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근 목사 칼럼
거룩한 혁신적 변화: 세상에 굴복할 것인가, 성령으로 변화될 것인가 (로마서 12:2)
로마서 12:2
한글 (개역개정):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English (NIV): “Do not conform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세상이라는 거대한 ‘고정된 틀’
오늘날 우리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압력 속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마치 모양이 정해진 ‘붕어빵 틀’처럼 우리를 압박하며 그 좁은 틀 안에 우리를 구겨 넣으려 합니다. 이 ‘틀’은 단순히 문화적 유행을 넘어, 우리의 영혼을 옥죄는 견고한 시대적 패턴으로 존재합니다.
첫째, 이 시대는 절대 가치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틀입니다.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며, 네가 좋으면 그것이 곧 진리”라고 유혹합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의 의견’으로 격하시키고, 각자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도록 부추깁니다. 기준이 사라진 시대, 결국 대중의 목소리가 곧 진리가 되는 혼란의 틀입니다.
둘째, 모든 가치를 소유로 치환하는 ‘물질주의’의 틀입니다. 인간의 존엄성보다 통장의 잔고와 아파트 평수가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믿게 만듭니다. 끊임없는 비교와 경쟁 속에서 더 많이 가져야만 안전하다는 공포를 심어주어, 우리를 탐욕의 노예로 찍어냅니다. 현재 일어나는 전쟁도 여기에 자유롭지 못하고 있습니다.
셋째, 순간의 쾌락을 숭배하는 ‘향략주의’의 틀입니다. “인생은 한 번뿐이니 즐겨라 (YOLO)”라는 구호 아래, 거룩함과 절제보다는 육체의 본능과 말초적인 자극을 쫓게 합니다. 의미 없는 소비와 쾌락의 굴레 속에서 영적인 갈급함을 잊게 만드는 마비의 틀입니다.
SNS의 알고리즘은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부러워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지시하며, 이러한 세속적 가치관에 순응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조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경고한 ‘이 세대 (This Age)’의 실체입니다.
’Conform’, 굴복의 미학인가 죽음의 수용인가?
우리는 본문에 등장하는 Conform’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어근 ‘-form (모양)’ 앞에 붙은 접두사 ‘Con-‘은 ‘함께 (with/together)’를 의미합니다. 즉, 주변의 모양과 똑같이 된다는 뜻입니다. 헬라어 원어적 의미로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외형적 패턴(틀)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행위입니다.
여기서 ‘본받다’ 혹은 ‘순응하다’는 표현은 세상의 압력에 자신의 의지를 내어주어 그 틀 모양대로 굳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생명력이 없는 밀가루 반죽이 뜨거운 틀 안에서 정해진 모양대로 구워지는 것과 같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물질주의, 향략주의라는 세상의 흐름에 무비판적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고유한 본질을 잃고 세상이 찍어낸 ‘붕어빵’ 같은 존재가 되고 맙니다.
’Transform’, 내 힘이 아닌 ‘신적 수동태’의 신비
반면, 바울은 대안으로 ‘Transform’을 제시합니다. 접두사 ‘Trans-‘는 ‘가로질러, 차원을 넘어 (Across/Beyond)’를 뜻합니다. 이는 단순히 겉모양을 바꾸는 변장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완전히 바뀌는 근본적인 혁신을 의미합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은 겉을 치장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내부의 생명이 폭발하여 차원을 이동하는 사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핵심적인 신학적 통찰에 마주하게 됩니다. 영어 성경 (NIV, KJV)을 보면 ‘Transform’은 명백하게 수동태 (be transformed / be ye transformed)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인간의 변화는 자신의 결단이나 도덕적 수양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너희 스스로를 변화시켜라”라고 하지 않고, “변화를 받아라”라고 명령합니다. 변화의 주체는 오직 ‘성령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패한 마음은 스스로를 새롭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우리 내면에 거룩한 재창조의 역사를 일으키실 때만 우리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 변화의 유일한 동력
동일하게 ‘-form’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지만, 세상의 틀에 나를 맞추는 ‘Conform’은 능동적 굴복인 반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Transform’은 철저하게 ‘신적 수동태(Divine Passive)’의 사건입니다.
기독교적 변화는 ‘자아 개조 (Self-Reform)’가 아니라 ‘성령에 의한 변화 (Holy Transformation)’입니다. 세상이 밖에서 우리를 ‘고정된 틀’로 조여올 때, 우리는 안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성령의 생명력으로 그 틀을 깨뜨려야 합니다. 내가 나비를 만들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성령께서 나를 나비로 빚으시도록 내 마음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를 받은 자만이 비로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오늘, 포스트모더니즘과 물질주의라는 세상의 틀에 갇힌 ‘평범한 다수’로 남기를 거부하십시오. 성령의 역사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드림으로, 이 세상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풀어내는 ‘거룩한 혁신적 변화’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저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치유의 문법: 명사와 동사가 빚어내는 삶의 기적
글을 쓰는 이들에게 문장은 하나의 우주다. 흔히 문장의 풍요로움은 화려한 형용사와 부사에서 온다고 믿기 쉽지만, 삶의 고통을 치유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언어는 의외로 단순하고 단단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내가 정립한 APT (Awareness Practical Therapy, 인식실천치료)의 정수는 바로 ‘명사와 동사의 결합’이다. 이는 수식어의 거품을 걷어내고 존재의 본질과 삶의 맥박만을 남기는 치유의 문법이다.
1. 명사, 존재를 명명하고 자각의 영토를 세우다
APT에서 명사(Noun)는 ‘자각(Awareness)’의 상징이다. 치유의 첫 단추는 내면의 혼란스러운 상태를 하나의 명확한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에서 시작된다. 형용사가 감정을 부풀리고 부사가 상황을 왜곡할 때, 명사는 오직 진실만을 가리킨다.
”나는 ‘몹시’ 괴롭다”는 표현 속에서 ‘몹시’라는 부사는 우리를 감정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지만, “나에게 ‘상실’이 왔다”라고 명사로 선언하는 순간 우리는 그 상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명사는 파도치는 감정의 바다에 박는 견고한 ‘말뚝’과 같다. 명명(Naming)하는 순간, 형체 없던 불안은 다룰 수 있는 ‘대상’이 되고, 비로소 자각의 영토가 세워진다.
그러나 명사에만 머무는 삶은 자칫 위태롭다. 이른바 ‘명사형 사람’은 자각과 분석, 그리고 깊은 생각에 침잠한다. 자신의 상처를 정의하고 그 이유를 살피는 데 탁월하지만,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사유의 향연이 실제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못할 때가 많다. 자각이 ‘감옥’이 되지 않으려면, 명사는 반드시 다음 단계를 향해 문을 열어야 한다.
2.형용사와 부사, 감정의 채색이나 삶의 중추는 아니다
문장에서 형용사와 부사는 감정의 결을 살리고 풍경을 채색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들은 삶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요소이기에 분명 우리 언어생활에 필요하다. 하지만 치유와 변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것들은 결코 삶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지 못한다.
형용사는 상태를 평가하게 만들고, 부사는 행동에 조건을 붙인다. “내 상처가 ‘너무나’ 크다”는 부사적 표현은 우리를 연민에 빠뜨리며, ” ‘완벽하게’ 준비되면 시작하겠다”는 부사적 태도는 실천을 영원히 유예시킨다. 감정은 삶의 배경음악일 뿐, 삶의 궤적을 바꾸는 엔진이 아니다. 수식어에 매몰될수록 우리는 본질적인 자각과 즉각적인 실천으로부터 멀어진다. 형용사와 부사가 걷히고 남은 담백한 풍경 속에 서야만 비로소 우리는 진짜 삶의 문제와 대면할 수 있다.
3. 동사, 자각의 무게를 밀어 올리는 생명의 엔진
명사가 치유의 기초석이라면, 동사(Verb)는 그 기초 위에 삶을 세워 올리는 ‘실천(Action)’의 동력이다. 자각(명사)만 있고 실천(동사)이 없다면 치유는 공허한 관념에 머물게 된다. 명사가 존재의 위치를 알려준다면, 동사는 그 존재가 가야 할 방향을 지시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동사형 사람’의 가치를 발견한다. 명사형 사람이 ‘왜(Why)’를 묻고 정의하는 데 시간을 보낸다면, 동사형 사람은 ‘어떻게 (How)’를 삶으로 증명해낸다. “슬픔이 있다 (명사)”는 자각 뒤에 “창문을 연다 (동사)” 혹은 “한 걸음을 내딛는다 (동사)”는 행위를 즉각적으로 결합한다. 동사형 사람에게 삶은 명제 (Proposition)가 아니라 사건 (Event)이며, 그는 행동함으로써 비로소 어제의 나를 넘어서는 사람이다.
동사는 관성을 깨뜨리는 힘이다. 치유 소설에서의 동사는 독자의 감각을 깨우는 맥박이다. “그는 절망했다”는 말 대신 “그는 낡은 운동화 끈을 조여 맸다”는 동사의 나열이 더 큰 울림을 주는 이유는, 동사가 정지된 시간을 흐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각이라는 무거운 명사를 삶이라는 현장으로 밀어 올리는 것, 그것이 바로 동사가 수행하는 경이로운 생명 운동이다.
결국 APT가 지향하는 치유는 명사와 동사 사이의 간극 (Gap)을 없애는 일이다. 명사형의 사유가 동사형의 행동을 만날 때, 인간은 분열된 자아를 통합하고 온전함에 이른다. 생각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대신, 자각한 진실을 동력 삼아 오늘을 살아내는 것. 형용사로 변명하지 않고, 부사로 지연시키지 않는 삶. 명사로 정직하게 자각하고, 동사로 단호하게 실천하는 삶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완성된 시가 된다. 정금처럼 변함없는 본질의 명사를 찾고, 헐몬의 이슬처럼 신선하게 움직이는 동사를 써 내려가는 일. 명사적 자각에 갇히지 않고 동사적 실천으로 나아가는 그 단순하고 강력한 치유의 문법이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에 가닿아, 다시 살아갈 용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시대적 창조적 기준과 영원한 삶의 척도
왜 리터 (L)가 아니라 ‘배럴 (Barrel)’일까?
요즘 아침 뉴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소식은 역시 천정부지로 치솟는 ‘기름값’일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주유소에서 리터 (L) 단위로 기름을 넣으면서도, 정작 국제 뉴스에서는 ‘배럴당 몇 달러’라는 표현을 접하며 의구심을 갖곤 합니다. “왜 석유는 리터라고 하지 않고 배럴이라고 부를까?” 이 작은 의문은 사실 160년 전, 한 사람의 창조적 결정에서 시작된 흥미로운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1860년대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거친 유전 지대에서 석유를 담을 마땅한 그릇을 찾지 못했던 누군가가 주변에 흔했던 위스키 나무통을 집어 들었을 때, 그것이 훗날 전 세계 에너지를 측정하는 ‘배럴 (Barrel)’이라는 절대적 단위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운송 과정에서의 증발과 유실을 고려해 2갤런을 더 얹어준 ’42갤런 (약 159리터)’이라는 넉넉한 마음이 담긴 결정은, 1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요동치는 세계 경제를 읽는 변함없는 척도가 되어 있습니다.
이는 창조성이란 결코 거창한 이론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합니다.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현실적인 도구를 선택하고, 거기에 나름의 논리와 진정성을 담아내는 ‘실천적 시도’가 결국 시대를 규정하는 새로운 기준 (Standard)이 됩니다. 누군가 창조성을 가지고 처음 시작한 그 발걸음이 수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을 때, 그것은 역사가 되고 규칙이 됩니다.
창조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
오늘나 우리에게 요구되는 창조성 역시 이와 맥을 같이 합니다. 단순히 남과 다른 것을 생각하는 ‘아이디어’의 차원을 넘어,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무엇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기준인지를 자각하고 (Awareness), 그것을 구체적인 삶의 양식으로 정착시키는 (Practice)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정립해 나가는 ‘APT (Awareness Practical Therapy)’ 모델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현대인의 흩어진 마음을 모으는 새로운 삶의 기준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모든 기준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거나 사라질 운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배럴이라는 단위가 경제의 척도는 될 수 있어도, 우리 영혼의 갈증이나 삶의 궁극적인 방향까지 측정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리적인 기준을 넘어, 결코 변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척도’를 갈구하게 됩니다.
구원의 기준점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우리 영혼의 구원에 있어 하나님께서 세우신 단 하나의 창조적 기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인간의 공로나 업적, 선행의 ‘리터’를 측정하여 구원의 자격을 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라는 단 한 번의 완전한 제사로 인류 구원의 새로운 기준 (The New Standard of Grace)을 세우셨습니다.
금본위제 시대에 금이 화폐 가치의 기준이었듯, 하늘나라의 구원 경제학에서 십자가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은혜의 본위’입니다. 우리가 절망의 심연에 있을 때도 십자가라는 기준점만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든 다시 ‘구원’이라는 확고한 지표 위로 복귀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창조적이고도 절대적인 사랑의 척도입니다.
삶의 마스터플랜: 성육신 (Incarnation)
구원의 기준이 십자가라면,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실천적 기준은 ‘성육신 (Incarnation)’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은, 진리가 단순히 머릿속의 관념이 아니라 ‘살아있는 삶’이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고귀한 언어를 인간의 평범한 일상어로 번역하셨고, 신의 거룩함을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구현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창조성의 극치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픔에 공감하며, 매일의 삶을 성실히 살아내는 모든 행위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결국 우리 삶의 최종적인 기준점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확증된 구원에 있으며, 매일의 삶을 지탱하는 기준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본받는 일상의 실천에 있습니다. 배럴이라는 기준이 세계 경제를 지탱하듯,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준이 우리 영혼을 지탱할 때 우리는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얻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만의 ‘위스키 통’을 들고 세상으로 나갑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것이 세상의 기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육신의 정신이기를 소망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400년 전 광해의 결단, 그리고 오늘 테헤란의 비극
강남의 테헤란로가 화려한 불빛으로 번영을 노래할 때, 그 이름의 시원인 저 멀리 테헤란의 ‘서울로’는 피와 갈증의 비명이 가득하다. 우정의 이름으로 맺어진 두 거리의 운명이 이토록 비극적으로 엇갈린 배경에는, 백성의 생명을 제단에 바쳐서라도 제 권좌를 지키겠다는 지도부의 ‘눈먼 광기’가 자리 잡고 있다.
지금 이란 지도부가 외치는 ‘항전’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성스러운 전쟁’이라는 번지르르한 가면 뒤에 숨은 실체는, 늙은 통치자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도그마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젊은 청년들과 무고한 백성들을 사지로 내모는 비겁한 도박일 뿐이다. 국가의 혈관인 철도가 끊기고, 아이들이 마실 물 한 모금이 없어 ‘물 파산’ 선언이 내려진 아비규환 속에서도 그들은 항복을 거부한다. 이는 용기가 아니라 오만이다. 백성의 목마름을 발판 삼아 제 권력의 성벽을 높이는 행위는 신에 대한 헌신이 아니라, 신의 이름을 빌린 가장 잔인한 우상숭배에 불과하다.
여기, 역사가 기억하는 또 다른 결단이 있다. 1623년 인조반정의 그 밤, 조선의 군주 광해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에게는 반격할 군사가 있었고, 도성을 피로 물들여서라도 왕좌를 부지할 힘이 있었다. 그러나 광해는 칼을 뽑는 대신 궁의 뒷문을 열었다. 그는 임진왜란의 참화 속에서 백성들이 겪은 지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였다. 제 한 몸의 안위와 권력을 위해 다시 한번 한양 땅을 잿더미로 만들 수 없다는 그 지독한 애민 (愛民)의 고뇌가 그를 유배자의 길로 이끌었다. 왕좌를 잃고 강화도와 제주도의 거친 바람 속에 늙어갔지만, 그는 결코 비겁하지 않았다. 그는 백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친 ‘진정한 군주’ 였다.
지금 테헤란의 지도자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양들이 목말라 죽어가고 늑대에게 물려 찢기는데도 자신들의 지팡이만을 움켜쥐고 있는 ‘삯꾼’들이다. 백성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사회의 근간이 뿌리째 흔들리는 ‘총체적 상실’ 앞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허울 좋은 이데올로기를 읊조린다. 지도자는 백성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자이지, 백성에게 자신의 짐을 전가하는 자가 아니다. 광해군이 보여준 ‘싸우지 않는 결단’은 오늘날 테헤란의 지도자들이 보여주는 ‘죽음의 항전’보다 수천 배 더 위대하고 용기 있는 행위다.
전쟁은 물리적 파괴보다 영혼의 흉터를 더 깊게 남긴다. 지금 이란 지도부에 필요한 것은 미사일이 아니라, 400년 전 광해군이 품었던 ‘백성을 향한 눈물’이다. 강남 테헤란로의 빌딩 숲 사이로 부는 평화의 바람이, 부디 저 멀리 고립된 테헤란의 ‘서울 Street’에도 닿기를 소망한다. 지도부의 탐욕이 멈추고, 다시금 그 거리에 맑은 물이 흐르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날. 그날이 바로 주님의 평화가 임하는 날일 것이다. 백성을 버린 지도자에게 미래는 없다. 이제는 광해처럼, 백성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결단이 필요한 때다.

김병근 목사
시드니성시화운동 대표회장, 엠마오상담대학 학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