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13-1)
Gelson Engel(1868.10.10-1939), 부산진 1900-1919; 평양 1919-37
호주장로교선교부의 대부(大父) 왕길지 선교사
왕길지(王吉志) 선교사는 초기 경상남도의 교회설립과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육에 주춧돌을 놓은 거목으로 호주선교사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1. 성장 배경과 한국선교동기
왕길지 선교사의 본명은 겔손 엥겔(Gelson Engel, 사진 우)로서 1868년 남부 독일 비텐베르크(Wüthenberg)에서 4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교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그가 4살 되던 해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남은 가족은 가난하고 힘겨운 생활을 했다. 엥겔은 6살에 뮤링엔(Murlingen)에 있는 일반교양학교(the College for Classical Study)를 다녔고 뉘팅엔(Nütingen)에서 중등학교를 마친 후에, 교사대학(Lehrer Seminar)에서 공부했다(1883-88). 그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천직이 교사인 것을 깨닫고 있었다.
엥겔은 경건주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랐다. 그의 고향 비템베르그는 독일 경건주의의 중심지였다. 필립 스페너(P. J. Spener)에 의해 시작되고 헤르만 프랑케(A. H. Francke)에 의해 더 발전된 독일 경건주의는 17세기 루터교 정통주의가 지닌 딱딱한 교리주의와 형식주의에 반발하면서 신앙의 내면화, 개인의 신앙체험과 변화, 기도와 성경읽기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경건한 삶을 강조했다. 이 경건주의 운동은 18세기에 모라비안 선교운동과 비템베르크 경건주의로 연결되었다. 비템베르크 경건주의 지도자는 저명한 신약성서학자였던 요한 벵겔(Johann A Bengel, 1687-1752)이었다. 그는 성서 영감설을 믿으면서 신약성경사본들을 정리하여 1734년에 독일 최초의 원문비평성경인 벵겔의 헬라어 신약성경을 출판했다.
비템베르크 경건주의는 라인강을 건너서 “바젤 선교회”에 영향을 주었다. 바젤선교회의 설립자, 크리스챤 불름하르트(Christian G. Blumhardt, 1779~1838)는 뷔템베르크의 개신교회 목사이며, 독일기독교공동체(Deutsche Christentumsgesellschaft)의 신학부 총무(1803~7)였고, 바젤선교회의 감독(1815~38)이었다. 독일기독교공동체는 선교잡지를 발행하고 선교단체를 설립하도록 사람들을 장려함으로써 유럽전역의 경건주의자들을 연결했고 1815년에 바젤선교회를 설립했다. 비템베르크 경건주의도 세계선교운동으로 연결된 것이다.
이러한 고향의 분위기는 엥겔이 원어성경연구과 선교에 관심을 갖도록 했다. 그는 한 선교대회에 참석한 후에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21세의 나이에 바젤선교회(Basel Mission)가 운영하는 신학교에 입학해서 3년간의 교육을 받고 1892년 인도의 푸나(Poona)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는 1894년 엥겔은 인도에서 선교사로 사역하던 호주 감리교 목사의 딸 클라라 바스(Miss Clara Math)와 만나 결혼했다. 바젤선교부 선교사로 6년을 사역한 후에 그는 1898년 그는 감리교선교부로 이적을 했다. 그러나 곧 질병에 걸려서 호주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 그는 빅토리아 주의 작은 마을 스토웰(Stawell)의 중등학교인 하버드 칼리지(Harvard College)에서 교장으로 14개월 동안을 일했다.
그 당시 부산에는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여선교회연합회(PWMU)가 파송한 4명의 미혼 여선교사들과 같은 교단의 청년연합회(YMFU)가 파송한 앤드류 아담슨(Andrew Adamson) 목사가 호주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선교사들은 아담슨 선교사의 감독을 받으 수 없다고 사임서를 제출해 놓은 상태였다. 교단의 해외선교부와 여선교회연합회는 아담슨을 대신해서 여선교들을 감독할 수 있는 목사선교사를 파송할 계획을 가지고 적임자를 찾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엥겔은 한국선교사로 자원했다.
엥겔이 한국선교사를 자원하게 된 동기는 세 가지였다. ⑴ 그의 부인 클라라와 한국선교사 아그네스 브라운((Miss Agnes Brown)은 1895년 멜버른에서 함께 선교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클라라는 한국선교에 대해 깊이 알고 있었다. ⑵ 1899년 4월 멜버른을 방문한 아담슨 목사는 장로교에서 목회를 하고 싶어 하는 엥겔에게 한국선교를 추천했다. ⑶ 엥겔은 한국교회가 성장하고 있으며 많은 선교사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에 크게 소명감을 느끼고 있었다.
2. 전도자와 목회자
엥겔선교사 부부와 세 명의 아이들은 1900년 9월 19일 일본선박 “카수가 마루”호를 타고 멜버른을 출발해서 10월 29일 오전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한국어를 공부하고 풍습을 익혔다. 그는 그달 말에 한국어 발음을 연습해서 축도를 시도했고 3~4개월이 지나 1901년 초에는 한국어로 설교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언어에 천재적 소질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한국이름을 왕길지(王吉志)로 정했는데 “엥겔”과 “왕길”의 발음이 비슷했고 그 이름에 “최고로 좋은 뜻”을 전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왕길지 목사는 부산에서 16년 동안 순회전도자로 목회자로 교육자로 봉사했다. 그는 아담슨 선교사와 지역을 분할해서 아담슨은 경남의 서부지역을 담당했고 자신은 동부지방 울산, 기장지역을 순회했다. 그는 순회전도여행을 하다가 1904년 10월 일본인 하급노동자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해 생명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다. 1909년도 총회보고서 왕길지는 26개의 지역교회를 관할하고 있고 울산 지역에서는 6개의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는 1914년까지 부산진교회의 담임목사로 봉직했다. 1916년 그는 언양의 12개 교회와 김해의 10개 교회를 감독하고 있었다.
경남 최초로 한국인으로 목사가 된 사람은 심취명이었다. 그는 1894년 경남지역의 첫 번째 세례자였던 심상현의 동생이었는데 형의 죽음 이후 예수를 믿고 1904년에 부산지역 최초의 장로가 되었다. 왕길지 목사는 심취명 장로를 권고해서 평양신학교에 보냈고, 1914년 그를 부산진교회의 자기 후임 목사로 세웠다.(다음호에 계속)
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