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0년 4월 22일경, 아랍 정치 지도자이자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 / 마호메트 / 모하메드 (Mohammed, Muhammad, Mahomet, 570 ~ 632) 출생
무함마드 / 마호메트 / 모하메드 (Mohammed, 570년 4월 22일경 ~ 632년 6월 8일)는 이슬람의 예언자이며 성사 (聖使, Holy Prophet, Last Prophet of Islam)이다. 마호메트 또는 모하메드 (Mohammed, Muhammad, Mahomet) 등은 아랍어 여러 방언의 발음 변이 및 아랍어를 차용한 여러 언어의 발음 차이로 생긴 변이형이다.

– 무함마드 / 마호메트 / 모하메드 (Mohammed)
.출생: 570년 4월 22일경, 아라비아 헤자즈 메카
.사망: 632년 6월 8일, 아라비아 헤자즈 메디나
.주거주지: 메디나
.성별: 남성
.국적: 아랍인
.별칭: 라술 (사도) / 직업: 선지자
.종교: 이슬람교
.부모: 부) 아브드 알라, 모) 아미나
.배우자: 카디자
.친척: 아브 딸립 (삼촌)
무함마드는 이슬람의 창시자이다.
아라비아 반도의 제부족을 이슬람의 기치하에 통합함으로써 이슬람 정복의 초석을 세운 상징적 인물로, 이슬람에서 파생된 드루즈교, 알라위파, 시크교 등에서도 존경받는 예언자이다.
아라비아 반도의 부족들에 의해 통치자로 추대되어 군주와 같은 직위에 있었으며, 아라비아 반도 상당수를 통치 영역에 두었다.
사후 아부 바크르가 칼리파가 되었으며, 국가는 라쉬둔 칼리파 시대로 이어졌다.

○ 생애 및 활동
– 어린 시절과 청년기
.메카의 경제적, 종교적 배경
이슬람의 성지 (聖地) 메카는 아라비아 반도 중부, 홍해 연안에서 약 80km 지점의 불모지 골짜기에 위치하는 도시로, 인도양에서 지중해 안에 이르는 대상로 (隊商路)의 요지였다. 옛날부터 흩어진 유대인들이 살았으며, 에베소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몰린 경교같은 기독교 소수 교파의 교회들이 로마교회의 탄압을 피해 거주하였다. 메카는 카바 신전을 중심으로 아라비아 반도의 종교적 중심지였기에 해마다 많은 대상과 순례자들이 찾아들었다.
.탄생
메카의 지배 계급은 5세기 말쯤 부근 황야에서 온 쿠라이시족이었으며, 무함마드는 그 중의 하심가 출신이다. 하심가에는 아브드 알 무딸립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에게는 열 명의 아들이 있었고 막내의 이름이 아브드 알라였다. 아브드 알라는 아미나와 결혼을 했는데, 그 사이에서 무함마드가 570년 4월 22일경 태어난다.
.고아
상인인 아버지의 죽음으로 무함마드는 유복자로 태어났으며, 어머니 아미나도 메디나를 방문하고 오는 중 병에 걸려 죽게 되어 고아가 되었다. 무함마드는 하녀의 손을 잡고 메카로 돌아와 할아버지 아브드 알 무딸립에 의해 자라다가 할아버지가 죽자, 삼촌 아브 딸립에 의해 키워지게 된다. 삼촌 아브 탈리브는 가난했고 딸린 식구들이 많아 무함마드는 어린 나이부터 삼촌 아브 딸립의 무역 활동을 따라다니게 된다. 12세에 무함마드는 삼촌을 따라 시리아로 갔다. 그곳에서 바히라라는 이름의 경교, 곧 기독교의 수도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대상에 무함마드에게 예언자의 징표가 있다고 말하였다. 그 후 무함마드는 목동일을 하며 자라나게 된다.
.다신교
당시 아라비아 각지에는 유대인들과 기독교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셈어족 언어를 사용하던 사바인들도 아라비아에 거주하였는데 이들은 서로 종교적인 영향을 주고 받았다. 신성한 달이라 불리던 9월에 금식을 행하던 것은 사바인의 종교적 영향이다. 유대인들과 기독교 신자들의 영향으로 유일신 사상이 아라비아 반도에 전해지긴 했으나 대부분은 여전히 다신교 신앙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카바 신전에는 360개의 우상들이 존재했었다. 이슬람의 알라도 카바 신전에서 모시던 신 중 하나였다.
.청년 시절
목동이었던 무함마드는 가난했던 삼촌 아부 딸립을 생각하여 수익성이 좋은 직업을 구했고, 삼촌 아부 딸립의 소개로 부자이자 과부 디자의 고용인으로 들어가 그녀를 대신해 시리아 지방으로 대상 무역을 떠나게 된다. 이 무역은 큰 성공을 거두고 샴 지방의 특산품을 구해 메카로 돌아왔다. 카디자는 이제 깊은 감명을 받고 15살이나 어린 무함마드에게 청혼을 하였다. 무함마드가 25세, 카디자가 40세에 둘은 결혼을 하였다. 부자였던 카디자와의 결혼은 무함마드에게 부와 명예를 주었고, 무함마드는 삼촌의 재정적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사촌 알리를 입양하였다.

– 이슬람
.진리와의 만남
경제적인 부는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한 여유를 주어, 무함마드는 금식하며 사색하며 진리를 찾기 시작했다. 사실 이러한 종교적 감수성은 유년시절부터 타고난 것이었다. 무함마드가 어린이일 때에 그의 삼촌은 카바 신전의 관리인이었다. 카바신전에서는 검은 돌을 숭배하였는데, 이를 본 무함마드는 과연 검은 돌이 신인가라는 의문을 가졌다. 그러던 어느날 무함마드는 히라 산 (山) 동굴에서 계시를 받았다. 무함마드는 겁에 질려 집으로 돌아왔는데, 부인 하디자가 무함마드를 진정시키고 자신의 사촌이자 이비아니교의 사제였던 와라카 이븐 나우팔에게 가서 사정을 설명하였다.
와라카 이븐 나우팔은 무함마드가 만난 것이 천사 가브리엘이었다며, 무함마드가 예언자라고 말하였고 하디자는 집으로 돌아와 무함마드에게 모두 말한 후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최초의 무슬림이 된다.
.설교자
첫 계시를 받은 후 점차 너의 양자들과 노예 그리고 친한 친구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하였고, 3년째 되던해 무함마드는 자신이 ‘알라의 사자’라는 정체성으로 자신의 친구와 친족을 모아놓고, 하늘의 계시에 의하여 유일신 알라의 전지 전능함, 만물의 창조, 최후의 심판 및 천국과 지옥 등을 주장하고 설교를 시작하였다.
– 탄압
하지만 친구와 친족들은 그를 비난하고 모욕하여 무함마드를 무시했고, 무하마드는 치욕적인 비난을 받았다. 그러자 무함마드는 메카로 오는 순례객들에게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유일신 사상을 전하기 시작했고, 메카의 카바신전을 지키며 순례객들로 수입을 얻었던 부족원들이 무함마드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상숭배를 배격하고, 알라 (알라는 하나님을 뜻한다)가 유일신임을 주장했다.

.메디나
622년 그도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갔는데, 이것을 신도들은 ‘헤지라 (성천)’라 하며 그 해를 이슬람의 기원으로 하였다. 메디나 시대에 이슬람의 예언자이며, 정치적 지배자, 무장 (武將)이기도 한 그는 계속 하늘의 계시를 전하였다. 한편 종교법, 사회적·경제적 여러 규정을 정함과 동시에 메카와 시리아의 통상로를 위협하고, 624년 해마다 메디나를 공격하는 메카 군을 메디나 남서에서 격파함으로써 무슬림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 이슬람이 세력을 넓혀가자 유럽사람들은 ‘한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어, 마치 이슬람이 강제로 개종하게 한 것처럼 악선전을 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무함마드는 폭력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써 이슬람 신앙을 넒혔다. 무함마드는 메카의 북쪽에 있던 메디나가 아랍계와 유대계의 갈등상태임을 알고는 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신 신앙인 이슬람을 대안으로 제시하여 중재했다.
622년 그도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갔는데, 이것을 신도들은 ‘헤지라 (성천)’라 하며 그 해를 이슬람의 기원으로 하였다. 메디나 시대에 이슬람의 예언자이며, 정치적 지배자, 무장(武將)이기도 한 그는 계속 하늘의 계시를 전하였다. 한편 종교법, 사회적·경제적 여러 규정을 정함과 동시에 메카와 시리아의 통상로를 위협하고, 624년 해마다 메디나를 공격하는 메카 군을 메디나 남서에서 격파함으로써 무슬림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 이슬람이 세력을 넓혀가자 유럽 사람들은 ‘한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어, 마치 이슬람이 강제로 개종하게 한 것처럼 악선전을 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무함마드는 폭력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써 이슬람 신앙을 넓혔다. 무함마드는 메카의 북쪽에 있던 메디나가 아랍계와 유대계의 갈등상태임을 알고는 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신 신앙인 이슬람을 대안으로 제시하여 중재했다. 630년 외교협상으로써 메카에 입성하여 카바 신전의 우상을 모두 파괴하였다. 그는 “진리는 왔고, 거짓은 멸망하였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슬람은 세율이 낮은 조세를 거두고, 평등한 참정권을 보장함으로써 평화적인 방법으로써 피정복민들을 복속하게 했다.
.정복과 죽음
그는 이슬람 신앙을 포교하는 데는 나라의 힘이 강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무함마드는 정복 전쟁을 계속해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632년 3월에는 메카에서 예배를 지내고, 무함마드 자신이 순례를 지휘하였다. 그 후, 같은 해 6월 8일 (이슬람력 11년 3월 13일) 애처 아이샤가 지켜보는 가운데 메디나의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검소하게 장례를 치러 오늘날 메디나에 있는 예언자의 모스크에 매장되어 있다.

○ 코란 (꾸란)에서의 무함마드
그의 사상은 이슬람, 중동 역사서적과 함께 코란 (꾸란) 속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그가 말한 알라의 계시를 그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으로, 6신 등을 중심으로 하는 교리를 이슬람의 다섯 기둥에 의하여 터득하려는 것이다.
– 코란 (꾸란)
꾸란 또는 쿠란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610년 이후 23년간 알라 (‘하나님’이라는 의미)에게 받은 계시를 구전으로 전하다가,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여러 장소에서 여러 시대를 걸쳐 기록한 기록물들을 모아서 집대성한 책으로, 이 계시는 무함마드가 40세 무렵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히라산 동굴에서 천사 지브릴을 통해 처음 받았다.
.꾸란
꾸란은 까라아 (낭송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 ‘낭송’이라는 뜻을 지닌다. 꾸란은 계시되어 가르쳐지면, 제자들이 그것을 낙타의 골편이나 야자의 엽피, 양피지 등에 기록하였으며, (무함마드가 죽자마자) 이후 제1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 시절에 꾸란을 한 권으로 집대성해 보관하였고, 제3대 칼리프 우스만 이븐 아판은 꾸란 결집위원회를 조직하여 최종적으로 집대성 작업을 완성했다. 이 과정에서 꾸라이쉬 부족의 언어로 그 기재 방법을 통일하였으며, 정통본을 암송자인 하피즈와 함께 이슬람 각지로 파견하여 전파하도록 했으며, 이것이 현재 사용되고 있는 꾸란의 정본 (定本)이다. 또한 이것을 달리 ‘이맘본’ 또는 ‘우스만본’이라 부르기도 한다.
오늘날 쓰이는 꾸란은 이 정본을 원본으로 삼고 있다. 9세기 말부터 모음 기호 (타쉬킬)가 붙어 표기되기 시작했으며 운율에 따른 읽는 법과 문법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그 내용은 같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는 꾸란의 구절로서 이슬람의 다섯 기둥 중의 하나인 샤하다 (하나님 이외에는 경배받을 존재가 없으며, 무함마드는 하나님의 사도이다)가 새겨져 있기 때문에 조기를 게양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구성
문체는 사즈아이고 일종의 운을 단 산문체로 되었고, 독송 할 때 리듬감을 느낀다. 6342개의 아야 (절)와 114의 수라 (장)로 되어 있으며 각 수라는 암소 · 이므란일가 · 여자 등과 같은 제목으로 분류된다. 꾸란에서 사용되는 단어는 점 하나까지도 리듬과 운율로 연결되어 소홀히 할 수 없다.
.각주서 (타프씨르)
꾸란의 주석서는 타프시르 (Tafsir)로 불리며 어근은 아랍어 fassara (설명하다)이다. 꾸란 구절을 설명할 때 가장 먼저 사용되는 것은 먼저 꾸란 그 자체의 다른 구절이며, 두 번째로는 하디스 (무함마드의 언행록)이며, 마지막으로는 사하바 (무함마드의 교우)의 전승이다.
.독송
하루 5번 기도시 무슬림은 정확한 발음으로 꾸란을 암송하여야 하며 꾸란 전체를 암기하는 자를 하피즈 (Hafiz)라고 한다. 각종 의식에서는 정규 독송자가 소리 높이 독송한다. 10여 개의 유파가 각기 다른 정지나 성조로 독송했으며 10세기경 이후는 7파로 통일되어 부르고 있다. 모든 예배 시에 알 파티하는 반드시 독송하며, 하루 다섯 차례 기도를 올리는 동안 최소한 17회 이상 개경장을 암송하게 된다.
.번역
알라가 계시한 꾸란은 문학적 아랍어로 되어있으며 아랍어 자체로써 꾸란을 이해할 때만이 그 의미에 가장 정확히 접근할 수 있다고 한다. 원뜻을 훼손하고 왜곡할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하여, 꾸란은 타언어로 번역된 꾸란을 인정하지 않는다. 비아랍어를 사용하는 독자, 예를 들어 한국인을 위해 한국어로 번역된 꾸란은 ‘한국어 꾸란’이 아닌 ‘꾸란 의미의 한국어 해설’로 불린다.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에 관심을 가져 12세기에 꾸란이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이것이 다시 독일어 · 이탈리아어 · 네덜란드어 등으로 중역되었다. 한국어로는 1980년 김용선 교수가 펴낸 ‘한역주해 코란 역편’이 있으며,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아 최영길 교수에 의해 이루어진 ‘성 꾸란 의미의 한국어 번역’이 번역본으로 나와 있으며, 이후 한국어로 완역하고 주석과 해석을 첨가한 ‘꾸란 주해’를 다시 펴내었다.

.꾸란의 장 (수라)
여기서의 수라는 “꾸란의 장”에 대한 아랍어 표기이다. 이는 보통 메디나 수라와 메카 수라로 구분되나 그 구분은 확실하지 않다. 모든 수라는 아야트, 즉 절로 나뉜다.
114개의 수라는 다음과 같다. 이때 “알”은 정관사이고, 그에 따라, 예를 들면 “알 진”은 “정령 장”이라는 뜻을 가진다.
알 파티하, 또는 개경장
알 바카라
알 이므란
안 니사
알 마이다
알 아남
알 아라프
알 안파르
앗 타우바
유누스
후드
요셉
알 라드
아브라함
알 히즈르
안 나흐르
알 이스라
알 까흐프
마리아
따하
알 안비야
알 하즈
알 무미눔
안 누르
알 푸르깐
아쉬 슈아라
안 나믈
알 까싸스
알 안카부트
알 룸
루끄만
아스 싸즈다
알 아흐잡
싸바아
파티르
야 씬
아스 사파트
사드
아즈 주마르
가피르
푸실라트
아쉬 슈 라
아즈 주크루프
아드 두칸
알 자씨야
알 아흐까프
무함마드
알 파트흐
알 후즈라트
까프

아즈 자리야트
앗 뚜르
안 나즘
알 까마르
알 라흐만
알 와끼야
알 하디드
알 무자달라
알 하쉬르
알 뭄타하나
아스 사프
알 주므아
알 무나피쿤
앗 타가분
앗 딸라크
앗 타흐림
알 물크
알 깔람
알 하까
알 마아리즈
노아
알 진
알 무잠밀
알 무다씨르
알 끼야마
알 인싼
알 무르쌀라트
안 나바아
안 나지아트
아바싸
앗 타크위르
알 인피따르
알 무따피핀
알 인쉬까끄
알 부루즈
알 따리끄
알 알라
알 가쉬야
알 파즈르
알 발라드
아쉬 샴쓰
알 라일
알 두하
알 인샤르흐
앗 틴
알 알라끄
알 까드르
알 바이아나
알 질잘
알 아디야트
알 까리아
앗 타카쑤르
알 아스르
알 후마자
알 필
꾸라이쉬
알 마운
알 카우싸르
알 카피룬
안 나수르
알 마싸드
알 이클라쓰
알 팔라끄
안 나쓰

– 이슬람의 다섯 기둥
이슬람의 다섯 기둥 (Five Pillars of Islam)은 수니파의 가장 기본적인 다섯 의례 (실천)를 가리키는 말이다.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이며, 이슬람 삶의 근본이다. 이슬람은 믿음과 실천으로 이루어진다. 이것들은 유명한 가브리엘의 하디트로 요약된다.
수니에서 다섯 기둥 (Arkan-al-Islam)은 샤리아 (이슬람법)에 근거하며 무슬림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시아에는 ‘종교의 뿌리’ (Usul-ad-Deen)로 알려진 다섯 가지 믿음과 ‘종교의 가지 (Furoo-ad-Deen)’로 알려진 열 가지 의례가 있는데, 이 열 가지는 순니의 “이슬람의 기둥”과 유사한 것이다.
.신앙고백 (샤하다) – 알라 이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예언자라는 선언. (제1의 기둥)
.기도 (살라트) – 하루에 다섯 번 알라에 기도해야 하므로 여행을 하다 일정한 시간이 되어도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예배를 드린다. (제2의 기둥)
.자선 (자카트) – 무슬림들은 자산의 2.5%, 교역품의 2.5%, 농업 생산의 5-10%정도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하도록 되어있다. (제3의 기둥)
.단식 (사움) – 라마단 (이슬람력 9월) 한 달 동안 일출부터 일몰까지 음식 및 음료의 섭취와 어떠한 성행위도 허용되지 않는다. (제4의 기둥)
.메카 순례 (하즈) – 이슬람력 12월 (둘 힛자)에 이루어지며, 경제적 신체적으로 능력이 있는 무슬림이라면 모두가 일생에 한 번은 행하는 것이 좋다. (제5의 기둥)
시아파와 수니파는 이러한 교리의 실천에 대한 동의를 하고 있지만, 시아파에서는 동일한 이름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 연표
570년: 무함마드 탄생
576년: 어머니 아미나 사별
583년: 상인이 되어 로마령 시리아 방문
595년: 카디자와의 결혼
610년: 대천사 지브릴의 계시받아 이슬람 전도 시작
614년: 메카 귀족들의 무슬림 박해 시작
615년: 일부 무슬림들의 에티오피아 피신
616년: 우마르의 개종
619년: 아내 카디자와 숙부 아부 탈리브의 별세
620년: 야스리브가 분쟁 조정자로 무함마드 초청
621년: 미라즈 (무함마드의 승천 기행)
622년: 헤지라 (성천: 마카 → 야스리브)
623년: 봉쇄에 대항하여 무슬림들이 메카의 카라반을 습격, 이후 메카 군대가 야스리브의 가축을 약탈.
624년: 바드르 전투 (승)
625년: 우후드 전투 (패)
627년: 한다크 (참호) 전투 (승)
628년: 후다이비야 협정 (메카 – 무슬림 간 휴전)
629년: 문다 전투 (패)
630년: 메카 입성, 후냔 전투 (승) 아무타스 전투 (승), 타이파 포위, 타북 함락
631년: 1차 두마툴 잔달 원정
632년: 마지막 순례 여행 후 영면
○ 후손
역사상 수많은 귀족 가문들과 이맘들이 무함마드의 후예로 알려져 있거나 스스로 주장해왔다. 무함마드의 아들들은 다 요절하여 부계 자손은 내려오지 않고 있다. 따라서 후손들은 다 무함마드의 딸인 파티마와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사이에서 나왔다. 이 둘 사이에서는 장남인 하산 이븐 알리와 차남 후세인 이븐 알리가 있고, 역사 속에 큼직한 발자취를 남긴 후예들은 대부분 이 둘의 후손이다. 파티마를 통한 무함마드의 후손은 단수형으로는 ‘샤리프 (Sharīf)’, 또는 동일한 어근을 지니는 ‘아슈라프 (Ashrāf)’라고 불리는데, 이 호칭은 하산의 후손들에게 자주 붙여진다. 후세인의 후손들은 주로 ‘사이이드’라고 불린다. 또, 무함마드의 후예는 알리의 후손이기도 하므로, ‘알리 씨족’이라고도 한다.

○ 무함마드 비하 관련 사고
.1988년에 발매된 인도 출신의 영국 문학가인 살만 루시디의 소설 ‘악마의 시’에는 무함마드를 비롯한 이슬람에 대한 비하 내용이 주를 이루어 이란에서 궐석재판이 진행되어 사형이 언도되었다. 하지만 실제 살만 루시디는 이란 밖에 체류하였기 때문에 집행되지도 않고 체포되지도 않았다. 또한, 이 소설을 번역한 각 언어의 번역자들이 피해를 입기도 했다.
.2006년에 덴마크 일간지 ‘윌란스 포스텐’에서 무함마드를 테러리스트로 비하한 만화가 출시되자마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등지에서는 우상 숭배 반대 시위를 벌이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이 사건은 특정 종교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사람을 분노하게 만드는지 보여주었다.
.무함마드는 자신이 53세 되던 해에 당시 9세였던 아이샤와 결혼을 하였다. 이것은 중동사회의 모델이 되어 현재에도 미성년 여아가 40~50되는 어른과 결혼하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무함마드는 아이샤가 9세 때 성교를 가졌다고 한다.
.사우스 파크 시즌 14의 에피소드 중 200화 특집 방송에서 무함마드를 묘사한 장면이 등장했으나 이슬람 과격 단체의 협박으로 검열 처리되었다.
.2012년 미국 대사관 습격 사건: 2012년 미국에서 만들어진 영화 “이노센스 오브 무슬” 이 이슬람을 모욕한다는 것을 이유로, 이에 항의하기 위해 이집트 카이로, 리비아 벵가지 등 아랍 국가의 미국 재외 공관이 2012년 9월 11일부터 차례차례 습격당하였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 (프: Attentat contre Charlie Hebdo): 2015년 1월 7일 11시경 복면을 쓴 이슬람 원리주의 성향의 두 테러리스트가 프랑스 파리에 소재한 풍자신문 ‘샤를리 에브도’ 본사를 급습하여 총기를 난사한 사건이다. 12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했다. 테러리스트들은 건물에 들어와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며 자동화기를 난사했으며, 50발 이상의 총격이 가해졌다. 1989년 크리스티앙 도르니에의 총기난사 사건 이후 프랑스 최악의 총기 살해 사건이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