못하고, 작가가 되어 문학에 전념하기 위하여 1844년 10월 제대하였다.
– 문단 데뷔
1846년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로 비평가 벨린스키로부터 ‘제 2의 고골리’라는 극찬을 받으며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하였다. 데뷔 전에 도스토옙스키로부터 직접 작품을 건네받아 읽었던 네크라소프는 감동을 받은 나머지 밤 중에 그의 집을 찾아갔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데뷔는 화려했을지 모르나, 이어서 발표한 ‘백야’와 ‘분신’ 등은 혹평을 면치 못했다. 이 때부터 서구주의 사상에 끌리고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는 페트라셰프스키의 모임에 가담하였다.
– 정치적 수난
젊은 시절 도스토옙스키는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를 중심으로 작가 등 젊은 지식인들이 모여 공상적 사회주의 를 신봉하는 급진적 정치 모임에 참가하였다. 당시 차르 니콜라이 1세는 첩자를 보내 정치 모임들을 감시하였는데, 도스토옙스키는 모임에서 절대 왕정의 입장을 신봉했다는 이유로 고골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불온문서로 간주되었던 벨린스키의 ‘고골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한 것이 원인이 되어 1849년 4월 23일 5시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니콜라이 1세는 체포된 지식인들을 사형에 처할 생각은 없었으나, 당시 확산되고 있던 급진주의 정치 모임들에 대해 경고하고자 직전에 특별 사면할 계획으로 사형을 선고하였다.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 회원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고, 총살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형 집행이 중지되고 시베리아에 유형을 가는 것으로 감형되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나온 이 경험으로 인하여 몇몇 사람은 공포와 충격으로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도 ‘백치’ 등의 작품에 사형 집행 직전의 심정을 묘사하는 등 이 사건은 그의 작품 세계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시베리아 유형은 감옥 수형과 출소 후에 수도로 복귀하지 못하고 시베리아에서 복무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는데, 도스토옙스키는 1854년까지 옴스크 감옥에서 4년간 수형 생활을 한다. 성서 이외에는 일절 출판물이 허용되지 않았던 환경에서 성서에 대한 깊은 독서와 감옥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혔던 죄수와 민중들의 생생한 삶이 그로 하여금 사회주의자에서 기독교적 인도주의자로의 사상적 변화를 겪게끔 하였다. 이 시기의 체험을 바탕으로 후일 ‘죽음의 집의 기록’를 펴냈다. 출소 후 세미팔란치스크 수비대에서 4년 간 사병으로 근무하며 당시 남편이 있었던 여성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이사예바를 만난다. 마리야의 남편이 병으로 사망하자 도스토옙스키는 1857년 당시 29세였던 그녀와 결혼한다. 그는 가까스로 1859년에 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한 뒤 10년에 가까운 문학적 공백을 메꾸고자 의욕적으로 작품 활동을 재개하였다.
– 문학 활동
1861년 형과 함께 잡지 ‘시대’를 발간하고, ‘학대받는 사람들’, ‘죽음의 집 기록’을 연재하여 큰 인기를 얻었으나, 이듬해 발행 금지를 당하였다. 1864년 형과 함께 새로운 잡지 ‘세기’를 창간하였으나 실패하여 큰 빚을 지게 되었다. 1866년 걸작 ‘죄와 벌’을 완성하였다. 1867년부터 외국, 특히 드레스덴에 거주하면서 ‘백치’, ‘악령’ 등을 쓰고 귀국하였다. 1874년 ‘미성년’을 발표하여 큰 돈을 벌어 빈곤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시베리아 유배 시절에 악화된 지병인 간질과 취미로 즐기던 도박 등이 창작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의 작품 속에 중요한 요소들로 간질과 도박 등이 자주 등장한다. 도박은 그의 인생을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고, 빚을 갚기 위해 출판사와 무리한 계약을 하여 마감에 쫓기는 나날을 보냈다. 바쁜 일정 때문에 ‘죄와 벌’, ‘도박꾼’ 등은 불러주는대로 받아적는 구술 필기의 형태로 작성되었다. 속기사였던 안나 스니트키나는 훗날 도스토옙스키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
소설 이외의 저서로는 ‘작가의 일기’가 있다. 이것은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잡지 ‘시민’에서 도스토옙스키가 담당했던 문예란에 게재했던 것으로, 문예 지평, 정치·사회평론, 에세이, 단편 소설, 강연 원고, 종교론 등을 포함하고 있어 훗날 도스토옙스키 연구에 귀중한 문헌 자료가 되었다.
1880년 그의 최후의 걸작인 장편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탈고하였다. 그 즈음에는 이미 사물을 분간하지 못할 만큼 눈이 어두워져 있었고 도스토옙스키가 침대 누워 구술한 것을 아내 안나가 속기하여 작품을 완성했다. 그로부터 몇 달 후인 1881년 1월 28일에 폐동맥 파열로 인하여 가족의 간호를 뒤로하고 6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임종 직전 아내에게 시베리아 형무소에 있었던 시절 지니고 있었던 성경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했고 같은 날 밤 11시 성경책을 가슴에 안고 죽었다. 유해는 같은 달 31일 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사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 작품들
가난한 사람들 (Бедные люди), 1846
분신 (Двойник: Петербургская поэма), 1846
네또츠까 네즈바노바 (Неточка Незванова), 1849
아저씨의 꿈 (Дядюшкин сон), 1859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Село Степанчиково и его обитатели), 1859
상처받은 사람들 (Униженные и оскорбленные), 1861 (다른 번역 제목 : 학대받은 사람들)
죽음의 집의 기록 (Записки из мертвого дома), 1862
지하로부터의 수기 (Записки из подполья), 1864 (다른 번역 제목 : 지하생활자의 수기)
죄와 벌 (Преступление и наказание), 1866
노름꾼 (Игрок), 1867 (다른 번역 제목 : 도박사)
백치 (Идиот), 1869
영원한 남편 (Вечный муж), 1870
악령 (Бесы), 1872
미성년 (Подросток), 1875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Братья Карамазовы), 1880 (다른 번역 제목 :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 평가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 문학의 최고 거장 가운데 한 명으로 불리며 20세기 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신흥 자본주의 압박 밑에서 신음하는 소시민층의 대변자인 동시에 열렬한 슬라브주의자였다. 그의 작품은 비단 문학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철학 · 종교 · 사회 문제 등 각 방면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으로는 ‘죄와 벌’ (1866년), ‘카라마조프의 형제’ (1879년 ~ 80년) 등이 있다. 진보적 사회 운동을 하다가 탄압받은 경험이 그의 문학 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작품들은 당시 퍼지고 있던 사회주의사상의 영향을 받은 지식층 (인텔리겐치야)의 폭력적인 혁명을 부정하고, 기독교, 특히 정교회 교리에 바탕을 둔 기독교 사상을 담고 있다. 그의 기독교 사상은 기독교의 교리와 사상을 변증하는 호교론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이름으로 종교재판을 행한 기독교의 폭력을 비판함으로써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그의 소설은 흔히 이질적, 극단적 심리의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인간 심리에 대한 놀라운 이해력을 보여주고 당대 러시아의 정치, 사회, 정신세계 등을 날카롭게 분석했다. 때로 그를 실존주의의 창시자로 여기기도 하는데, 발터 카우프만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지하실의 수기’를 “실존주의를 위한 최고의 서곡”이라 묘사한 바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보통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훌륭한 소설가 중 한 명으로 간주된다. 문학적 모더니즘, 실존주의, 그리고 심리학, 신학, 문학 비평의 다양한 학파들은 그의 아이디어에 의해 깊이 형성되어 왔다. 그의 작품들은 종종 예언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그는 러시아 혁명가들이 정권을 잡으면 어떻게 행동할지를 매우 정확하게 예측했기 때문이다.” ―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도스토옙스키는 일반 독자들에게는 언젠가는 읽어야 할 작가, 평론가들에게는 가장 문제적인 작가, 문인들에게는 영감을 주는 작가 제1순위로 꼽히는, 그 영향력에 있어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전무후무한 작가이다.― 열린책들 도스토옙스키 전집 서문
그를 알고 난 후부터 인간은, ‘도스토옙스키人’과 ‘그와는 무연한 인간’의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했다.― 니콜라이 베르쟈에프
그의 후기 생활로 미루어 보건대, 명성에 의해서도 그처럼 타락하지 않고 끝까지 완벽하게 자연스러웠던 위대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에드워드 카, ‘도스토옙스키 평전’
도스토옙스키는 내가 무언가를 배운 유일한 심리학자이다 : 그는 내 인생의 가장 멋진 행운 중의 하나이다. 이 심오한 인간이 천박한 독일인을 하찮게 평가한 것은 열 번 지당한 일이었으며, 그는 그가 오랫동안 살았던 시베리아 형무소의 수감자들, 사회로의 복귀 가능성을 더 이상 갖지 못하는 중범죄자들을 자신이 예상했던 바와는 전혀 다르게 느꼈다ㅡ 러시아 땅에서 자라는 것 중에서 가장 최고의 재목이자 가장 강하고 가치 있는 재목으로 만들어진 인간들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가 낳은 악마적인 천재였다.― 막심 고리키
그는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자리를 차지한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지금까지 쓰인 가장 장엄한 소설이고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세계 문학사의 압권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문학이라는 산의 여행자가 뒷걸음질로 물러나 고개를 젖히고 한참을 올려다볼 때에나 고원 사이로 우뚝 솟은 그 꼭대기가 보일 법한 장대한 봉우리가 톨스토이라면, 도스토옙스키는 그 너머에 솟은 광대무변한 봉우리다.― 앙드레 지드
도스토옙스키는 근대 작가 그 누구보다 위대하다.― 제임스 조이스
도스토옙스키는 육체와 영혼의 고귀함보다는 불행과 악덕, 욕정과 범죄에 기독교적인 공감을 보인 작가였다.― 토마스 만
도스토옙스키는 사실상 신을 창조해야만 했다. 그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헨리 밀러
도스토옙스키는 세계 문학사의 위대한 기독교 작가들인 단테, 세르반테스, 밀턴, 파스칼의 옆 자리를 차지한다. 단테처럼, 그는 인간 지옥의 모든 계 (界)를 통과한다. 그런데 이 지옥은 ‘신곡’의 중세적 지옥보다 더 끔찍하다.― 콘스탄틴 모출스키
도스토옙스키는 그 어떤 과학자들보다도, 심지어 수학자 가우스보다도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그의 소설은 오직 순수하게 영혼의 재료로만 빚어낸 작품들이다.― 버지니아 울프
도스토옙스키는 근대적 서사의 틀을 넘어섰다.― 루카치 죄르지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지하 인간’은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이자 대변인이다. 이 작품과 인물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증명한다.― 장 폴 사르트르
인생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모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안에 있다.― 커트 보네거트
20세기의 진정한 예언자는 칼 마르크스가 아니라 도스토옙스키였다.― 알베르 카뮈
삶 전체가 그냥 타는 듯한 아픈 상처로 느껴질 때, 절망을 숨쉬고, 희망 없음의 죽음을 죽을 때 우리는 도스토옙스키를 읽는다. 비참함으로 고독해지고 마비되어 망연히 삶을 건너다볼 때, 삶의 거칠고도 아름다운 잔인함을 더는 이해하지 못하고 더는 삶을 바라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이 무시무시하고 위대한 작가가 울리는 음악에 마음을 연다.― 헤르만 헤세
만약 찰스 다윈이 도스토옙스키가 본 것을 인생에서 보았다면, 그는 종의 기원에 관한 법칙이 아니라 그것의 파괴에 대해 말했을 것이다.― 레브 셰스토프
그의 심리학적 감각은 압도적이고 예지력 있다.― 크누트 함순
대학 1학년 때인 1973년 밤새워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던 감동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제 30여년이 지나 그 감동을 제대로 정리해 냈다는 기분이다. 19세기 작가였던 도스토옙스키를 21세기에 읽는다는 것에 의문을 느낄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가 모든 작품을 통해 추구했던 자유 의지와 신, 사회와 인간 본성에 대한 치열한 탐구는 여전히 유효하다.― 홍지웅 열린책들 대표 (도스토옙스키 전집을 출간하며 남긴 말)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악령’은 인간이 써낸 가장 충격적인 예닐곱 편의 소설 중 하나이자 가장 위대한 정치 소설이다.― 오르한 파묵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다양한 희화 (戱畵)로 가득 차 있다. 그렇지만 그 희화의 대부분은 분명 악마조차도 우울하게 만들 것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소설가로서 궁극적으로 쓰고 싶은 건 ‘종합 소설’이다. 이를 정의 내리기란 어렵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바로 그 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들은 허영심이 많고 질투가 심하다. 적어도 나는 그런 작가였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와 견주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레프 톨스토이
한 인간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창조해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이제 이토록 경이로운 일은 일어났고, 여기에는 그 어떤 설명조차 필요치 않다.― 헤르만 헤세
창작자의 내면에 이는 온갖 모순과 동요를 도스토옙스키보다 탁월하게 입증해낸 작가도 없을뿐더러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만큼 이를 경이롭게 구현해낸 작품 또한 없다. ― 조이스 캐럴 오츠
○ 어록들
“만일 누군가 내 앞에서 그리스도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면, 나는 진리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편에 서겠다.”
“온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내 곁의 이웃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괴로움과 번민은 위대한 자각과 심오한 심정의 소유자에겐 언제나 필연적인 것이다. 괴로움이야말로 인생이다. 인생이 괴로움이 없다면 무엇으로써 또한 만족을 얻을 것인가?”
“땅에 엎드려서 입을 맞추고 눈물로 그것을 적셔라. 그러면 네 눈물이 대지의 열매를 맺어줄 것이다. 이 땅을 꾸준히 언제까지라도 사랑하라. 무엇이든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또 이 사랑의 열광과 환희를 맛보아라. 네 기쁨의 눈물로 이 땅을 적시기도 하며 너의 그 눈물을 또한 사랑하라.”
“자기에게 거짓을 말하고, 스스로에게 한 그 거짓말을 들으며 사는 사람은 진리를 더 이상 분별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한다.”
○ 연보
1821년 러시아력 10월 30일, 모스크바의 말린스키 빈민구제병원에서 일등군의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도스토옙스키의 둘째아들로 태어나다.
1831년 양친이 툴라현에다 영지를 사들이자 매년 이곳에서 여름을 지내다.
1834년 모스크바에 있는 체르마크가 경영하는 기숙학교에 입학하다.
1836년 문학사(文學史)를 가르치는 교사의 감화를 받아 푸시킨에 열중하다.
1837년 2월 27일, 어머니 마리아 표도르브나 도스토옙스키야가 죽다. 5월, 형과 함께 테르스부르크로 가서 코스트바로프 기숙학교에 입학, 공병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하다. 7월, 군무에서 아버지가 제대하다. 9월, 육군공병학교에 입학이 허가되다.
1838년 1월 16일, 공병학교에 정식으로 입학. 이때부터 발자크, 위고, 호프만 등의 소설을 탐독하다. 가을 진급시험에 낙제하다.
1839년 영지 농노들의 원한을 사서 아버지가 피살당하다.
1840년 호메로스, 실러, 프랑스 고전 비극을 탐독하다. 11월 29일에 하사관, 12월 27일에는 견습사관이 되다.
1841년 이해가 시작될 무렵 <보리스 고두노프>, <마리야 스추아르트>의 극작을 시도했으나 둘 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8월 5일, 공병소위로 임관되었으나 특별연구를 위해 공병학교에 남다.
1842년 8월 11일, 중위로 진급하다.
1843년 8월 21일, 공병학교를 졸업, 페테르부르크 공병대에 편입되다. 23일, 제도과에 지원하여 근무하다.
1844년 발자크의 <외제니 그랑데> 번역하다. 조르주 상드의 번역도 시도하다. 10월 19일, 중위로 진급함으로써 제대가 허락되다. <가난한 사람들> 쓰기 시작하다.
1845년 5월, <가난한 사람들> 완성하다. 네크라소프, 벨린스키의 격찬을 받다. 여름에 <분신>을 쓰기 시작하다. 가을 <아홉 통의 편지에 담긴 소설> 쓰다. 풍자 신문 ≪즈브스칼≫의 발행을 계획하다.
1846년 1월 15일, <가난한 사람들>을 네크라소프가 편집하는 ≪페테르부르크 문집≫에 발표하다. 2월 1일 <분신>을 ≪조국의 기록≫에 발표하다. 봄, 페트라세프스키와 알게 되다. 10월에 <프로하르친씨> 발표하다. 12월 <네토치카 네즈바노바> 쓰기 시작하다.
1847년 이해 첫무렵 벨린스키와 사이가 나빠져 페트라세프스키와 가까워지다. <아홉 통의 편지에 담긴 소설>을 ≪현대인≫ 1월호에 발표하다. <여주인>, <조국의 기록> 10,11 월호에 발표하다. <가난한 살마들>이 단행본으로 출간되다.
1848년 <폴준코프> 발표하다. <약한 마음>, <유부녀>, <정직한 도둑>, <크리스마스와 결혼식>, <백야>를 ≪조국의 기록≫에 발표하다.
1849년 <네토치카 네즈바노바>를 ≪조국의 기록≫ 1,2,5,6 월호에 발표하다. 3월, 페트라세프스키 집에서의 회합에서 벨린스키의 고골리에게 보낸 편지를 낭독하다. 4월 23일 페트라세프스키 회의 검거로, 다른 회원들과 함께 붙들려 페트로파블로스키 요새감옥에 감금되다. 감금된 동안 <작은 영웅>, <첫 사랑> 쓰다. 12월 22일,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에 끌려갔으나 황제의 특사로 4년간의 시베리아 유형과 4년간의 병역근무를 선고받고 24일 밤에 페테르부르크를 출발하다.
1850년 유형지인 옴스크 감옥에서 복역하다.
1854년 2월 15일 형기가 만료되어 3월 2일 일개 병졸로 시베리아 국경수비연대 제 7 대대에 편입되다. 가을부터 그 마을의 세무관리의 아내 마리아 드미트리예브나 이사예바와 사랑을 속삭이기 시작하다.
1855년 <죽음의 집의 기록> 쓰기 시작하다.
1856년 2월 15일, 근무 성적이 좋아 하사관으로 진급되다. 3월 24일, 황제에게 사면 탄원서를 내다. 10월 1일, 척명으로 대대의 기수(旗手)가 되다.
1857년 2월 6일,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이사예바와 크즈네츠크에서 결혼하다. 4월 18일, 옛 신분으로 돌아가라는 척명이 내리다. 8월, <작은 영웅>을 ≪조국의 기록≫에 발표하다. 이해 말 사표를 제출하고 모스크바에서의 거주를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다.
1859년 3월 18일 소위로 임관됨과 동시에 예편, 거주지는 트베리로 한정되다. 7월 2일 트베리에 도착, 가을에 거주지 선택의 자유에 대한 탄원서를 황제에게 내다. 12월 27일, 페테르부르크에의 거주허가가 내려 트베리를 떠나다.
1861년 형과 함께 ≪시대≫를 창간, <학대받은 사람들>을 1월호부터 연재하다. 연재가 끝나자 단행본으로 내다. <죽음의 집의 기록>을 1월부터 ≪러시아 세계≫에 연재했으나 4월부터는 이 작품을 ≪시대≫로 옮겨 처음부터 다시 게재, 이듬해 완결하다.
1861년 6월 7일 출발하여 파리, 런던, 제네바를 여행하다. 8월,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다. 이해 <죽음의 집의 기록>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1863년 5월 폴란드 문제에 관한 스트라호프의 논문 <운명적인 문제>(4월 호) 때문에 ≪시대≫가 발행정지처분을 받다. 여름에 연인 수술로바와 함께 외국으로 떠나다. 여행중에 도박에 열중, 경제적인 궁핍으로 <도박자>를 구성하다. 수슬로바와의 사랑에 파탄이 일어, 10월 모스크바의 아내에게로 돌아오다. 겨울, 아내의 병이 악화, 병석을 떠나지 않고 아내를 헌신적으로 간호하다.
1864년 3월 24일, ≪시대≫를 계승한 새로운 잡지 ≪세기≫ 창간호를 내다. <지하 생활자의 수기>를 창간호에 게재하다. 4월 16일, 아내가 폐결핵으로 죽다. 6월 10일, 형 미하일 죽다. 12월 25일, 친구 그리고리예프 죽다. 이해 말부터 이듬해 초에 걸쳐 마르타 브라운과의 연애사건 일어나다.
1865년 안나 그로코프스카야에게 구혼했으나 거절당하다. 4월 ≪세기≫ 폐간되다. 7월에 세번째 외국여행을 떠나다. 다시 수슬로바와 사랑을 속삭이며 도박에 열중, 궁핍하여 <죄와 벌>을 쓰기 시작하다. 다시 사랑에 실패, 11월 러시아에 돌아오다. 출판업자에게 저작권을 팔아 버리고, 이듬해에 걸쳐 전집 3권을 출간하다.
1866년 <죄와 벌>을 ≪러시아 통보≫ 1, 2, 4, 6, 8, 11,12 월호에 연재 발표하다. 여름에 모스크바 근교 류플리노에 머물다. 10월, <도박자>를 여자 속기사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스니트키나에게 구술하여 탈고하자마자 전집 3권 속에 수록하고 곧 이어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1867년 2월 15일, 스니트키나(20 세)와 페테르부르크에서 결혼하다. 4월 14일, 그냐와 함께 외국으로 떠나 4년간 머물다. 6월, 드레스덴에서 투르게네프와 말다툼하다. 8월, 제네바로 옮겨가다. 9월 <작가의 일기>를 계획, 연말에 <백치>를 쓰기 시작하다. 이해에 <죄와 벌>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1868년 <백치>를 ≪러시아 통보≫ 1, 2, 4~12 월호에 연재, 이어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2월 22일, 제네바에서 맏딸 소피야가 태어났으나 5월에 폐렴으로 죽다. 스위스를 떠나 이탈리아로 옮겨 12월 피렌체에 도착, 연말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구상하기 시작하다.
1869년 7월 말까지 피렌체에 머물다. 스트라호프가 편집하는 ≪여명≫에 관계하다. 8월, 이탈리아를 떠나 프라하를 거쳐 다시 드레스덴에 머물다. 9월 14일, 둘째딸 류보피(에메) 태어나다. 생활이 궁핍하여 <영원한 남편>을 쓰기 시작, 12월 초에 탈고하다.
1870년 <영원한 남편>을 ≪여명≫ 1, 2 월호에 연재. 1월부터 <악령>을 쓰기 시작하여 이듬해 탈고. <죄와 벌> 제 4판이 나오다.
1871년 <악령>을 ≪러시아 통보≫ 1, 2, 4, 7, 9, 11 월호에 연재, 제 2편까지 완결했으나 그 후 1년간 중단하다. 7월 8일, <영원한 남편> 단행본으로 출간되다.
1872년 근동 지방으로의 여행을 계획하다. <악령> 제 3 편을 ≪러시아 통보≫ 11, 12 월호에 발표하여 완결하다. 주간지 ≪시민≫의 편집국에 입사하다.
1873년 <작가의 일기>를 ≪시민≫ 1 호에 50 호까지 1년에 걸쳐 연재하다. <악령>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1874년 2월 말부터 정식으로 ≪시민 편집자≫가 되다. 3월 말 검열법 위반으로 구속되다. 가을부터 페테르부르크의 남쪽 지방 온천장으로 옮기다. <미성년>을 쓰기 시작하다.
1875년 네크라소프의 요청으로, 그가 편집하는 잡지 ≪조국의 기록≫에 <미성년>을 발표하다. 1, 2, 4, 5, 9, 11, 12 월 호에 연재하여 완결하다. 여름에 서부 독일에 머물다. 8월 둘째아들 알렉세이 태어나다. <죽음의 집의 기록> 제 4판 나오다.
1876년 1월부터 <작가의 일기>를 원간으로 게재하다. <미성년>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1877년 5월, 둘째아들 알렉세이 죽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쓰기 시작하다. <죄와 벌> 제 5판이 나오다.
1878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러시아 통보≫ 1, 2, 4, 5, 6, 8, 9, 10, 11 월호에 연재하다. 이해 <작가의 일기> 재판 발행하다. <학대받은 사람들> 제 5판이 나오다.
1880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러시아 통보≫ 1, 4, 7, 8, 9, 10, 11 월호에 계속 연재하다. 5월 25일 모스크바의 작가, 저널리스트가 주최한 도스토옙스키를 위한 축하회가 베풀어지다. 8월, <작가의 일기>를 복간하다. 푸시킨제(祭)에서 연설하다.
1881년 2월 9일 오후 8시 30분 페테르부르크에서 영면하다. 향년 59세. 2월 12일, 페테르부르크 대사원 묘지에 묻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단행본으로 출간되다.
참고 = 위키백과,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