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세대 문제
카를 만하임 / 책세상 / 2013.6.30
이전 세대의 세대론, 즉 실증주의적 세대론과 낭만주의적 세대론의 한계를 비판하고, 사회운동론의 관점에서 세대론을 재구성했다. 카를 만하임에 따르면, 단선적인 역사관과 양적 시간관에 따라 ‘젊은 세대는 진보이고 나이 든 세대는 보수’라는 개념을 도출한 실증주의적 세대론으로는 세대 문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또 낭만주의적 세대론은 질적 시간을 고려해 동일 세대가 경험한 사건의 영향을 중시함으로써 이런 한계를 넘어서려고 했으나 사회적 요소를 배제함으로써 동일 세대 안에 진보와 보수가 공존하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이런 비판 위에서 만하임은 실증주의적인 수직적 세대론과 낭만주의적인 수평적 세대론을 결합해 독창적인 구조적·사회운동론적 세대론을 제시했다. 그는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서 세대를 고찰하고 세대운동을 계급운동과 비교하며, 동일 세대 안에 서로 다른 세대단위가 존재함을 역설한다.
그의 논의를 통해 수평적인 세대 이해가 가능해졌으며, 동시대 동일 세대 안에 존재하는 갈등을 분석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대의 사회운동 조직화를 위한 이론과 실천의 방향이 정립되었다. 이전 세대론의 한계를 지적하고 운동론의 관점에서 세대론을 재구성한 만하임의 <세대 문제>는 우리 시대 세대 논의의 출발점이자 경유점이다.
○ 목차
들어가는 말 | 이남석
Ⅰ 문제의 상태
- 실증주의적 문제 제기
- 낭만주의적-역사주의적 문제 제기
Ⅱ 사회학적 관점에서 본 세대 문제
- 구체 집단 – 사회적 위치
- 세대현상의 영역에서 생물학적 문제 제기와 사회학적 문제 제기의 구분
- 하나의 위치에 ‘내재된 경향’
- 세대현상 영역에서의 기본적인 사실
결론
- 세대위치, 실제 세대, 세대단위
- 세대현상에서의 통일 심화적 요소
- 역사 속의 또 다른 형성 요소들과의 관계에서 본 세대
참고문헌
해제-운동론의 관점에서 본 세대론 | 이남석
- 세대 이해의 단초
- 기존 이론에 대한 만하임의 비판 근거
- 동일 세대 다른 목소리
- 만하임이 미처 못한 이야기들
- 만하임의 세대론에 대한 논쟁적 평가
주
더 읽어야 할 자료들
옮긴이에 대하여
○ 저자소개 : 카를 만하임
헝가리 출신의 독일 사회학자로 고전사회학과 지식사회학의 선구자이다. 189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부다페스트 대학, 하이델베르크 대학 등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강사를 거쳐 프랑크푸르트 대학 사회학과 교수가 되었으나, 1933년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했다. 런던 정치경제대학에서 사회학을 강의했고, 1945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런던 대학 교육연구소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세기말,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극좌에서 극우까지의 다양한 사회운동, 사회주의 혁명 등 격동의 시기를 직접 보고 경험한 연구자이기도 하다. 지멜의 강의를 듣고, 루카치가 조직한 토론 집단에 참여했으며, 막스 베버의 형제인 알프레트 베버 밑에서 공부하고, 마르크스, 하이데거, 후설, 딜타이 등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독일 역사주의, 마르크스주의, 현상학, 사회학, 영미 실용주의를 통합하려고 시도했다. 또한 그는 지식이나 진리를 특정한 이해관계를 표현하는 이데올로기로 바라보는 지식사회학을 정초했다. 마르크스주의, 그중에서도 루카치의 ‘허위의식’에 영향을 받은 지식사회학은 지식 자체 또는 진리의 독립성을 부정하고 지식이나 진리가 존재에 의해서 규정을 받는다고 보았다. 영국에 정착한 후에는 민주적인 사회 계획과 교육으로 현대 사회의 구조를 포괄적으로 분석하려고 시도했다. 주요 저작으로 ‘사유의 구조’, ‘지식사회학’,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재건기의 인간과 사회’, ‘정치 교육으로서의 사회학’ 등이 있다.
– 역자 : 이남석
대학에서 남들이 보기에 무척 고리타분하고 딱딱해 보이는 정치사상을 무척 재미있게 공부했다. 청년세대 문제에 관심이 많은 그는 희망을 품고 멋지게 살아가야 할 청년들이 왜 힘들게 살아가는지 고민이 많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마음만 먹으면 취직을 할 수 있던 1980년대를 경험했고, 아무리 힘들어도 노력하면 그래도 먹고살 만한 직장을 구할 수 있던 90년대도 보았다. 그런 그에게 지금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취직할 수 없는 청년세대는 너무 낯설다. 그는 정치적․절차적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이루었고, 노동자 투쟁을 통해 미약하나마 경제 민주화도 달성한 이 시대에 불만이 많다.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민주화의 결과물이 청년에게까지 파급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민주주의는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청년들의 정치적 소외를 낳았고, 경제적 민주주의는 다수의 비정규직과 청년의 알바를 제도화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는 현재 세대 문제를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있다. 세대 문제를 넘어 세대의 근본 원인으로 돌아가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알바에게 주는 지침》《기술, 지배, 이데올로기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차이의 정치-이제 소수를 위하여》《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시민불복종》《참여하는 시민 즐거운 정치》를 쓰고, 《페미니즘 정치사상사》와 《행정의 공개성과 정치지도자 선출》을 우리말로 옮겼다.
○ 출판사 서평
‘세대 ’로 통하는 문, ‘세대 문제 ’의 출발점 : 만하임의 세대론
- 실증주의적 세대론과 낭만주의적 세대론을 결합해 사회운동론적 세대론을 제시하다
세대 차이, 세대 갈등, 세대 전쟁…. ‘세대 문제’는 유사 이래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인류와 함께해온 ‘오래된’ 문제이다. 고대 그리스의 신전 기둥에도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다”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고 하지 않는가. 또한 세대 문제는 오늘 한국 사회의 주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세대를 둘러싼 수많은 명명과 담론이 명멸해왔으며, 지난 18대 대선 결과를 놓고도 이른바 2030세대와 5060세대가 첨예한 대결 양상을 보였다. ‘88만원 세대’로 대변되는 청년 문제는 해소될 줄을 모르며, 최근에는 ‘일베’ 현상에서 보듯 청년 세대 안에 존재하는 극단적 이념 대립이 이슈로 불거지기도 했다.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정작 세대에 대한 연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처음으로 세대 문제에 대해 본격적인 질문을 던지고 체계적인 이론 틀을 제시한 이가 바로 지식사회학의 창시자 카를 만하임이다. 그는《세대 문제》에서 이전 세대의 세대론, 즉 실증주의적(생물학적) 세대론과 낭만주의적(역사적) 세대론의 한계를 비판하고, 사회운동론의 관점에서 세대론을 재구성했다. 만하임에 따르면, 단선적인 역사관과 양적 시간관에 따라 ‘젊은 세대는 진보이고 나이 든 세대는 보수’라는 개념을 도출한 실증주의적 세대론으로는 세대 문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또 낭만주의적 세대론은 질적 시간을 고려해 동일 세대가 경험한 사건의 영향을 중시함으로써 이런 한계를 넘어서려고 했으나 사회적 요소를 배제함으로써 동일 세대 안에 진보와 보수가 공존하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이런 비판 위에서 만하임은 실증주의적인 수직적 세대론과 낭만주의적인 수평적 세대론을 결합해 독창적인 구조적·사회운동론적 세대론을 제시했다. 그는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서 세대를 고찰하고 세대운동을 계급운동과 비교하며, 동일 세대 안에 서로 다른 세대단위가 존재함을 역설한다. 그의 논의를 통해 수평적인 세대 이해가 가능해졌으며, 동시대 동일 세대 안에 존재하는 갈등을 분석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대의 사회운동 조직화를 위한 이론과 실천의 방향이 정립되었다. 이전 세대론의 한계를 지적하고 운동론의 관점에서 세대론을 재구성한 만하임의《세대 문제》는 우리 시대 세대 논의의 출발점이자 경유점이다.
- 청년세대는 진보이고 나이 든 세대는 보수인가? : 이전 세대론 비판
20세 초반 만하임은 반유대주의와 범게르만주의를 옹호하는 독일 청년들의 호전적 민족주의, 그리고 러시아혁명을 필두로 일어난 다양한 이질적 이데올로기 운동이라는 역사적 현실에 직면해 ‘청년이 기성세대보다 진보적이다’ ‘동일 세대는 동일 목소리를 낸다’는 통념을 근본적으로 회의하게 된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같은 나이 세대 중 일부는 보수적이고 일부는 진보적이라면 그들은 동일 세대인가 아닌가? 이러한 문제의식 위에서 만하임은 실증주의적 세대론과 낭만주의적 세대론을 비판?종합해 사회운동론적 세대론을 정립한다.
- 실증주의적 · 생물학적 세대론 비판
실증주의적 세대론은 ‘삶과 죽음, 명확하게 측정 가능한 수명, 세대와 세대 간 일정한 간격들’이라는 생물학적 요소와 ‘양적 시간’, 그리고 역사가 항상 진보한다는 단선적 역사관에 따라 세대를 실증주의적인 방식으로 이해함으로써 ‘젊은 세대는 진보적이고 나이 든 세대는 보수적’이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만하임은 역사사회학의 범주인 ‘진보적/보수적’이라는 개념과 형식사회학의 범주인 ‘신新/구舊’ 개념을 혼동한 결과 이러한 도식이 만들어졌다고 분석하며, 이러한 방법론으로는 세대 문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현실 세계에서 이미 ‘청년은 진보, 기성세대는 보수’라는 등식이 깨졌으며, 청년이 어떤 성향을 띠게 될지는 사회구조와 청년의 반응에 달려 있다는 것이 만하임의 주장이다.
- 낭만주의적 · 역사주의적 세대론 비판
낭만주의적 세대론은 실증주의자들의 양적 시간 개념과 역사관을 부정하고, ‘주관적으로 경험 가능한 시간’ ‘질적 시간’에 입각해 사유한다. 동일 세대가 경험한 사건과 그 사건의 영향을 중시하는 낭만주의자들에 따르면, 동일 사건을 동시대에 같이 경험한 세대는 비슷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만하임은 낭만주의적 세대론의 정점으로 독일의 예술사가 핀더G. M. W. Pinder의 ‘동시대의 비동시성’을 드는데, 핀더의 ‘엔텔레키’ 개념으로써 동시대의 비동시성을 발전시켜 각 세대가 고유한 질적 통일성을 지니고 있음을 설명한다. 낭만주의적 세대론에 따르면 보수적 세대와 진보적 세대라는 구분은 나이가 아닌 ‘경험의 공통성’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이처럼 낭만주의적 세대론은 공시적 개념에 집중해 동일 세대는 왜 비슷한 태도를 보이는가라는 세대론의 난제를 설명해냈지만, 동일 세대 안에 진보적인 목소리와 보수적인 목소리가 공존한다는 현실의 문제, 즉 집단에 따라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만하임은 그 이유가 사회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면서 사회학적 관점에서 세대론을 연구하려면 사회적 요소, 그중에서도 ‘집단’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사회’와 ‘집단’에 주목해 구조적 · 사회운동론적 세대론을 제시하다 : 만하임의 세대론
.동일 세대의 서로 다른 세대단위, 동일 세대의 다양성을 드러내다
당대의 현실 앞에서 ‘동일 세대 내의 서로 다른 세대단위, 서로 다른 목소리’라는 현상에 주목한 만하임은 실증주의의 생물학적 요소와 양적 시간, 그리고 낭만주의의 주관적 경험과 질적 시간을 결합해 구조적?사회운동론적 세대론을 제시했다. 그는 생물학적 요소의 연역성을 부정하고 그것을 ‘사회적 상호작용’과 연관시킨다.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고 해서 같은 세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 간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거쳐 하나의 세대로서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경험적 요소의 보편성 역시 거부하고 같은 세대의 경험이 특수한 측면에 제한됨을 이야기한다. 같은 세대라 해도 자신이 놓인 ‘사회 내 위치 관계’에 따라 같은 사건을 다르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만하임은 이처럼 양적 시간과 ‘사회적 위치의 특수성’, 그리고 질적 시간과 ‘사회 내 위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통합해 특정한 시대의 세대 문제를 규명할 수 있는 구조적·사회적 세대론을 발전시킨다. 그의 논의는 세대에 대한 이해를 수직적 이해에서 수평적 이해로 전환시킴으로써 나이에 따른 세대차이가 아니라 동일 세대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또 동시대에 서로 다른 세대단위가 존재함을 밝힘으로써 통시적인 세대갈등을 넘어 공시적인 세대갈등, 즉 동시대의 동일 세대 내 갈등을 구체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1980년대에도 사회 한편에는 보수적인 목소리를 내는 집단이 존재했다. 또한 2013년 현재 청년들 가운데 일부는 보수적인 청년으로, 다른 일부는 진보적인 청년으로서 동시대의 역사를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동일 시대를 단 하나의 슬로건으로 ‘진보’ 또는 ‘보수’라고 단정하는 것은 섣부른 이론적 시도가 될 것이다. 동시대의 비동시성을 세대 간의 문제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동일 세대 내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본 만하임을 통해 우리는 ‘동일 시대’, ‘동일 세대’, ‘서로 다른 목소리’라는 세대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얻게 된다.” _ 옮긴이 해제에서
- 세대를 사회운동론으로 재구성하다
만하임의 세대론은 세대를 사회운동론의 관점에서 재구성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이전의 세대 논의가 과거 사실에 대한 정태적 분석이었다면, 만하임의 논의는 당대의 변화하는 세대를 포함시켰을 뿐만 아니라 세대의 사회운동 조직화를 위한 이론적 근거이자 실천적 방향을 제시하는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역자에 따르면 ‘세대위치’ ‘실제 세대’ ‘세대단위’ ‘구체 집단’ ‘선구자’ 등의 개념은 “문제를 겪고 있는 세대를 포섭하는 이론적 장치가 될 수 있다. 예컨대 ‘88만원 세대’처럼 스펙 쌓기, 취업난, 경제적 어려움 등을 이유로 희망을 상실한 세대를 세대전쟁에 배치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가 될 수도” 있다.
만하임은 계급운동론의 구성과 비교하면서 세대운동론을 전개한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적용되는 즉자적 계급 대신 세대위치, 대자적 계급 대신 실제 세대, 대중조직 대신 세대단위, 전위정당 대신 구체 집단, 지식인 계급이라는 용어 대신 선구자라는 용어를 사용해 세대운동론을 구성하고 있다. 노동자와 비교되는 ‘세대위치’는 같은 시대에 태어나 역사적으로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을 말한다. ‘실제 세대’는 노동자로서 노동의 현실이 왜 문제인지 깨닫고 활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대자적 계급과 비교되는데, 동일 세대를 살아가는 역사적·사회적 공동 운명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노동운동에 더 깊이 개입하는 대중운동조직과 비교되는 ‘세대단위’는 실제 세대보다 더 깊이 세대운동에 관여하는 세대로, 동일 세대 내에 하나의 세대단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세대단위가 존재한다. 따라서 동일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도 다른 세대단위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다르게 행동하게 된다. 이것이 만하임이 세대 문제를 바라보는 독자성이자 독특성이다. 동일 세대 내에 서로 다른 세대단위 및 서로 다른 사고와 행위를 하는 세대집단이 있음을 밝힌 만하임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동일 사건을 진보적 또는 개혁적으로 사고하는 세대단위와 보수적 또는 역행적으로 해석하는 세대단위가 존재한다는 것, 나아가 이런 세대단위가 또 다른 정치적 집단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주체로 나선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계급운동의 전위조직과 비교되는 ‘구체 집단’은 세대단위를 통합시키면서 통일적 목소리를 내게 하며, 지식인 집단은 ‘선구자’로서 세대운동에 자양분을 제공한다. 만하임에 따르면, 세대운동의 선구자는 동일 세대가 아니라 주로 이전 세대 지식인 계층에서 나온다.
○ 언론소개
[프레시안 books] 카를 만하임의 ‘세대 문제’
- 20대는 무조건 ‘야권’ 찍는다? 확실히 아니다! _ 노정태 자유기고가
어떤 책은 다른 책보다 너무 늦게 도착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이 쓴 <세대 문제> (이남석 옮기고 해제 씀, 책세상 펴냄)가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88만원 세대> (우석훈·박권일 지음, 레디앙 펴냄)가 출간된 2007년 이후 이른바 ‘세대론’을 둘러싸고 수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제목 그대로 ‘세대 문제’를 사회학적인 문제로 정식화하고 분석한 이 고전적 논의가 우리에게 도달한 것은 2013년의 일이기 때문이다.
비극적이게도 나는 이 책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다. 또한, 내가 2007~2008년 이후 이른바 ’20대 논객’으로 호명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알게 된 내용들이 이 책에 이렇게 저렇게 포개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일단 <세대 문제>의 가장 핵심적인 문단을 인용해보자.
“동시대의 낭만적-보수적인 청년과 자유주의적-합리주의적인 청년은 동일한 실제 세대에 속하지만 두 가지 다른 세대단위들Generationseinheiten에 의해 결합되어 있다. 세대단위들은 단순한 실제 세대가 구성했던 유대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유대다. 동일한 역사적-실제적 문제에 정향하고 있는 이와 같은 청년은 동일한 ‘실제 세대’ 속에서 살고 있다. 동일한 실제 세대 내에서 이러한 경험을 각각의 서로 다른 방법으로 소화하는 이러한 집단들은 동일한 실제 세대의 범주 내에서 각각의 다양한 ‘세대단위’들을 구성한다.” – (67쪽, 강조는 원문)
시간에 따라, 혹은 생물학적 시대에 따라 나누어지는 세대들, 가령 막연한 ‘1980년대 생’ 같은 것이 단순한 ‘세대위치’가 된다면, 그 속에서 구성원들이 구체적인 사건이나 기타 다양한 변수로 인해 자신들이 어떤 세대임을 자각할 때 그들은 실제 세대를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1980년대 초반 생들이 20대 초반에 2002년 월드컵을 겪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그렇다. 그런데 그 실제 세대 속에서 지역, 소득, 교육, 기타 여러 가지 변수가 종합되어, 같은 체험을 공유한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은 각기 다른 몇 개의 집단을 구성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그것을 ‘세대단위’라고 만하임은 명명하고 있다.
세대위치 – 실제 세대 – 세대단위라는 이 세 가지의 개념적 틀을 정확히 파악하면, ‘왜 어떤 세대는 세대화가 되지 않는가’라던가, ‘과연 88만원 세대라는 말로 중산층의 자녀로 태어나 어학연수를 가는 청년과 그 청년의 부모가 가진 건물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을 같이 지칭할 수 있는가’와 같은 문제에 대한 대답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2013년 7월 12일이라는 ‘오늘’을 같이 살아가는 동년배들과 필자는 같은 세대위치에 놓여있지만, 그들 전부와 동일한 실제 세대를 이루는 것은 아니며, 같은 세대단위에 속한다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만하임의 말을 직접 인용해보자. “우리는 먼 지역에 떨어져 있어서 엄청난 격변을 조금도, 아니, 전혀 접촉하지 못하는 농민들을 동시대의 도시 청년과 함께 공동의 실제 세대 집단에 집어넣는가? 확실히 아니다!”(65쪽) 왜냐하면 그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서로 다른 세대단위를 구성하며, 도시의 청년들은 그 중에서도 ‘낭만적-보수적 청년’이 되거나 ‘자유주의적-합리적 청년’이 되는 식으로, 다시 별개의 세대단위를 형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치 20대라면 모두 민주당, 열린우리당, 기타 등등 ‘야권’을 찍을 것처럼 간주하는 시각에 대해 일찍이 만하임은 의문을 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동일한 실제 세대라는 범주 안의 양극에서 적대적으로 다투고 있는 다수의 세대단위들이 형성될 수 있”으며, “다수의 세대단위들이 서로 다투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여러 세대단위들은 하나의 ‘실제 세대’를 구성”(71쪽)한다. 즉 단지 나이대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젊은이들’을 호출하여 ‘우리 편’으로 삼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대단위라는 세대현상은 동일 연령 집단의 구성원들 사이의 생물학적인 단순한 끌림의 현상에서는 결코 발생하지 않”(76쪽)기 때문이다.
동일 연령 집단의 구성원들은 특정한 계기나 집단 구성 등을 통해 하나의 세대단위를 형성한다. 그들이 다른 세대단위와 갈등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할 때 그 세대를 대표하게 되며, 한 걸음 나아가 다른 세대와의 상호작용과 갈등을 통해 시대정신을 종합적으로 구현해내게 된다.
그런데 이 경우, 모든 세대위치에서 실제 세대가 도출된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30년 주기별로, 15년마다, 아무튼 특정한 시간대를 먼저 제시한 후 거기에 맞춰서 세대를 호출하는 것은 마케팅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겠지만, 그렇게 불러 세워진 세대가 실제 세대로서 다른 실제 세대와 길항하며 시대정신의 구성 요소가 된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옮긴이가 해제에서 제대로 짚고 있다시피, 이것은 이른바 ’88만원 세대’가 상대적으로 볼 때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대표를 갖지 못한 채 부유하고 있는 현상을 잘 설명해준다. 세대위치도 있고, 그 위치에 빼곡하게 차있는 머릿수들도 있지만, 그들 중 어떤 세대단위가 다른 세대단위와 충돌하며 실제 세대를 구성하는 일만큼은 지금껏 온전히 가시화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카를 만하임의 <세대 문제>는 사회학적 연구를 담은 책이다. 어떤 운동의 실천을 위해 만들어진 팸플릿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어떤 해답을, 혹은 ‘통찰’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특히 원고를 써서 생활을 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면, 몰염치한 발언이기도 하다. 사회학 쪽의 연구자라면 독자에게 이 작은 책자의 후속 논의들이 무엇이 있는지 소개하고, 읽는 이들의 정신적 지평을 넓혀야 할 의무가 있을 것이다. 반대로 해당 분야의 연구자가 아니라 사회적 논의를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을 작업의 본령으로 삼는 자, 즉 ‘논객’이라면, 이 책이 제시하는 이론적 틀을 통해 한국 사회를 다시 한 번 읽어낸 후 그 논의를 재활성화하기 위한 시도를 할 필요가 있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 보자. 만하임은 세대들의 연속성, 즉 한 세대가 다른 세대에 의해 대체되는 과정에서, 가장 나이 많은 세대와 젊은 세대가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일은 그리 자주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신 “이러한 반작용적 화해 과정에서 가장 나이 많은 세대와 가장 어린 세대가 아니라, 서로 가장 인접한 ‘중간 세대Zwischengeneration’가 서로 대치한다.”(62쪽) 우리의 맥락에서 말하자면, 88만원 세대는 ‘세대’의 일원으로 등장하여 연속성을 띄는 과정에서, 이른바 386세대와 서로 대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반대로 말해볼 수도 있다. 386세대의 문제의식 및 그들의 세계관과 맞서지 않는 한, 88만원 세대가 스스로에게 적합한 이름을 찾고 그 속의 여러 세대단위를 구성하여 실제 세대로 자리매김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나꼼수’의 김용민이 ‘너희들은 희망이 없다’고 촛불시위 잘만 나오고 있던 대학생들을 향해 일갈했을 때, ‘우리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라는 식으로 대답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대응이었을까? 그렇게 질문을 던지는 김용민 스스로가, 바로 그런 행동을 통해, 약 10여년의 세대위치를 뛰어넘어 ‘민주화 세력’이라는 실제 세대의 일원으로 편입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그 대답은 더욱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1983년에 태어나 2001년에 대학에 들어간 나는, 이 글을 쓰면서 계속 나 스스로가 어떤 세대에 속하는지, 혹은 내가 속한 세대단위를 어떻게 호칭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나의 세대를 외부에서 부르는 이름들은 매우 분열적이고 또 일회적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외부로부터의 호명을 받아내는 수많은 세대단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혹은 우리는, 비록 ‘수꼴’이나 ‘보수화된 청년층’으로 매도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스스로를 드러내야 한다. _ 노정태 자유기고가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