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만족의 대이동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서기 375년 (빠르면 300년)부터 568년까지 지속된 시기이며, 서로마 제국의 쇠퇴가 진행 및 멸망한 이후 시기에, 주로 게르만족 및 훈족 등 여러 민족들이 주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서기 375년 (빠르면 300년)부터 568년까지 지속된 시기이며, 서로마 제국의 쇠퇴가 진행 및 멸망한 이후 시기에, 주로 게르만족 및 훈족 등 여러 민족들이 주로 로마의 영토에 해당하는 유럽 지역으로 침입한 때이다. 영어권에서는 독일어 용어 Völkerwanderung을 번역한 Migration Period (민족 대이동기)라고 하며, 로마 및 그리스의 관점으로 보아, 야만인의 침입기라고도 한다.
–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의 시작과 고트족의 침략

AD 363년 율리아누스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 도중에 전사하고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요비아누스마저 AD 364년 급사하자 새로운 황제로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즉위하게 되었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일개 병사로 시작해 군사령관의 지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요비아누스가 죽자 군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발렌티누스 1세는 계속된 서쪽의 게르만족 침입과 동쪽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원활히 추진하기 위해 동생인 발렌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고 제국의 동부를 맡기는 대신에 자신은 서부에 전념하기로 했다. 이후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주로 갈리아의 파리에 머물며 알레마니족을 격파하였고 브리타니아에 침공한 피트족과 스코트족을 상대하기 위해 유능한 장군인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를 파견했다.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는 자신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는데 그는 바로 나중에 로마 황제가 되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아버지가 된다.
AD 367년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아들 그라티아누스의 왕위계승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9살의 나이에 공동황제로 임명했다. 그리고 AD 375년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사망하자 그라티아누스가 황제로 즉위했으나 판노니아의 로마군단은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또 다른 아들인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4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황제로 추대했다. 그라티아누스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자신의 공동황제로 인정하고 어머니 유스티나의 후견 하에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일리리쿰을 통치하도록 한 후 자신은 라인강을 넘어오는 게르만족을 상대하기 위해 주로 갈리아에 머물며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 등 나머지 서방 영토를 맡기로 했다. 그리고 제국의 동부 지역은 숙부인 발렌스가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은 다시 3분할 되었다. 하지만 발렌스는 고트족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면서 로마 제국을 위기로 몰아넣게 된다.
– 고트족 집단이주와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대패, 고트족의 집단이주 요청
고트족은 본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거주하던 게르만족의 일파로 AD 2세기 중엽부터 3세기에 걸쳐 남하하여 다뉴브강 북안과 흑해 북안에 머물기 시작하면서 서고트족 (다뉴브강)과 동고트족 (흑해)으로 나뉘어졌다. 동고트족은 통일왕국을 형성하면서 세력을 확장하기도 하였으나 서고트족은 몇 개의 부족 (키비타스)로 분열하여 통일되진 못하였다. AD 370년 경 훈족의 침입으로 동고트족 왕국은 멸망하였고, 서고트족도 훈족의 공격을 피해 다뉴브 강의 로마국경으로 도망갔다. 서고트족은 로마황제에게 로마 영토안으로의 이주를 요청하였는데 서고트족이 이주를 요청한 다뉴브 강은 발렌스 담당이었다. 발렌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근거지로 하여 주로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서고트족의 이주 요청에 발렌스는 처음에 고민하였으나 황폐화 된 국경지대에 서고트족이 정착하면 세입이 증가하고 국경방어 병력보강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여 다뉴브강 이남의 트리키아 속주로 이주를 허락하였다.

문제는 발렌스가 생각한 숫자를 훨씬 상회한 사람들이 다뉴브강을 넘어오기 시작하였다는 점이었다. 당초 발렌스는 서고트족만 이주를 허락하였으나 로마군의 다뉴브강 국경선이 개방되자 훈족에게 멸망한 동고트족과 또다른 게르만족인 타이팔레족에 일부 훈족까지 섞여 다뉴브강 도하를 시도한 것이다. 때마침 내린 비로 불어난 다뉴브강을 도하하느라 수많은 사람들이 익사하였지만 그럼에도 발렌스의 예측을 뛰어넘는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로마국경 안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이주한 사람들의 숫자가 예상을 웃돌자 이들을 정착시킬 토지가 부족해졌고 일부 로마관리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고트족을 노예로 만들거나 그들의 가축이나 양탄자 같은 재산을 착취하면서 고트족의 로마에 대한 반감이 높아져 갔다. 당초 발렌스는 서고트족의 집단이주의 조건으로 무기반납과 성인남자 및 아이들의 로마 지역내 분산배치를 요구하였으나 무기반납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고트족의 아이들은 로마로 인도되어졌으나 성인남자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식량문제였다. 부족한 식량은 매우 비싼 값으로 올랐고 고트족은 노예를 팔면서 식량을 구매하였지만 나중에는 자식까지 팔아야 할 지경이 되었다. 고트족은 로마관리에게 해결을 요구하였지만 트리키아 속주관리를 맡았던 루피키누스와 막시무스는 이를 해결해 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무력으로 압박하려고만 하였다. 더구나 루피키누스는 고트족을 통솔하고 있던 프리티게른과 알라비부스를 비롯한 고트족 귀족들을 성으로 초대하여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이 과정에서 알라비부스는 살해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프리티게른은 놓치고 말았다. 탈출에 성공한 프리티게른은 당장 자신의 부족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분노한 서고트족과 기타 부족들은 로마 제국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루피키누스도 자신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즉각 트라키아 속주의 전병력을 소집하여 고트족 반란을 진압하고자 하였으나 고트족에게 패배하고 무기를 모두 빼앗기면서 오히려 고트족의 무장을 강화시켜주고 말았다. 이후 서고트족은 식량을 찾아 트리키아 속주일대를 약탈하면서 로마제국 치하에서 불만이 많았던 트라키아 광산의 광부들과 고트족 노예, 추방되었던 소작농에 로마군 소속의 고트족까지 병력으로 흡수하여 세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당시 발렌스는 안티오크에서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여념이 없었기에 서방의 정제 그라티아누스에게 원군을 청했다. 그라티아누스는 발렌스의 요청에 응하여 프리게리두스에게 판노니아 발레리아 군대 지휘권을 부여하여 출병시켰고, 리코메레스가 이끄는 갈리아인 부대도 이동시켰다. AD 377년 여름 프리게리투스와 리코메레스의 군대는 살리케스에서 고트족과 전투를 벌였으나 양군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고 승패를 가르지 못한 채 퇴각하고 말았다. 프리게리두스와 리코메레스는 이 전투를 계기로 무질서한 폭도에 불과할 것으로 판단하였던 고트족을 다시보게 되었고 그라티아누스가 갑자기 북방에서 처들어 온 알라마니 족과의 전쟁으로 직접 원군을 이끌고 오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전략을 수정하여 정면대결을 피하게 되었다. 또한 고트족의 프리티게른도 로마 서방군의 강력함을 깨닫고 서쪽으로의 진격은 포기하고 로마 동방에 대한 약탈에 집중하게 되었다.
발렌스는 그라티아누스에게 원군을 청하는 한편 트라키아 방위를 맡도록 트라야누스와 프로푸투루스를 각각 보병대 사령관과 기병대장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는데 제대로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자 트라키아의 제국군을 증강시키기 위해 사투르니누스를 기병대 총사령관에 임명해 파견했다. 이에 프리티게른도 다뉴브강 건너편의 동고트족과 훈족, 사르마티아족, 알라니족, 타이팔레족에게 기병대를 차출해 일제히 다뉴브강을 도하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루피키누스에 의해 다뉴브강 방위병력까지 이미 소집된 상태였기에 이들은 다뉴브강을 아무런 저지없이 도하할 수 있었다.
–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의 참패
AD 378년 동방 정제 발렌스가 드디어 페르시아와의 평화조약을 맺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회군하였다. 발렌스가 회군하기 전에 이탈리아의 세바스티아누스가 각 군단으로부터 300명씩 차출하여 조직한 별동대를 이끌고 트라키아 속주 남부의 로도페를 약탈하고 돌아가던 고트족을 괴멸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발렌스는 세바스티아누스의 승전보에 고트족을 과소평가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동방군만으로 고트족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그라티아누스가 알라마니 족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를 시기하여 자신도 단독으로 고트족을 격퇴하고자 하는 공명심에 들뜨게 된다. 발렌스는 그 해 8월 6일 고트족의 군대가 하드리아노폴리스 (현재의 에디르네)로부터 20km 서쪽에서 진군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후 하드리아노폴리스에 입성하여 세바스티아누스 군대와 합류하였다. 그라티아누스가 보낸 원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발렌스는 정찰병으로부터 고트족의 병력이 1만명에 불과하다는 보고를 받고는 동방 로마군 단독으로 고트족을 상대하려는 마음을 더욱 굳혔다.
발렌스는 AD 378년 8월 9일 아침 일찍 하드리아노폴리스 외곽에 주둔 중이던 4만여명의 보병대와 2만여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출병하였다. 발렌스도 고트족을 발견하고는 그들이 1만여명이 아님을 깨달았다. 고트족은 둥글게 배치된 짐마차 방벽 뒤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다니는 고트족의 습성상 비전투원들은 짐마차 방벽 뒤에 숨어 있게하고 전투를 담당할 사람들만 짐마차 방벽 밖에 둥글게 포진한 상태였다. 그러나 고트족의 가장 큰 문제는 동맹군으로 이루어진 기병대 대부분이 마초와 식량 보급을 위해 다른 곳으로 가있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로마군이 중앙에 보병대가 포진하고 양익에 기병을 배치하는 전통적인 진형을 취하는 사이에 프리티게른은 사절을 보내 정착할 토지와 필요한 곡식 및 가축을 공급해준다면 무기를 버리고 로마제국 방위를 위해 돕겠다는 의사를 보내왔다. 다른 곳으로 간 동맹군 기병대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끌고자 한 것이었다. 발렌스는 프리티게른이 보내는 사절들에게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이 올 것을 요구하면서 그들의 협상안을 거부했다.
이에 고트족은 로마측에서도 인질과 같은 높은 자격의 인물이 고트족에게 보낼 것을 요구하였고 로마측에서는 리코메레스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협상이 지루하게 진행되는 동안 로마군 병사들은 기온이 40도나 되는 8월의 더위로 인해 지쳐가기 시작했다. 사실 로마군 병사들은 새벽에 출발한 이후로 물도 식량도 지급받지 못한 상태로 수시간이나 방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고트족이 주변의 건초와 나무들에 불을 붙여 로마군 병사들은 열은 물론 연기와 사막의 먼지에 의해 고통에 시달렸다. 리코메레스가 로마군을 출발하여 고트족 진영으로 가는 동안 로마군의 우익이 고트족과 사소한 전투를 벌이다가 발렌스의 공격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교전상태에 들어갔다. 이에 놀란 양측 사령부는 협상을 결렬시켰고 리코메레스는 본진으로 귀환하였다

전투는 처음에는 로마군의 공격을 고트족 보병이 방어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로마군은 전투단위와 명령체계가 분명한 반면 고트족은 비록 프리티게른이 총지휘를 맡고는 있었으나 사실상 부족단위별로 나뉘어져 개별적으로 전투에 임했다. 본격적으로 전투가 개시되자 로마군은 이미 교전상태에 들어갔던 우익 기병에 이어 좌익 기병도 교전상태에 들어갔고 좌익기병은 고트족을 밀어내고 짐마차 방벽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보병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제때에 지원하지 못해 좌익 기병은 밀려나고 만다. 로마는 제대로 진형을 갖추지 못하고 무질서하게 전투에 임하면서 서로 동조할 수 없었고 오히려 보병대의 측면을 보호해야할 기병들이 너무 앞서나가 보병의 측면을 노출시켰다. 이때 갑자기 로마군 배후에 5만여 기병이 출현하면서 전쟁의 양상이 갑자기 돌변하였다. 고트족 동맹군 기병대가 프리티게른의 연락을 받고 급하게 돌아온 것이었다. 고트족 기병은 중장기병을 중심으로 경장기병과 궁기병이 섞여있는 상태로 제대로 진형을 갖추지도 못하고 전투에 참가하였다.
비록 고트족 기병은 진형을 정비하지 못했지만 로마군 우익의 기병의 배후를 덮치는 형태로 전투에 임했기에 손쉽게 로마 우익기병을 물리칠 수 있었다. 더구나 로마기병 대부분이 경무장이었기에 중장기병 중심의 고트기병을 감당하지 못하고 로마 좌익기병마저 퇴각하고 만다. 이제 로마군의 중장보병의 가장 취약점인 측면을 노출한 채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둥글게 진을 치고 있던 정면의 고트족 경장보병들이 반월형으로 진을 변형해 로마군을 압박하고 있었고 로마군 양익은 적의 중장기병에게 훤하게 노출된 상태였으며 퇴로는 적의 경장보병이 끊겨버렸다. 최악의 상황에 처한 로마군은 마지막까지 저항하였지만 결국 대패하고 말았다. 로마군의 피해는 엄청났다. 황제 발렌스가 전사하였고 대대장 35명과 군단 전체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로마 제국 국경 안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는 점에서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는 동시대 로마인들에게 일찍이 포에니 전쟁 시절에 겪은 칸나에 전투 이후 최악의 패배로 평가받게 된다.
–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의 오해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는 로마 정규군이 난민에 가까웠던 고트족에게 패배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많은 전쟁 사가에게 주목을 받았고 오랫동안 고트족 기병이 로마의 중장보병을 상대로 승리한 것으로 믿어졌다. 이후 중장보병이 전장을 지배하던 시대를 마감하고 중장기병이 새롭게 전장의 주역으로 떠오르며 중세유럽을 지배할 ‘기사’의 등장배경이 되었다고도 하였고 고트족 기병이 이렇게 뛰어난 위력을 보일 수 있었던 배경에는 등자 사용이 있었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론이 최근에 대대적으로 제기되었다. 고고학적 연구에 따라 유럽의 등자 사용은 6세기 이후에나 이루어졌다는 점이 증명되면서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고트족 기병이 등자를 사용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게 되었다. 더욱이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는 보병과 보병이 충돌하고 적 기병을 제압한 기병이 보병의 양익을 포위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제2차 포에니 전쟁부터 등장한 아주 오래된 형태의 회전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다.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고트족 기병이 로마군 기병을 압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예는 로마 전사에서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미 로마군은 3세기의 위기를 거치면서 갈레리우스와 아우렐리아누스를 통해 중장보병 위주의 편성을 포기하고 게르만족이나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같은 기병 위주의 적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한 기병예비대를 운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를 중장기병의 중장보병에 대한 우월성을 입증한 전투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1세 시절에 로마군 최고위로 “마기스테르 에퀴툼 (magister equitum; 기병대장)”을 신설했을 정도로 기병 병과를 매우 중시하고 있었다. 사실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로마군의 패배원인은 바로 로마군 내부에 있었다. 발렌스의 정찰부족에 의한 상대 병력 오판과 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성급히 전투를 벌인 공명심, 그리고 로마군의 무너진 군율에 의한 무질서한 공격이 더해지면서 발렌스의 로마군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 테오도시우스 1세의 동방 정제 등극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로마 동방군은 정예 병력을 모두 잃어버리고 황제 발렌스가 사망하는 비상 사태를 맞이하였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서방 황제 그라티아누스는 도나우 강 하류의 모이시아 속주의 군사령관 출신인 테오도시우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였다. 히스파니아 출신인 테오도시우스는 유능한 장군이었던 아버지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의 곁에 종군하며 AD 368년 브리타니아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며 그 이름을 알렸다. 이후 AD 370년 갈리아에서 알레만니족과의 전투 및 AD 372년 발칸 지방에서 사르마티아족과의 전투에 참가하며 무훈을 쌓았고 AD 374년에는 도나우 강 하류의 모이시아 속주에서 군사령관을 맡아 사르마티아족을 격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궁중 암투에 휩싸여 처형되자 당시에는 고향인 히스파니아로 은퇴한 상태였다.
AD 379년 1월 19일 황제가 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서둘러 이집트와 시리아 등지에서 새롭게 병력을 모았다. 그리고 효과적인 지휘를 위해 군사 제도를 재편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가 군사령관을 보병 (마기스테르 페디튬)과 기병 (마기스테르 에퀴툼)을 나누던 것을 ‘마기스테르 밀리툼 (Magister militum)’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하였다. 그러나 새로 모집된 로마군은 훈련이 많이 부족하여 로마 동방의 주요지역 방어에만 치중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머지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고트족의 약탈을 막지 못했다. 고트족도 제대로 된 공성무기가 없어서 성으로 둘러싸여진 하드리아노폴리스나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같은 주요 도시들은 함락시키지는 못한 채 주변지역을 약탈하고만 다녔다. 고트족의 약탈은 4년이나 계속되었지만 고트족은 어떠한 중요한 마을이나 도시도 점령할 수 없었고 로마군도 고트족을 전투에서 물리칠 수 없었다. 결국 양측은 협상을 통한 해결책을 모색하였고 테오도시우스 1세가 서고트족에게 트라키아 지방을 내어주는 조건으로 로마군에 병력을 제공하는 포이데라티 협정을 맺으면서 고트족의 소요는 겨우 진정되었다.
– 그리스도교 국교화
테오도시우스 1세는 그리스도교 집안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로마의 동방 황제로 즉위하자 자신의 통치하던 로마 제국의 동방지역에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는다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당시 그리스도교는 삼위일체설을 추종하는 니케아 신조의 신봉자들과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들이 대립이 심각한 수준에 이른 상태였지만 테오도시우스 1세 자신이 심한 병을 앓고 AD 380년 세례를 받으면서 니케아 신조를 신봉하게 되었기 때문에 곧바로 테오도시우스 1세는 니케아 신조의 삼위일체설을 신봉하는 사람들만 “보편적 (가톨릭) 그리스도교인”으로 간주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가톨릭이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AD 381년 주교 150명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모인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열려 아리우스파를 비롯하여 니케아 신조를 신봉하지 않는 모든 종파가 이단으로 선포되었다.
이에따라 AD 385년부터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가 금지되었고 AD 391년에는 일체의 이교도 의식을 금지하였으며 AD 392년에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형태의 이교 숭배를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서방 황제 자리를 노리던 이교도 유게니우스를 격파하고 로마 전체를 통합하여 유일한 황제로 즉위하면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삼위일체설의 로마 카톨릭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언하여 로마 제국을 그리스도교의 나라로 만들었다. 이러한 그리스도교 국교화와 삼위일체설의 정립 때문에 테오도시우스 1세는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이어 로마 제국의 황제로는 2번째로 ‘대제 (The Great)’의 칭호를 부여받게 된다.
– 로마의 일시적인 재통합과 최종분열
테오도시우스 1세가 고트족 소요를 진압하는 데 여념이 없는 사이 로마 제국 서방에서도 이변이 일어나 AD 383년 브리타니아 군단의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반란을 일으켜 그라티아누스를 살해하고 제위를 찬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처음에 테오도시우스 1세는 서방의 일에 신경쓸 여유가 없어 마그누스 막시무스를 서방의 황제로 인정했지만 그라티아누스의 동생이자 공동황제였던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몸을 위탁해오자 생각이 바뀌었다. 결국 테오도시우스 1세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 연합하여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그리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서방 황제로 복위시키고 테오도시우스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되돌아 갔다.
AD 392년에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궁정에서 의문사하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 대립하던 갈리아의 아르보가스트가 유게니우스를 새로운 서방 황제로 추대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테오도시우스 1세는 자신의 아들인 호노리우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한 후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황제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AD 394년 5월 호노리우스와 또 다른 아들인 아르카디우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남긴 채 대군을 이끌고 출병하였다. 비록 테오도시우스 1세는 같은해 9월에 벌어진 유게니우스와의 첫번째 대결에서는 피해를 입었지만 다음날 재차 공격을 감행하여 승리하였다. 이렇게 하여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 제국을 다시 통합시켰지만 유게니우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병에 걸렸기 때문에 서둘러 후계자 문제를 매듭지어야 했다. 이에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를 동서로 나뉘어 두 아들 중 호노리우스를 서방 황제로, 다른 아들인 아르카디우스를 동방 황제로 각각 임명하기로 마음먹고 호노리우스를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AD 395년 1월 17일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비록 테오도시우스 1세가 후계자를 지명할 때 다시 제국을 동서로 분할하기는 했지만 로마 제국은 이전에도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였고 테오도시우스 1세도 영구적으로 로마 제국을 분할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테오도시우스 1세의 뒤를 이은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모두 어렸기 때문에 테오도시우스 1세는 자신의 충성스런 장군인 반달족 출신의 플라비우스 스틸리코에게 두 아들의 후견을 부탁했지만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동방의 훈족에게 밀려난 게르만족이 대규모로 서유럽을 침공하기 시작하면서 스틸리코는 동로마를 신경쓸 여력이 없게 되었다. 더욱이 동로마의 아르카디우스가 정무에 관심없어 처음에는 루피누스에게, 나중에 루피누스가 암살된 이후에는 에우트로피우스에게 통치를 맡겨 버렸기 때문에 동로마는 서로마의 위기를 방관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일시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서로마와 동로마의 분리는 점차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고 결국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서로마 제국의 위기 : 스틸리코의 고군분투, 스틸리코의 등장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호노리우스는 11살로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테오도시우스 1세는 호노리우스의 후견인으로 반달족의 플라비우스 스틸리코를 임명하였다. 스틸리코는 뒤에 등장하는 아이티우스와 함께 서로마 제국을 지탱한 최후의 로마인으로 불리게 된다. 로마인과 반달족의 혼혈로 태어난 스틸리코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조카와 결혼하고 호위대장 (comes stabuli)에 임명받을 정도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총애를 받았다. 스틸리코는 AD 390년 로마군 최고 지위인 군사령관 (magister militum)이 되었고 AD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로부터 서로마 제국의 군대를 총괄하는 총사령관 (magister utriusquae militiae)으로 임명받으며 어린 호노리우스의 후견인이 되어줄 것을 부탁받았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 뒤 스틸리코는 그의 유언에 따라 서로마 제국을 실질적인 통치를 하면서 서로마 제국의 각지의 반란 및 이민족의 침입을 방어해야 하는 어려움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 서고트족과의 대결과 북아프리카 반란토벌
스틸리코는 AD 395년 1월 동방에서 훈족이 이동해오면서 연쇄적으로 촉발된 게르만 족의 대이동에 서로마 제국은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서고트 족의 족장이 된 알라리크가 기존에 맺은 로마와의 포이데라티를 파기하고 트라키아 속주를 침입하여 하드리아노폴리스까지 약탈하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죽기 직전에 정예병력 상당수를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새롭게 등장한 훈족을 방어하기 위해 아나톨리아 반도를 비롯한 동방속주에 배치하였고 나머지 정예병력도 찬탈자 유게니우스를 진압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이끌고 왔었다. 이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하면서 이탈리아의 로마 군단은 해산되지 않은 채 호노리우스의 서로마 제국에게 편입된 상태였다. 아르카디우스의 동로마 제국은 정예병력을 이탈리아에 내주면서 발칸 반도의 방어는 포이데라티가 된 서고트족에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고트족이 반기를 들자 이를 방어할 만한 힘이 없었다. 이에 동로마 제국의 아르카디우스는 스틸리코의 도움을 이탈리아의 정예병력을 이끌고 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아르카디우스의 요청에 따라 스틸리코는 병력을 이끌고 발칸반도에 상륙한 뒤 동로마 제국군의 지휘권까지 인수하여 알라리크의 서고트족을 격퇴해내었다. 그러나 스틸리코가 무력으로 동로마 제국을 위협하려들지도 모른다며 루피누스가 음해하였고 이에 아르카디우스는 스틸리코에게 동로마 제국군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되돌려보낼 것을 요구했다. 충직했던 스틸리코는 이 명령을 거부하지 못한 채 콘스티노폴리스로 동로마 제국군을 되돌려 보낸 뒤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루피누스도 정작 자신의 음모대로 귀환한 동로마 제국군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는데 이 과정에 스틸리코가 어느정도 관여했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한편 AD 397년에 아프리카 속주의 군대를 지휘하던 코메스인 길도가 반란을 일으켰다. 아프리카 속주는 서로마 제국의 주요 식량생산지였으므로 스틸리코는 우선 갈리아에서 대량의 곡물을 싣고 와 식량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킨 후 로마 원로원 결의를 통해 북아프리카 반란토벌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토벌군 지휘는 스틸리코를 대신하여 마스케젤이 맡았는데 마스케젤은 고작 5천명의 병력만으로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여 길도의 반란군을 손쉽게 평정하였다. 그러나 마스케젤은 귀환 후 다리에서 떨어져 익사하고 말았다.
– 서고트족의 재침공과 동고트족과의 대결
AD 397년 서고트족의 알라리크가 다시 처들어오자 스틸리코도 병사들을 이끌고 나아갔고 이오니아 해를 지나 아르카디아 지방에서 서고트족을 포위하였으나 알라리크는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스틸리코가 이를 추격하였으나 알라리크의 공작에 따라 이번에도 스틸리코의 의도를 의심한 동로마 제국의 방해를 받아 서로마 제국으로 철군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후 알라리크가 다시 발칸 반도를 공격해오자 동로마 제국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알라리크를 일리리쿰 속주의 군사령관으로 임명하였는데 테오도시우스 1세의 유언에 따라 일리리쿰은 본래 서로마 제국의 영토였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의 이러한 행동은 당연히 월권이었으나 동로마 제국은 알라리크의 칼날이 서로마 제국으로 향하게 만들기 위해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동로마 제국의 의도대로 AD 400년이 되자 서고트족의 알라리크가 이번에는 발칸반도가 아닌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했다. 당시 알라리크는 동로마 제국의 일리리쿰 속주의 군사령관일 뿐만 아니라 서고트족의 왕으로도 추대된 상태였다. 알라리크는 동고트족의 라다가이수스와 동맹을 맺은 후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라이티아 속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이때 스틸리코는 반달족을 막기 위해 이탈리아를 비운 상태였기 때문에 호노리우스가 머물던 밀라노까지 함락위기에 처했다. 스틸리코는 서둘러 회군하였고 AD 402년 4월 폴렌티아 전투에서 알라리크를 격파하였고 협상을 통해 알라리크를 일리리쿰으로 되돌려보냈다.
AD 405년 이번에는 동고트족의 라다가이수스가 게르마니아 북쪽 끝에서 진군해왔다. 이때 동고트족인 여자와 아이들을 합쳐 무려 10만명이나 되었으나 스틸리코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3만명에 불과했다. 이에 스틸리코는 신병을 모집하였으나 여의치않자 노예까지 해방시켜 겨우 3만명을 동원할 수 있었다. 동고트족은 이탈리아로 들어와 많은 도시들을 약탈하였으나 스틸리코는 피렌체 근교의 피에솔레로 후퇴하여 보급선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동고트족에게 대승을 거뒀고 이듬해 티치눔에서 라다가이수스를 사로잡아 처형하는 데 성공했다.
– 스틸리코 숙청과 서고트족의 로마 약탈
이렇게 스틸리코의 고군분투로 서로마 제국은 위기에서 여러 번 벗어났지만 거듭된 전쟁으로 제국 자체는 점점 더 피폐해져만 갔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스틸리코는 서고트족과의 동맹을 추진하였는 데 정착지와 매년 돈을 지급하는 굴욕적인 조건 때문에 스틸리코의 입지가 약화되었다. 더욱이 호노리우스와 결혼했던 스틸리코의 장녀 마리아가 죽은 이후 스틸리코가 아들 에우케리우스와 테오도시우스 1세의 막내딸 플라키디아 사이의 결혼을 추진하면서 호노리우스는 스틸리코가 자신을 폐위시킨 후 에우케리우스를 황제로 옹립하려는 것은 아닌 지 의심하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AD 408년 8월 동로마 제국의 아르카디우스가 사망하자 스틸리코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할 것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서고트족과 내통하여 에우케리우스를 동로마 황제로 세우고자 한다는 의심이 깊어졌다. 결국 파비아에서 쿠데타가 발행하여 스틸리코의 측근들이 대거 살육당하는 사태가 일어났고 스틸리코는 호노리우스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후 얼마 뒤 처형당했다.
스틸리코가 숙청당하자 그의 휘하에 있던 게르만족 병사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로마에서 도망쳐 서고트족의 알라리크 휘하로 들어갔다. 그러자 알라리크는 스틸리코의 원수를 갚는다는 핑계로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AD 408년 9월 수도 로마를 포위한 후 거액의 보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일단 물러났다. 알라리크가 스틸리코의 지위를 이어받기를 요구했으나 호노리우스가 거절하자 AD 409년 다시 로마로 진군하여 아탈루스를 황제로 옹립하여 라벤나에 머물고 있던 호노리우스를 압박하였다. 하지만 호노리우스가 여전히 알라리크에게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AD 410년 8월 24일 아탈루스를 폐위시킨 후 로마를 약탈하였다. 그러나 알라리크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기 때문에 서로마 제국은 겨우 위기에서 벗어났다.
– 히스파니아와 브리타이아의 독립
알라리크의 뒤를 이은 아타울푸스는 서고트족을 이끌고 갈리아 (지금의 프랑스) 남부에 정착했다가 히스파니아 (지금의 이베리아 반도)로 이동했으나 반달족이 히스파니아로 밀려오자 다시 갈리아 남부지방으로 밀려났고 AD 418년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와 동맹협정을 맺으며 그곳에 정착하였다. 이후 반달족이 북아프리카로 이동하자 서고트족이 히스파니아를 다시 장악하였고 AD 466년 유리크 왕 시절에 정식으로 서고트 왕국을 세웠으나 알라리크 2세가 프랑크족의 클로비스에게 패배하면서 갈리아를 상실하고 영토가 피레네 산맥 이남으로 줄어들게 된다. 이후 서고트 왕국은 AD 711년 이슬람 세력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히스파니아 지방을 지배하게 된다.
AD 407년 브리타니아에서 콘스탄티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콘스탄티누스는 스스로 황제 콘스탄티누스 3세를 자처하며 갈리아를 침공하였으나 군사령관인 콘스탄티우스에게 패배하였다. 콘스탄티우스는 AD 417년 호노리우스 황제의 동생인 갈라 플라키디아와 결혼하였고 AD 421년 2월에는 공동황제까지 임명되었으나 같은해 8월 사망하였다. 한편 콘스탄티누스의 반란으로 더이상 브리타니아에는 로마 군단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고 호노리우스가 브리타니아에 새로운 로마 군단을 보내는 것을 포기하면서 브리타니아는 사실상 독립하게 되었다. 이후 브리타니아는 오늘날 독일 북서부에 거주하던 앵글족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에 거주하던 작센족이 유입되어 앵글로-색슨족으로 불리우며 각지에 왕국을 세웠다. 오늘날의 잉글랜드라는 명칭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의 마지막 노력, 아이티우스의 등장
AD 423년 호노리우스가 죽자 로마의 치안장관인 요하네스가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2세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AD 425년 서로마 제국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요하네스는 훈족과 친분이 두터운 갈리아의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에게 훈족 용병을 이끌고 이탈리아의 라벤나로 와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아이티우스가 미처 도착하기 전에 요하네스는 동로마 제국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아이티우스가 라벤나로 도착했을 때는 호노리우스에 의해 공동황제로 임명되었던 콘스탄티우스 3세의 아들인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옹립된 상태였다. 그러나 즉위 당시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나이가 6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모친인 플라키디아가 한동안 섭정이 되었다. 플라키디아는 아이티우스를 회유하기 위해 갈리아의 최고 군사령관으로 임명했고 아이티우스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서로마 제국의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 보니파키우스와의 분쟁과 반달족의 북아프리카 점령
아이티우스와 함께 서로마 제국의 또다른 실력자로는 북아프리카의 코메스인 보니파키우스가 있었다. 아이티우스는 보니파키우스와 의견대립이 많았기 때문에 모략을 꾸며 보니파키우스를 반역혐의를 뒤집어 씌웠고 이에 보니파키우스가 히스파니아에 있던 반달족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비록 얼마지나지 않아 보니파키우스에 대한 누명이 벗겨지면서 반달족에 대한 지원요청을 취소했지만 군데리크의 뒤를 이은 이복동생 가이세리크는 예정대로 8만명에 달하는 반달족 전체를 데리고 AD 429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로 처들어갔다. 보니파키우스가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가이세리크는 히포 레기우스 (현재 알제리의 안나바)를 14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함락시켰다.
결국 보니파키우스는 이탈리아로 도망쳤고 가이세리크는 서로마 제국과 협상을 벌여 AD 435년 포이데라티 협정을 맺었으나 AD 439년에 협정을 파기하고 카르타고를 기습 점령하였다. 그리고 AD 442년 다시 로마와 동맹협정을 맺어 북아프리카의 지배를 인정받아 반달왕국을 성립시켰다. 반달왕국은 옛 카르타고의 선원들을 이용하여 대규모 함대를 조직한 후 지중해를 건너 사르데냐, 코르시카, 시칠리아 등 지중해의 여러 섬들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영토를 확대시킨 후 AD 533년 벨리사리우스 장군이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섬들을 지배하게 된다.
– 아이티우스의 권력장악
보니파키우스는 북아프리카를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티우스를 견제하고자 하는 목적에 중용되어 서로마 제국의 총사령관 (magiser utriusque militiae)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반발하여 아이티우스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를 처들어오면서 AD 433년 라벤나 근처에서 리미니 전투가 벌어졌다. 비록 아이티우스가 패배하면서 물러나야했지만 이때 입은 부상으로 보니파키우스가 사망하고 그의 사위인 세바스티아누스가 보니파키우스의 지위를 이어받자 아이티우스는 재차 이탈리아로 진군하였다. 더이상 아이티우스를 막아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티우스는 라벤나에 입성하였고 세바스티아누스를 추방한 후 보나파키우스의 미망인인 펠라지아와 결혼하며 죽은 보나파키우스을 대신하여 서로마 제국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아이티우스는 서로마 제국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이후 20년간 아이티우스는 갈리아에서 여러 게르만 부족과 싸우며 눈부신 군사적 업적을 쌓았다. AD 436년에는 부르군트족을 격파한 후 평화협정을 강요하였고 AD 438년에는 수에비족과 서고트족에게 승리를 거뒀다. AD 443년에는 부르군트족을 제네바 호수 근처에 정착시키고 복속시킨 게르만 부족 중 알란족을 AD 440년에는 발랑스에, AD 442년에는 오를레앙에 차례로 옮겨 살도록 정리하였다. AD 450년에는 프랑크족의 계승 분쟁에 개입하여 그 중 한 명을 양자로 삼았다.
– 훈족의 침공
AD 451년 훈족이 침공하면서 서로마 제국이 큰 위기에 처했다. 훈족은 중앙아시아의 스텝지대에 거주하였던 투르크계의 유목 기마민족으로 AD 4세기경 유럽에 등장하여 볼가 강과 돈 강 사이의 평원지대를 지배하던 알라니족을 무너뜨리고, AD 375년에 흑해 연안의 동고트족을 정복했으며 AD 376년경에는 다뉴브강 하류의 서고트족을 쫓아내는 등 막강한 군사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훈족의 유래에 대해서는 AD 5, 6세기에 인도와 이란을 침략한 에프탈족과 일찍이 중국인에게 알려진 흉노족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훈족과 로마 제국 사이에 위치한 게르만 부족들이 차례로 무너지거나 로마 제국 영토안으로 들어가자 이제는 훈족과 로마 제국이 국경을 맞대게 되었고 AD 434년 아틸라가 훈족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면서 훈족이 로마 제국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아틸라는 형 블레다와 공동으로 훈족의 왕이 된 후 동로마 제국과 공물을 받는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맺었는데 동로마 제국이 이를 이행하지 않자 AD 441년 도나우 강을 건너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진격하기도 했다. AD 445년 형 블레다를 살해하고 단독으로 왕권을 장악한 아틸라는 AD 447년 동로마 제국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발칸 반도를 정벌하였다. 동로마 제국으로서는 아틸라를 달래기 위해 매년 700파운드의 금을 공물로 제공해야만 했다. 이렇게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유린하고 막대한 부를 쌓게 된 아틸라는 AD 451년 관심을 서로마 제국으로 옮겼다.
– 카탈라우눔 전투의 승리
아틸라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여동생 호노리아로부터 구혼편지를 받자 지참금으로 서로마 제국의 반을 요구하며 AD 451년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 지방으로 처들어갔다. 아틸라의 훈족이 거침없이 진군하며 오를레앙까지 육박하자 아이티우스는 서둘러 군사들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당시 서고트족의 왕인 테오도릭 1세를 설득하여 동맹으로 끌어들였고 그밖에 동맹부족 (포이데라티) 협정을 맺은 프랑크족과 부르군트족, 동고트족 등의 지원을 받아 연합군을 구성하였다. 이렇게 병력을 구성을 마친 아이티우스는 AD 451년 6월 20일 오를레앙 근처의 카탈라우눔 평야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아이티우스는 기마술이 우수한 서고트족을 우익에 배치하여 훈족을 포위하고자 하였으나 아틸라는 정예 훈족 기병을 가운데에 배치하여 중앙돌파를 노렸다.
전투가 시작되자 예정대로 아틸라가 기병을 이끌고 중앙으로 돌진하였고 좌우에 배치된 서고트족과 동고트족 역시 전투에 돌입하였다. 연합군의 우익의 서고트족의 전투가 특히 치열하게 전개되어 서고트족은 테오도릭 1세가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으나 테오도릭 1세의 아들인 토리스먼드가 부대를 수습하였다. 아틸라의 훈족 기병과 서고트족의 전투가 혼전으로 치닫는 동안 좌측에 위치한 아이티우스는 여전히 제자리를 사수하고 있었다. 아틸라는 중앙돌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틸라 부대의 후미가 노출되었고 이에 아이티우스는 병력을 나눠 아틸라 부대의 후미를 향해 돌격시켰다. 결국 이 공격이 결정타가 되어 훈족의 진형이 무너지면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아이티우스는 해가 질때까지 훈족을 추격하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아버지 테오도릭 1세를 잃어버린 토리스먼드가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기 때문에 아틸라로서는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이했으나 아이티우스는 훈족이 무너질 경우 서고트족을 더이상 견제할 수단이 없어진다고 생각하고는 토리스먼드에게 아버지의 왕위를 정식으로 계승하기 위해 서둘러 철수할 것을 종용하였다. 결국 서고트족이 물러나면서 아틸라 역시 후퇴할 수 있었고 라인강을 건너 본거지로 되돌아갔다. 카탈라우눔 전투는 아틸라에게 있어서 최초이자 유일한 패배였다.
이듬해가 되자 아틸라는 세력을 다시 회복하여 이탈리아의 북부를 침략했다. 이번에는 아이티우스가 아틸라를 저지할 만한 병력을 모으지 못했기 때문에 갈리아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며 방관하였다. 아틸라는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하여 파도바, 비첸차, 베로나, 크레모나, 피아젠차, 파비아, 밀라노를 차례차례 유린하였고 서로마 제국으로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다. 결국 로마의 교황 레오 1세와 원로원 의원 2명이 아틸라를 만나 협상을 통해 겨우 돌려보낼 수 있었다. 협상의 자세한 내용은 기록되진 않았으나 상당수의 공물을 바친 것으로 추정되며, 아틸라는 때마침 닥친 기근과 전염병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고 철군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10년 가까이 유럽을 공포속으로 몰아넣으며 ‘신의 채찍’이라고까지 불렸던 아틸라였지만 AD 453년 결혼식날 급사하였다. 한시대를 풍미한 영웅으로서는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아틸라가 죽자 여러 명의 아들에 의해 제국은 분열되었고 결국 455년 판노니아의 네다오 강 대전투에서 게피다이, 동고트, 헤룰리, 기타 여러 민족들로 구성된 연합군에게 대패를 당하고 역사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 아이티우스의 암살과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단절
아틸라가 죽은 후 아이티우스는 자신의 아들을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과 결혼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아이티우스가 자신을 폐위시키고 아들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려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고 로마 원로원 의원이었던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아이티우스를 암살하도록 부추겼다. 결국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자신을 알현하러 온 아이티우스를 칼로 찔러 죽였다. 하지만 발렌티니아누스 3세 역시 얼마지나지 않아 막시무스에 의해 암살당하였고 원로원 투표를 통해 막시무스가 새로운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참고로 동로마 제국에서도 아르카디우스가 AD 408년 사망한 이후 아르카디우스의 아들인 테오도시우스 2세 (재위기간 AD 408년 ~ AD 450년)와 아르카디우스의 사위인 마르키아누스 (재위기간 AD 450년 ~ AD 457년)가 차례로 즉위하였지만 모두 아들을 낳지 못하여 동로마 제국의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스파르에 의해 레오 1세가 새로운 황제로 추대되었다. 이렇게 하여 테오도시우스 1세가 창건한 후 로마 제국을 동서로 분할하여 지배하던 테오도시우스 왕조가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 양쪽에서 단절되고 만다.
– 서로마 제국의 멸망, 반달족의 로마 약탈

막시무스가 황제가 된 뒤 북아프리카의 반달족과 분쟁이 발생했다. 당초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북아프리카의 반달족의 왕인 가이세리크의 아들과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려고 하였으나 막시무스가 그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가이세리크가 반달족을 이끌고 AD 455년 로마를 침공했다. 서로마 제국은 아이티우스가 죽은 이후 아이티우스를 따르던 게르만족 용병들이 떠나가면서 군사력이 더욱 약화되었기 때문에 반달족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했다. 막시무스는 로마를 탈출하려다가 로마 시민들에게 발각되어 살해되었고 로마는 반달족에 의해 약탈당했다. 비록 대규모 학살이나 파괴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반달족의 로마 침공은 그 자체로 동시대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기 때문에 문화유산이나 예술품 등을 파괴하거나 훼손하는 것을 지칭하는 ‘반달리즘 (vandalism)’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 AD 455년 반달족의 로마 약탈, 리키메르의 전횡
반달족이 물러간 뒤 원로원 의원이자 갈리아 군사령관이었던 에파르키우스 아비투스가 서고트족의 후원을 얻어 황제로 즉위하였지만 AD 456년 게르만족 출신의 군사령관이었던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에 의해 폐위되고 리키메르의 친구이자 로마인 출신 군사령관이었던 율리우스 발레리우스 마요리아누스가 리키메르의 추대로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마요리아누스는 리키메르의 꼭두각시 노릇을 과감히 거절한 후 나름대로 개혁정치를 펼치고 갈리아의 부르군트족과 그리고 히스파니아의 서고트족을 격파하며 서로마 제국의 재건에 나섰다. 그러던 중 AD 460년 반달족을 공격하기 위해 300척의 함대를 이끌고 히스파니아로 갔다가 오히려 패배하고 불리한 조건의 강화조약을 체결한 채 돌아오자 리키메르가 이를 구실로 마요리아누스를 폐위시키고 살해하였다.
이제 모든 실권은 서로마 제국의 총사령관인 리키메르가 장악했지만 리키메르는 게르만족 출신이기 때문에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수는 없었다. 이에 리키메르는 원로원 의원인 리비우스 세베루스를 후임 황제로 옹립하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로마 제국은 여전히 하나의 국가로서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공동 황제의 개념으로 서로를 승인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왕조가 단절된 이후 새로운 황제로 추대된 레오 1세는 마요리아누스의 서로마 황제 즉위는 승인했지만 리비우스 세베루스는 명목상의 황제에 불과할 뿐이었고 리키메르가 사실상 서로마 제국을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리비우스 세베루스에 대한 승인은 거절하였다. 이 때문에 리키메르와 동로마 제국이 서로 마찰을 빚게 되었고 AD 465년 리비우스 세베루스가 사망하자 서로마 황제의 자리가 2년동안 비워지는 일도 벌어졌다.
AD 467년 동로마 제국의 레오 1세가 서로마 황제로 안테미우스를 지명하여 보냈다. 당시 서로마 제국은 계속된 반달족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었고 또한 안테미우스의 딸과 리키메르의 약혼이 성사되자 리키메르는 안테미우스를 서로마 황제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AD 468년 안테미우스와 레오 1세가 연합하여 추진한 반달족 공격이 최종적으로 실패하자 리키메르는 안테미우스를 폐위시킬 기회만 엿보게 되었다. 그러던 중 AD 472년 4월 동로마 제국의 레오 1세가 안테미우스를 지원하고 리키메르를 견제하기 위해 원로원 의원이자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사위이기도 한 올리브리우스를 수도 로마로 보냈으나 오히려 리키메르는 올리브리우스를 서로마 황제로 옹립하고 안테미우스를 공격하여 AD 472년 7월에 살해해버렸다. 이렇게 4명의 황제를 폐위시키고 옹립하며 서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하던 리키메르였으나 안테미우스를 살해한 다음달인 AD 472년 8월에 병사하였고 리키메르가 올리브리우스 역시 같은 해 11월에 사망하였다. 다만 동로마 제국의 레오 1세는 올리브리우스를 끝까지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 서로마 제국의 멸망

리키메르와 올리브리우스가 연달아 사망하면서 서로마 제국의 통치에 공백이 발생하자 리키메르의 조카이자 부르군트족인 군도바트가 부르군트족의 지지를 바탕으로 글리케리우스를 새로운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옹립하였다. 그러나 동로마 황제 레오 1세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달마티아의 군사령관인 율리우스 네포스를 서로마 황제로 임명하여 함대를 파견하였다. 그러자 부르군트족이 지지를 철회했기 때문에 AD 474년 글리케리우스가 폐위되어 달마티아에 보내졌고 군도바트는 부르군트족에게 달아났다. 이제 네포르가 서로마 황제가 되었으나 로마 원로원과 시민들의 외면을 받았기 때문에 결국 AD 475년 플라비우스 오레스테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네포스는 달마티아로 달아났고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어린 아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황제로 세웠다.
이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서로마 황제가 되고 그의 아버지인 오레스테스가 실권을 장악했지만 AD 474년 새로운 동로마 황제가 된 제노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승인하지 않았다. 이에 AD 476년에 게르만족 출신 용병대장인 오도아케르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면서 오레스테스는 오도아케르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당했으나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나이가 어려 이탈리아 남부의 캄파니아에 연금된 채 지내게 되었다. 이후 오도아케르는 이전의 게르만족 출신 실권자들과 달리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지 않은 채 동로마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 이탈리아에 대한 통치권만 요구하였다. 처음에 동로마의 제노는 오레스테스에게 폐위된 채 달마티아로 달아난 네포스를 서로마 황제로 다시 임명하려고 하였지만 오도아케르가 거절하였다.
이미 오도아케르가 이탈리아를 완전히 장악했고 반달족이 북아프리카를, 서고트족이 히스파니아-갈리아-루아르 지역을, 프랑크족과 부르군트족이 각각 나머지 갈리아 지역을, 수에비족이 히스파니아 북서부를 각각 장악하고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여 이제 서로마 제국의 영토는 이탈리아 본토와 달마티아 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결국 동로마 제국의 제노도 내부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네포스도 AD 480년 글리케리우스의 지지자들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오도아케르를 이탈리아의 통치자로 묵인해야만 했다. 그러나 오도아케르가 사실상 독립적으로 이탈리아를 통치하게 되었기 때문에 오도아케르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킨 AD 476년을 서로마 제국이 최종적으로 멸망한 해로 본다.
비록 오도아케르는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켰지만 여전히 원로원을 유지하는 등 로마 제국의 통치 체계를 바꾸지는 않았기 때문에 로마인의 반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 오도아케르는 달마티아를 공격하여 2년만에 정복하였고 서고트족에게는 이탈리아 북서부 일부를 빼앗겼지만 반달족으로부터 시칠리아를 되찾아왔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에서 제노를 폐위시키기 위해 일어난 일루스의 반란을 지원하였다가 실패하였고 도리어 제노의 요청에 따라 판노미아에 거주하던 테오도리크의 동고트족이 이탈리아를 침공하면서 오도아케르는 AD 493년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이탈리아에는 동고트 왕국이 건설되었고 이후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에게 멸망하는 AD 552년까지 동고트족의 지배를 받게 된다.
– 포이데라티 (foederati)와 서로마 제국의 멸망
로마는 초기 이탈리아 반도의 다른 도시와 동맹을 체결하였는데 이들 동맹도시를 ‘포이데라티 (foederati)’라고 불렀다. 그러나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의 영토가 지중해로 급격히 확대되고 그 과정에서 이탈리아 도시들의 많은 지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로마의 우월적 지위가 유지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이탈리아 동맹 도시들이 동맹시 전쟁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로마 시민권이 이탈리아 동맹 도시로까지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포이데라티는 이탈리아 밖에 있는 로마의 동맹국으로 의미가 변경되었다. 또한 로마 군단은 로마시민들이 중장보병을 이루고 기병대는 동맹국으로부터 제공받은 보조군으로 구성하는 형태로 변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포이데라티는 자연스럽게 용병을 제공하는 동맹국을 지칭하는 의미가 되었다.
로마는 처음에는 동맹국에게 용병을 제공하는 대가로 금전이나 식량을 제공하였지만 3세기의 위기 이후 로마 제국의 재정이 궁핍해지면서 정착할 토지를 제공해주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갈리에누스는 라인강을 넘어 온 알라마니족에게 국경 안의 정책지를 내주고 대신에 국경방어를 맡도록 하였다. 이제 로마 제국은 포이데라티가 된 게르만족에게 토지를 제공하고 자치를 허용하는 대신에 국경수비의 재정 부담을 덜게 되었지만 게르만족의 방어를 게르만족에게 맡겨버리면서 국방의 자주성을 일부 포기하고 말았다. AD 358년 프랑크족이 갈리아 북부에 정착하였고 AD 376년에는 서고트족이 도나우강 남쪽에 정착하여 포이데라티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서고트족이 AD 378년 반란을 일으키고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로마군단을 괴멸시키고 로마 황제 중 한 명인 발렌스까지 전사시키는 일이 일어났다. 뒷 수습을 맡게 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서고트족을 무력으로 제압하지 못하자 다시 포이데라티 협정을 맺고 트라키아 지방을 내어주면서 겨우 사태를 진정시키게 되었다.
비록 이후 테오도시우스 1세가 로마 제국의 동방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고 최종적으로 서방까지 통합하게 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죽음을 눈 앞에 두게 되면서 두 아들인 호노리우스와 아르카디우스에게 각각 제국의 로마 서쪽과 동쪽을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호노리우스와 아르카디우스 모두 어리고 통치능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훈족의 등장으로 촉발된 게르만족 대이동이라는 대위기 앞에 로마 제국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만 비교적 풍족하고 테오도시우스 1세가 동방 정제 시절 구축한 안정적인 기반을 가진 동로마 제국은 위기를 극복해내었지만 테오도시우스 1세가 제대로 통치기반을 마련하지도 못한 채 무능한 호노리우스에게 맡겨져 버린 서로마 제국은 궁핍한 재정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에 따라 서로마 제국은 국경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게르만 부족과 연이어 포이데라티 협정을 맺는 방식으로 사태 수습에 나섰다. 비록 AD 451년 아이티우스가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훈족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포이데라티 협정를 맺은 프랑크족, 부르군트족, 동고트족의 도움 덕분이었으나 로마 시민을 징병하여 훈련시키는 것보다는 포이데라티에게 군사력을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서로마 제국은 더욱 쇠락해졌다. 결국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와 같은 게르만족 출신의 군사령관에 의해 로마 황제가 마음대로 교체되는 혼란을 겪은 끝에 게르만족 용병대장인 오도아케르가 최후의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키면서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 서로마 국경의 발렌티니아누스 –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 중에서

발렌티니아누스가 아직 밀라노에 머물 때 궁정의 마지스테르 오피키오룸 (master of the offices) 우르사키우스 (Ursacius)에게 하찮은 대우를 받고 분을 삭이던 알레마니족이 명년이 시작되자 마자 갈리아를 침공했다. 라인 전선을 지키던 카리에토 (Charietto)가 늙고 무능한 세베리아누스 (Severianus)가 합류한 속에서 알레마니 분파와의 회전에서 패하고 두 백 (伯) 모두 전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효과적인 도주법에도 밝았던 적들은 많은 전리품과 약탈물들과 함께 다시 국경 건너 도망간 이후로 다갈라이포스 (Dagalaiphus)는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파리(Paris)로 자신의 궁정을 옮길 것을 생각하고 출발하려던 황제에게, 365년 11월 1일에는 동로마 트라키아에서 고트족을 뒷배경으로 하는 프로코피우스의 내란과 서로마에서의 알레마니족의 침공 소식이 동시에 전해졌다. 외정 계획을 바꾸어 내부의 적을 칠지에 대한 고민의 끝에 그는 “프로코피우스는 나 자신과 내 동생의 적이지만, 알레마니는 전 로마의 적이다”라는 말을 토한 채 알프스를 넘어 전선으로 향한다. 아에퀴티우스 (Aequitius)를 대장군으로 승진시켜 동방의 문제를 처리케 했는데 일단 서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참제의 야심을 적절히 좌절시켰다. 황제가 랭스 (Rheims)에 도착했을 때는 아프리카 속주 역시 위협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기관 (notary) 네오테리우스 (Neoterius), 도미티스키의 장교 마사우키오 (Masaucio)와 자기 지인인 가우덴티우스 (Gaudentius) 등을 파견했다. 그 옆의 트리폴리타니아 (Tripolitania) 역시 인근의 무어인들의 침입에 고통받고 있었다.
파리에서 황제는 아들 그라티아누스 (Gratian)와 함께 집정관이 되는 다갈라이포스 대신 요비누스가 알라마니 문제를 맡게 하고 전의 전투에 비겁하게 군기 (軍旗)를 빼앗기고 도주한 바타비족 (Batavian)과 헤룰리족 (Heruli) 부대를 로마군법에 따라 노예로 팔겠다는 노여움 까지 표하며 분위기를 일신하려 했다. 366년 한 해, 효과는 곧 나타났다. 메츠(Metz) 부근 스카르포나(Scarponna)에서 방심을 틈탄 기습으로 일단의 알레마니 족을 물리쳤고 모젤강(Moselle) 인근에서 약탈 후 멱을 감으며 휴식을 취하는 다른 알레마니족에게도 큰 승리를 거두었다. 패잔병들은 마지막으로 살롱앙상파뉴 (Chalons in Champagne) 카탈라우니아 평야 (Catalaunian plains)의 본진으로 모여들었으며, 이들과의 결전에서 약간의 위기는 있었지만 6,000명의 알레마니족을 참하는 큰 전과를 올리며 파리로 개선한 후 다음 해 집정관의 영예가 예정된다. 이 해에 프로코피우스의 난이 진압된 소식이 그의 목과 함께 이송되었어, 이로써 재위 초의 위기가 일단 진정되었다. 다음 해 중병에서 깨어난 발렌티니아누스는 근심 속에 그라티아누스를 군대 앞에서 공동황제로 선언했다. 이 즈음 황제는 트레베 (Treves)에 있었는데 브리타니아에서 해안을 수비하던 백 (伯)이 사망하는 등의 소동에 대해 전해 듣고 도미스티키 백 (伯) 세베루스 (Severus)에게 일차 조사시키게 한 뒤 테오도시오스 (Theodosius:
테오도시오스 황제의 아버지)를 보내 이 문제를 해결하게 한다.
368년, 황제는 무방비된 도시 모군티아쿰 (Moguntiacum) 즉 현 마인츠 (Mainz)에서 기독교축제 중 알레마니의 한 왕인 란도 (Rando)가 한 약탈에 대한 보복으로 아들과 함께 마인 (Main) 강을 건넜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최후로 라인을 건넌 로마 황제다). 사실 그 직전엔 친로마에서 적대로 돌아선 알라마니의 궁정에 내분을 야기해 왕을 암살해 침략을 일시 막았었다. 대장군 요비누스와 세베루스가 함께 한 황제의 친정을 세바스티아누스 (Sebastian) 백 (伯)이 (율리아누스의 페르시아 원정 때 프로코피우스를 도운 이) 일리리아와 이탈리아의 부대를 이끌고 라에티아 (Rhaetia) 방면에서 도우며 수많은 마을들을 불태웠으며 전력에 완연한 열세에 있는 알레마니군은 뷔르템베르크 (Wirtemberg)의 솔리키니움 (Solicinium) 산으로 도망가 있었다. 이들을 퇴치하러가다가 황제 자신이 복병에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으나 산을 사방에서 포위하였다. 절망적인 항전을 계속하던 알라마니족은 죽거나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도망갔다. 이를 계기로 이 곳에서의 주도권을 쥐게 된 황제는 트레베로 귀환 한 후 라인전선의 요새를 보수 건설하는 등으로 국방을 강화하였다. 역시 색슨족의 난동도 이 즈음 세베루스가 투입되어 진압되었는데 항복한 적을 배신하는 기만적 방법을 사용하기 까지 했다. 절망에 찬 알레마니의 지속적 대항에 발렌티아누스는 점점 더 잔인한 꾀들을 생각해 좀 더 멀리사는 부르군디족과의 싸움을 더욱 부추기고자 재물로 그들을 불러들이고서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것은 마크리누스 (Macrinus)라는 알레마니왕에 대한 미칠 듯한 증오 때문이었는데 그를 잡기 위해 후에 몸소 라인을 건너기도 했었다. 다시 한 참 후에는 외적 정세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모르지만 그와 몸소 회담까지 한 후 동맹관계에 들어가기도 했다.
갈리아와 다뉴브 전 국경을 누비며 전선을 관리하던 황제가 바다까지 건너 가지는 않았는데, 아프리카와 브리타니아의 문제 만큼은 테오도시오스란 장군에게 맡겨 졌다. 373년 아프리카에서 오랜 폭정을 해온 로마누스 (Romanus)에 맞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 곳의 무어족 속국왕이 죽자 피르무스 (Firmus)가 로마누스가 아끼는 동생 자마 (Zamma)를 살해한 것이다. 로마누스와 피르무스는 다투어 황제의 궁정에 탄원을 하였다. 이번에도 궁정의 고관과 끈을 가진 로마누스 측의 의견만 반영이 되어 토벌이 결정되고 요비누스의 후임 대장군 테오도시오스가 파견되게 되었다. 여기서 잠깐 그의 행적을 쫓아 브리타니아 평정 과정으로 돌아가 보자. 황제의 명을 받고 그는 헤룰리 (Heruli), 바타비아 (Batavians) 요비 (Jovians), 빅토르 (Victors) 등의 부대를 이끌고 샌드위치 (Sandwich)에 상륙해 런런 (London)으로 들어간다, 주변에 산재한 게릴라 부대들을 섬멸한 뒤 질서를 바로잡고 다시 투항자들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군기를 확립해 지역을 안정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발렌티누스 (Valentinus, 로마에서 학정을 한 막시미누스의 동생)라는 반란의 주모자의 음모를 분쇄하고 섬을 회복하여 새로이 황제단의 이름을 따 발렌티아 (Valentia)란 속주를 추가했다.
돌아와 한동안 알레마니족 등을 다루던 테오도시우스는373년 이번에는 갈리아에서 새로 모은 소병력을 배에 태워 아를르 (Arles)에서 바다 건너 마우렌타니아 (Maurentania)의 이길길리스 (Igilgilis)의 해변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모든 갈등의 원흉이었던 사령관 로마누스 (Romanus)을 쫓아내고 부사령관 빈센티우스 (Vincentius)에 대해 체포명령을 내렸는데 이것으로 아프리카의 문제는 어느 정도 끝난 것이었다. 시티피스 (Sitifis)로 진입해서 피르무스의 평화 제의와 인질을 일시 받아들여 시간을 끌며 주변 상황을 점검하고 작전을 짰다. 계속되는 평화요구를 물리치고 투부수툼 (Tubusuptum)을 거치며, 피르무스 형제들과 몇 차례 전투에서 승리한다. 놀란 적들은 기독교 사절까지 동원해 용서와 평화를 구했으나 계속해서 이코시우 (Icosium)과 티파사 (Tipasa)를 거쳐 카이사리아 (Caesarea)에 입성했다. 아프리카 부족들은 로마의 군사기술에 제대로 맞설 수 없었고 피르무스는 이사플렌세스족 (Isaflenses)에게로 도망갔는데, 키케로의 “salutaris vigor vincit inanem speciem clementiae (온전한 힘이 헛된 자비를 보이를 보이는 것보다 우월하다)”란 말을 모토로 삼은 테오도시우스의 원정은 무자비한 것이었다. 로마군과의 힘겨운 싸움 끝에 그 왕 이그마젠 (Igmazen, 이그마젠은 베르베르족이 자칭명으로 자유롭고 고귀한 사람들이란 뜻이라 함. 대부분의 전투는 Mauretania Caesariensis에서 일어난 듯 함)은 피르무스를 넘겨 줄 수 밖에 없었다. 이를 일찍 예감한 무어인 폭군은 그를 지키는 간수들과의 술로 고통의 감각을 무디게 한 후에 로마의 고문과 개선식의 치욕을 피하려 스스로 목을 매었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회복 후 테오도시오스에 의해 아프리카를 로마에서 떨어져 나가게했던 로마누스와 그를 둘러싼 궁정관리들의 부패상의 극악한 수준이 오에 (Oea, 현 트리폴리시로 나머지는 두 곳은 폐허로 변해있었다), 렙키스 (Leptis), 사브라타 (Sabrata)의 세도시 연맹을 의미하는 트리폴리타니아 (Tripolitania) 주민들과 벌였던 갈등에서 드러났다. 아우스토리아니족 (Austoriani)에게 위협을 받던 렙키스 주민들의 보호 요청을 아프리카 백 (伯) 로마누스는 4,000 마리의 낙타를 군수품으로 요구하며 사실상 거절했었다. 트리폴리타니아 의회와 민중은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 이 일을 탄원했지만 이미 렙키스와 오에는 이미 야만족의 침입에 엄청난 고통을 그 과정에서 겪고 난 후였다. 중간에서 궁정에 끈을 가진 로마누스는 황제의 조사를 이래저래 저지했다. 답답한 시민들은 다시 한번 사절을 파견했고 이미 눈과 귀가 가리워진 황제는 뒤늦게 팔라디우스 (Palladius)란 부패한 관리를 파견해서 조사시키지만 로마누스의 뇌물과 협박을 받은 그가 거짓 보고를 하는 바람에 도리어 총독을 비록한 고발자 다수가 “신성한” 임금의 귀에 거짓말을 한 죄 등으로 극형을 받게 되었다. 어이없고 부당한 판결에 침묵하게 되어 수 년간 묻혀졌던 사건이 테오도시오스의 조사에 의해서야 로마누스가 가진 서신에 팔라디우스의 이름이 발견되어서야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에게 보고되었었으며, 이에 팔라디우스는 소환되는 도중 자신이 받을 잔인한 처형을 짐작하고 자살했다. 로마누스는 당시에 레미기우스 (Remigius)라는 마지스테르 오피키오룸을 뒷배경으로 하고 있었는데, 은퇴한 레미기우스 역시 자신의 영지에서 목을 매었다. 암미아누스는 로마누스를 언급하면서 발렌티니아누스가 “군관리들의 방약무인”을 드높인 제국의 첫 황제라고 했는데, 로마누스는 이런 조사를 받으면서도 끝내 사형을 피했다. 자신과 함께 전선에서 작전을 수행했던 테오도시우스에 의해 모처럼 그의 귀가 열리긴 했지만 같은 군인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는지 로마누스에 대해서는 움직여지지 않았다. 사실상 아프리카 문제의 원흉이었던 로마누스는 경미한 처벌에 그쳤음에도, “신성한 귀에 불경한 죄”를 내세워 아예 황제 앞에 아무 말도 함부러 하지 못하게 하는 괴상한 법이 그 당대에 있었던 것이다.
말년을 향하는 발렌티아누스는 대체로 고향 가까운 곳으로 돌아와 있었다. 발렌티니아누스의 요새는 종종 국경 너머를 침입할 정도였는데 쇠잔해져 있는 콰디족 (Quadi)의 항의를 받자 공사를 맡던 마르켈리아누스 (Marcellianus)가 그 왕을 초대해서 살해한 사건으로 자유사르마티아인들과 합심해 판노니아에 침입했을 때 매시아의 공 (公)이었던 테오도시우스가 격퇴한 일이 있었다. 한 사람은 극악무도한 막시미니우스의 다른 한 사람은 바로 아프리카에서 피르무스와 싸우고 있는 테오도시우스의 아들들이었다. 사실 사태에 대한 공정한 처리가 올바른 해법이었지만 잘못을 인정할 용기는 황제에게 없었고, 도리어 콰디족과 사르마트족에게 복수하기 위해 몸소 다뉴브를 건넜으며 엄청난 학살을 하고 별다른 손실없이 복귀했다. 콰디족 사절의 애걸에도 불구하고 다음 해의 비슷한 원정을 준비하다가 375년 11월에 사망하였다. 그에겐 중혼의 혐의가 있어 그라티아누스의 어머니인 세베라 (Severa) 외에도 유스티나 (Justina)와 결혼해 네 살난 아들을 두기도 했다. 전자는 아마 교회법에 어긋나는 이혼을 했을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 콰디족과 사르마트족의 소동 와중에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의 말년 결혼에서 난 딸이 프로코피우스의 손을 거쳐 그 지역에 머물러 있다가 동란의 해를 가까스로 면해 그의 후계자인 그라티아누스와 맺어지게 되어서 발렌티니아누스조는 이전 플라비우스조의 정통성을 잇게 되었다. 황제가 있던 브레게티오 (Bregetio)의 병영에서는 멜로바우데스 (Mellobaudes)와 아에퀴티우스 (Aequitius)가 주동이 되어 유스티나와 그 어린 아들을 불러와 후자를 황제로 선언했다. 그라티아누스는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애매모호한 방법으로 그가 아버지의 모든 영토를 물려받아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로마 47대 황제로 이민족들과의 전쟁에 일평생을 바친 ‘최후의 서방 대제’ 발렌티니아누스 1세 (Valentinianus Ⅰ)에 대하여
발렌티니아누스 1세 (Valentinianus Ⅰ)는 364년부터 375년 죽을 때까지 로마 제국의 47대 황제로 제국을 침입한 이민족들과의 전쟁에 일평생을 바친 ‘최후의 서방 대제’ (The Last Great Western Emperor)였다.
발렌티니아누스는 판노니아의 밧줄만드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군대에 들어가 아버지와 함께 아프리카에서 복무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일개병사에서 시작해 혼자 힘으로 상당한 계급까지 승진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율리아누스 휘하에서 부관으로 있을 때 기독교 신앙을 고집해 율리아누스의 눈밖에 났다고 한다. 그는 363년 율리아누스의 페르시아 원정에 참여했으며, 율리아누스의 전사 이후 황제가 된 요비아누스는 발렌티니아누스를 진급시킨 직후 세상을 떠났다.
요비아누스가 죽은 지 10일 만에 그는 니케아 (지금의 터키 이즈니크)에서 황제로 선포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서 3월 28일에 그는 동생 발렌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고 제국의 동부를 맡게하고 자신은 서부를 다스렸다. 황제가 된 이후 발렌티니아누스는 계속된 야만족의 침입과 맞서 싸워야 했다. 365년 갈리아에서 알레마니족의 침입으로 로마군이 패하자 그는 파리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계속 그 곳에서 머물면서 야만족과 싸웠다. 동생 발렌스가 프로코피우스의 반란으로 도움을 요청했을 때 그는 알레만니족과의 싸움으로 병력을 빼 수 없다고 그 도움을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프로코피우스는 우리 형제만의 적이지만, 알레마니족은 로마 세계 전체의 적이다.”
발렌티니아누스의 장군인 요비누스는 알레마니족을 상대로 3차례 승리하고 그 후 여러 해 동안 갈리아 지방을 안전하게 했으나 발렌티니아누스는 367년 브리타니아에서 피트족과 스코트족의 침입을 받았다. 자신은 갈리아에 있어야 했으므로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황제 테오도시우스의 아버지)에게 브리타니아 원정을 맡겼는데 테오도시우스는 성공적으로 원정을 마쳤다. 이후 발렌티니아누스는 아들의 왕위계승권을 강화하기 위해 당시 9세인 아들 그라티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그는 트리어에서 7년 동안 머물면서, 제국의 국경을 안정화시키고 373년 갈리아에서 돌아왔다.
374년 판노니아의 도나우 강 건너편에 살던 콰디족이 로마가 요새를 세운데 불만을 품고 제국의 국경을 침입하였다. 이듬해 발렌티니아누스는 콰디족의 사절을 만난 자리에서 갑자기 뇌졸증으로 쓰러졌고 분노한채로 죽고 말았다.
– 발렌티니아누스 1세 (Valentinianus Ⅰ)

.출생: AD 321년 7월 3일, 크로아티아 빈코비치
.사망: AD 375년 11월 17일, 헝가리 코마롬 Szőny
.본명: Valentinian I
.배우자: 저스티나
.부모: 그라티아누스 더 엘더
.자녀: 발렌티니아누스 2세, 그라티아누스, Galla, Grata
.재위: 364 ~ 375년
.전임: 요비아누스 / 후임: 발렌스, 그라티아누스, 발렌티니아누스 2세
“그러나 아무리 신랄한 비평가라도, 제국을 통치하는 문제와 관련된 황제의 실패 없는 철저함에서는 잘못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
로마 제국의 제47대 황제로 최후의 서방 대제 (The Last Great Western Emperor)다.
364년부터 375년까지 재위했으며, 여섯 번째 세습왕조인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의 창건자이다. 전통적으로 정규군의 병참기지이자 수많은 군단병들을 배출한 동네인 판노니아 속주 출신으로 일개 병졸에서 능력 하나로 장교를 거쳐, 율리아누스, 요비아누스 밑에서 부관과 장군까지 지낸 뒤, 로마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다. 즉위 후, 동생 발렌스를 공동황제로 지명해 본인은 서방을, 동생에게는 동방을 담당하도록 한 뒤, 제국을 침입한 이민족들과의 전쟁에 일평생을 바쳤다.
○ 생애
– 즉위 이전
그라티아누스 푸나리우스 (혹은 대 그라티아누스)의 아들로 321년 판노니아의 키발라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대 그라티아누스는 원래 밧줄을 만들어 팔던 사람이었는데, 힘이 세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이후 그는 군에 입대하여 아프리카 코메스의 지위까지 이르렀다. 어린 발렌티니아누스는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다니면서 자랐다. 대 그라티아누스는 배움이 짧은 것이 한이 되었는지 아들에게는 교양 교육을 시켰는데, 단순히 읽고 쓰는 것뿐만 아니라 예술이나 고전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에 입대했다. 그러나 그의 군 경력은 그다지 평탄하지 못했다. 356년 그는 율리아누스와 콘스탄티우스 2세 간의 정치적 대립에 휘말려 해임되었고, 일설에 의하면 율리아누스가 즉위한 후 등용되었다가 종교적 문제로 또 해임되었다고 한다. 그가 다시 군에 들어온 것은 요비아누스 황제 때였다. 요비아누스는 발렌티니아누스의 용맹을 높이 사 스콜라이 스쿠타리오룸의 장교로 임명했고, 발렌티니아누스는 요비아누스의 장인을 따라 갈리아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 이후 제국 동방으로 돌아온 발렌티니아누스는 안키라에 파견되어 있었다. 그러나 364년 초, 요비아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던 길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고위 문무관들은 니케아에 모여, 다음 황제로 누구를 추대할 것인가를 놓고 회의를 열었다. 그들이 두 명의 후보를 제치고 선택한 사람은 다름아닌 발렌티니아누스였다.
– 즉위 이후

발렌티니아누스는 자신이 황제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니케아로 달려왔다. 앞서 율리아누스와 요비아누스의 잇따른 죽음을 목격한 병사들은 새 황제에게 공동황제를 지명할 것을 요구했고, 발렌티니아누스는 자신의 친동생 발렌스를 공동황제로 임명했다. 발렌티니아누스가 제국 서방, 발렌스가 제국 동방을 통치하게 되었으며, 두 형제는 같은 해 8월경까지 제국을 나누어 다스리는 데 필요한 준비들을 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발렌티니아누스는 제국 서방의 밀라노로 향했고, 그곳에서 본격적인 제국 통치를 시작했다.
.군사정책
발렌티니아누스는 치세 대부분을 라인 강 – 다뉴브 강 유역의 변경 지대에서 보냈을 정도로 제국의 방어에 힘썼다. 집권 초기~중기에는 무어인들이 북아프리카를, 알라마니족이 갈리아 변경지대를, 색슨족과 프랑크족이 갈리아 해안 지대를 침략하는 일이 잦았으며, 브리타니아에서도 소요 사태가 발생했다. 집권 후기에는 주로 다뉴브 강 유역의 사르마티아족과 콰디족이 판노니아와 발레리아의 변경지대를 침략했다. 황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알라마니족과 사르마티아족, 콰디족에 대한 원정에 나섰으며, 다갈라이푸스, 세베루스, 요비누스, 테오도시우스 등 휘하의 유능한 장군들을 파견하여 멀리 떨어진 속주나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침략에 대응했다.
이민족의 침략에 더해서, 제국 내부에서 반란도 발생했다. 365년 발생한 프로코피우스의 반란은 발렌티니아누스의 정통성이 언제든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369년에는 브리타니아에서 발렌티누스의 반란이, 372년에는 아프리카에서 피르무스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두 반란 모두 테오도시우스 (테오도시우스 1세의 아버지)가 진압하였다.
한편으로 발렌티니아누스는 변경 지대에 적극적으로 요새를 쌓고 보수하기도 했다. 황제가 세운 요새들은 적군을 감시하고 강을 순찰하는 선단들을 보호하기 위해 지어졌으며, 어느 정도는 황제의 군사적 업적을 선전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행정정책
거의 변경지대에 머물러 있었던 것과는 별개로, 서민들을 위한 정책에도 비교적 관심을 보였다. 발렌티니아누스는 ‘데펜소레스 플레비스’를 조직하여 농민들이 따로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도 법적인 변호를 받을 수 있게 했고, 로마 시민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공급하는 정책을 보완했다. 한편으로는 양돈 농가, 광부 조합, 도시의 짐꾼이나 소방대 등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그들의 권리를 보장해 주고자 하기도 했다. 에드워드 기번에 의하면, 황제는 갓난아기를 버리는 것을 금지하고 로마에 학교와 의료소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정책들이 제대로 수행되었는가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는데, 황제가 제국 전역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통제하기는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종교정책
발렌티니아누스는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인이었으나, 종교적으로는 중립과 관용을 지킨 것으로 평가받아 왔다. 그는 희생 제의나 남을 저주하는 의식만 하지 않는다면 이교 제의를 수행하는 것도 허용했다. 한편으로, 그는 사제들의 부패를 막기 위해서 사제들이 과부에게 유산을 받거나, 과부나 고아의 집에 분별없이 드나드는 것을 금지했다.
– 원로원과의 대립
원로원과 가장 치열하게 대립했던 황제들 중 한 명으로 유명하다. 측근 막시미누스를 로마에 파견하여 마술이나 간통 혐의를 빌미로 원로원 계층을 대거 숙청했으며, 이 과정에서 원로원 의원의 특권이었던 고문 금지도 무시했다. 황제의 측근들이 고위 관직을 장악하고 원로원에까지 진입함으로써 원로원의 불만은 커졌고, 그들은 로마의 행정정책을 두고 황제와 사사건건 대립했다.
물론 발렌티니아누스는 전적으로 원로원을 배척하지는 않았다. 특히 군사정책이나 종교정책은, 그가 어느 정도 원로원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나 황제와 원로원 간의 반목은 깊었고, 그것은 황제의 이미지가 사후 상당히 왜곡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원로원 측이나 도시 지식인들이 기록한 사료에는 황제와 그 측근들을 주로 ‘폭력적이고 잔인하며 무식하고 탐욕스럽다’고 비판하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과장되었거나 왜곡된 것도 적지 않다.
– 죽음
375년 겨울, 황제는 콰디족 사신단을 만나고 있었다. 사신들은 황제에게 “변경을 약탈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떠돌아다니는 도적떼이며, 우리 영토에 먼저 요새를 세운 것은 당신들이지 않느냐”고 변명했다. 이에 분노한 황제는 사신단에게 욕을 퍼부으며 꾸짖다가, 갑자기 뇌졸중을 일으켜 쓰러졌다. 신하들은 급히 의원을 찾았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황제가 역병에 걸린 병사들을 치료하라며 의사들을 다른 데로 보냈고 근처에 의사가 남아 있지 않았다. 마르켈리누스는 이후 의사가 오긴 왔으나 황제의 병을 나아지게 할 수는 없었다고 말한다. 황제는 그날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해는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성 사도 성당에 안장되었다.
황제의 죽음 직전에 혜성이 떨어지는 전조가 나타났다고 한다. 혹은 황제가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황후가 상복을 입은 채 울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발렌티니아누스의 가족사
발렌티니아누스는 두 명의 부인과의 사이에서 2남 3녀를 두었다. 첫 번째 부인 마리나 세베라와는 황제가 되기 이전에 결혼했는데, 369-370년경 이혼하고 두 번째 부인 유스티나와 재혼했다. 일설에 따르면, 세베라 황후와 유스티나는 서로 아는 사이였는데, 어느 날 함께 목욕을 했다고 한다. 그날 저녁에 황후는 별 생각 없이 황제에게 “유스티나는 정말 아름답다” 고 칭찬했고, 그 말을 들은 황제는 도대체 얼마나 예쁜 아가씨인지 보고 싶어졌다고 한다.
자녀들은 거의 요절했다. 두 아들 그라티아누스와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황제가 되기는 했지만 젊은 나이에 암살당했고, 딸 플라비아 갈라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황후가 되었으나 셋째아이를 낳다가 난산으로 사망했다. 나머지 두 딸 그라타와 유스타는 결혼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요절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키가 크고 강건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으며, 금발에 잿빛 눈이었다고 한다. 대단한 다혈질로 유명했다. 마르켈리누스는 황제가 전쟁에 있어서는 신중하며, 기억력이 좋고 글씨를 잘 쓰며, 새로운 병기를 고안하는 것을 좋아하고, 방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만 욱하는 성격과 잔인함, 신랄한 말투 등에 대해서는 비판했다.
에드워드 기번에 의하면, ‘인노켄티아’와 ‘미카 아우레아’라는 이름의 곰 두 마리를 키우며, 죄인을 잡아먹게 했다고 한다.
아프리카누스라는 이름의 지방 지사가 더 큰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로 승진하고 싶어했다. 이 말이 황제의 귀에 들어갔고, 테오도시우스도 아프리카누스의 뜻을 지지했다. 그러자 황제는 테오도시우스를 향해 “그러면 갔다 오시오, 코메스. 그 자가 다스리는 지방을 바꾸고 싶다고 하니, 그대가 가서 그 자의 머리도 바꾸어 놓으시오.”라고 하는 일화가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