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근 목사 칼럼
21세기 생존을 위한 세 가지 나침반
오늘날 우리는 거대한 데이터의 바다와 인공지능이라는 보이지 않는 엔진이 이끄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정작 그 기술이 우리의 삶을 어디로 끌고 가는지 이해하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현대 사회라는 복잡한 미로를 헤쳐나가기 위해 우리는 세 가지 핵심적인 논리 도구를 손에 쥐어야 합니다. 보다 쉽게 3가지 익숙한 단어 즉 메카니즘, 알고리즘, 그리고 사이버네틱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 메카니즘 (Mechanism): 존재의 목적과 판을 짜는 ‘전략’
메카니즘은 이 세상이 ‘무엇을 위해, 어떤 구조로 설계되었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21세기의 메카니즘은 단순히 기계적인 부품의 결합을 넘어 ‘플랫폼’과 ‘생태계’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SNS, 배달 앱, 금융 시스템은 모두 특정한 목적 (이윤, 연결, 편의 등)을 달성하기 위해 정교하게 설계된 메카니즘입니다. 이것은 전쟁으로 치자면 ‘전략’에 해당합니다. 어디로 가야 승리할지, 어떤 구조를 만들어야 지속 가능한지를 결정하는 설계도인 셈입니다. 현대인에게 메카니즘을 이해한다는 것은 내가 속한 시스템이 나를 어디로 유도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통찰력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알고리즘 (Algorithm): 목적을 향한 최선의 ‘전술’
메카니즘이 ‘어디로 가느냐’를 결정한다면, 알고리즘은 그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어떻게 가느냐’를 실행하는 구체적인 절차입니다. 알고리즘은 현대 사회의 ‘전술’입니다. 출근길 최단 경로를 찾아주는 내비게이션, 내가 좋아할 만한 영상을 추천하는 유튜브의 로직은 모두 알고리즘의 산물입니다. 이것은 매우 효율적이고 빠릅니다. 하지만 전술에만 매몰되면 전략적 방향성을 상실할 위험이 있습니다. 알고리즘이 제시하는 효율적인 선택지가 정말 나의 메카니즘 (삶의 목적)과 일치하는지 비판적으로 사고할 때, 우리는 알고리즘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을 도구로서 부릴 수 있게 됩니다.
3. 사이버네틱스 (Cybernetics): 궤도를 수정하는 지능적인 ‘통제’
마지막으로 사이버네틱스는 ‘어떻게 하면 목적지에 잘 도달하고 있는가’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수정하는 과정입니다. 이는 단순히 작동하는 것을 넘어, 주변 환경과 소통하며 스스로를 조절하는 ‘피드백 기반의 통제’입니다.
21세기는 불확실성의 시대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전략 (메카니즘)과 전술 (알고리즘)이 있어도, 변화무쌍한 현실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 있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사이버네틱스적 사고입니다. 목표와 현실의 오차를 측정하고, 그 결과에 따라 다시 입력을 조정하는 능력이죠. 인공지능이 스스로 학습하며 성능을 높이는 원리도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우리 역시 삶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정리하자면, 메카니즘은 목적지 (Where)를, 알고리즘은 경로 (How)를, 사이버네틱스는 최적의 조정 (How well)을 담당합니다. 이 세 가지 개념은 21세기라는 거대한 기계를 돌리는 핵심 엔진입니다. 이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세상은 그저 알 수 없는 마법처럼 보이겠지만, 이를 꿰뚫어 보는 이들에게 세상은 정교하게 설계된 도전의 장이 됩니다.
우리는 알고리즘이라는 전술에 갇혀 메카니즘이라는 전략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사이버네틱스라는 피드백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관제해야 합니다.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시대가 온다고 말하지만, 결국 이 세 가지 나침반을 들고 항해를 주도하는 것은 인간의 몫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메카니즘 위에서, 어떤 알고리즘을 사용해, 어떻게 스스로를 제어하며 항해하고 있습니까?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9)
신앙생활과 뇌과학
21세기, 우리는 인공지능 (AGI)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거대한 변곡점에 서 있습니다. 물질적 풍요는 보장될지 모르나, 역설적으로 인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라는 존재론적 허무와 의미의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로마 시대 시민들이 육체적 노동에서 해방된 뒤 자극적인 ‘빵과 서커스’에 매몰되었듯, 현대인들 또한 스마트폰 속의 ‘값싼 도파민’에 중독되어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뇌 속에는 이 위기를 돌파할 신비로운 설계도가 이미 새겨져 있습니다. 바로 ‘신앙생활’과 ‘뇌과학’의 경이로운 만남입니다.
1. 찬양과 기도
뇌과학은 도파민을 ‘보상 회로의 엔진’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할 때 도파민을 분출합니다. 신앙 안에서 드리는 간절한 기도와 뜨거운 찬양은 뇌의 보상 회로를 가장 고차원적인 방식으로 자극합니다.말초적인 쾌락이 주는 도파민은 금방 내성이 생겨 우리를 허기지게 만들지만, 영적 체험을 통해 분출되는 도파민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향한 강력한 동기부여를 제공합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성경의 권면은 뇌의 보상 회로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상시 가동하라는 최고의 뇌 관리 지침입니다.
2. 감사와 묵상
현대인의 고질병인 우울증과 불안은 세로토닌의 부족에서 기인합니다. 뇌과학은 우리가 햇빛 아래에서 리듬감 있게 걷거나, 깊은 명상에 잠길 때 세로토닌이 나온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범사에 감사하라”는 가르침은 뇌과학적으로 놀라운 치유력을 가집니다. 우리가 모든 상황 속에서 감사의 조건을 찾아 고백할 때, 뇌는 정서적 안정감을 주는 세로토닌을 분출하며 편도체의 과잉 흥분을 가라앉힙니다. 기도는 ‘쉬지 않는 명상’이며, 감사는 ‘천연 항우울제’를 뇌 스스로 생산하게 하는 거룩한 습관입니다.
3. 영적 감동과 공동체
예배 중 느끼는 깊은 영적 감동이나 은혜의 순간에는 엔도르핀 (Endorphin)이 분비됩니다. 마약보다 수백 배 강한 이 물질은 신체적, 정신적 통증을 완화하고 극도의 평안을 선사합니다. 또한, 성도 간의 사랑과 유대감 속에서는 ‘사랑의 호르몬’인 옥시토신 (Oxytocin)이 분출됩니다. 이는 고립된 개인을 타인과 연결하며, 뇌의 사회적 회로를 건강하게 회복시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우리 뇌를 고립의 공포로부터 해방시키는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4. 전두엽의 회복
인간을 동물과 구별 짓는 가장 큰 특징은 전두엽 (Prefrontal Cortex)에 있습니다. 이곳은 도덕성, 이성, 미래에 대한 계획을 담당합니다. 신앙생활은 이 전두엽을 끊임없이 훈련시키는 과정입니다. 말초적인 자극에 반응하는 변연계의 지배를 벗어나, 기도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행위는 전두엽의 기능을 극대화합니다. AGI 시대, 기계가 가질 수 없는 ‘영성’과 ‘이타심’이야말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바른 인간성의 핵심입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삶의 방식—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은 뇌를 가장 창조적이고 행복한 상태로 만드는 우주적인 법칙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운동을 통해 영성을 회복할 때, 우리 뇌의 신경망은 새롭게 재구성 (Neuroplasticity)됩니다. 물질적 풍요를 넘어 영적 풍요를 누리는 삶, 자극적인 서커스가 아닌 거룩한 기쁨을 노래하는 삶. 이것이 바로 21세기 인류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행복의 길입니다.
로마서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서울로”에 평화를 기다리며
매일 아침, 서울 강남의 테헤란로는 거대한 유리 벽들이 빛을 반사하며 대한민국에서 가장 역동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는 곳이다. 1977년 이란의 테헤란 시장과 서울시장이 맺은 ‘우정의 약속’으로 이름 붙여진 이 길은, 이제 한국 경제와 IT 혁신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화려한 거리의 이름이 유래된 본래의 도시, 테헤란의 안부를 이제야 묻게 된다.

47년 전, 중동 붐과 함께 찾아온 골람레자 닉페이 시장은 서울에 ‘테헤란로’를, 테헤란에 ‘서울로’를 남겼다. 그것은 서로의 번영을 기원하는 뜨거운 약속이었다. 세월이 흘러 서울의 테헤란로는 세계적인 ‘테헤란 밸리’로 성장했지만, 지금 이란의 테헤란은 전쟁의 공포와 파괴의 위협 아래 신음하고 있다. 우리가 강남역 사거리에서 세련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일상을 영위할 때, 테헤란 북부의 ‘서울 Street’ (Seoul Street)에는 사이렌 소리, 죽음의 두려움이 울려 퍼진다. 한때 양국의 우호를 상징하며 곧게 뻗어 있던 그 길 위로, 이제는 평화 대신 긴장과 파괴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 우정의 이름으로 맺어진 두 거리가 한쪽은 번영의 극치를, 다른 한쪽은 생존의 기로를 걷고 있는 이 비극적인 현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지명 (地名)은 단순히 길을 찾는 도구가 아니다. 그 안에는 역사가 있고, 약속이 있으며, 사람의 숨결이 담겨 있다. 우리가 매일 걷는 테헤란로가 그저 ‘비싼 땅값’의 대명사로만 남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가는 테헤란의 소식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도시의 일부가 상처 입는 아픔으로 다가와야 한다. 우리는 이제 모두 지구촌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다. 서울 강남에 위치한 이 활기찬 테헤란로의 시작점에서, 우리는 저 멀리 전쟁의 폭염에 휩싸인 테헤란의 ‘서울로’를 생각한다. 속히 포화가 멈추고 다시금 평화로운 일상이 그 거리에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한다. 테헤란로의 빌딩 숲 사이로 부는 평화와 자유의 바람이, 부디 저 먼 곳 테헤란의 ‘서울로’에도 주의 날 (The Lord’ day)에, 주님의 평화의 소식으로 전해지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 소중한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전쟁은 속히 끝이 나야 한다.
결국 전쟁의 아픔은 단순히 물리적인 파괴나 인명의 손실을 넘어, 한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의 근간을 뿌리째 흔드는 총체적인 상실에 있다. 포화 속에 정든 터전이 잿더미가 되고 평범했던 일상이 공포로 뒤바뀌는 과정에서, 생존자들은 사랑하는 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부채감과 형용할 수 없는 정신적 외상 (PTSD)을 평생 짊어지게 된다. 국가 간의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명분 뒤에 숨겨진 실제 얼굴은 아이들의 눈물과 찢겨진 가족, 질병과 가난, 그리고 세대를 거쳐 대물림되는 증오와 허무이며, 이는 한 번 무너지면 다시는 전쟁 전으로 온전히 되돌릴 수 없는 깊고도 잔인한 영혼의 흉터를 남깁니다. 더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시 122: 6-8)
이제 기름 없이도 살 수 있다
최근 중동의 포성이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지정학적 전쟁의 위기는 곧바로 전 세계 기름값의 폭등으로 이어졌고, 서민들의 삶은 팍팍해졌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당장의 기름값보다 ‘화석 연료 문명의 황혼’입니다. 기름은 언젠가 고갈될 자원이며, 우리가 태워버린 그 시커먼 연기는 이산화탄소가 되어 지구를 오염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이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오염과 갈등의 에너지를 계속 쓸 것인가, 아니면 생명과 평화의 에너지로 전환할 것인가. 저는 그 해답을 우주에서 가장 흔하고 깨끗한 원소인 ‘수소 (Hydrogen)’에서 찾아 보고 싶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는 “맹물로 가는 차가 나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동화처럼 듣고 자랐습니다. 이제 그 동화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수소 에너지는 본질적으로 ‘물의 순환’입니다. 태양광이나 풍력으로 물 (H_2O)을 분해하여 수소를 얻고, 그 수소가 다시 산소와 만나 전기를 일으킨 뒤 깨끗한 물로 돌아갑니다. 질량 보존의 법칙에 따라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고, 오직 깨끗한 에너지 흐름만이 존재합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는 가장 완벽한 선순환 구조인 에느지 메카니즘입니다.
물론 넘어야 할 산은 있었습니다. 수소는 기체 상태일 때 부피가 너무 커서 기름처럼 배에 실어 나르거나 보관하기가 매우 까다로웠습니다.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우리 한국의 삼성과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이 난관을 극복할 혁신적 기술을 선보였습니다.
영하 253도라는 극한의 저온으로 수소를 얼려 액체로 만드는 기술입니다. 기체가 액체가 되면 부피는 무려 800분의 1로 줄어듭니다. 거대한 풍선더미 같던 수소를 아주 작은 가방 속에 꾹꾹 눌러 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한 번에 엄청난 양의 수소를 배에 실어 나를 수 있게 되고, 결국 수소 가격은 기름값보다 저렴해지는 변곡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이곳 호주는 끝없는 햇빛과 바람을 가진 수소 생산의 최적지입니다. 여기에 한국의 세계적인 액화 및 저장 기술이 결합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중동의 기름 한 방울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단순한 에너지 교체를 넘어, 지구를 살리고 인류의 경제적 자유를 찾아오는 ‘에너지 독립 선언’과 같습니다.
상담학자로서 저는 인간의 마음도 이와 같다고 믿습니다. 과거의 상처와 찌꺼기를 태워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에너지로 승화시켜 삶을 순환시킬 때 진정한 치유가 일어납니다. 에너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에서 빌려온 것을 다시 자연으로 깨끗하게 돌려보내는 수소 경제는 지구를 향한 인류의 가장 진심 어린 사과이자 고백입니다.
지금 비록 고유가와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우리는 절망 대신 기술과 자연이 공존하는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맹물이 에너지가 되고, 그 에너지가 다시 생명의 물이 되는 시대. 우리 한국인들의 손끝에서 시작된 이 혁신이 머지않아 전 세계의 거리를 맑게 정화할 것입니다. 이제 수소는 희망의 다른 이름입니다. 수소차가 거리를 누비게 될것입니다.
성경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요한계시록 2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수소라는 작은 원소 속에 담긴 엄청난 힘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위기에 처한 인류에게 새로운 생존의 길을 열어주고 계십니다. 전쟁과 고유가의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절망 대신 이 깨끗하고 무한한 에너지의 빛을 보아야 합니다.
물에서 배우는 사랑의 에너지
우리는 흔히 ‘에너지’라고 하면 거대한 발전소나 차가운 기계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세상의 미래를 바꿀 수소 에너지의 근본 원리를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우리네 인생사와 꼭 닮은 ‘만남과 사랑, 그리고 연합의 드라마’가 숨어 있습니다.
본래 수소(H_2)와 산소(O_2)는 ‘물(H_2O)’이라는 이름의 가장 평온하고 안정적인 공동체를 이루며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더 큰 동력을 얻기 위해 ‘전기’라는 강한 외부 자극으로 이들을 억지로 갈라놓습니다. 물에서 수소와 산소가 분리되는 그 순간, 그들은 각자 고립된 존재가 되어 이별의 아픔과 결핍을 경험합니다. 이 과정은 마치 우리 삶에서 예기치 못한 시련으로 소중한 관계가 단절되었을 때 느끼는 상실감과 닮아 있습니다.
하지만 자연의 섭리는 이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홀로 남겨진 수소는 마음 한구석에 산소를 향한 강렬한 ‘그리움’을 간직하게 됩니다. 이 그리움은 다시 하나가 되고 싶다는 강력한 ‘재회의 동기’가 되어 우리 곁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마침내 수소차라는 만남의 광장에서 산소를 다시 만나는 그 운명적인 순간, 그들은 참아왔던 에너지를 폭발적으로 쏟아냅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움직이고 불을 밝히는 데 쓰는 그 ‘전기’는, 사실 서로 다른 존재가 다시 만나 하나로 묶일 때 발생하는 ‘재회의 환희 축제’인 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연합(Union)’의 신비를 마주하게 됩니다. 수소와 산소의 만남은 단순히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물리적 결합이 아닙니다. 그들은 서로의 본질을 내어주고 완전히 섞여 ‘물’이라는 전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납니다. 진정한 연합은 A+B=C가 되는 일입니다.
인간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각자가 고립된 ‘나’로 존재할 때는 가질 수 없던 강력한 힘이, 서로의 결핍을 인정하고 채워주는 진정한 연합을 이룰 때 비로소 발휘됩니다. 수소와 산소의 연합이 전기를 만들어 세상을 밝히듯, 사람과 사람이 마음으로 깊이 연합할 때 우리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강력한 삶의 에너지를 얻게 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사랑과 연합의 결말입니다. 무언가를 태워 에너지를 얻는 화석 연료는 이산화탄소(CO_2)라는 찌꺼기를 남겨 지구를 아프게 하고, 자원을 독점하려는 전쟁의 불씨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수소와 산소의 연합은 오직 ‘맑고 깨끗한 물’만을 남깁니다. 진정한 연합은 상처를 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갈등의 찌꺼기를 씻어내고 우리 삶을 정화하는 맑은 눈물과 평온을 가져다줍니다.
세상은 이제 ‘투쟁과 독점’의 시대에서 ‘연합과 순환’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연료를 바꾸는 기술의 진보를 넘어, 인류가 서로의 소중함을 인식(Awareness)하고 하나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거대한 깨달음의 실천(Practical) 과정입니다.
상딤가로본 제가 본 수소 경제학은 자연이 우리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입니다. “혼자서는 차가운 기체일 뿐이지만, 연합하면 생명의 물이 되고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된다”는 그 가르침 말입니다. 오늘 당신의 곁에 있는 누군가와 수소와 산소처럼 깊은 연합을 이루어 보십시오. 그 진실한 만남이 만드는 에너지가 당신과 당신의 세상을 환하게 밝혀줄 것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21)

김병근 목사
시드니성시화운동 대표회장, 엠마오상담대학 학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