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9년 4월 25일, 17세기 잉글랜드의 군인 겸 정치가 ·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ll, 1599 ~ 1658) 출생
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ll, 1599년 4월 25일 ~ 1658년 9월 3일)은 잉글랜드의 정치가이며 군인이다. 잉글랜드 내전으로 잉글랜드의 군주제를 폐한 1658년 9월 3일부터 죽을 때까지 호국경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다스렸다.
그는 증조 할머니를 통해 토머스 크롬웰의 후손이고, 고조 할머니를 통해 헨리 7세의 삼촌인 재스퍼 튜더의 후손이 된다.

– 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ll
.출생: 1599년 4월 25일,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셔 헌팅던
.사망: 1658년 9월 3일 (59세), 잉글랜드 런던 화이트홀
.학력: 시드니 서식스 칼리지 졸업
.국적: 잉글랜드
.부모: 부) 로버트 크롬웰, 모) 엘리자베스 크롬웰
.배우자: 엘리자베스 바우처
.자녀: 로버트 크롬웰, 올리버 크롬웰 2세, 브리짓 크롬웰, 리처드 크롬웰, 헨리 크롬웰, 엘리자베스 크롬웰, 매리 크롬웰, 프랜시스 크롬웰
.종교: 청교도

○ 생애 및 활동
– 가계 배경
제4대 스코틀랜드 왕실 최고시종관인 알렉산더 스튜어트의 셋째 아들 앤드류 스튜어트의 7대손인 로버트 크롬웰의 아들로 태어났다. 알렉산더 스튜어트의 큰 아들인 제5대 시종관 제임스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조의 시조 로베르 2세의 친할아버지였고, 메리 스튜어트의 9대 선조였다. 알렉산더 스튜어트의 둘째 아들 본킬 경 존 스튜어트의 11대손이었다.
같은 성씨를 쓰는 헨리 7세 시대의 정치인 토머스 크롬웰은 그의 먼 친척이었다. 올리버 크롬웰의 증조 할머니인 캐서린 크롬웰 (1482 ~ ?)은 토머스 크롬웰의 누나였다. 1499년 캐서린 크롬웰과 모건 압 윌리엄스는 결혼했고 그들의 아들은 웨일스의 리처드 윌리엄스 압 예반이었다. 그의 아들 헨리 윌리암스 알리아스는 할머니쪽의 성을 따서 크롬웰이라는 성을 썼고, 헨리 윌리엄스 크롬웰의 차남 로버트 크롬웰이 올리버 크롬웰의 아버지가 된다.
그는 또다른 모계로는 헨리 7세와 헨리 8세하고도 연결된다. 오언 튜더와 헨리 5세의 부인 발루아의 캐서린의 재혼으로 얻은 아들 에드먼드 튜더는 헨리 7세의 아버지였고, 에드먼드 튜더의 동생 자스퍼 튜더는 베드포드의 공작이었다. 베드포드의 공작 자스퍼 튜더의 딸 중 한명인 조앤 튜더는 1479년 윌리엄 압 예반과 결혼, 모건 압 윌리엄스를 낳았고, 조앤 튜더는 올리버 크롬웰의 고조 할머니가 된다.
발루아의 캐서린은 프랑스의 왕 샤를 6세의 딸이었으므로, 고조 할머니의 친정을 통해 프랑스 왕실의 후손도 된다.

– 청교도 혁명
잉글랜드 동부의 케임브리지셔주 헌팅턴의 청교도이자 젠트리 계급의 지주의 집에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1628년에 하원 의원이 된다.
청교도 혁명에서는 의회파에 속하여 1642년에 ‘철기군'(Ironsides)이라 불리는 기병대를 지휘하여 요크 서쪽의 마스톤무어 전투에서 활약하여 의회파가 철기대를 모델로 조직한 신형군의 부사령관에 취임하여 1645년의 잉글랜드 중부의 네이즈비 전투에서 국왕 찰스 1세를 스코틀랜드에 몰아내어 의회파 측을 승리로 이끌었다.
내란의 종결후 의회는 군의 해산을 요구하였으나 크롬웰은 의회파 중에서도 국왕과의 타협을 용납하지 않는 독립파에 속하여 타협을 구하는 장로파와 대립하여 결국 장로파를 추방하고 크롬웰은 독립파 의원에 의한 의회에 주도권을 잡아 1648년에 다시 궐기한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하고 1649년 5월에 잉글랜드의 최초이자 마지막 공화국인 ‘잉글랜드 연방’ (또는 ‘잉글랜드 공화국’)을 성립시켰다.
– 철기군
청교도혁명이 시작되자 크롬웰은 잘 훈련된 왕의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기병대 조직 및 훈련에 착수했다. 그는 전쟁초기에 의회군에게 “도시 출신의 바텐더나 천박하고 분방한 사람들을 버리고, 그 일을 감당할 정신력이 있는 착실한 자작농으로 군대를 편성하라”고 충고했다. 이렇게 하여 엄격한 선발과정을 거쳐 기병대를 모집했는데 이들이 철기군이다. 그들은 오직 신만을 두려워하고 그 어느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신앙심으로 무장하고 청교도주의에 입각한 기율과 맹렬한 훈련을 받은 크롬웰의 군대는 곧 영국에서 가장 잘 싸우는 ‘철기병’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크롬웰의 철기병은 1644년 마스턴 무어 (Marston Moore) 전투에서 기고만장한 왕당파 군대를 깨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의회는 크롬웰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고 철기병 방식을 도입하여 전군을 개편 하였는데 이를 신모델군 (New Model Army)이라 한다.
– 잉글랜드 공화국
.군사독재
크롬웰은 잉글랜드 역사에 군사독재라는 오점을 남겼다. 실제로 잉글랜드 공화국의 지도자로서 크롬웰은 왕당파의 반(反)혁명운동의 가능성을 두려워한 중산시민의 지지를 받으며 1653년 의회를 해산하여 결국 종신호국경이 되었으며, 성문헌법인 “통치장전”에 기하여 군사독재를 행하였다. 또한 혁명군 중에서 평등한 보통선거를 요구하고, 아일랜드 침략을 양심적 병역거부로 반대하는 등 진보적 성격을 보이던 수평파를 지도자 총살과 이들의 주장에 대한 묵살 (정치는 무지한 민중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엘리트주의적인 논리)로 탄압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싹을 억압하였다. 크롬웰은 자신을 지지하는 중산시민의 권익을 옹호하여 중상주의 정책을 시작하였다.
.네덜란드 견제
1651년에는 항해 조례를 시행하여 네덜란드 무역상의 활동을 제한하여 영국-네덜란드 전쟁을 수행하였다. 또 스페인과 싸워 자메이카를 획득하기도 했다.

○ 종신 호국경 취임 및 군사독재
정권을 잡은 크롬웰은 자신의 지지기반인 중상시민, 젠트리 층의 권익을 위해 중상주의를 실시했다. 그리하여 1651년에 항해조례 (=항해법)를 반포하여 네덜란드 중계무역상인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로 인해 일어난 잉글랜드-네덜란드 전쟁(제1차 영란전쟁)에 간신히 무승부를 거두면서 네덜란드 유일의 패권체제에서 벗어나 잉글랜드가 제해권과 식민지 개척에 좀 더 공격적으로 나설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1653년 크롬웰은 의회를 해산하고 상원 의사당을 폐지한 후 남아있는 의원들은 전부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일단 기존 의회의 대다수는 청교도들이긴 한데, 다수파는 장로회였지만 크롬웰 그의 군대는 소수파에 속하는 독립파였기 때문에 원래부터 갈등이 있었고, 크롬웰이 찰스 1세가 마지막 저항 시도를 했던 스코틀랜드와 의회 장로회가 연관되었다고 약간의 조작과 진상조사 없이 그 구실을 핑계로 장로회를 숙청했기 때문이다. 평등한 선거를 주장하는 수평파, 그 외 가톨릭, 왕당파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청교도 법령을 반포하는 등 군사독재권력을 휘둘렀다.
크롬웰은 의회를 해산시킨 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강제 병합하고 국가원수 ‘호국경(Lord Protector)’에 취임했다. 호국경의 정식 명칭은 잉글랜드 · 스코틀랜드·아일랜드연방 호국경 (Lord Protector of the Commonwealth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이었다. 영국 역사의 유일한 성문법이자 헌법인 “통치장전 (統治章典, Instrument of Government)”이 제정되었는데, 최고 통치권과 정부권을 호국경에게 위임하는 것을 규정했다. 이는 의회가 아닌 장로교회의 아이디어였다.
의회를 해산시킨 크롬웰은 자신이 지명한 인원들로 새로운 의회인 배어본스 의회 (Barebones Parliament)를 만들었으나 이마저도 반 년 후에 폐지시켰다.
하지만 국내 사정은 여전히 어지러웠다. 그 이유는 엄격한 청교도법령에 입각한 강력한 군사독재 정치 때문. 크롬웰과 청교도들은 그 ‘청교도 도덕성’ 곧 엄격한 도덕주의를 지키도록 할 법을 도입했는데, 극장이나 운동 경기나 춤 등 청교도 입장에서 죄악시될 수 있는 행동들을 폐지하는 것이다. 심지어 대중음악마저도 금지해서 영국인들은 노래라고는 오로지 찬송가만 부를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역시 금지되어 의회가 매년 12월 25일에 소집되었다.
크롬웰의 정치는 근본주의 성향에 가깝게 엄격하여 결국 민중들은 그나마 자유롭던 왕정 시대를 그리워하게 됐다. 특히 찰스 1세가 사형당한 것에 대한 동정론이 일면서 왕을 사형시킨 건 잘못이라는 여론까지 생겼다. 이 때문에 왕당파의 복귀를 두려워한 젠트리 계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크롬웰은 1654년 배어본스 의회를 해산시키고 군부독재 하에서 종신 호국경이 되었다.
독실한 청교도임에도 불구하고 1290년에 잉글랜드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잉글랜드로 돌아오는 것을 허용했는데, 원래 크롬웰이 믿는 청교도가 속한 칼뱅파 급진주의 교단들은 이 때만 하더라도 공적인 스페인 중심의 가톨릭 절대주의를 막기 위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해적들과도 협력하는 등, 기독교 외부 종교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 타종교에 대해 청교도가 관용적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말 그대로 당장 직접적인 위협이 아니었기 때문에 손을 잡은 것이다.
크롬웰이 종신 호국경이 되자 의회에선 그를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크롬웰도 왕이 되려는 욕심을 버리지 못했으나 이전에 사망하고 만다. 결국 죽기 얼마 전에 자신의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을 후임 호국경으로 지명하고 사망한다. 이는 크롬웰 체제가 사후 붕괴하는 원인이 된다.

○ 죽음
크롬웰은 더 나아가 국왕의 자리를 넘보았으나 1658년에 병사하였다. 사인은 인플루엔자였다고 하는 설이 있다.
그러나 처음에는 개혁을 주장했지만, 영국 역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군사독재의 오점을 남긴 크롬웰의 군사독재에는 반발도 강하여, 그의 사후 일단 호국경으로서의 권력은 그의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에게 넘어가나 장로파가 1660년에 찰스 2세를 국왕으로 맞이하면서 왕정복고가 일어난다. 1661년, 왕정복고 후 왕을 시해했다는 명목으로 크롬웰의 묘는 파헤쳐진 후 시신에 부관참시가 행해졌으며, 먼나라 이웃나라 영국편 (이원복 글, 그림, 김영사)의 내용과 달리 그의 추종자들 중 주요 인사들도 교수형을 당한다. 참고로 실낙원을 쓴 존 밀턴 시인은 청교도 혁명때에 크롬웰 정부에서 활동했지만, 시각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교수형은 면하였다.(자세한 설명은 ‘불굴의 이상주의자 존 밀턴 평전’, 박상익 지음, 푸른역사, 참조) 상징적으로, 찰스 1세가 죽은 1월 30일에 시행되었다.
지금도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궁전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 갑옷차림으로 검과 성서를 들고 있는 크롬웰의 동상이 서 있다.
– 임종시 나눈 대화
토머스 굿윈은 1658년 9월 3일에 크롬웰의 마지막 순간에 함께 하였다. 크롬웰은 생전에 자신이 저질렀던 많은 일들로 인해, 성도의 견인교리가 과연 맞는지 굿윈 목사에게 물어보았다. 그곳은 택자가 믿음을 상실할 수 있는지 여부였다. 이에 대해, 굿윈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그것에 대하여 크롬웰은 ‘그렇다면 나는 안전하겠군. 난 확실히, 은혜의 상태에 있던 것이었군!” 하며 마지막 호흡을 쉬었다.
– 그의 수급
올리버 크롬웰은 찰스 2세에게 부관참시를 당하고 계속 효수되었다. 그 이후 바다 건너 프랑스에 가서 프랑스 전국을 조리돌림 순회하다가 영국에 되팔려 오는 등 여기저기 굴러다니다가 결국 그의 모교에 안장되었다. 크롬웰에게 깊은 원한이 있는 많은 사람들의 자손을 의식해서 그 수급이 파묻힌 장소는 현재까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 평가
올리버 크롬웰의 업적은 우선 왕당파와의 전투 당시 직업 군인 대신 농민들을 소집했는데, 비록 전문 병사는 아닐지라도 일단 겁주고 협박하면 병사들 이상으로 더 치열하게 싸울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 전파에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크롬웰은 청교도 정신 곧 성서주의에 근거하여 성탄절을 금지하였다. 마태복음서, 누가복음서에 예수의 탄생설화가 나오기는 하지만, 예수가 12월 25일에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크롬웰의 종교적 원리주의는 사람들이 크롬웰에게서 등을 돌리는 원인들 중 하나로 작용했다.

– 종교개혁가 크롬웰
잉글랜드의 청교도는 잉글랜드 국교회 내에 남아 있던 교황주의의 잔재인 주교제도, 성직자 의 제복과 각종 성구, 예전에 대해 폐기를 요구했다. 그들은 영국 교회의 사도적 계승권자라고 칭하던 주교직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겼다.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비 성경적 요소들을 제거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롬웰은 교황주의에 반대했고 1641년 5월3일 하원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로마 가톨릭을 공고히 하려는 사제단과 예수회의 구상에 대해 경계하고 이들의 참된 종교개혁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저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온 힘을 다해 전능하신 하나님을 예배 하고 교황주의와 교황주의자들의 변신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황주의와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경계는 그가 호국경이 된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1656년 9월 17일 의회에서 크롬웰은 “진실로 스페인은 위협적인 적입니다. 그들은 자연적인 (natural) 적입니다. 본인이 이전부터 지적해 왔던 것처럼 그들 안에 하나님에 대해 적대감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미신과 맹목적인 추종에 있어서 로마의 눈에 복종하는 자들입니다”라고 말함으로 교황주의와 로마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크롬웰은 교황주의와 국교에 대하여는 선명하고도 단호한 선을 그었고 교황주의와 국교회의 제도들을 개혁했다. 1643년에 크롬웰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의회는 회의를 소집하여 신앙고백서의 작성을 결의했고 마침내 1648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의회의 승인으로 확정되었다. 크롬웰은 또한 사회윤리의 확립, 풍기단속법 등의 제정을 통한 기독교 이상사회의 구현을 위한 노력, 성직제도의 개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채택 등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하여 영국에서의 종교개혁에 광범위하게 기여했다.
또한 크롬웰은 로마 가톨릭교회를 제외한 다른 종교들에 관용정책을 펼쳤는데 그의 종교적 관용정책은 영국에서 침례교회와 퀘이커같은 군소 교단들이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영국의 침례교도들은 재세례파의 세례관을 버리지 않았고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신앙을 고백한 자들에게만 세례를 베풀었다. 이같은 종교적 토대에서 침례교적 청교도인 존 번연이나 퀘이커의 조지 폭스같은 인물이 탄생할 수 있었다.

– 프로테스탄트의 보호자
.피에몬테 학살의 종식
그는 평생을 로마 가톨릭 교회에 탄압받는 프로테스탄트를 보호하는데 바쳤다. 특히 그는 이탈리아 북부지방서 자행된 피에몬테 학살 사건 때 로마 교황청에 항의한 것은 유명하다. 그해 6월에 피에몬테 계곡의 박해에 관한 소식이 그에게 전해졌다. 가톨릭의 여섯 연대들이 그들 중 셋은 아일랜드인들이였는데, 한 겨울에 주거지로부터 왈덴시스 (프로테스탄트)들을 쫓아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불쌍한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취해진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만행은 아주 유명하다. ‘마을들은 철저히 불태워졌고, 남자들은 도끼로 베어졌다, 아이들의 머리가 바위 위로 던져졌고, 여자들은 벌거벗겨진 체 창에 찔렸다. 150명의 여자들이 교수형 되었고, 그들의 머리는 볼게임에 사용되었다.’ 그 잔악한 만행에 관한 소식이 크롬웰에게 전해졌을 때 그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 날 1655년 1월 3일 그는 프랑스와 조약을 조인하고자 했는데, 그는 즉시 거절하고, 그 국왕 (루이 14세)과 마자렝 추기경 겸 수상이 왈덴시스 프로테스탄트들을 구하는데 그를 원조하겠다고 스스로 서약할 때까지 협상은 진행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알프스로 배를 몰고 가서라도 그 박해를 중지시킬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이 박해를 중지시킬 수 있다면 프랑스와의 전쟁, 아니 전 세계와의 전쟁이라도 치를 것이다.”
루이 14세는 크롬웰의 협박에 결국 양보하였고, 사보이의 공작이 왈덴시스에 대한 사면을 보장하고 그들의 이전의 권리들을 회복시킨다는 전언이 전달되었고 학살은 중단되었다.
.아일랜드 대학살에서 프로테스탄트 보호를 구실로 가톨릭 교도 말살
1641년에 반란을 일으킨 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들은 1642년 잉글랜드 내전이 일어나자 신교도 왕당파와 함께 킬케니 연맹 (Confederation of Kilkenny)을 조직하고 국왕을 지지하고 있었다. 크롬웰은 항복을 거부하는 드로게다 (Drogheda) 시를 정복하고 수비대와 시민 모두를 학살하였으며, 1650년 여름까지 대부분의 연맹파가 장악한 지역을 정복하였다. 크롬웰을 옹호하는 개신교인들은 1641년의 반란이 아일랜드의 예수회원들, 신부들 그리고 수사들이 모의해 지역내 모든 프로테스탄트들을 학살하기로 마음 먹은 데서 비롯됐다며 그 근거로 《폭스의 순교사》를 제시한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John Foxe는 독실한 프로테스탄트로서 가톨릭에 대해 의도적인 왜곡과 근거 없는 마타도어를 편집해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그 내용에 대해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willful falsification of evidence”, 즉 고의적인 증거의 조작이라며 신뢰해선 안 된다고 경고한다.
2009 Encyclopædia Britannica notes that Foxe’s work is “factually detailed and preserves much firsthand material on the English Reformation unobtainable elsewhere.” It was typical, however, in the late nineteenth and early decades of the twentieth centuries to treat Foxe’s text as “not to be trusted….If not the father of lies, Foxe was thought to be the master of inventions, and so readers of the Encyclopedia [sic] Britannica were advised and warned.”
아일랜드에 대해 크롬웰은 일종의 증오심을 갖고 있었다. 종교적으로도 아일랜드는 가톨릭교였고 내전에서도 왕정파를 지지했었다. 더구나 1641년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잉글랜드 정착민에 대한 대규모 학살도 아일랜드인의 의도적 살인이라 믿고 있었다. 이는 영국 내전이 반발해 잉글랜드 세력이 약화된 사이 아일랜드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 4천-1만여명에 달하는 잉글랜드인이 살해되거나 쫓겨난 사건을 말한다. 폭동의 근원은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부터 계속돼온 plantation, 즉 비가톨릭 영국인의 식민이주 정책이다. 삶의 근거지를 잃고 노예처럼 살게 된 북아일랜드 가톨릭계 원주민들의 불만이 오랜 기간 동안 쌓이다 영국 내전으로 본토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폭발한 것이다.
크롬웰은 아일랜드 정벌에서 그야말로 잔인하기 짝이 없는 초토화 작전을 벌였다. 그가 그토록 경멸하고 금지했던 군대의 살인, 방화, 약탈을 용납하고 군인은 물론, 일반 아일랜드 시민에 대한 탄압도 묵인했다. 당시 아일랜드 국민의 약 20%인 20~30만 명이 살해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크롬웰의 아일랜드 정벌 작전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알 수 있다. 개중 얼스터 반란을 진압하며 해당 지역 인구의 5/6를 학살하거나 노예로 팔아 추방했고, ‘아일랜드 토지자산처분법 (1654)’으로 경작지의 2/3를 강탈해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신교도 이주민에게 불하했다.
이 중에서도 특히 드로이다 공성전은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잔인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크롬웰의 군대는 드로이다 성을 포위하고 아사 작전을 펼쳤다. 성 안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먹을 것이 없던 아일랜드 인은 나중에는 인육까지 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성을 함락하고 크롬웰은 성 안의 모든 주민을 살해했다. 무려 2000여 명이 한꺼번에 떼죽음을 당했다. 이렇게 아일랜드를 점령한 크롬웰은 아일랜드의 지배 구조를 바꾸는 정책을 실시한다. 아일랜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가톨릭 귀족, 켈트족 수뇌부들을 괴멸하기 위해 그들의 토지와 재산을 모조리 몰수하고 사람이 살 수 없는 늪과 황무지 지역으로 추방했다. 그리고 잉글랜드에서 이주한 신교도들과 자신의 부하들에게 아일랜드의 핵심, 알짜 지역의 토지를 분배해 아일랜드의 지배 체제를 뒤바꿔버린 것이다.
지금도 아일랜드 사람들은 크롬웰에 대한 뿌리 깊은 원한을 갖고 있다. 그들에게 크롬웰은 잔인하고 무도한 군인이자 아돌프 히틀러급의 학살자로 취급하고 있다. 2009년 당시 아일랜드 총리 버티 아헌이 영국의 고위급 관리와 회담을 하기 위해 찾은 회담장에 크롬웰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회담장을 박차고 나왔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아일랜드에 대한 크롬웰의 군사적, 정치적 행위는 잔인했다. 단지 신앙이 같다는 이유로 크롬웰을 옹호하는 개신교인들이 애써 외면하려 하는 진실이다.
– 신앙인 크롬웰
크롬웰은 1658년에 올린 한 기도문에서 그 자신이 비록 부족하고 허물 많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안에 거하기를 원했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부름받아 쓰임받게 되기를 간구했다.
“하나님 저를 주의 백성들을 선하게 하는 일에 배치하여 주시고 지속적으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에게 한결같은 판단력을 주시고 같은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들을 개혁주의 사역으로 인도하여 주시고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써 주시옵소서. 당신의 도구인 주의 백성들을 지도하여 주시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하여 주시옵소서”
크롬웰의 사적 메모 형식의 일지의 끝에는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다” (God is our Strength)라고 적혀있다. 또 전장의 동료 부하들에게 보낸 짧은 서신들의 끝에도 ”저는 당신의 겸손한 보잘 것 없는 종입니다“ (Your Humble Servant)라고 표기하는 예가 대부분 이었다. 그는 곤경에 처하거나 어려운 일이 닥칠 때면 참모들과 모여 함께 기도를 했다. 해답이 나올 때까지 그 기도는 계속됐다. 하루 이틀 어떤 때는 몇날 며칠을 해답이 나올 때까지 기도했다고 한다. 한편 그의 이러한 독실한 신앙이 바로 청교도 혁명과 인종청소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아일랜드 대학살의 근원이 되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