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근 목사 칼럼
망설임의 강가에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을 자주 듣고 또 씁니다. 익숙해서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이 격언의 이면에는, 역설적이게도 ‘시작을 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인간의 깊은 심리적 고뇌가 숨겨져 있습니다. 해야 할 일임을 머리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왜 현재에 안주하며 머뭇거리는 것일까요?
발걸음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은 마음에 찾아오는 ‘의구심’과 ‘두려움’입니다. “과연 이 일이 될까 안 될까?”라는 확신 없는 마음은 영혼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실패에 대한 심리적 두려움은 거대한 장벽이 되어 앞을 가로막습니다. 결국 출발선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기에, 종착지에는 영영 도달할 수 없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시작을 아예 하지 않으니, 우리 삶에는 그 어떤 기적도,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매일 마트나 빌딩에서 자동문을 마주합니다. 멀리서 바라볼 때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보고 “아, 문이 닫혀 있네. 들어가기 틀렸어”라고 지레짐작하며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문은 내가 다가서야 열리는 문이거나, 혹은 이미 열려 있는 문일지도 모릅니다. 멀리서 닫힌 모습만 보고 출발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눈앞에 두고도 그 열린 문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그 어느 세대보다 똑똑합니다. 손가락 하나로 세상의 모든 정보를 쥐락펴락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정보와 예측 가능성은 오히려 독이 되기도 합니다. 모든 리스크를 완벽하게 계산하려다 보니 생각이 많아지고, 결국 몸이 움직이지 못하는 ‘분석 마비’ 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때로는 정보의 양보다, 단순한 무모함과 용기가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성경 여호수아 3장에는 이 진리를 관통하는 거대한 사건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마주한 요단강은 마침 모내기 철이라 물이 언덕까지 넘쳐흐르던 시기였습니다. 인간적인 계산과 정보로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절망의 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궤를 멘 제사장들은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강물이 갈라지는 것을 보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넘실거리는 강물 속에 그들의 ‘발을 먼저 담갔을 때’, 비로소 위에서부터 흐르던 요단강 물이 멈추어 섰습니다.
기적은 머리로 계산할 때가 아니라, 믿음으로 한 발을 내딛는 역동적인 액션 (Action)이 일어날 때 시작됩니다. 두려움이 사라지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모든 상황이 완벽하게 세팅되기를 기다리다가는 평생 강가에 서서 망설이다 인생을 보낼지도 모릅니다.
지금 당신의 발걸음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단강은 무엇입니까? 미리 문이 닫혀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 포기한 채 서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오직 목표만을 바라보며 먼저 한 발을 내딛는 용기가 필요할 때입니다. 망설임을 끝내고 발을 담그는 순간, 당신 앞의 거대한 강물은 길을 내어줄 것입니다. 움직이십시오. 시작해야 비로소 역사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항상 시작하는 자의 편에 서 계십니다.
수도꼭지와 수원지
최근에 현대 사상계의 거장이라 불리는 유발 하라리가 6년 만에 내놓은 신작 《넥서스 (NEXUS)》가 연일 화제다. 석기시대의 구전 신화부터 오늘날의 인공지능 (AI)까지, 인류가 구축해 온 정보 네트워크의 역사를 다룬 이 책에서 하라리는 매우 도발적인 선언을 던진다. 정보의 본질은 ‘진실의 추구’가 아니라, 인간을 통제하고 묶어두기 위한 ‘질서의 유지’에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커다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깊이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하라리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역사의 구체적인 장면들을 소환한다. 대표적인 것이 근대 관료제와 전체주의의 폐해다. 과거 소련의 스탈린 정권 시절, 당 관료들은 상부의 입맛에 맞는 수치와 거짓 보고 (정보)를 양산했다. 그 결과 현장의 진실은 철저히 가려졌고, 수백만 명이 기근으로 고통받는 비극을 초래했다. 정보 네트워크가 진실을 밝히기보다 기득권의 ‘질서와 권력’을 지키는 도구로 작동할 때 어떤 참사가 벌어지는지 보여주는 단면이다. 오늘도 이런 현실은 세계 곳곳에서 양산 되고 있다.
나아가 하라리는 현대의 AI 기술이 과거의 관료제보다 훨씬 더 위험한 이유를 경고한다. 과거의 인쇄술이나 원자폭탄은 인간이 조종해야만 움직이는 ‘수동적인 도구’였다. 하지만 AI는 스스로 데이터를 학습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비유기적 행위자 (Agent)’다. 인간이 설계했으나 더 이상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마치 외계 지능과 같은 독자적인 정보 네트워크가 탄생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그의 이러한 현상 분석은 날카롭고, 디스토피아적 전망은 묵직한 긴장감을 준다. 그러나 역사와 과학의 방대한 데이터를 종횡무진하는 그의 천재적인 서사 뒤에는, 현대 무신론적 지식인들이 지닌 치명적인 사상적 결점과 편향성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는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혼란의 ‘결과’는 기가 막히게 짚어냈지만, 그 현상을 발생시킨 근본적인 ‘원인’의 문은 철저히 닫아버렸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본질적인 비유를 떠올리게 된다. 매일 아침 우리가 마주하는 수도꼭지 (Water-tap)의 비유다. 수도꼭지에서 오염된 구정물이 흘러나온다고 가정해 보자. 오직 눈에 보이는 결과와 데이터만을 신봉하는 현대 과학과 하라리 같은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은 수도꼭지 앞에만 매달린다. 흘러나온 물의 성분을 분석하고, 수도꼭지의 밸브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에만 집착한다. 하라리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사법부의 정비’나 ‘언론의 자가수정 능력 강화’ 역시 결국 수도꼭지를 고쳐보겠다는 1차원적 처방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무리 정교하게 수도꼭지를 만지작거리고 제도를 정비한들 오염된 물을 근본적으로 멈출 수는 없다. 그 물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즉 ‘수원지 (水源地)’를 찾아 올라가야만 진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진리의 형평성 (Balance)은 언제나 원인과 결과가 마땅히 한 쌍을 이루어 함께 갈 때만 확보되기 때문이다. 모든 참된 진리는 균형이 있으며,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순간 반드시 부작용을 낳는다.
하라리가 바라본 인류의 역사와 기술 문명은 철저히 ‘결과물로서의 수도꼭지’다.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은 이기주의적 메커니즘과 타락한 본성 (죄성)이 어떻게 왜곡된 정보 네트워크와 통제 시스템을 만들었는지 그 현상은 넓게 보았지만, 무신론적·불교적 세계관에 갇힌 탓에 인류를 목적과 사랑으로 빚어내신 근원적 ‘원인자 (原因者)’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수원지를 부정해 버린 의사가 어떻게 온전한 처방전을 쓸 수 있겠는가. 그 결과가 바로 “인류에게는 소망이 없다”는 차가운 절망의 서사다.
특히 상담자가 보는 관점에서도, 치유의 시작은 ‘수원지의 확인’에 있다. 내담자가 겪는 삶의 부적응과 고통 (결과)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역기능적 태도의 뿌리 (원인)를 스스로 명확히 ‘인식 (Careful Awareness)’ 하는 단계가 선행되어야 한다. 인류 전체의 영적·기술적 혼란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떠나 오염된 수원지를 가지고 있음을 겸손히 인정할 때 비로소 참된 실천과 회복의 길이 열린다.
하라리의 외침대로 정보가 넘쳐날수록 세상이 더 혼란스러워지는 이유는, 인간이 만든 정보가 결국 권력을 쥐고 타인을 통제하려는 이기적 메커니즘을 복제하기 때문이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유일한 동력은 외부로부터 오는 거룩하고 순수한 에너지, 즉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 (Logos)뿐이다. 세속의 정보는 인간을 가두는 가짜 질서를 만들지만, 하나님의 진리는 도리어 자기를 낮추고 타인을 살리는 ‘사랑의 질서’를 구현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2)
쏟아지는 가짜 뉴스 수백만 건, 혹은 AI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정교한 알고리즘보다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붙드시는 하나님의 거대한 수원지의 생수 한 모금이, 마치 사마리아 여인에게처럼 (요한복음 4장), 이 시대를 살리는 근본적인 대안이다. 거장들의 화려한 분석에 압도되거나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눈앞의 과학적 결과와 현상에 매몰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원인자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균형을 잡는 것. 그것이야말로 혼탁한 AI 시대의 정보 홍수 속에서 침몰하지 않고 참된 지혜와 자유를 누리는 유일한 열쇠다.
어싱 (Earthing)에 눈뜨다
지난 20년 동안 나는 매주 대지를 딛고 달리며 삶의 에너지를 얻어왔다. 마라톤과 장거리 러닝은 나에게 심신의 건강을 유지해 주는 소중한 동반자였다. 하지만 꾸준함의 훈장처럼 찾아온 불청객이 있었다. 바로 왼쪽 발꿈치를 찌르는 듯한 통증, ‘족저근막염’이었다. 달릴 때마다 전해지는 묵직한 불편함은 어느 순간 나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내가 과연 이 길을 계속 달릴 수 있을까?’ 은근한 절망감이 밀려오던 때, 주변의 권유로 운명처럼 한 가지 치유법을 만났다. 바로 맨발로 땅을 밟는 ‘어싱 (Earthing, 땅 밟기)’이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신발을 벗고 흙을 밟는 것만으로 통증이 사라질까?’ 그러나 그 속에 숨겨진 지구의 위대한 치유 과학을 이해하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클린턴 오버 (Clinton Ober) 등이 저술한 《어싱: 땅과의 접촉이 치유한다 (Earthing)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지구의 중심, 즉 외핵에서는 거대한 액체 금속의 회전 운동을 통해 상상을 초월하는 강력한 자기장을 만들어낸다.
이 지구 자기장은 우주 공간으로 거대하게 뻗어나가 태양이 뿜어내는 치명적인 방사선 물질과 강력한 우주 폭풍 (태양풍)의 나쁜 열풍을 막아내는 거대한 ‘우주 방어막 (보호막)’ 역할을 한다. 만약 이 자기장이 없다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태양의 치명적인 열풍에 타버려 생존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우주적 스케일로 생명을 보호하는 거대한 자기장 에너지가, 지표면에서는 무한한 ‘자유전자 (Free Electrons)’의 형태로 매 순간 발산되고 있다.
지구 자체가 우주를 막아내고 생명을 살리는 거대한 천연 배터리인 셈이다. 반면 현대인들은 고무 밑창 신발을 신고 아스팔트 위를 걸으며 이 경이로운 대지의 에너지로부터 철저히 절연된 채 살아간다. 그 결과 몸속에 양전하가 쌓이고 활성산소가 배출되지 못해 만성 염증에 시달리게 된다. 어싱은 바로 이 차단된 연결을 다시 회복하는 행위다. 맨발로 대지를 밟는 순간, 우주 폭풍을 막아내던 그 강력한 지구가 발산하는 전자기적 에너지가 우리 몸으로 유입되어 통증을 유발하는 염증 세포를 즉각적으로 중화시킨다.
이 놀라운 치유를 경험하기 위해 나는 전용 어싱 양말까지 구비하여 지난 2개월 동안 꾸준히 땅을 밟았다. 결과는 실로 기적 같았다.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며 달리기 세포를 위축시켰던 족저근막염 통증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지구의 자기장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체내 염증을 스스로 치료해 낸 결과였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어싱을 시작한 지인들도 만성 통증과 피로가 회복되는 등 상당한 효과를 몸소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싱을 어떻게 해야 가장 효과적일까? 나의 경험과 과학적 원리를 바탕으로 세 가지 명당을 추천하고 싶다.
첫째, 파도가 밀려왔다 지나간 바닷가 모래밭이다. 촉촉하게 물기가 머문 젖은 모래와 염분이 가득한 바닷물은 전도성이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천연 도체다. 대지의 치유 에너지를 가장 빠르고 강력하게 흡수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다.
둘째, 바다로 가기 어렵다면 가까운 잔디밭을 걷는 것이다. 잔디는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고 늘 적당한 습기를 유지하고 있어, 전기가 아주 잘 통하는 훌륭한 어싱 통로가 되어준다.
셋째, 주변에 잔디가 없다면 습기가 있는 촉촉한 황토길이나 흙길을 밟는 것이다. 메마른 땅보다 수분이 있는 땅을 밟을 때 전도율이 극대화되어 염증 치료 효과가 배가된다.
어싱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다. 태양의 나쁜 열풍으로부터 지구를 지켜내는 거대한 우주의 힘이, 내 발바닥을 통해 몸속 염증을 치료하는 가장 완벽하고 부작용 없는 ‘천연 치료제’로 작용하는 과학이다. 혹시 족저근막염으로 걷는 기쁨을 잃어버렸거나, 원인 모를 만성 통증으로 힘들어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신발을 벗어 던지고 대지 위로 내려서 보길 권한다. 지구의 깊은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치유의 에너지가 당신의 몸과 마음을 다시 세워줄 것이다. 염증 치료에는 이만한 최고가 없다. 단언컨대, 한 번 꼭 해보시길 바란다. 나는 지금도 학교로 출근하기 전 어씽 (Earthing) 위해 잔디밭으로 나가고 있다. 염증이 없는 세상이 오고 있다.
암 (Cancer)을 극복하는 비결
몇 년 전, 평생을 동역하며 가깝게 지내던 동료 목사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처음 암 발병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절망적이었으나, 그는 치열한 고통 속에서 여러 차례의 약물치료와 방사선치료를 견뎌냈다. 결국 병원으로부터 암세포가 모두 사라졌다는 완치 판정을 받았고, 우리 모두는 기적이라며 함께 기뻐했다. 그러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강력한 독성의 항암제와 방사선은 암세포만 조준 타격하지 않았다. 암을 죽이는 과정에서 몸속의 건강한 정상 세포와 면역 체계까지 초토화되었고, 결국 그는 면역력 고갈로 인해 허망하게 생을 마감했다. 암은 죽었으나 숙주인 인간의 몸도 함께 무너져 내린 비극이었다.
친구를 먼저 보내고 깊은 사유에 잠겼을 때, 문득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가라지 비유의 말씀이 뇌리를 스쳤다.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마태복음 13:29~30)
주님께서는 가라지를 억지로 뽑아내려다 알곡까지 상하게 하지 말고, 추수 때까지 그냥 두라고 말씀하셨다. 질병도 마찬가지 아닐까. 현대의학이 행하는 ‘암세포와의 전면전’은 종종 알곡 (정상 세포)까지 통째로 말려 죽이는 악순환을 낳는다. 그때 필자는 깨달았다. 암을 억지로 죽이려 들기보다, 암세포가 좋아하는 환경을 원천 차단하고 정상 세포인 알곡에 더욱 영양을 공급하여 강하게 만드는 것이 최고의 치유 전략이라는 것을 말이다. 설령 내 몸에 암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필자는 그것을 칼과 독약으로 없애려는 쪽보다는 도리어 암이 극도로 싫어하는 환경을 만들어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굶기는 방법이 옳다고 확신한다. 이 글은 바로 그 지혜를 나누기 위한 필자의 고백이자 다짐이다.
생물학적, 그리고 정신신경면역학적 관점에서 암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들은 결코 무적의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특정한 조건 속에서만 폭발적으로 증식하며, 자신들이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을 마주할 때 급격히 무력화되는 대단히 취약한 대사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먼저 신체 내부의 대사적 환경을 살펴보면, 암은 명확히 싫어하는 물리적 조건들이 존재한다. 그 첫 번째는 바로 ‘공복 (굶주림)’이다. 노벨 생리학상 수상자인 오토 바르부르크가 밝혀냈듯, 암세포는 정상 세포와 달리 오직 포도당만을 비정상적으로 과다 발효시켜 에너지를 얻는다. 따라서 정제된 탄수화물과 설탕을 제한하여 혈중 당 수치와 인슐린을 안정시키면, 암세포는 주 에너지원을 잃고 대사적 스트레스 상태에 직면한다. 여기에 암이 가장 기피하는 ‘풍부한 산소’와 ‘높은 체온 (36.5℃ 이상)’, 그리고 채식 위주의 미네랄 섭취를 통한 ‘약알칼리성 미세환경’이 더해지면 암세포의 증식과 전이 경로는 사방으로 차단된다. 자연이 선물한 쌉싸름한 맛인 십자화과 채소의 설포라판이나 녹차의 카테킨 같은 쓴맛 (파이토케미컬) 역시 암세포의 자살을 유도하고 신생 혈관 형성을 방해하는 고약한 천연 무기가 된다. 알곡을 키우는 청정한 토양이 결국 가라지를 이겨내는 법이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는 결코 독립된 물질이 아니다. 정신적인 것과 영적인 부분이 촘촘하게 뇌신경계와 연결되어 작용하는 유기체다. 암세포가 가장 두려워하는 진짜 전장은 다름 아닌 우리의 ‘마음과 영성’에 있다.
정신신경면역학에 따르면, 암이 가장 좋아하는 자양분은 ‘억압된 분노’와 ‘미래에 대한 불안’, 그리고 ‘단절로 인한 고립감’이다. 마음속에 응어리진 만성적 원망과 슬픔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뿜어내어 암세포를 감시하고 타격해야 할 NK세포 (자연살해세포)를 마비시킨다. 반대로 암세포가 가장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바로 ‘기쁨’과 ‘감사’ (살전 5:16-18)이다.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은 교감신경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부교감신경을 활성화하여 체내 염증 수치를 급격히 떨어뜨린다. 마음의 평화가 찾아올 때 우리 몸의 면역 세포들은 비로소 예리한 칼날을 갈며 다시 깨어난다.
더 나아가 암은 ‘서로 연합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고립과 절망은 세포를 산화시키지만, 타인과 깊이 연대하고 무조건적인 사랑과 자비를 나눌 때 인간의 뇌에서는 강력한 항염증 호르몬인 ‘옥시토신’이 분비된다. 이 영적인 사랑의 에너지는 신체 전반에 강력한 보호막을 형성하여 암세포가 침투할 틈을 주지 않는다. 여기에 과거의 상처를 흘려보내는 ‘용서’의 결단과,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확고한 ‘생의 의지 및 사명감’이 결합하면 유전자 수준에서 후성유전학적 변화가 일어난다. 암을 촉진하는 유전자의 스위치는 꺼지고, 암을 억제하는 치유의 유전자 스위치가 켜지는 것이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잠 17:22)는 오랜 잠언의 말씀은 현대 과학이 증명하는 가장 정확한 종양학적 진실이다. 암을 자라지 못하게 굶기는 법은 정제된 당을 끊는 물리적 실천에서 시작하여, 내면을 감사와 사랑, 그리고 연합의 영성으로 채우는 영적 도정에서 완성된다. 암이 도저히 숨 쉴 수 없는 청정한 내외면의 환경을 가꾸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이 가진 고유의 신성한 치유력을 회복하는 본질적인 길이다. 현대 의학도 암치료에 고려해야할 정점에 와 있다. 결국 암은 극복할수 있는 장애일 뿐이다.

김병근 목사
시드니성시화운동 대표회장, 엠마오상담대학 학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