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6월 19일, 쿠웨이트 (Kuwait)가 영국으로부터 독립
중동에 위치한 아랍국으로 정식국명은 ‘쿠웨이트국 (Dawlat al-Kuwayt)’이다. 영어 발음인 쿠웨이트 (Kuwait)로 알려져 있지만 아랍어로는 ‘알-쿠와이트’인데, 이는 물 근처에 세워진 요새라는 의미다. 수도는 쿠웨이트 (Kuwait City)로 싱가포르, 과테말라 등 몇몇 나라와 더불어 수도와 국명이 일치하는 나라 중 하나다. 국토면적은 18,000㎢, 인구는 약 410만 명이다. 사실상 에미르가 통치하는 전제군주제이지만 일단 입헌군주제의 형태를 취하고는 있다. 공용어는 아랍어이지만, 영어도 널리 쓰이고 있다.
1752년 쿠웨이트 (Kuwait) 셰흐국이 건국됐다. 1871년 오스만 제국 지배에 들어가 바스라 주의 일부가 됐다가 1899년 영국 보호령이 됐으며 헌법으로 민주주의가 채택되고 주권재민을 포함했으나 국가 원수는 사바가 (家) 세습 군주였다.
1961년 6월 19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1990년에서 1991년 걸프 전쟁 때 이라크에 점령됐다.
1990년 이라크군이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후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자국의 19번째 주로 강제 편입했다. 알사바 국왕은 사우디아라비아로 도피하고 망명 정부를 세웠으며 1991년 1월 다국적군이 이라크를 축출하고 3월 국토를 되찾았다.

○ 쿠웨이트 (Kuwait) 개관
쿠웨이트 (Kuwait)는 서아시아에 있는 군주국이다. 정식 명칭은 쿠웨이트국 (State of Kuwait)이며 수도는 쿠웨이트 시(또는 쿠웨이트 시티)이다. 과거 영국령의 일부였다.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와 국경을 접한다. 공용어는 아랍어이며 면적은 레바논과 크기가 비슷하다.
작은 크기와 달리 세계적 석유 부국이며, 걸프전과 월드컵 축구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이라크 전쟁 이후로 막대한 군비 수백억 달러를 부담해도 경제적으로 아무런 타격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부자 나라다. 인구 백만의 나라에 외국인 노동자가 삼백만에 이르고, 대부분의 성인 남성은 별로 하는 일 없이 월급만 많이 받는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물론 모든 교육도 무료이며 그러면서도 교육에 대한 투자도는 상당한 편이다. 다만 공교육보다는 사교육에 의존하는 비율이 상당한 편이다.
20세기 초 영국이 이 땅을 점유하면서 운명이 엇갈리게 되었다. 영국이 강제로 침탈한 땅이 아니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보호해달라며 부족들이 자진하여 영국 휘하에 든 것이다. 1961년에 독립하였으며, 막대한 오일 머니로 엄청난 국부를 획득하였다.
이웃나라인 이라크, 바다 건너 이란 등 주변국들이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어 그 여파로 쿠웨이트 소식은 묻혀버린다.
쿠웨이트의 인구는 2019년 기준으로 410만 정도지만 쿠웨이트 국적권자는 전 인구의 30%를 겨우 넘는 140만명 정도에 불과하다. 특이하게도 전 인구의 70%가 외국인인 나라이다. 구체적인 인구비율은 쿠웨이트 시민권자가 31.3%, 타 아랍국가 출신이 27.9%, 아시아 출신(주로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이 37.8%, 아프리카 출신이 1.9%, 기타 1.1% 정도로 이루어져 있다.
– 역사
.고대 ~ 쿠웨이트의 성립까지
쿠웨이트는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꼽히는 수메르부터 시작해서 고대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신 바빌로니아를 거쳐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였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 이후 셀레우코스 제국, 파르티아, 사산 왕조를 거쳐 이슬람 제국시대인 우마이야 왕조와 압바스 왕조를 맞이한다. 따라서 현대의 국가들 중 쿠웨이트 지역을 지배했던 가장 오래된 국가를 굳이 꼽자면 페르시아 제국의 후손인 이란이다.
쿠웨이트는 전국토가 거의 사막이나 다름없어 농사를 짓는게 거의 불가능해 정주민이 거의 없었다. 의외로 비슷한 사막지대라 생각하기 쉬운 이라크 같은 경우는 경작 가능 면적이 800만 헥타르가 넘으며, 지금도 500만 헥타르에서 농사가 지어지고 있어 충분한 인구를 지탱해온 것과 비교된다. 다만 쿠웨이트에서도 구석기 유물이 출토되긴 한지라 사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던 곳은 아니었던듯 하다.
쿠웨이트가 과거에 바그다드의 압바스 왕조의 지배를 받은 건 맞긴 하지만, 8세기에서 13세기까지에 불과하고 이후 몽골,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하지만 당시 역사가 명확하지 않은 점을 볼 때 정식으로 이라크의 영토라고 할 수는 없고, 느슨한 종속관계 정도였던 듯하다. 어차피 이 당시 쿠웨이트에 살던 사람들은 제대로 된 정착민이 아니라 사막의 유목민들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쿠웨이트 민족은 17세기 이후에 이주해온 아니자족(`Anizzah)이 중심으로 사실상 주인없는 땅에 정착한 것과 같다(당시 이 지방의 지배자였던 오스만 제국이 이들의 정착을 인정했다). 원래 이들은 고대 로마 제국 시절부터 향신료 등을 거래하며 동서교역에 종사하는 걸로 먹고 살았는데, 17세기에 이르면 대항해시대가 열려 아시아-유럽간에 직거래가 이루어지게 되자 중간상인이었던 이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어졌다. 그렇다고 유목만으로 생계를 유지하자니 아라비아 반도가 몽골같은 초원지대도 아니었다. 결국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정착하려하니 이미 좋은 땅은 다른 민족들이 다 차지하고 있었고, 이들에게 남은건 쓸모없는 사막지대 뿐이었다. 다만 쿠웨이트 지역은 물고기는 좀 잡혔는지라 여기에 정착했고 그래서 초기 정착된 쿠웨이트 마을은 가난한 어촌이었다. 그러던 것이 18세기 중반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인도를 사실상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중동-인도간에 교역량이 크게 늘었는데 이 때 쿠웨이트인들도 자신들의 특기를 살려 교역에 적극 나섰고 그래서 18세기 쿠웨이트는 중동의 교역 중심지로 변화하였다.
지금의 정착된 쿠웨이트 지방은 이 아니자족이 발전시킨 것으로 그 전까지는 떠돌이 유목민들이 돌아다니던 지역에 불과했다. 때문에 이라크와는 민족구성이 완전히 다르다. 이후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애당초 쿠웨이트인은 이라크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 그래서 쿠웨이트인은 이라크인과는 전혀 민족적, 문화적 동질감을 갖지 않는다. 현재 쿠웨이트의 사바흐 왕조는 이 아니자족의 지도자 가문 출신이다. 1752년 쿠웨이트시의 지도자였던 사바흐 1세가 바스라를 다스리던 오스만 제국의 총독에게 찾아가 오스만 제국 술탄에 충성을 바치는 대가로 정당한 지배자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현재 쿠웨이트 정부에서는 이 때부터 독립국이었다고 주장하나 물론 오스만 제국에서는(그리고 현대 학자들도) 자치령 중 하나로 보았다.
.쿠웨이트의 독립 ~ 현대
이렇게 쿠웨이트는 오스만 제국의 자치령이 되었는데 19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이 행정구역을 현대적으로 정비하면서 행정구획을 에얄레트(Eyalet)에서 빌라예트(Vilayet)로 바꾸면서 쿠웨이트도 바스라 빌라예트에 속하게 된다. 다만, 이것도 행정구획 상으로만 설정된 것뿐 실제로는 여전히 자치령으로 오스만 제국의 관리는 쿠웨이트에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비록 속령이었지만 잘 살아온 쿠웨이트인들이 바스라령에 속하게 되니 당연히 불만이 없을리 없었는데, 이 때 등장한 것이 오늘날 쿠웨이트 사람들로부터 대왕이자 국부로 불리는 무바라크 알 사바흐였다. 무바라크는 쿠웨이트의 유력 부족인 사바 가문 출신으로 통치자가 되기 전에는 오스만 제국의 기병장교로 공도 세워 작위도 받고 훈장도 받았다. 그러다가 1896년 계승 과정에서 이복형을 죽이고 쿠웨이트의 통치자가 된다.
무바라크는 1899년 이란에 주재하던 영국 대령에게 찾아가 영국의 보호령이 될 테니 독립을 보장해 달라고 했다. 구체적으로는 영국 정부의 승인 없이 외국의 대표자를 받아들이거나 영토를 매도하지 않겠다고 했다. 영국은 원래 쿠웨이트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스스로 보호령이 되겠다는데,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이 협정은 원래 비밀 협정이었으나 쿠웨이트에서 영국의 영향력이 높아지자 오스만 제국에서도 이 사실을 알아차렸고 괘씸해 했지만, 20세기 초의 오스만 제국에는 골치아픈 문제거리가 한 두가지가 아니라 변방의 조그만 속령 따위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1913년 오스만 제국 – 영국 – 무바라크 3자간에 회담이 이루어졌는데 무바라크를 오스만 제국의 총독 (kaymakam)으로 인정하고 쿠웨이트를 명목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보나 실질적으로 독립적인 지역으로 인정해주고 1899년 협정도 인정해주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협정으로 오스만 제국과 쿠웨이트의 영역이 획정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이라크-쿠웨이트간의 국경이 된다.
1914년 오스만 제국이 독일의 동맹국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영국은 아랍인들에게 “오스만 제국과 싸워라! 그럼 독립시켜주겠다.”하고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아랍인들의 반란을 유도했다. 무바라크도 여기에 적극 참여해 먼저 쿠웨이트의 국기부터 바꾸고는 바스라 속주를 점령하고 오스만 제국을 쫓아냈다. 이 공로로 영국으로부터 ‘영국 보호하의 독립국’ (Independent government under British protection)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게 중요한건 쿠웨이트는 영국의 우호국 대접을 받아서 영국 보호령이면서도 간섭을 거의 받지 않고 오히려 무기 등을 지원 받는다. 영국이 전쟁 때 이라크의 독립을 약속했으면서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지연하다가 1932년 독립시켜주고 나서도, 간섭하다 이라크인들의 반감이 높아져서 2차 세계대전 때 이라크가 추축국으로 참전한 것과 비교된다.
1920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당시 네지드 토후국)가 쿠웨이트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한 차례 전쟁을 치룬바 있다. 이 때문에 지금도 쿠웨이트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를 경계한다. 원래 사우디아라비아도 쿠웨이트도 영국의 보호령이었으니 처음에는 영국도 중립을 지켰다. 하지만 쿠웨이트가 사우디아라비아의 공격을 받는 입장이었으니 직접 영국군을 보내는 대신 많은 무기를 쿠웨이트에 지원했다. 덕분에 사우디아라비아의 군사력보다 크게 열세인 쿠웨이트가 대등히 싸울 수 있었고, 나중에는 영국이 전투기와 군함 세 척까지 보내자 결국 사우디아라비아도 공격을 중단했다. 이후 소강상태가 지속되다가 1922년 영국의 중재로 전쟁이 종결된다. 참고로 당시 네지드 토후국의 수장인 압둘 아지즈는 쿠웨이트와의 분쟁이 끝난 뒤에도 적극적으로 영토확장을 하려고 1924년 트란스요르단 (현 요르단 왕국)을 침공했다가 마침내 영국이 공군을 투입해 압둘 아지즈의 기병대가 완패하고 이후는 영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이후 1961년 6월 19일, 영국이 쿠웨이트를 완전히 독립시켜 주면서 현재의 쿠웨이트가 탄생한다. 다음해, 쿠웨이트의 독립은 아랍연맹과 UN의 인정을 받아 국제법적으로도 합법적으로 독립했다. 한편 쿠웨이트가 독립하자 이라크에서는 쿠웨이트가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며 군대를 보내려 했다. 이에 쿠웨이트는 영국에 도움을 요청해 영국이 항공모함까지 보내자 결국 이라크도 물러났다. 하지만 이후에도 계속 이라크는 쿠웨이트가 자기네 영토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걸프 전쟁이 발생하게 된다.
1990년에 이라크는 이란-이라크 전쟁의 실패로 막대한 국가 부채가 쌓여 있었다. 사담 후세인은 풍부한 석유자원을 갖춘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병합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걸프 전쟁을 일으킨다. 소국인 쿠웨이트는 그 간의 전쟁으로 실전경험이 풍부하게 쌓인 이라크 군에 순식간에 점령되고, 이라크에 병합되어 “쿠웨이트 주”로 편입되었으며, 당시 국왕이었던 자베르 3세와 쿠웨이트 왕가는 사우디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미국이 주도한 UN 다국적 군대에 의해 해방되었다.
이후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아랍 국가중에 유일하게 미국을 지지하면서 미국의 對 이라크 공격의 전진기지로 활용되었다. 다만, 쿠웨이트도 바그다드가 함락되고 후세인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는 미국을 지원하고 지지했지만 이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발을 뺐다.

– 지리
쿠웨이트는 아라비아 반도의 동쪽에 위치하고 페르시아 만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알자라의 오아시스, 남동쪽과 해안부의 얼마 안되는 비옥한 땅 외에는 국토의 대부분이 평탄하고 황량한 사막이다. 연안에 암초와 얕은 여울이 많으며 앞바다에는 부비얀·파일라카섬 등 쿠웨이트가 영유하는 9개의 섬이 있다.
– 정치
쿠웨이트는 명목상 입헌군주제 국가이며, 군주의 칭호는 “아미르” (토후 [土侯]라는 뜻)으로 유럽의 “공” (公) 또는 “대공” (大公)에 해당한다.
쿠웨이트는 걸프 아랍국에서는 유일하게 명실상부한 의회를 보유하고 있다. 군인과 공무원의 참정권은 허용되지 않고 있다. 쿠웨이트에서는 정당 결성이 금지되고 있으나 각각의 계층을 대변하는 정치단체가 6개 이상 존재하고 있으며 1997년부터 온건파 자유주의자들이 새로운 정치 운동 단체결성을 시도하였다. 1999년 자베르 국왕이 총선에서 대승했고 야당의 개혁파가 의회를 장악한다. 쿠웨이트는 당초 2003년부터 여성에게 투표권 및 피선거권을 부여할 계획이었으나 1999년 11월 의회에서 부결되었고 2005년 여성에게도 투표권이 부여되었다.
– 행정 구역
쿠웨이트는 6개 주로 구성되어 있다. 알아마디주 (Al Ahmadi), 알파르와니야주 (Al Farwaniyah), 수도주 (Al Asimah), 알자라주 (Al Jahra), 하왈리주 (Hawalli), 무바라크알카비르주 (Mubarak Al-Kabeer)다.
쿠웨이트의 주요 도시로는 쿠웨이트 시와 알자라가 있다. 살미야와 하왈리는 많은 사람들이 주거하는 도시이고 상업적인 도시이다. 알아시마의 슈와이크는 공업이 발달한 도시이다. 쿠웨이트의 궁전인 아스-시프 궁전 (As-Seef Palace)는 쿠웨이트 수도의 살로와라는 도시에 있다. 쿠웨이트의 에미르가 주거하는 곳이며, 정치적인 일이 해결되는 도시이다.
– 민족 구성
인구 구성은 쿠웨이트계 아랍인이 45%, 기타 아랍인 35%, 남아시아인 9%, 이란인이 4%, 그 외 민족이 7%로 조사된다.
– 언어
공용어는 아랍어이다. 외국인 간에 페르시아어, 우르두어, 영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영어는 쿠웨이트 인구의 30% 가까이 쓰이고 있다.
– 종교
이슬람교가 국교이며 쿠웨이트 인구의 69.9%가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16.7%는 기독교, 1%는 성공회, 13.4%는 기타, 힌두교, 불교 등이 차지한다. 이의 경우는 외국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비율이다.
– 군대
쿠웨이트 북쪽에 이라크가 있기 때문에 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자이툰 부대도 쿠웨이트 최북단에 주둔했었다.

– 경제
좁은 땅에도 불구하고 쿠웨이트 유전에서 세계 석유의 10%가 매장되어 있다. 석유로 경제가 한때는 세계 제일의 1인당 GDP 기록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현재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부자인 나라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다.
산업의 기간은 석유로서 전 세계 석유자원의 7분의 1을 소유하고 있다. 석유산업 국유화를 강력 추진하여 1975년 쿠웨이트 석유회사를 설립하는 등 쿠웨이트 자본이 대부분이다. 국가수입의 90%를 석유수출로 충당하며, 석유 한 가지만으로 국민소득을 올리고 있는 나라이다.
– 문화
주요 문화는 이슬람교 문화이다. 쿠웨이트의 문화는 인사를 중요시한다. 또한 술과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 되고, 주위에서 그걸 먹은 사람을 보면 불쾌감을 나타낸다. 남녀 성비는 1.52 정도이며 이는 통일 후 경흥군의 남녀 성비 (예상치)와 맞먹는 수치이다. 쿠웨이트는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이란 등 페르시아만 해역의 여러 국가들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어 항상 이들 국가로부터 다양한 문화적 영향을 받아왔다. 인도와 동아시아와의 전통적 교역도 쿠웨이트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쿠웨이트는 문화, 관습, 가능성의 혼합물이다.
쿠웨이트의 문화는 호의, 관대함, 개인과 가족의 명예, 중동 문화에서 보편적 전형인 남성 지배적 사회운영 등의 전통을 공유하고 있다. 쿠웨이트는 오랜 해외 교역의 경험에 의해 다른 문화와 접촉하고 여러 민족, 종교와 융화하면서 오랫 동안 자연스럽게 배양된 ‘인내’가 그들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내는 이슬람의 이상과 공공의 명예를 수호하는 범위 안에서만 행하여진다. 최근 쿠웨이트에서 자신의 문화 유산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풍토가 널리 퍼지고 있어 이에 대비한 몇 가지 정책을 정부가 계획하고 있다.
– 인사
쿠웨이트의 문화는 다른 베두인 문화처럼 사람 대접 하는 일을 중요시한다. 그리하여 사람 대접의 일부인 인사도 중요시한다. 쿠웨이트인의 전통적인 인사는 악수와 양볼을 입맞추는 것이다. 남녀 사이는 몇 마디의 인사와 간단한 악수만 하는 것이 예의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들이 친척이라면 양볼에 입맞추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다음에는 친밀감을 주기 위해 사적인 이야기를 나눈다.
– 차
차는 쿠웨이트의 인사문화에 아주 큰 역할을 한다. 쿠웨이트인들은 자기 집으로 초대한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만약에 손님이 차 대접을 거절하면 쿠웨이트인들은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차 대접은 친절함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 외교
쿠웨이트는 대한민국과 1979년에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며, 1988년 서울올림픽에는 선수 및 임원진을 서울 현지에 파견하여 참가하였고 1991년 걸프 전쟁에서는 대한민국군이 다국적군 자격으로 쿠웨이트 현지에 참전하였다. 한때 대한항공이 쿠웨이트시티에 직항 노선을 운항하였으나, 폐지하였다.
걸프 전쟁을 일으킨 이라크는 쿠웨이트 전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미국과 그 밖의 나라들이 다국적군을 형성하여, 이라크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현재에도 이라크와의 관계는 좋지 못한 상태다.
쿠웨이트는 비교적 아랍 연맹 국가들과도 이라크를 제외하면 비교적 양호한 상태이다. 경제적인 협력을 위해서는 미국 및 러시아, 유럽 연합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