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 (公園)의 역사
“지금 이곳에 공원을 만들지 않는다면 100년 후에는 이만한 크기의 정신병원이 필요할 것이다.” – 프레드릭 로 옴스테드
공원 (公園)은 대중에게 개방되어 시민이 산책과 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최초의 공원은 중세 시대의 잉글리시 디어 파크이다. 주변에 벽이나 두터운 울타리가 있어서 수사슴과 같은 사냥감들을 가둘 수 있었다. 평민이 이 디어 공원에서 짐승을 사냥하는 일은 금지되었다.
디어 파크는 16세기부터 맨션과 컨트리 하우스에 조성된 공원으로 발전했다. 이런 공원은 주인의 부와 지위를 과시하는 용도로 사용됐다. 공원 조경은 자연 경관을 향상시킨 조경 건축가들의 정원에서 시작됐다.
○ 역사
- 고대의 공원
공원이 처음 생긴 것은 문명이 탄생하면서부터였다. 보통 역사학계에서는 국가가 탄생하기 이전, 인간 집단이 모여 도시를 이루어 가는 과정을 문화(文化)라고 하고, 도시국가가 탄생한 이후를 문명(文明)이라 한다. 문명의 탄생은 곧 국가를 다스릴 사람을 필요로 했고, 이로써 왕이 탄생한 것이다. 국가의 탄생과 더불어 탄생한 권력자들은 자신의 성, 혹은 궁궐 안에 인위적으로 자연을 끌어들여 조경을 하거나, 혹은 사냥터를 만드는 등의 사치를 했다. 이것이 바로 공원의 시작이었는데, 그러나 이 시대의 공원은 권력자, 혹은 귀족만 이용할 수 있을 뿐,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public’을 내포하는 현대의 공원 개념과는 달리 공공장소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 시대의 공원은 사유지 안에 만들어진 정원의 개념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현대의 공원도 엄밀히 따지자면 공공정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유적은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중국 문명 할 것 없이 다 발견되고, 기록에도 나온다. 서기전 2750년 무렵 수메르의 왕 길가메시가 도시의 1/3이 과수원으로 되어 있는 도시를 방문하였다는 기록을 통하여 고대에도 공원 비스무리한 게 있었다는 걸 추정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공원은 페르시아 왕들의 사냥터로 이용된 넓은 구역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사냥만을 위한 공간이었던 이곳에 점차 승마를 할 수 있는 공간과 오두막 등이 건설되면서 인공적으로 꾸며지게 되었다. 이를 파이리다에자(pairidaeza, 그리스어의 파라데이소스(paradeisos))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낙원을 뜻하는 Paradise의 어원이 되었다. 파이리다에자는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아랍의 정원과 공원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로마의 공원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숲 지역인 테로트로피움(therotrophium)과 사적지를 담으로 둘러 싼 공원인 비바리움(vivarium)의 형태였다. 전자는 1460년 무렵 체이스(chase)로 발전하였으며, 후자는 1600년 무렵의 비바리움(vivarium) 혹은 1712년의 동물원(menagerie)이 각각 되었는데, 각각 현대의 자연공원과 도시공원으로 이어지게 된다.
중국에서는 주나라 문왕이 서기전 1030년 경 영유(靈囿)라는 공원을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원(苑)은 황실의 공원이나 사냥터를 뜻하고, 유(囿)는 담장으로 둘러친 곳을 의미한다. 이것은 훗날 한자문화권에서 공원이란 단어에 쓰는 원(園)이라는 개념의 유래가 되었다. 이외에도 그리스나 아랍, 아즈텍, 잉카에도 공원이 있었고, 특히나 페르시아나 로마의 공원이 중세 유럽에 생기는 공원들의 전신이 된다.
- 중세의 공원
Park라는 말은 고대 프랑스어로부터 유래된 단어로서, 본래 사냥감 보호구역을 뜻했다. 귀족들이 오락으로서의 사냥을 즐기기 위해 울타리를 쳐서 그 안에 동물을 키우고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와 사냥하지 못 하게 함과 동시에 사냥감이 울타리 밖으로 이탈하지 못 하게 한 것이다. 이로 인해 Park는 울타리로 둘러친 공간을 뜻하게 되었으며, 이 말은 곧 공원이라는 단어에서 원(園)에 해당되는 것이다. 즉, 본래의 자연공간과는 울타리로 구분되는 인위적인 자연공간이자 오락의 장소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냥감 보호구역은 영국에서 그 유래가 시작된다. 이를 잉글리시 디어 파크(English deer park)라 하는데, 말하자면 ‘영국식 사슴 보호구역’ 정도가 되겠다. 7왕국 시대부터 이러한 형태가 성립된 것으로 보이며, 이는 앵글로색슨 헌장(Anglo-Saxon charters)라는 일종의 토지 문서 같은 곳에도 나타나 있다. 고대 영어로는 이것을 heġe(울타리) 혹은 ġehæġ(봉쇄된 땅)라 불렀다.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 영국은 노르만 왕조가 성립되었는데, 윌리엄 1세는 기존의 사냥감 보호구역을 점유하고, 삼림법을 제정하여 ‘Royal forest’를 만들었다. 중세 영어에서 포레스트라는 말은 ‘보존’이라는 말에 더 가까우므로, ‘왕의 숲’보다는 ‘왕의 보호지’ 정도로 부르는 것이 맞다고 할 것이다. 이때의 공원은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지정하는 현대의 국립공원이나 도립공원 같은 자연공원과 형태가 비슷했다. 카롤링거 왕조나 메로빙거 왕조 역시 비슷한 시스템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왕의 초대로 귀족들도 왕의 숲에서 사냥을 할 수 있었고, 점차 왕족과 귀족들을 위한 공간으로 확장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귀족들도 왕실의 허가 하에 자신들만의 공원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왕실 자체도 계속해서 왕의 숲을 늘려 나갔다. 이것이 12세기로 가면서 점점 많아져 잉글랜드 남부의 3분의 1이 왕의 숲으로 지정되었을 정도다. 에섹스 주 전체가 왕의 숲이 된 적도 있었고, 1079년에 왕의 숲으로 지정된 뉴포레스트(New Forest)는 현재까지도 뉴포레스트 국립공원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당시에 지정되었던 왕의 숲 중 일부는 아직도 영국 왕실 소유로 내려오고 있다.
사냥터를 왜 이리 끝도 없이 늘렸냐 하면, 바로 사냥감 때문이었다. 사슴들은 대개 광활한 목초지에서 생활하기도 하거니와, 보호구역 내에서 왕이 마음껏 사슴 사냥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군데에서 사슴이 계속해서 자생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냥도 오락이라 한 번 빠지면 중독성이 어마어마하다. 조선의 왕들이 신하들한테 혼나면서도 계속 사냥을 나갔던 게 아니었다. 조선에서도 왕의 사냥터에 금줄을 둘러 백성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 하게 했는데, 현재의 서울특별시 성동구 응봉동, 성수동 일대가 그런 사냥터였다고 전해진다. 특히 폭군으로 유명했던 연산군은 사냥터를 끝도 없이 늘려서 거의 지금의 성동구, 광진구, 동대문구까지가 사냥터가 되었던 적도 있었다.
이렇듯 병폐는 심각했지만, 이렇게 보존된 구역은 의외의 쓸모가 있었는데, 바로 목재가 보존되었다는 점이었다. 평민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 하므로 벌목을 할 수 없었고, 나무들은 그대로 보존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존된 나무들은 대항해시대에 접어들며 배를 만드는 데에 쓰일 수 있었다.
2.3. 르네상스 ~ 초기 근대의 공원[편집]
14세기부터 귀족들도 각자 디어 파크를 갖게 되었고, 그곳에 머물며 사냥을 할 수 있도록 별장(Country house)를 지었다. 그러니까 현대의 골프장과 같은 느낌으로 발전한 것이다. 다만 거기서 즐기는 게 골프가 아니라 사냥이었을 뿐.
그리고 차츰 사냥 같은 오락이 아닌 휴양에 중점을 두고 꾸며지기 시작한다. 자신이 소유한 토지의 조경을 신경 써서 꾸미면서 부와 지위를 과시하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 공원 조경은 바로 이렇게 인위적으로 자연 경관을 울타리 안으로 들이면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18세기에 접어들면 유럽 각지에서 시민혁명이 터져 귀족이 소유하던 성이나 별장 등이 시민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정원들이 공공에 개방되면서 초기 도시공원의 형태가 갖추어지기 시작한다. 일본에서도 근대 이후에는 황실 소유의 정원을 시민들에게 개방하여 공원으로 조성하면서 신주쿠 교엔이나 여러 은사공원이 생겨났고,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조선왕조가 망한 이후로 경복궁이나 창덕궁 같은 궁궐들이 대한민국 정부의 소유로 넘어가면서 공공에 개방되는 과정을 거쳤다.
- 현대의 공원
오늘날의 도시공원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세기 산업혁명 이후부터였다. 산업화가 시작됨과 동시에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었고, 이렇게 변화하는 도시 속에서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여러 사람들의 휴양을 위해 도시공원을 만들었다.
최초로 공공기관에 의해 계획적으로 조성된 공원은 미국 뉴욕의 센트럴파크이다. 본래 센트럴파크는 습지 지형에 돼지농장과 판자촌 등이 있던 땅이었는데, 1850년대에 공원조성 운동이 일어 공원으로 조성하게 되었다.
당시 맨해튼의 도시설계자였던 로버트 모지스가 이 구역을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만들고자 설계에 매진하던 도중, 누군가가 조언을 했다고 한다.
“지금 이곳에 공원을 만들지 않는다면 100년 후에는 이만한 크기의 정신병원이 필요할 것이다.” (프레드릭 로 옴스테드)
결국 삶의 휴식처를 넣지 않으면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질환자가 늘어날 것이라는 예견이다. 이러한 조언을 수용한 옴스테드는 이 버려진 습지를 일터가 아닌 휴식처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10만 수레의 돌과 흙이 동원되었으며, 50만 그루가 넘는 나무와 관목을 심고 언덕과 풀밭, 호수까지 만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바쁜 도시 중 하나인 뉴욕에 조성된 거대한 녹지인 센트럴파크는 ‘도심에서 자연으로 최단시간 탈출’ 이라는 옴스테드의 설계 철학이 확고히 드러난다. 센트럴파크는 전 세계적으로 도시공원 설계의 전형적인 표본이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종래의 공원이 귀족적인 색채를 강하게 풍기는 정원 형태의 공원이었다면, 센트럴파크는 개인이나 특정인을 위한 것이 아닌 다수의 도시민을 위한 시민의 공원이었다. 이는 시민의 세금이라는 공공기금으로 설립된 것이고 시민의 보건위생과 도시의 미관을 목적으로 계획적으로 건설되었다.
이 시기부터 발생한 도시공원의 특징은 바로 모두의 정원이라는 것이다. 전근대에는 각자 개인 주택에 살며 마당에 정원을 꾸몄지만, 근대에 와서는 공동주택에 살게 되면서 개인 마당을 가질 기회가 사라졌다. 이때문에 공원녹지는 도시 공간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광장의 역할도 겸하게 되었다. 때문에 도시공원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커뮤니케이션의 장이 되었다. 이러한 특성으로 지역의 각종 행사 등을 공원에서 개최하는 일이 많아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공원은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 근대의 도시공원이 도심 속 녹지 확보에 주력했다면, 현대의 도시공원은 안에 각종 시설을 겸비하여 활용도를 높이려고 하고 있다.
한편, 산업화로 인한 환경파괴에 대한 우려가 시작되면서 광활한 지역의 생태계와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산이나 숲, 바다 같은 곳을 보전지역으로 지정하기 시작했다. 1872년 3월 1일에 율리시스 S. 그랜트 미국 대통령이 옐로스톤 국립공원 보호법을 제정함으로써 옐로스톤 국립공원이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이 되었다.
이로써 공원의 의미는 도시에 조성한 녹지공간 뿐만 아니라 원래의 자연지형도 포함하게 되었다. 둘 다 자연을 보전하려는 목적 자체는 같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