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 홍길복 목사의 ‘잡기장과 라틴어 인문학’ 중에서
꼰대와 꼰순이 / Ego pater, tu pater / 고정관념 / 바이올린과 가야금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55) _ 8월 31일
“꼰대와 꼰순이”
제 나이를 포함하여 저 보다 앞선 세대를 요즘 젊은이들은 ‘꼰대’라고 부릅니다. 나이 든 남자들 중에서 아버지나 선생님 같은 남자 어른들은 ‘꼰대’ 여자 어른들은 ‘꼰순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주로 권위를 앞세우는 기성세대를 통칭하여 이름 붙인 젊은 세대의 은어입니다. 구태의연하고 나이 가지고 권위를 세우며 남을 시키는 데 익숙하고 주로 대접을 받기만 하려는 사람들을 ‘꼰대’ ‘꼰순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처음에는 좀 못된 청소년들, 반항적이고 탈선한 10대들이 주로 자기들을 꾸짖고 타이르는 아버지나 선생님을 향하여 뒤에서 꼰대라고 수군댔는데 요즘은 일반적으로 나이든 세대를 통칭하여 그렇게 부릅니다.
구글을 검색해 보니 여러가지 설들이 있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두가지입니다. 첫째, 어원으로는 프랑스어 ‘콩테’ Conte 에서 온 말이라는 주장입니다. 프랑스어 ‘콩테’는 ‘백작’이라는 뜻인데 이를 일본 사람들이 일본식 발음으로 ‘꼰대’라고 불렀고 특히 이완용 등 친일파들이 일본 정부로 부터 ‘꽁테’ 작위, 즉 백작 작위를 받은 것을 ‘꼰대’라고 부른데서 온 것이라는 설입니다. 둘째는 경상도에서는 번데기를 ‘꼰대기’라고 한다는 데서 온 사투리라는 설입니다. 즉 경상도 지방에서 번데기 처럼 주름살이 낀 늙은이들을 ‘꼰대기’라고 부르다가 그것이 변해서 ‘꼰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처럼 은퇴한 노인들이 모이면 우리 제발 ‘꼰대’ 소리 듣지 않토록 조심하자는 이야길 자주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이것저것 아는 척하지 말고 끼어들지 말자’
‘우리 소시적에는 하면서 자꾸 옛날 이야기 꺼내지 말자’
‘누가 돈내주지 않나 하면서 머뭇거리지 말자’
‘입은 꼭 다물고 지갑은 빨리 열자’
‘걸을 때는 허리 꼿꼿히 펴고 부지런히 걷자’
‘몸에서 냄새나지 않토록 샤워 좀더 자주하자’
‘TV만 보지 말고 책도 좀 열심히 읽자’ 등등 다짐하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얼마전 서울에서 발행되는 한 여성잡지에 나온 글이라면서 아는 사람이 보내준 글입니다. 제목이 ‘우리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꼰대들이다’ 하는 글이었습니다. 지금의 7,80대 이상 되시는 ‘꼰대세대’의 지난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는데 이 또한 겸손한 척 폼만 잡다가 ‘우린 그렇지 않아! 우리도 이해 좀 해줘!’ 하는 말 같아서 머뭇거려집니다만 그래도 오늘의 젊은 세대들도 지난 꼰대, 꼰순이 세대의 이면도 좀 아는 것이 세대간 갈등을 좁히고 상호 이해를 돕는데 보탬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여기 약간 다듬어서 그 글을 옮겨봅니다.
‘우리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꼰대들입니다’
1) 우리는 호롱불 세대입니다. 우리는 90%가 전기불 없이 호롱불 밑에서 공부했습니다.
2) 우리는 ‘뒷간’세대입니다. 우리는 90%가 집안에 화장실 없이 밖에있는 재래식 변소에서 볼일을 보았습니다.
3) 우리는 ‘우물세대’입니다. 우리는 90%가 수돗물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우물물이나 개울물을 먹고 썼습니다.
4) 우리는 ‘가마솥 세대’입니다. 우리는 전기밥솥이 아니라 가마솥에서 밥해 먹고 물 끓여 목욕했습니다.
5) 우리는 ‘손빨래 세대’입니다. 우리는 100% 세탁기 없이 겨울에도 개울로 가서 얼음장을 깨트려 빨래를 했습니다.
6) 우리는 ‘보행세대’입니다. 우리는 99% 자가용이 없었고 3,40리는 다 걸어 다녔습니다.
7) 우리는 ‘고무신 세대’입니다. 우리 세대는 95%가 구두나 운동화를 신어보지 못했습니다. 그져 검정 고무신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8) 우리는 ‘사리마다 세대’입니다. 우리는 한 번도 공장에서 만든 팬티나 스타킹을 입어보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모든 속옷은 엄마가 집에서 만들어 입혔습니다.
9) 우리는 ‘보자기 세대’입니다. 우리 중 98%는 초등학교 때 책가방이란 것을 메어보지 못하고 보자기에다 책을 싸서 허리춤에 차고 다녔습니다.
10) 우리는 ‘고무줄 세대’입니다. 우리는 100% 장난감이나 놀이기구나 놀이터 없이 동네 빈터에서 여자애들은 고무줄넘기를 하고 남자애들은 새총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11) 우리는 ‘강냉이 세대’입니다. 우리는 100% 강냉이 가루로 만든 빵을 먹고 꿀꿀이 죽을 먹으면서 컸습니다.
12) 우리는 ‘주경야독세대’입니다. 우리는 98% 낮에는 청소, 설거지, 동생보기 등 가사일을 했고 숙제는 엄마가 돌아온 후 밤에 했습니다.
13) 우리는 ‘주판세대’입니다. 우리는 100프로 컴퓨터나 계산기가 없었습니다. 우린 주판알을 굴리면서 셈을 했습니다.
14) 우리는 ‘일제고사세대’ 입니다. 우리는 100% 전교 일제고사를 보고 전교생 등수를 매겨 경쟁한 세대입니다.
15) 우리는 ‘입학시험세대’ 입니다. 우리는 100%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본고사 입학시험을 치고 진학했습니다.
16) 우리는 ‘공돌이 공순이 세대’입니다. 우리는 가난해서, 돈이 없어서 진학을 못하고 식모살이나 공장에 가서 공돌이, 공순이가 되어 일하면서 야간 학교에 다녔습니다.
17) 우리는 ‘삯월세 세대’입니다. 우리는 80%가 신혼 살림을 단칸방 삯월세로 부터 출발했습니다.
18) 우리는 ‘월남전 세대’입니다. 우리는 가난해서 목숨걸고 전쟁터에 가서 돈벌어 식구들 먹여 살리고 나라에선 고속도로라도 놓게 했습니다.
19) 우리는 ‘광부 간호사 세대’입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 국민이었습니다. 우리는 잘사는 나라 독일에 가서 1000미터도 더 되는 땅속으로 들어가 석탄을 케고 늙은 환자들 대소변을 받아내고 죽은 사람들 시신을 닦으면서 돈벌어 동생들 공부도 시키고 집 한칸이라도 마련했습니다.
20) 우리는 ‘중동 노동자 세대’입니다. 우리는 영상 50도를 오르내리는 영사의 땅 중동에 가서 피땀 흘려 돈벌어 지금의 가정을 만들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세웠습니다.
그래! 좋다! 우리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꼰대다! 꼰순이다! 우리는 우리 자식들과 가족과 국가를 위해 뼈빠지게 일해온 꼰대들이다! 우리는 일제 36년과 6.25로 망가진 나라와 가정을 위해 바보 처럼 일만해온 꼰대들이다!
그러니 우리도 좀 봐줘라!
우리 좀 봐주면 않되겠니?
오늘도 관용과 이해, 사랑과 아량으로 행복하시길 빌며…
Carpe diem !
Bonam fortunam !
라틴어 인문학 (37) _ 9월 1일
Ego pater, tu pater.
(에고 파테르 투 파테르)
나도 신부, 너도 신부.
ego, 나는…이다. 영어, I am
tu, 너는….이다. 영어, You are
pater, 아버지, 영어 father 천주교에선, 신부
Ego..tu.. 나는..이고 너도..이다
Ego pater, tu pater.
나도 신부고 너도 신부다.
이 말은 16세기 종교개혁 후,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의 사상이 함축된 문장입니다. ‘너도 신부 나도 신부’ ‘Ego pater tu pater’라는 말을 통하여 이후개신교의 ‘만인 사제설’ Universal Priesthood, Priesthood of All Believers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앞에서는 인간적 중보자 없이 모든 신자는 똑같은 성직자이며 별도로, 따로 성직과 속직이 구별되지 않아야한다는 이론입니다. 이후 이런 신학사상은 직업소명론으로 까지 확대, 발전되었습니다. 장 칼뱅에 의하면 신부나 목사 같은 전문적 종교 직업인 만이 아니라, 세속적 일반 직업도 하느님이 주신 성직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이 부도덕한 일만 아니라면 그 일은 하느님이 주신 일이라는 소명의식을 갖어야 한다는 직업소명론으로 발전을 시켰습니다. 이는 훗날 프로테스탄트 직업윤리로 자리를 잡게되었고 청교도 정신에 기반하여 상공업 등을 발전시키며 근대 서구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go pater, tu pater와 비슷한 문장은 Ego servus, tu servus 입니다. Servus – 종, 하인, 영어로 servant라는 뜻이지요. ‘나도 종이고 당신도 종입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아직도 신부나 목사만 ‘주님의 종’이란 생각을 합니다만 종교개혁자들은 일찌기 모든 신자는 차별 없이 ‘주님의 종’이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교회에서도 소위 전통적으로 성속을 분리하거나, 전문적 전업 종교인과 평신도를 구별했던 생각이나 제도를 바꾸어 나가야한다는 운동이 넓혀지고 있습니다. 사실 조직이나 명칭 등에 있어서도 세상과 교회에는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교회도 교황, 추기경, 대주교, 주교, 본당신부, 보좌신부, 평신도로 이어지거나 혹은 총회장, 노회장, 지방회장, 당회장,그리고 평신도회장으로 이어지는 계급적 상하구조, Hierarchy system이 일반 회사의 회장, 이사장, 사장, 이사회, 부장, 과장, 평사원의 시스템이나 공무원 조직과 대동소이합니다.
Ego pater, tu pater.
Ego servus, tu servus.
이는 신학적, 인문학적 평등사상을 나타내는 표어라 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문장을 만들어 봅니다.
Ego Homo, Tu Homo
나도 사람, 너도 사람.
Ego humus, tu humus.
저도 흙이고 당신도 흙입니다.
우린 다 흙으로 만들어졌고 흙으로 돌아 갈 것입니다.
(참고 : 저는 라틴어 pater, 영어father를 천주교회에서 ‘신부’라고 번역하여 쓰는 것은 언젠가 다시 번역하여 사용하길 바랍니다. ‘신부’ – ‘신의 아버지’ ‘하느님의 아버지’란 번역은 물론 우리 보다 앞서 천주교를 받아드린 중국이나 일본교회교회의 번역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지만 이는 앞서 말씀드린대로 동양과 기독교의 가부장적 위계체제를 그대로 드러내며 본래의 신학적 의미와도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Pater, Father는 ‘신부’ ‘하느님의 아버지’가 아니라 그냥 아버지입니다. 가정에 아버지가 계시듯이 교회에도 아버지라는 position이 있으니까 ‘교부’- 교회의 아버지라고 재번역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마침 초대 그리스도 교회에서도 ‘신부’ 아니라 ‘교부’ 라고 불렀던 경험이 있으니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Ego pater, tu pater.
Ego servus, tu servus.
Ego Homo, tu Homo.
Ego humus, tu humus.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며 존경을 나누는 좋은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56) _ 9월 2일
“고정관념”
(Stereotype, Fixed Idea)

세상은 넓고, 인총은 많고, 역사는 쉬임없이 변합니다. 그래서 우린 무엇이든 단순하게 보고 단순하게 판단하면 실수할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이든 “한마디로” 말하기가 참 어려운 시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전 같으면 비교적 간단하게 정의했던 개념이나 명제도 이젠 그렇게 하다가는 잘못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예컨데 전에 우리는 ‘교회란 신앙 공동체다’라고 간단히 정의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간단히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때로 교회도 정치 집단이나 이익 공동체나 심지어는 사회적 조직 중 하나로도 비쳐지기 때문입니다. 전 같으면 시민 단체나 각종 NGO에 대한 보통 시민들의 생각은 ‘사회를 위해서 좋은 일하는 모임’이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좋게만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오늘날은 국제 올림픽 위원회 (IOC)나 국제 축구연맹 (FIFA)를 비롯하여 수 많은 스포츠 단체들이 이미 순수한 스포츠 정신을 버리고 각종 이익 단체들과 결탁되어 있는 것을 다 알게되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정신대 지원 단체인 정의연을 비롯하여 수많은 인권단체, 여권단체, 아동 보호단체, 소수자 권익 단체들에 대해서도 ‘좋은 일하는 조직’ 이라든가 ‘좋은 일하는 사람들’ 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제 별로 없습니다. 그들을 ‘도덕적’ 이라든가 ‘양심적’ 이라고 단정적으로는 말할수가 없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에 우리들이 갖고 있었던 통념이나 고정관념이나 주어진 선입관을 과감하게 버려야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단순한 사람은 바보가 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우리는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 ‘진리는 승리한다’ ‘NGO는 도덕적이다’ ‘역사는 진보한다’ ‘다국적 기업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이제 국경은 살아졌다’ ‘전문가들이 나보다 훨씬 잘안다’ ‘이슬람은 민주주의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올림픽은 순수한 스포츠 행사다’ 등등 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하는 사람은 거이 없습니다. 제 역시도 오랫동안 종교적 고정관념 속에서 살아온 사람 중 하나입니다. 저는 근본주의적 보수적 교회와 가정에서 자라나 신사 참배한 한경직 목사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고 돼지고기나 오징어 같이 율법이 금지한 것을 먹으면 지옥에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이나 편견을 심어주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예전에는 부모님, 선생님, 목사님이었고 지금은 TV를 비롯한 각종 메스 메디아들과 유투브와 SNS 들이 우리를 세뇌시키고 생각과 사상을 주입시켜 일정한 Sterotype, Fixed Idea, 더 나아가서는 Prejudice와 Confirmation Bias 까지 만들어 내게합니다. 물론 모든 인간은 고정관념을 하나도 갖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지식과 경험과 생각이 넓고 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이란 자신이 지닌 인간적 한계나 틀로 부터 완전히 자유스럽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린 노력해야합니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과 생각이 편견이나 선입관이나 고정관념이나 심지어는 확증편향성에 빠진 것은 아닌지 스스로 검증하며 부단히 자신을 살피며 겸손해 져야합니다. 세상은 모든 것이 내 기준에 따라 흑과 백, 선과 악, 도 아니면 모로 딱 나누어지지는 않습니다. 선한 조직 속에도 악이 깃들어 있고, 악한 체제 가운데도 선한 구석이 조금은 있을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전보다 훨씬 더 판단을 유보하거나 생각을 보류하거나 말과 글과 행동을 신중하게 하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특히 오피니언 리더라고 불리우는 이들이 더 신중해야 합니다. 교수들, 학자들, 전문가들, 종교인들, 언론인들이 제일 고정관념이 강하고 확증편향성에 강하게 붙잡혀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평범한 보통사람들은 여기도 보고, 저기도 볼줄 알아서, 이것도 이해하고, 저기에도 머리를 끄덕일줄 아는데 지식인들과 종교인들이 더 옹고집에다 고집불통이어서 한번 들어온 생각, 한번 먹은 마음은 천지가 무너져도 바꾸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하면 융통성 있는 사람이 아니라 신념을 버린 변절자 처럼 여겨진다고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인문학 친구들은 날마다 ‘고정관념 깨트리기’에 조금씩이라도 노력합시다. 저부터 ‘마음과 생각을 넓히는’ 작은 몸짓이라도 해보는 하루가 되길 다짐하며…
Carpe diem !
Bonam fortunam !
(오늘의 추천도서: 세계의 진실을 가리는 50가지 고정관념, 파스칼 보니파스 지음, 이명은 옮김, 서해문집, 2015)
라틴어 인문학 (38) _ 9월 3일
Contra imprudentem stultas est nimia ingenuitas.
(콘트라 임프루덴템 스툴타스 에스트 니미아 인게누이타스)
contra, …에 대항하여, 거슬러 반대하여, 반하여, 영어 contrary, contrast
imprudentem, 미련한, 멍청한 영어, senseless, foolish
stultas, 바보, 멍청이, stupid
nimia, 아무것도 아니다.
ingenuitas, 고귀한, 순진한, 똑똑한, intelligence
Contra imprudentem stultas est nimia ingenuitas
멍청한 바보와 맞서는 자는 결코 똑똑한 자가 아니다.
무지한 자 앞에서 현명한 것은 멍청한 일이다.
미련한 자 앞에서 똑똑한 척하는 것은 순진하거나 고상하거나 지혜로운 게 아니다
미련하고 고집만 센 사람과 맞서서 싸우는 사람은 그 또한 똑같이 어리석은 인간이다.
익히 잘 알려진 옛날 이야기 입니다.
옛날 어떤 고을에서 두 사람이 서로 다투다가 원님에게 나와 판결을 요청했습니다.
그 중 한사람은 4×7은 28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한 사람은 자꾸 27 이라고 하다가 ‘그럼 원님에게 판결을 받자’고 물으러 온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난 원님이 판결을 내렸습니다. ‘두 사람이 싸우긴했으나 이번 일에 있어서 4×7을 27이라고 한 사람은 풀어주고 28이라고 한 사람은 곤장 3대를 때려서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게 해 주어라’
28이 맞다고 주장한 사람은 그건 이치에 맞지도 않고 너무 억울하다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러자 원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4×7을 27이라고 저렇게 우기는 어리석은 자와 다툰 너는 똑똑은 하지만 지혜가 모자라다. 무릇 다툼도 다툴 자와 다투어야 하거늘 그대는 다툴 대상이 못되는 자와 다투었으니 참으로 어리석도다’
인생이란 머리 좋고 똑똑하고 이치에 맞는다고 해서 지혜롭게 살고 처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어리석은 자와 논쟁하는 자도 역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오늘도 우린 말도 않되는 사람들 틈에서 속을 끓일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4×7은 27이다, 30이다, 50이다, 100이다, 라며 우기고 억지를 부리는 시대와 역사 속에 있습니다.
Contra imprudentem stultas est nimia ingenuitas.
콘트라 임프루덴템 스툴타스 에스트 니미아 인게누이타스.
무지한자 앞에서 그와 다투는 자 역시 지혜로운 자가 아님을 명심할지어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홍길복의 세 번째 잡기장 (57) _ 9월 4일
“바이올린과 가야금”
혼자 세워본 꿈과 목표라 할지라도 그걸 이루어내지 못했다면 실패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40여년 전 호주에 와서 처음으로 한국인 이민목회를 시작할 즈음 저도 나름 이런 저런 꿈이랄까 목표 같은 것들을 구상했던 것들이 있었는데 별로 이룬 것 없이 은퇴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은퇴문집과 강연을 통해서 ‘저는 실패한 목사’라는 고백을 한적이 있습니다. 여러가지 아쉬운 경험 중 하나는 호주라는 서구적 전통과 문화속으로 옮겨와 사는 동양적 사고와 감성을 지닌 우리가 함께 동서문화와 신앙, 신학을 융화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긴 기독교문화의 바탕 위에 서있는 호주교회와 동양적 감성과 뜨거운 신앙적 열정을 서로 융합하거나 조화를 이루어 제 3의 기독교문화와 균형있는 크리스챤의 삶을 실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예건대 우리는 이곳 호주교회와 신도들에게는 새벽기도나 금식기도 같은 영성과 한국인 크리스챤들의 열심과 그를 통한 교회성장에 대해 말해주고 대신 우리는 서구 기독교의 합리성과 민주성, 그리고 생활화된 기독교문화를 배워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가는 실험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호주교회의 목회자들에게는 글이나 강의를 통하여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소개하고 그 밑바탕에 자리한 동양적 영성신학을 강조하곤 했습니다. 동시에 저는 제가 목회하고 있던 교회를 비롯하여 힘닷는데 까지 우리 한국교회와 신도들도 좀더 평등하고 민주적 교회행정과 제도를 만들어 나가고 신앙의 생활화를 통한 정직이나 개방성을 일상화하고 신학적으로도 좀더 이성적이며 합리적 바탕 위에 우리 교회와 신앙을 세워가자고 가르치곤 했습니다. 이를 테면 평신도들의 교회행정권을 넓히고 남녀구별 없는 직분이나 직책을 확대하고 생활 속에서 정직한 세금신고를 강조하는 등 서구교회로 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것 등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성서연구도 오래된 관습에 따른 단순한 ‘성경공부’ Bible study가 아닌 ‘성서연구’ Biblical studies로 바꾸어 다양한 안목으로 성서에 접근하는 방법을 소개했습니다. 구약에서는 J문서, E문서, P문서, D문서 등 성서의 문서설을 이야기하고 신약에서는 Q자료, 마가자료, 누가자료, 마태자료 등 자료설을 소개하는 등, 이런 것들도 지나치게 신앙을 감성 혹은 영성적 측면에서만 보아왔던 것을 이제 이 새로운 서구 신학의 기조 위에서 좀도 폭넓게 보고, 이해하여 동서교회와 동서기독교 신앙인들 사이의 간격을 좁히고 제 3의 ‘동양적 영성과 서구적 합리’를 조화시키고 균형을 만들어 볼수있는 길이 될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시도해 보았던 경험입니다. 허지만 동과 서의 만남, 신비와 이성의 접근, 영성과 합리가 맞잡음, 한국교회와 호주교회의 조화와 균형의 가능성은 그져 작은 실험만 하다가 흐르는 세월과 함께 은퇴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차츰 차세대 목회자들 중에서는 인종과 문화를 통전하는 다문화 교회, Multicultural Church나 International Church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동서교회와 동서신학의 접목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 더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전 저는 유투브에서 중국계 이민 2세인 캐나다 국적의 젊은 음악가 Henry Lau와 한국 국악계에서 떠오르는 샛별이라고 칭찬받는 15살 짜리 박고은양이 바이올린과 가야금으로 합주하는 음악을 들었습니다. 참 놀라웠습니다. 서로 다른 악기, 그것도 서양과 동양의 판이한 음색과 선율, 고저와 장단이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질 않은 악기인 바이올린과 가야금이 어쩜 저렇게도 완벽한 조화를 만들어 낼수있단 말인가! 가야금으로 ‘라 캄파렐라’를 연주하고 바이올린으로 우리의 ‘판소리’를 연주할수 있다니! 그 느릿한 저음 악기 가야금으로도 서양의 클라식 음악을 물흐르듯 소화해내고, 그 빠른 고음 악기 바이올린으로도 우리의 구성진 소리들을 이어갈 수 있다니! 그리고 그 둘이서 함께 합주를 통하여 바로크와 서편제를 묶어 나가다니! 저는 처음 정신이 몽롱했다가 다시 정신이 번쩍해졌습니다.
동서양 사이의 정서적 및 합리적 차이 때문에 힘들고 어렵다며 거의 포기했던 동서 교회와 신학과 신앙의 조화와 균형의 가능성을 그날 바이올린과 가야금이 다시 일깨워주었습니다. 아, 교회는 못해도 예술은 하는구나! 아, 목사들은 못해도 음악가들은 해내는구나! 감탄과 함께 동과 서의 협력, 남자와 여자의 하모니, 판이한 악기들 사이의 조화! 서로 다른 것, 서로 다른 세상이 진짜로 아름다운 신세계로구나! 이해와 협력, 양보와 보완, 겸손과 낮아짐을 통하여 꿈에 그리던 그 멋진 신세계를 이룰 수도 있겠다는 희망의 빛을 찿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식물계나 동물계에서 수많은 이종교합을 이루어냈고, 더 나아가 먹거리나 음식이나 각종 생활용품 등에서도 서로 다른 재료나 원료들을 하나로 섞어 더 질좋고 아름답고 맛있는 신제품들을 만들어왔지 않습니까? 서로 다른 것들을 섞는 것은 새로운 창조활동입니다. 서로 이질적인 것들을 조합하면 전혀 새로운 것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우리는 바이올린과 가야금 처럼, 이성과 감성, 신앙과 신학, 이론과 삶, 논리와 영성, 동양과 서양, 한국과 호주, 한국과 일본, 여와 야, 진보와 보수사이에 이종교합이 않될까요?
바이올린과 가야금도 하나가 되어 합주를 하고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데 왜 당신과 나는 같은 사람이고 동양과 서양은 하나의 세계이고 우린 모두 흙에서 왔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갈 동일원소로 지음 받은 존재들인데, 그런데 우린 왜 이렇게 엇박자만 내고 아프게 살아가야 하나요?
저부터 이 아침, 다시 일치, 균형, 조화, 나눔, 양보, 그리고 낮아짐을 통한 멋진 신세계를 그려봅니다.
Carpe diem !
Bonam fortunam !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주강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3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