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2년 5월 31일, 몽골 제국의 건국자이자 초대 카안 칭기즈 칸 / 징기스칸 (Činggis Qan, 1162 ~ 1227) 출생
칭기즈 칸 / 징기스칸 (몽: Činggis Qan, 成吉思汗: 1162년 5월 31일 / 음력 4월 16일 ~ 1227년 8월 18일 또는 25일 / 음력 7월 20일)은 몽골 제국의 건국자이자 초대 카안이다. 묘호는 태조 (太祖), 시호는 법천계운성무황제 (法天啓運聖武皇帝)이다. 본명은 보르지긴 테무친 (孛兒只斤鐵木眞, 패아지근철목진)으로,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한 군사·정치 지도자로서 몽골 초원의 부족들을 정복하고 몽골 제국을 성립시켜 몽골과 중국 지역을 비롯해 한반도에서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정복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 칭기즈 칸 / 징기스칸 (Činggis Qan)
.휘: 보르지긴 테무친
.묘호: 태조(太祖)
.칸호: 칭기즈 칸 (成吉思汗, 성길사한)
.시호: 법천계운성무황제 (法天啓運聖武皇帝)
.국적: 카묵 몽골 → 몽골 제국
.출생: 1162년 5월 31일 (음력 4월 16일), 몽골 울루스 (오논 강)
.사망: 1227년 8월 18일 또는 25일 (음력 7월 20일)
.가문: 보르지긴
.부모: 부) 예수게이, 모) 호엘룬
.배우자: 부르테 카툰, 쿨란 카툰, 예수이 카툰, 쿤주 카툰, 예수겐 카툰, 이수칸 카툰, 군주 카툰, 아비카 카툰, 그르베스 카툰, 차가 카툰, 모게 카툰
.형제자매: 테무게, 벨구테이, 카사르, 하치운, 벡테르, Temulin
.종교: 텡그리교
* 몽골 제국의 제1대 카안
.재위: 1206년 봄 ~ 1227년 8월 18일
.대관식: 1206년 봄 오논 강가 쿠릴타이
.전임: (신설) / 후임: 툴루이 칸(감국)
* 우구데이 카안 / 카묵 몽골의 칸
.재위: 1189년 ~ 1206년
.전임: 쿠툴라 칸 / 후임: 본인
* 보르지긴 키야트의 수장
.재위: 1171년 ~ 1189년
.전임: 예수게이 바투르 / 후임: 본인(칸)
칭기즈칸의 본명은 테무친으로 1155년에 오논강 상부지역에서 테어났다. 하지만 1162,1167년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그의 아버지 에수게이가 타타르의 왕인 테무친을 잡았을 때 태어나서 이름을 테무친으로 삼았다.
테무친은 태어날 때 한손에 핏덩어리를 쥐고 있었기에 주위사람들이 몽골을 통일할 인물로 점지하였다. 원래 영웅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고 시련과 고난이 있기 마련이듯 테무친 역시 엄청난 고난과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아버지 에수게이가 타타르에게 독살 당한 것이다 그 후 그의 아버지를 따르던 물들은 키릴투크를 따라나서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 테무친의 나이가 너무 어려 부족민들을 잡지 못하고 오히려 어머니 호엘룬과 그의 동생들만 데리고 도망을 쳤다. 그 후 호엘룬은 메르키트의 칠르게 보코의 아내였다 에수게이에게 납치되어 아내가 되었었는데 그걸 빌미로 그의 이복동생들은 테무친을 메르키트 자식이라고 놀려 화가난 테무친은 이복동생중 한명을 활로 쏘아 죽인다.

그 후 테무친은 여러 곳을 옮겨 다니다 타이추트족 (키릴투크의 부족)에게 잡혀 죽을 위기에 쳐해 있었다. 그 때 키릴투크의 시종인 소르간 시라의 도움으로 구사 일생되어 도망을 쳤다. 그 후 몽고제국의 최고의 가신이 되는 보루츠와 안다 (의형제)가 되고 아내 보르테를 맞아들인다. 하지만 메르키트부족이 쳐들어와 보르테를 납치해 가버린다.
이에 테무친은 절망하는데 호엘룬이 에수게이의 안다였던 커레이트족의 토릴칸을 찾아가라 조언한다. 토릴칸을 찾아간 테무친은 토릴칸이 자무카를 끌어 들인다면 군사 4만을 내어 준다고 하자 순순히 허락한다.
그 이유는 테무친과 자무카는 3번이나 안다의 연을 맺은 인물이 었기 때문이다. 자무카를 찾아간 테무친은 그의 부족 잘라이르의 진영을 보고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자무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자 자무카도 순순히 그의 부탁을 들어 정병2만을 보내어 테무친을 도와 준다.
약6만대군을 이끌고 메르키트를 치니 메르키트는 버티지 못하고 대패하였고 테무친은 보르테를 구한다. 하지만 또다른 가족간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되고 만다. 보르테가 임신을 한 것이다.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게 아버지가 누군지 모를 상황이 되어버렸다.
어째든 보르테를 구한 테무친은 자신의 부족민을 이끌고 자무카에게로가 그에게 의탁한다. 그리고 상인들을 이용해 자신에게 항복하면 배신자도 받아준다고 한다. 그러자 많은 부족민들이 그의 그늘로 들어왔고 자무카의 부족민 부다 테무친의 부족민이 더 많은 실정이었다. 그 에 자무카는 테무친에게 자신을 떠나 독립해라 하고 테무친은 부족민을 이끌고 자무카를 떠난다. 이에 테무친의 부족에서는 테무친을 칸으로 추대한다. 그리하여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칭기즈칸에 오른다.
이에 자무카는 테무친이 자신보다 먼저 칸에 자리에 오른 것을 질투 하여 13개 부족을 연합하여 테무친을 쳐 승리한다. 세월이 흘러 테무친의 부족은 다시 부흥하여 자무카 테무친 토릴칸 3개 부족으로 몽골 고원을 통치하는 구조가 되었다. 하지만 자무카 동생의 죽음으로 또다시12개 부족을 연합 테무친을 친다.
이번에는 테무친이 토릴칸과 연합하여 오히려 승리 자무카는 패망하여 토릴칸에게 의탁한다. 나머지 11개 부족도 거의 멸망하다시피 하여 고원은 테무친과 토릴칸 2개의 강력한 부족만이 남았다. 하지만 토릴칸은 늙었기 때문에 테무친에게 모든 것을 넘겨 주려 하였지만 그의 아들 쉠김이 반대 테무친을 기습하여 승기를 잡아 테무친은 커레이트 족에게 대패하여 동쪽으로 후퇴를 한다.
하지만 또 다시 기운을 차린 테무친은 커레이트를 공격 커레이트를 멸망시키고 쉠김을 죽인다. 자무카는 나이만에게 의탁하고 토릴칸은 나이만에게 죽는다. 테무친은 고원을 통일하기로 마음먹고 나이만을 치기 위하여 군사를 모으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만은 서고원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군사는 50만에 육박했는데 어려운 상대였다.
그러나 나이만의 왕인 타양칸은 왕비인 퀴베르에게 놀아나는 존재임을 안 테무친은 10만대군을 일으켜 나이만을 공략 지도부의 무능력으로 50만대군은 힘함번 쓰보지 못하고 멸망하고 만다. 그후 테무친은 역사상 처음으로 고원을 통일하게 되고 쿠릴타이 (고원 최대의 회의 기구)를 개죄 대칸의 자리에 오른다. 이 때 삼림족이 반란을 하고 3번의 원정으로 힘들게 진압하게된다.
그 후 금나라 황제인 장종이 죽자 칭기즈칸은 금을 치기위해 군사를 모으고 후방의 안전과 금의 반격을 시험하기 위해 하나라 (서하)를 공략 항복을 받아낸다. 그러자 그 서쪽에 있던 위그르가 복속을 자청하고 항복한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10만 대군을 이끌고 서하를 우회하여 금나라를 공격한다. 그 거대하고 강하던 금나라도 만리장성이 돌파되자마자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100년간 한족에 동화되어 힘을 잃은 것은 물론 부패 한인들의 불만 지도부의 분열등이 그 원인이었다 (모든 북망민족이 망하게 된 원인) 칭기즈칸의 기병대는 순식간의 금나라의 대부분의 영토를 정복 수도를 둘러싸고 금나라는 항복하게 된다. 이에 칭기즈칸은 만족하고 군대를 고원으로 물린다. 하지만 금나라는 수도를 버리고 남하 변경으로 천도한다. 이에 칭기즈칸은 군대를 보내 도발한다.
그 때 호라즘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안 칭기즈칸은 그나라에 600명의 상인사신단을 보내 교역하고자 하였으나 호라즘의 이날축 성주가600명의 상인들은 모조리 죽여버린다. 이에 칭기즈칸은 분노하고 군대를 이끌로 호라즘을 치게된다. 호라즘은 아랍인들의 나라로 그 왕을 술탄이라고 칭하고 신을 알라라 칭하는 중아아시아의 최대 강국이었다. 하지만 그 왕인 술탄이 무능력하고 겁이 많아 전쟁은 칭기즈칸의 몽고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게되었다.
이에 수도와 최고의 도시가 함략되자 술탄은 모든 것을 버리고 도주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죽는다. 하지만 칭기즈칸의 군대도 피해가 켰다. 징기즈칸이 가장 아끼던 손자와 사위가 죽고 장자 주치가 호라즘의 영토 정복과정에서 징기즈칸에게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칭기즈칸이 다음 대칸의 후계자로 주치가 아닌 오고타이를 지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징기즈칸은 주치에게 계속하여 소환명령을 내리지만 주치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뒤 주치는 나이만과 메르키트의 잔당이 쏜 독화살을 맞고 킵차크고원에서 죽어 징기즈칸에게로 돌어갔다. 칭기즈칸은 분노하고 고통스러워하다 귀환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가장 아끼던 맹장 제베 (뛰어난 활솜씨를 가진 인물로 고려인으로 추정되었다. 원래 칭기즈칸의 적이었다 칭기즈칸의 빰에 독화살을 쏘아 인연을 맺은 인물로 칭기즈칸에게 귀순한후 최고의 용맹과 지략의로 칭기즈칸을 보좌한다. 고려을 공략하다 김윤후에게 죽은 살리타이가 이때 제베의 부장이었다)를 잃게 된다. 그러자 칭기즈칸 자신도 죽음을 생각하게된다. 그때 서하가 배신하였다는 보고를 들은 칭기즈칸은 고령으로 전쟁에 친정하였다 그러나 원정하던 도중 낙마로 부상을 당하고 유언으로 제국을 나누어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게된다.
첫째 주치가에게는 킵차크고원을 포함한 알타이 서쪽을 지배하게하고 국호는 킵차크한국이라하였다. 둘째 차가타이가에게는 남부 호라즘과 위그르 서요를 지배하게 하고 차가타이한국으로 명명하였다. 셋째 오고타이가에게는 나이만의 영지만 알타이 서쪽의 기슭 즉 중가리아 대평원을 주고 오고타이란국이라 이름지었고 마지막으로 막내 톨루이가에게는 트란속사니아 남부와 서쪽의 호라산 일대를 주어 일한국으로 명명 했다.
그 후 칭기즈칸은 죽어 브르칸산으로 그의 시체를 옮겼다. 하지만 정말 부르칸산에 묻혔는지는 모른다.

○ 생애 및 활동
세계의 정복자를 꼽으라면 징기스칸과 알렉산더를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정복한 땅의 넓이를 보자면 징기스칸과 알렉산더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알렉산더, 나폴레옹, 히틀러를 합친 땅보다 더 많은 땅을 정복한 이가 바로 ‘징기스칸’이기 때문이다.
해가 뜨는 동시에 해가 질 정도로 광대한 영토를 점령한 징기스칸.
– 칭기즈칸, 몽골을 정복하다
몽골 제국의 1대왕 칭기즈칸 (1162 ~ 1227.8.25), 징기스칸의 본래 이름은 테무진 (鐵木眞)으로 몽골어로 ‘강철’을 뜻한다. 칭기즈칸은 오늘날 몽골과 시베리아가 맞닿은 오논강 유역에서 보르지긴 씨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테무진은 스물여덟의 나이로 ‘칸 (몽골어로 왕)’으로 옹립되어 니룬 (몽골 신화에 따라, 순수한 혈통을 간직했다고 여겨지는 부족)의 수령이 된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칭기즈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니룬들의 조직 형식을 고쳐 자신의 권력과 입지를 탄탄히 다진 칭기즈칸은 몽골 각 부락을 통일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한다. 또 금나와라 연합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타타르족을 물리쳐 복수를 갚는데, 금나라에서는 이 공로를 높이 사 그를 초토관 (招討官)으로 봉한다.
그 후 정벌을 계속하던 칭기즈칸을 견제하기 위해 11개 부락이 연합했으나 칭기즈칸에게 모두 패배, 칭기즈칸의 세력은 날로 강해져 간다. 이후에도 승승장구를 계속하던 칭기즈칸은 1204년, 칸이 된 후 20여 년간의 전쟁을 끝내고 전 몽골을 통일하게 된다. 그리고 1206년, 테무진은 ‘칭기즈 칸’에 오른다.
– 유능한 참모들
칭기즈 칸에 대항했던 마지막 몽골 부족인 나이만의 한 신하는 그에게 문화의 유용함을 일깨워 주었고, 몽골어를 문자로 정착시키는 일을 도와주었다. ‘몽골 비사’에 따르면 1222년말 아무다리야 강 (고대명은 옥수스)과 시르다리야 강 (고대명은 작사르테스) 지역에서 호라즘 샤 왕조와 전쟁을 벌였을 때, 칭기즈 칸은 이슬람 출신의 측근으로부터 성읍의 의미와 중요성을 배우게 되었다.
한때 금나라의 신하였던 또 다른 측근인 야율초재는 농민과 장인들이 생산해내는 물품은 과세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일러주었다. 칭기즈 칸은 당초 중국 북부의 비옥한 전답들을 말의 목초지로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몽골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시킬 위대한 정복은 아직 수행되지 않은 단계였고 그 주목표로 중국이 떠올랐다.
– 칭기즈칸, 제국을 세우다
몽골지역을 완벽히 통일한 칭기즈칸은 1211년 중국을 정복하기 위해 나선다.
사막과 초원을 건너 만리장성을 정복하고, 황하 이북을 점령, 1215년에는 금나라 수도인 북경을 함락시킨다.
그 후에도 멈추지 않은 칭기즈칸은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카프카스, 러시아, 크림반도,
볼가강 유역의 동유럽까지 정복, 몽골통일 20년 만에 유라시아에 걸친 대 제국을 건설한다.

– 칭기즈칸 군대의 위엄
이런 칭기즈칸의 업적에는 그의 능력이 뛰어남에도 있지만, 칭기즈칸의 뛰어난 군대 때문에 가능했다.
칭기즈칸의 군대는 페르시아를 정복할 때는 약 24만 명, 중국과 러시아 유럽을 정복할 때는 각각 15만 명을 넘지 않았다.
상대국에 비하면 엄청난 열세였지만, 칭기즈칸의 군대는 모두를 물리쳤고, 유럽인들에게 지옥이란 뜻의 ‘타르타투스’로 불리며 그 악명을 자랑했다.
이런 몽골군의 능력은 기동력과 조직력에서 나왔다.
보조부대를 제외한 모든 인원은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10명, 100명, 1,000명, 10,000명으로 구성된 10진법 편제아래 따랐으며, 부대장의 절대적인 권위 아래서 엄격한 군기를 지켰다.
기본적인 능력도 다른 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기마민족인 칭기즈칸의 사람들은 3~4세부터 말을 탔고, 활을 비롯한 다른 무기를 훈련했으며, 유목민족의 삶은 그들을 강하게 만들었다.
말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럽의 말에 비해 강인한 몽골 말은 유럽기병이 따라갈 수 없는 기동성을 제공해
각종 전략 (유인전과 기습공격)을 유리하도록 만들었다.
– 칭기즈칸의 죽음과 몽골 제국의 몰락
칭기즈칸은 탕구트와의 전쟁 중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죽음 이후 칭기즈 칸의 아들인 오고타이가 몽골의 제 2대 칸이 됐으며, 송과 연합해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더욱 영토를 넓힌다.
하지만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기 때문일까, 몽골제국은 칭기즈칸과 오고타이, 그리고 그의 손자까지 3대를 유지하고는 내분에 의해 분열된다.
○ 칭기즈 칸의 통치법
칭기즈 칸은 주변 국을 확장해나가면서 자신에게 협력할 경우 자치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여러가지 혜택을 부여했다. 그러나 반항하게 되면 그 지역 전체를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모조리 멸족시켰는데 전멸시킨 사람들의 해골을 모아서 탑을 쌓았다. 바그다드와 이스파한 등의 지역에는 거의 100,000개 가량 되는 해골들로 탑을 쌓기도 했다. 특히 샤리 골골라의 경우 정복활동 도중 징기스칸의 손자인 모토칸(또는 무투겐)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므로 칭기즈 칸의 분노를 사서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모두 죽일 뿐만 아니라 모든 건물을 파괴시켜 전대미문의 폐허로 만들면서 멸망시켰다.

○ 정복 사업
– 서하 정복
칭기즈 칸은 중국 북서쪽 변방지역의 국가인 서하 (西夏)와 싸움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고, 1211년 중국 북부에 자리잡고 있던 금을 향해 진격했다. 1214년 금으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보상금을 받고 철수했다가 1215년 전쟁을 재개하여 연경을 함락시켰다. 그 뒤 중국 북부의 완전한 장악은 부장인 무칼리에게 맡겨졌다.
– 호라즘 정복
칭기즈 칸은 중국에서 더 나아가 호라즘 샤의 정벌에 나섰다. 그 전쟁은 칭기즈 칸의 보호하에 있던 450명의 이슬람 대상단을 몰살시킨 오트라르 시 (市)의 지사 (知事) 이날축 때문에 촉발되었는데, 호라즘 제국의 샤 (황제)는 이에 대한 보상을 거부했다. 호라즘 샤와의 전쟁은 조만간 벌어지게 되어 있었지만 이제 더이상 그 전쟁을 연기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 철저한 섬멸전
이 전쟁에서 몽골족은 끔찍한 야만적 행동을 자행하여 이그만족이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몽골족은 가는 곳마다 도시를 불태웠고, 주민들은 몰살되거나 동족이라도 자신들보다 높은 신분이라면 모두 몰살시키는 몽골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도록 강요되었다. 칭기즈 칸이 호라즘 샤를 상대로 무자비한 복수전을 펼쳐나가는 동안 전답과 화원은 황폐화되었고 관개시설은 파괴되었다. 이 광경을 본 칭기스칸은 1223년 철수했고 1226 ~ 27년 서하를 상대로 마지막 전역 (戰役)에 나설 때까지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는 1227년 8월 18일에 죽었다.
○ 업적
칭기스칸의 사인에 대해서는 서정 참가를 거부하였던 서하를 응징하려다 낙마로 부상하여 중국 육반산 남쪽 땅에서 죽었다는 설, 서하의 수도 닝샤를 포위하였으나 간쑤성 칭수이현 시장강 부근에서 병사하였다는 설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칭기스칸은 전무후무한 대제국을 건설하여 비단길을 다시 열고, 마르코 폴로와 그리스도교 선교사들로 하여금 아시아를 왕래할 수 있게 한 것이 후세들에게 유명해진 이유중의 하나다.
동서양의 문화교류는 칭기스칸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위구르문화를 사랑하여 아들들에게 위구르문자를 배우게 하였고, 국자로 채용하였으며, 이 문자를 바탕으로 몽골문자와 만주문자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의 존재감이 후세에 크게 다가왔다.
또 1206년에 칭기스칸이 만든 법전은 상당한 권위를 지닌 것이었으며 몽골법과 통치방식은 초기 러시아 제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비록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여러 문화를 파괴하긴 하였지만, 종교나 소수 민족 문제 등에는 관대하였으므로 그에 대한 평가는 후세에 상반되게 나타나기도 한다. 오늘날 중국과 러시아는 그를 비난하지만, 몽골에서는 국가의 상징적 존재로서 추앙하고 있는 이유도 그것이다.
○ 다양한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한 정복의 비밀
– 혹독한 유년 시절의 꿈
칭기즈 칸이 처음부터 강했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를 잃은 후 부족 사람들에게마저 버림 받고 노예로 팔려가기까지 했던 테무친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해야 했다. 강한 부족의 공격을 늘 받아야 했던 테무친은 힘을 키워 어지러운 몽골 부족들을 하나로 통일해야겠다는 꿈을 키웠다. 몽골 초원의 작은 아이의 꿈이 훗날 세계사의 거대한 물줄기의 방향을 바꾸게 된다.
– 혈연을 무시한 조직의 정비
친족들에게 배신당하고 목숨을 잃을 뻔한 사건을 겪으면서 테무친은 오랫동안 몽골을 지배했던 혈연 중심의 조직사회를 변혁한다. 혈연과 관계없이 십호, 백호, 만호와 같은 새로운 군대 조직을 만들어 형제처럼 지내게 했으며 친척이 아닌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장군, 지휘관으로 중용했다. 이것은 배신과 보복이 심했던 몽골 사회를 질서 있게 만들었으며 몽골제국을 통일하고 이웃 나라들을 정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 강인한 몽골전사 그리고 뛰어난 전술과 무기
몽골군의 대부분은 기마병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말을 타고 사냥을 하던 그들은 뛰어난 기마병이었으며, 강인한 체력을 지니고 있었다. 칭기즈 칸은 초원의 전사들과 함께 수일을 멈추지 않고 말을 달렸으며, 다양한 전술과 전략으로 적국을 꼼짝 못하게 했다, 그중 가운데 적은 수의 부대를 먼저 내보내 적군을 끌어들이고 나머지 2개의 군사대열이 다양한 대형을 만들어 적들을 포위하는 전략도 있었다. 전쟁 때마다 상대국의 전술과 무기를 배워 활용하기도 했다.
– 왕보다 위대한 철저한 대헌법
‘대야사’라고도 불리는 대헌법은 점점 커져가고 다양한 민족들이 섞여 있는 몽골제국의 안정과 질서를 위해 만들어졌으며 이를 통해 제국 내에 부족간의 갈등과 작은 전쟁들은 종식되었다. 같은 몽골제국 사람끼리는 전쟁을 하지 말 것이며 돈으로 여자를 사거나 납치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했다. 남의 짐승을 약탈해선 안 되고, 사냥 기간을 제한해 동물들을 보호하라고 했다. 또한 ‘칸’은 부족장들의 공식 회의인 쿠릴타이를 통해서만 선출할 수 있으며 ‘대야사’는 왕보다도 더 우위에 있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 수백 년간 우리를 떨게 했던 공포
수많은 역사학자들은 칭기즈 칸과 몽골군이 가져왔던 어마어마한 공포에 대해서 묘사했다. 그들은 아이와 여자를 잔혹하게 죽였고, 포로들의 눈에 뜨거운 은을 붓기도 했다고 한다. 과장된 소문은 유라시아 대륙에 순식간에 퍼져 몽골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상대 적군들이 도망치기도 했다. 서양에서는 자신들을 벌하러 온 ‘지옥의 악마’라고도 불렀다. 몽골군은 아직 정복되지 않은 나라한테는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칭기즈 칸은 이러한 공포감으로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유효적절하게 전술로 활용했다.
– 다양한 민족과 종교를 아우른 관용의 정치
칭기즈 칸의 또 다른 얼굴은 관용이다. 몽골 제국에서 모든 사람들은 평등했다. 부패한 관리들을 엄벌로 다스리고 아무리 지위가 높은 자라도 약한 사람을 착취해서는 안 되었다. 정복한 다른 민족을 몽골화 하지 않았고, 자신의 언어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또한 다양한 민족의 다양한 종교들이 모두 평등하다고 여겨 각 종교들이 평화와 조화를 유지하도록 애썼다. 그리하여 유교와 도교, 불교가 융성하고 그리스도교가 사방으로 전파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 역사적 배경
– 유목민과 정착민의 관계
야담 (野談)으로 가득 차 있는 ‘원조비사’ (元朝秘史, 1240년경)를 제외하고는 몽골 쪽의 자료가 아닌 사료들이 칭기즈 칸이 살았던 시대와 비슷한 시대적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유사 이래 유목민과 정착민은 늘 접촉관계를 유지했다. 이 두 사회는 정반대되는 생활양식을 유지했기 때문에 늘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호의존적인 처지에 있었다.
– 유목민의 정복활동
북방의 유목민들은 남부지역의 일부 주요산품과 그 지역의 사치품들을 필요로 했다. 유목민들이 이같은 물품을 얻는 방법은 무역·대상(隊商)·무력약탈의 3가지가 있었다. 중국의 정착민들은 유목민들이 사는 스텝 지역의 생산품들을 절실히 필요로 하지는 않았지만, 유목족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유목민들의 내침을 막아내야만 했다.
– 유목민의 단합과 분열
스텝 지역 유목민들의 단합과 분열은 중국 왕조의 흥망성쇠에 따라 결정되었다. 유목민들은 세력이 강성할 때 결단력 있는 지도자를 옹립하여 다른 유목민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그 후 중국의 왕조가 쇠망의 길을 걷고 있으면 그들의 세력을 스텝 지역 밖으로까지 확장시켰다. 그러나 유목민들이 이같이 세력을 확장하여 남방정착민들의 문화를 수용하게 되면 결국에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 흥망성쇠의 반복
유목민들은 원래 기동성이 뛰어나 후방에서 별도의 물자보급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세력확장 이후에는 이 전통적인 우월성을 상실해 끝내는 그들이 복속시킨 중국인들에 의해 동화되고 말았다. 그 후 중국에는 다시 강력한 제국이 일어나고 유목민들은 족장들끼리 끊임없이 싸움을 벌여 분열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의 흥망성쇠는 계속 반복되었다. 반론 – 원의 붕괴는 강력한 전염성 질환에 의한 유라시아의 붕괴가 직접 원인이다. 이로 인한 국제무역이 축소되어 통치자금의 부족을 초래하고 몽골족은 중안아시아의 초원으로 회귀하게 된 것이 원의 소멸이다.
– 칭기즈칸의 현실이해
몽골 정복의 역사는 이같은 형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이러한 정치적 갈등과 긴장을 배경으로 하여 칭기즈 칸의 생애가 검토되어야 한다. 그는 자신 부족들 내부에 재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고 또 그당시 중국과 기타 정착문화를 가진 나라들이 쇠퇴의 길을 걷고 있음을 인식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정복자의 길로 나선 것이었다.
– 칭기즈 칸의 통치법
칭기즈 칸은 주변 국을 확장해나가면서 자신에게 협력할 경우 자치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여러가지 혜택을 부여했다. 그러나 반항하게 되면 그 지역 전체를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모조리 멸족시켰는데 전멸시킨 사람들의 해골을 모아서 탑을 쌓았다. 바그다드와 이스파한 등의 지역에는 거의 100,000개 가량 되는 해골들로 탑을 쌓기도 했다. 특히 샤리 골골라의 경우 정복활동 도중 징기스칸의 손자인 모토칸 (또는 무투겐)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므로 칭기즈 칸의 분노를 사서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모두 죽일 뿐만 아니라 모든 건물을 파괴시켜 전대미문의 폐허로 만들면서 멸망시켰다.
– 칭기즈 칸의 지도자로서의 장점
칭기즈 칸이 활발한 정복활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다음과 같다.
.철저한 능력위주의 군 인사행정 : 계급이 미천한 자라도 능력이 있다면 귀히 쓰지만, 능력이 없는 자라면 계급을 강등했음.
.이민족이라 해도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인재흡수
.승마능력과 기동성이 뛰어난 군대
.상인들을 통한 정확한 정보수집
.다른 종교(기독교, 이슬람)에 대한 존중
.정복하고자 하는 나라가 다종교사회인 경우, 특정종교를 지지하여 내분을 조성
.학자인 야율초재와 같이 일함으로써 학식을 이용함.

○ 가족 관계
– 제 1알아타 관리
황후 : 광헌익성황후 홍길랄씨 (光獻翼聖皇后 弘吉剌氏)
장남 : 목종 주치 (穆宗 朮赤) : 추존황제 (追尊皇帝)
차남 : 성종 차가타이 (聖宗 察合台) : 추존황제 (追尊皇帝)
3남 : 태종 우구데이 (太宗 窩闊台) : 몽골 제국의 2대 대칸
4남 : 예종 툴루이 (睿宗 拖雷) : 몽골 제국의 임시 대칸
장녀 : 창국대장공주 코첸 베키 (昌國大長公主 火臣 別吉) : 창충무왕 패독 (昌忠武王 孛禿)에게 하가 (下嫁)
차녀 : 연안공주 체체 이켄 (延安公主 撦撦亦堅) : 토랍이길 (土拉而吉)에게 하가 (下嫁)
3녀 : 조국대장공주 알카이 베키 (趙國大長公主 阿剌海 別吉) : 불안석반 (不顔昔班), 북평왕 진국 (北平王 鎭國), 조무의왕 패요합 (趙武毅王 孛要合)에게 하가 (下嫁)
4녀 : 운국공주 투멜룬 (鄆國公主 禿滿倫) : 적굴 (赤窟)에게 하가 (下嫁)
5녀 : 아아답로흑 공주 (阿兒答魯黑 公主) : 태출 (泰出)에게 하가 (下嫁)
황후 : 홀로륜 황후 (忽魯倫 皇后)
황후 : 활리걸담 황후 (闊里桀擔 皇后)
황후 : 탈홀사 황후 (脫忽思 皇后)
황후 : 첩목륜 황후 (帖木倫 皇后)
황후 : 역련진팔랄 황후 (亦憐眞八剌 皇后)
황후 : 불안홀독 황후 (不顔忽禿 皇后)
황비 : 홀승해 비자 (忽勝海 妃子)
황비 : 야간 비자 (耶干 妃子)
황비 : 야축 비자 (耶逐 妃子)
– 제 2알아타 관리
황후 : 홀란 황후 올와사씨 (忽蘭 皇后 兀洼思氏)
6남 : 활렬견 태자 (闊列堅 太子)
황후 : 고야별속 황후 (古兒別速 皇后)
황후 : 역걸렬진 황후 (亦乞列眞 皇后)
황후 : 탈홀사 황후 (脫忽思 皇后)
황비 : 야진 비자 (也眞 妃子)
황비 : 야리홀독 비자 (也里忽禿 妃子)
황비 : 찰진 비자 (察眞 妃子)
황비 : 합랄진 비자 (哈剌眞 妃子)
황비 : 내만녀 비자 (乃蠻女 妃子)
8남 : 출아철 황자 (朮兒徹 皇子) : 요절 (夭折)
– 제 3알아타 관리
황후 : 야수 황후 탑탑아씨 (也遂 皇后 塔塔兒氏)
황후 : 홀로합랄 황후 (忽魯哈剌 皇后)
황후 : 아실륜 황후 (阿失侖 皇后)
황후 : 독아합랄 황후 (禿兒哈剌 皇后)
황후 : 찰합 황후 이씨 (察合 皇后 李氏)
황후 : 아석미실 황후 (阿昔迷失 皇后)
황후 : 완자홀도 황후 (完者忽都 皇后)
황비 : 혼도로알 비자 (渾都魯? 妃子)
황비 : 홀로회 비자 (忽魯灰 妃子)
황비 : 날백 비자 (剌伯 妃子)
– 제 4알아타 관리
황후 : 야속간 황후 탑탑아씨 (也速干 皇后 塔塔兒氏)
7남 : 찰올아 황자 (察兀兒 皇子) : 요절 (夭折)
황후 : 홀답한 황후 (忽答罕 皇后)
황후 : 합답안 황후 속륵손도씨 (合答安 皇后 速勒遜都氏)
황후 : 알자홀사 황후 (斡者忽思 皇后)
황후 : 연리 황후 (燕里 皇后)
황후 : 독해 황후 (禿該 皇后)
황비 : 완자 비자 (完者 妃子)
황비 : 금련 비자 (金蓮 妃子)
황비 : 완자태 비자 (完者台 妃子)
황비 : 노륜 비자 (奴倫 妃子)
황비 : 묘진 비자 (卯眞 妃子)
황비 : 쇄랑합 비자 (鎖郞哈 妃子)
황후 : 모개 황후 (謨蓋 皇后)
황비 : 숙량합 비자 (肅良合 妃子) : 고려인 (高麗人)
황후 : 아복합 황후 (阿卜哈 皇后)
황비 : 팔불별걸 비자 (八不別乞 妃子)
황후 : 공주 황후 완안씨 (公主 皇后 完顔氏)
황비 : 탑탑아녀 (塔塔兒女)
5남 : 올로적 황자 (兀魯赤 皇子)
황비 : 미상 (未詳)
9남 : 올로찰 황자 (兀魯察 皇子) : 생모미상 (生母未詳), 요절 (夭折)
6녀 : 고창공주 야립 가돈 (高昌公主 也立 可敦) : 생모미상 (生母未詳), 파이술 아아특 적근 (巴而術 阿兒忒 的斤)에게 하가 (下嫁)
7녀 : 포역색극 공주 (布亦塞克 公主) : 생모미상 (生母未詳), 공주 (公主)의 외모가 추해 부마 (駙馬)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자, 칭기즈 칸 (成吉思汗)은 크게 노하여 부마를 죽였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