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영 목사의 그리스 & 터키 학술탐사 ⑳
최종회
지난 4월26일(토) 갑바도기아 공항에 도착하면서 시작된 그리스 & 터키 학술탐사를 떠나면서 이런 기도를 드렸다. “1C 교회를 통한 성령님의 발자취를 따라 오늘 이 시대에 일하시는 흔적을 확인하고, 이 땅의 교회가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바로 그 현장이 되게 하소서!”
1C 믿음의 선배들이 순결을 잃지 않기 위해 생명도 아끼지 않은 삶에 고개를 숙인다. 현시대에 호화로운 삶을 살아가면서도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자신의 욕심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 군상들… 그러기에 삶의 갱신을 위한 영적 몸부림이 필요하다는 심연(深淵)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2천년 전의 믿음의 현장을 확인할 수 있는 타임머신을 타고 역사의 현장으로 달려갔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간직했던 동굴교회 흔적,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비둘기 집, 많은 순교자들의 피를 통해 교회를 세워 가시고 기독교 공인에 이르기까지의 여정들. 주상성인(시몬파)과 기둥위에 수도원을 통해 생명으로 하나님을 섬겼던 흔적들. 뿐만 아니라, 닭을 통해 발견된 지하도시 코냐의 데린구유는 “깊은 우물”이라는 뜻을 지하도시를 볼 수 있었다. 한 사람 정도 지나갈 수 있는 지하 통로를 만들고 그 곳에 지하도시를 건설했다. 지하도시 안에서의 안전을 위해 동굴 중간 중간 통로를 막기 위해 바윗돌로 막을 수 있도록 설치하였다. 그리고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터와 성찬식을 위해 포도주를 만들었던 곳, 장례를 치렀던 던 묏자리, 특별히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기 위한 방법으로 자녀들을 교육하며 신학을 훈련했던 학교는 다음세대를 바라보지 못하고 현세에만 급급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경종이 되었다. 바로 오늘 우리시대가 잃어버린 것 중에 가장 큰 부분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이 땅에 이슬람교에 정복당한 현실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이 가슴을 찢으며 회복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이슬람교는 “인샬라”(= 신의 뜻대로) 는 운명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 특히 이슬람 6信 5行은 기독교가 부족했던 삶의 부분 즉, 행함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훈해 주는 듯하였다.
[6信] 1. 알라 2. 거룩한 천사 3. 거룩한 선지자 4. 코란 5. 정해진 운명 6. 심판
[5行] 1. 알라 유일신 고백 2. 1일 5번 기도 1) 해뜨기 직전 2) 해 중천 3) 해지기 전 4) 해가 지고 5) 완전 어둠, 3. 라마잔, 라마단 금식(1달 – 아침부터 저녁까지 / 밤에 폭식) 4. 40/1 구제헌금 5. 사우디 메카 – 성지순례
다소산맥을 넘어 안탈리아로 가면서 바울의 선교여정을 직접 확인해 볼 수 있었다. 편안한 차량으로도 여행하기 버거운 곳을 도보로 이동하면서 바울은 얼마나 고독했을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메섹에서 만난 에수 그리스도와의 감격을 가슴에 안은 채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으리라 상상해 본다. 안탈리아에서부터 출발하여 계시록에 기록된 7교회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7교회가 모두 기념교회라는 것과 그 흔적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다. 물론 칭찬받은 교회와 책망 받은 교회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지금은 흔적으로만 남아있는 버가모 – 두아디라- 사데 – 서머나 – 빌라델비아 – 에베소 – 라오디게아교회를 보면서 이 땅에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사람임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게 되었다.
가장 핍박이 극렬했던 시대 밧모섬에서 하나님과 함께 했던 사도 요한
요한계시록 1:9-16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같고 그의 음성은 맑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빠뜨모스(PATMOS)섬은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장소로 그리스의 도데까니사 제도의 14개 섬들 중에서도 아주 작은 섬이며 면적이 34 Km2이고, 길이는 63Km, 아테네에서 동쪽으로 약 270Km 떨어진 에게해에 있다. 선사시대에는 화산의 폭발로 바다속에 많은 부분이 잠겨있는 지형으로 도리아 인과 이오니아 인이 차례로 정착했고 로마시대에는 정치범들의 유배지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주후 95년 도미티안 황제 때에 에베소에서 기독교를 전하고 있던 요한은 밧모섬으로 유배되었고 약18개월만에 에베소로 돌아가게 되었다. 1090년에 발견되어 보전되고 있는 밧모섬의 동굴(계시의 현장으로 추정되는 동굴의 길이는 약 6.5m, 폭이 5.5m 정도)에서 요한은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지내던 어느 주일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 그리스 정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요한의 계시 내용을 브르고로가 대필하였다고는 하지만 증명된 바 없다. 이 동굴안에는 요한이 기도할 때 머리를 두었던 곳과 일어날 때 손을 짚었던 자리가 표시되어 있으며 순례자들이 이 자리에 입으로 맞추고 손으로 만지어 광택이 나고 있다. 동굴 입구에는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라는 요한계시록 14장 7절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전승에 의하면 유배되어 호송되던 배에 로마의 관원인 미로노스 父子도 함께 있었는데 큰 풍랑이 일게되어 미로노스의 아들이 바다에 빠져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지나 사도 요한의 절실한 기도로 잠잠해진 풍랑 뒤에 아들을 무사히 찾게 된다. 이 사건으로 사도 요한은 죄인으로서가 아닌 은인 대접을 받게 되고 미로노스는 섬에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이 된다.
계시동굴의 위에는 제우스의 신전터위에 빠뜨미아다스 학교(PATMIAN SCHOOL)가 세워져 있는데 1535년 네오케사리아 그레고리(Neocesaria Gregory)가 시작한 것으로 13세부터 19세 연령층을 위한 7년간의 교육과정으로서 일반 중.고교에 해당되나 구분되는 차이점이 있다면 전교사와 함께 100명으로 제한된 전교생들이 숙식을 같이 하는 공동체 형태로 전 과정을 이수한다는 것이다. 밧모섬 항구인 스깔라(Skala)에서 올려다 보는 최정상 호라(Chora)에는 주전 4세기에 세운 아르테미스(사냥의 신) 신전터 위치에 1088년 흐리스토둘로스(‘그리스도의 종’이란 뜻)가 비잔팀 섬을 기증 받아 사도 요한의 기념 수도원을 세웠다. 동서길이가 70m, 남북길이가 50m, 성벽 높이가 15m로 마치 하나의 요새인 城처럼 건축되었고 수도원내 도서관에는 여러 필사본과 인쇄본들이 소장되어 있으며, 재부교회의 입구쪽에는 모자이크와 은으로 만든 관 속에 그의 유골이 보존되어 있다.(유골은 정교회인들만 구경할 수 있도록 제한되어 있다.) 이 수도원은 비잔틴 분위기를 갖추었으며 성벽이 견고하고 길어서 섬 전체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수도원이다. 베네치아 통치시대에 수도원의 자치가 허용되었으나 터키의 지배하에서는 수도사들이 매년 지대(地代)를 냈다. 1988년 수도원 건립 900주년 기념 성찬예배가 총대주교의 집례로 성대히 거행되었고 ‘거룩한 섬’으로 호칭되었다.
페르시아(Persia)전쟁
기원전 6세기 중엽에 오리엔트지역을 통일한 페르시아제국(Persian Empire)은 지중해세계로의 진출을 꾀하여 그리스사회와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원전 492년, 490년, 그리고 485년의 세 차례에 걸쳐서 일어난 페르시아전쟁입니다. 여기서 그리스의 모든 폴리스가 단결하여 승리함으로써 전제적인 오리엔트체제에 대하여 자유로운 그리스체제가 승리했음을 자부했습니다. 특히 아테네는 강한 해군력으로 그리스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 아테네는 혹자가 칭한대로 아테네의 제국주의시대를 맞이한다. 아테네는 종전 후 페르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반(反) 페르시아 동맹인 델로스(Delos) 동맹의 주도권을 잡아서 그리스사회의 패권을 장악한 것이다. 아테네는 그 기금으로 행정을 담당하는 관리와 민회참여자에게 수당을 제공하는 등 내부적인 민주화 및 복지를 꾀했으며 문화의 꽃을 피웠다. 우리가 앞에서 본대로 펠로폰네소스전쟁기에 행해진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아테네의 자부심을 표현하고 있다.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발판으로 명실상부한 제국을 이룩했으나, 이는 아테네 민주 정치의 종말을 의미했다.
펠로폰네소스전쟁(Peloponnesian War)과 폴리스체제의 쇠퇴
그러나 다른 폴리스들을 희생시키거나 무시하면서 자국의 민주화를 확대했던 아테네의 주도는 스파르타를 비롯한 다른 폴리스들에게 불만을 야기했다. 이는 그리스 폴리스들 사이의 내분인 펠로폰네소스전쟁(Peloponnesian War, BC 431-404)을 초래했다. 처음에는 아테네가, 다음에는 스파르타가, 그 뒤를 이어서는 테베가 우세를 점했으나 오래가지 않았다. 상호 유사한 힘과 규모에 입각해 있는 폴리스들 간의 싸움에서 결정적인 승자는 나타나지 않은 채 끝이 보이지 않는 대립과 분쟁만이 격화되었을 뿐이다.
이 소모적인 전쟁을 겪으면서 침체와 쇠퇴를 거듭하던 폴리스체제는 와해되고 말았다. 정치적 혼란의 와중에서 해상무역도 축소되었고 생계에 쫓기는 시민들은 공동체의식이 약화되고 정치에 무관심해졌을 뿐만 아니라 점차 동질성을 잃어 갔다. 시민들은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돈을 받고 조국과 적대하고 있는 폴리스의 용병이 되기도 했다. 개인과 폴리스의 일치가 깨어진 것이다. 그리스는 급기야 기원전 338년에는 마케도니아의 지배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리스 & 터키 학술탐사의 여정을 소개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시간이 언젠가 후손들에게는 성지가 되지 않을까 하면서도 흔적만이 아닌 살아있는 성령님의 역사의 현장으로 남기를 소망하는 바이다.
_ 윤석영 목사의 그리스 & 터키 학술탐사 完

윤석영 목사(히스교회 시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