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고의 한서(漢書) – 본기(本紀)
7. 소제기(昭帝記)
반고의 한서-본기의 일곱 번째 기록.
소제기(昭帝記)는 한 효소황제 유불릉(漢 孝昭皇帝 劉弗陵, 기원전 94년~기원전 74년)에 대한 기록으로 전한의 제8대 황제(재위 기원전 87년~기원전 74년)이다. 무제와 구익부인 소생이다.
○ 소제기(昭帝記)

효소황제(孝昭皇帝)는 무제의 작은아들이다. 어머니는 조첩여(趙첩여)로 본래 기이한 기품이 있어 천자의 총애를 받았는데, 소제를 낳음에 이르러서도 또한 기이한 일이 있었다. 이 말이 <외척전(外戚傳)>에 있다.
무제 말년에 여태자(戾太子)는 패망하고, 연왕 단(旦)과 광릉왕(廣陵王) 서(胥)는 행실이 교만하였는데, 후원 2년(BC 87) 2월, 상이 병이 드니, 마침내 소제를 세워 태자로 삼으매 그때 나이가 8세였다. 시중 봉거도위 곽광을 대사마 대장군으로 삼아, 유조를 받들어 어린 임금을 보필하게 했다.
다음날, 무제가 붕어했다.
무진일, 태자가 제위에 즉위하고, 고묘에 알현했다. 황제의 누나 악읍공주(鄂邑公主)에게 탕목읍(湯沐邑)을 더해주고, 장공주(長公主)로 삼아, 천자를 공양(供養)하고 금중(禁中)의 일을 살피게 했다.
대장군 곽광은 정권 을잡아, 상서(尙書)의 일을 영솔하였으며, 거기장군 김일제(金日제)와 좌장군 상관걸(上官桀)이 이를 보좌했다.
여름 6월,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가을 7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제북왕(濟北王) 관(寬)이 죄가 있어 자살하였다.
장공주 및 종실의 곤제(昆弟)들에게 각각 차등있게 물품을 하사했다. (어머니) 조첩여를 추증해 황태후라 하고, 운릉(雲陵)을 세웠다.
가을, 흉노가 삭방에 침입해, 이민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군대를 내어 서하에 주둔시키고, 좌장군 상관걸이 북변을 순행하였다.
시원(始元) 원년(BC 86) 봄 2월, 누런 학이 건장군의 태액지(太液池) 가운데 내려왔다. 공경들이 헌수(獻壽)를 올렸다. 제후·왕과 열후 및 종실에게 금과 전을 각각 차등있게 하사했다.
기해일, 상이 구순(鉤盾)의 농전(弄田)에서 밭을 갈았다.
연왕·광릉왕 및 악읍장공주에게 각각 1만 3천호씩 더 봉해주었다.
여름, 태후를 위해 운릉에 원묘(園廟)를 세웠다.
익주군의 염두(廉頭)·고증(姑繒)과 장가(장柯)군의 담지(談指)·동병(同竝)의 24읍이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 수형(水衡)도위 여파호(呂破胡)를 보내 이민들을 모집하고 건위·촉군에서 명을 듣고 급히 달려온 자(奔命)를 징발해 익주를 쳐, 대파하였다.
유사가 하내(河內)는 익주(翼州)에, 하동(河東)은 병주(幷州)에 속하게 하자고 청했다.
가을 7월,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백성들에게 1백호 당 소와 술을 하사했다.
큰 비가 내리니, 위교(渭橋)가 끊어졌다.
8월, 제 효왕(孝王)의 손자 유택(劉澤)이 반역을 모의하여, 청주자사 전불의(鐫不疑)를 죽이려 하다가 발각되니, 모두 복주되었다. 불의를 옮겨 경조윤(京兆尹)으로 삼고, 1백만 전을 하사했다.
9월 병자일, 거기장군 김일제가 훙했다.
윤월, 옛 정위 왕평(王平) 등 5명을 보내, 부절을 갖고 군국을 다니면서, 현량을 천거하고, 백성들에게 고통스럽고 원통한 바나 제 생업을 잃은 것을 물어보게 하였다.
겨울, 얼음이 얼지 않았다.
시원 2년(BC 85) 봄 정월, 대장군 곽광과 좌장군 상관걸이 모두 이전에 모반했던 자들을 체포하여 참수하고 중합후 마통을 사로잡은 공으로 봉해지니, 광은 박륙후(博陸侯), 상관걸은 안양후(安陽侯)가 되었다.
종실 중에 관위가 없는 자로써 무재(茂才)로 천거된 유벽강(劉벽彊)과 유장락(劉長樂)을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삼고, 벽강은 장락궁을 지키는 위위(衛尉)로 임명했다.
3월, 사자를 파견해 빈민들 중 종자나 양식이 없는 자에게 진대하였다.
가을 8월, 조칙을 내려 이르길 “지난해는 재해가 많았고, 올해는 누에치기와 보리농사가 상했으니, 진대하였던 종자와 양식은 거둬들이지 말고, 백성들에게 영을 내려 올해의 전조를 내지 않게 하라”고 했다.
겨울, 전투와 활쏘기를 익힌 군사를 징발해 삭방으로 보내고, 이전의 관리 중에서 (장수가 될 만한 자) 선발하여 (그들을) 거느리고 장액군에서 둔전케 했다.
시원 3년(BC 84) 봄 2월,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다.
가을, 백성들을 모집해 운릉으로 옮기고, 돈과 전택을 하사했다.
겨울 10월, 봉황이 동해(東海)로 모여드니, 사자를 보내 그 곳에서 제사지내게 했다.
11월 임신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시원 4년(BC 83) 봄 3월 갑인일, 황후 상관(上官)씨를 세웠다.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송사(訟事)가 무제 후원 2년(BC 87) 이전에 있었던 것이면, 모두 치죄하지 말도록 했다.
여름 6월, 황후가 고묘에 알현했다. 장공주·승상·장군·열후·중 2천석 이하 및 낭리(郎吏)와 종실에게 돈과 비단을 각각 차등있게 하사했다.
삼보의 부유한 사람을 운릉으로 옮기고, 호당 10만전을 하사했다.
가을 7월 조칙을 내려 이르길 “올해는 곡식이 여물지 않아 백성들이 먹을 게 없고, 떠돌아 다니며 품팔던 사람들(流庸)도 (고향으로) 다 돌아오지 못하였는데, 지난 번에는 백성들에게 말을 공출하란 영을 내렸으니, 그 영을 중단시키라. 경사의 여러 관부에게 지급하던 것을 또한 줄여라.”고 했다.
겨울, 대홍려 전광명(田廣明)을 보내 익주를 치게 했다.
정위 이충(李충)이 예전에 사죄의 죄수를 석방한데 연좌되어 기시되었다.
시원 5년(BC 82) 봄 정월, 황태후의 아버지를 추존해 순성후(順成侯)라 하였다.
하양(夏陽)의 남자 장연년(張延年)이 북쪽 궁궐에 나아가 스스로 위태자(衛太子)라고 칭하다가 무망(誣罔)하였다 하여, 요참되었다.
여름, 천하에 정(亭)에서 어미 말을 기르게 한 영(亭母馬)와 말과 궁노(弓弩)에 대한 관 통과 금령(馬弩關)을 파했다.
6월, 황후의 아버지인 표기장군 상관안(上官安)을 봉해 상락후(桑樂侯)로 삼았다.
조칙을 내려 이르길 “짐이 작고 보잘 것 없는 몸으로 종묘를 보존하게 되니, 전전긍긍하며, 아침에 일어나거나 잠에 잘 들 때마다, 옛 제왕의 일을 닦고, <보전전(保傳傳)> 및 <효경>·<논어>·<상서>를 통독했지만, 아직 이에 능히 밝다고 말할 수 없다. 삼보 및 태상에 영을 내려 현량 각 2인 씩, 군국에서는 문학에 뛰어난 자(古第) 각 1인씩 천거케 하라. 중 2천석 이하에서 이민들까지 작을 각각 차등있게 하사하라”고 했다.
담이(담耳)·진번(眞番)군을 파했다.
가을, 대홍려 전광명과 군정(軍正) 왕평(王平)이 익주를 쳐서, 참수하고 포로로 한 것이 3만여 명이고, 노획한 가축은 5만여 두(頭)나 되었다.
시원 6년(BC 81) 봄 정월, 상이 상림에서 친히 밭을 갈았다.
2월 조칙을 내려 유사에게 군국에서 천거한 현량·문학에게 백성들의 괴로워하는 바를 묻게 했다. 염철관·각고관을 파하자고 주의(奏議)했다.
이중감(移中監) 소무(蘇武)는 전에 흉노에 사신을 보내졌다가 선우의 조정에 억류되어 19년 뒤에야 돌아 오게되었는데, 명을 받들어 출사(出使)함에 부절을 온전히 보전하니, 소무를 전속국(典屬國)으로 삼고, 1백만 전을 하사했다.
여름, 가물어서 큰 기우제(大雩)를 지냈지만, 양기를 억누를 수 없었다.
가을 7월, 각고관을 파하고, 백성들에게 영을 내려 율에 따라 스스로 계산해 세금을 내되, 술 1되(升)를 팔 때 4전으로 내게 했다. 변방의 요새가 소활(疏闊)하고 멀어, 천수·농서·장액군에서 각각 2현 씩을 취하여 금성군(金城郡)을 두었다.
조칙을 내려 이르길 “구정후(鉤町侯) 무파(毋波)는 자신의 군장과 백성을 거느리고 반역자를 쳐서 머릴 베고 포로를 잡은 공이 있다. 무파를 세워 구정왕으로 삼으라. 대홍려 전광명도 군대를 거느림에 공이 있으니, 관내후의 작과 식읍을 하사하라”고 했다.
원봉(元鳳) 원년(BC 80) 봄, 장공주가 공양한 노고를 생각하여, 남전(藍田)의 땅을 장공주의 탕목읍으로 다시 더해주었다.
사수(泗水) 대왕(戴王)이 이전에 훙했는데, 후사가 없어, 나라가 없어졌다.
(대왕의) 후궁에게 유복자 난(煖)이 있었지만, (사수국의) 상과 내사가 이를 상주하지 않았는데, 상이 이를 듣고서 가련히 여겨, 난을 세워 사수왕으로 삼았다. 상과 내사는 모두 하옥되었다.
3월, 군국에서 의로운 일을 행하여 천거된 탁군(탁郡)의 한복(韓福) 등 5인에게 비단을 각각 50필 씩 하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조칙을 내려 이르길 “짐이 그들이 관직의 일에 고생함을 염려하여, (고향에 돌아가) 효제를 닦고 향리를 교화하는데 힘쓰게 했다. 군현에 영을 내려 늘 정월에 (그들에게) 양과 술을 하사하라. (그 중에) 죽은 자가 있으면, 의복 1습을 하사하고, 중뢰(中牢)로써 제사지내라.”고 했다.
무도군의 저인(저人)들이 반란을 일으키니, 집금오(執金吾) 마적건(馬適建)·용액후(龍額侯) 한증(韓增)·대홍려 전광명을 보내,. 삼보와 태상의 도형 죄수를 거느리고 모두 그 형을 면해주고 이를 치게 했다.
여름 6월,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가을 7월 을해일, 날이 어두워지며 개기일식이 있었다.
8월, 시원의 연호를 고쳐 원봉이라 했다.
9월 악읍장공주·연왕 단(旦)과 좌장군 상관걸과 그의 아들 표기장군 상관안, 어사대부 상홍양(桑弘羊)이 모두 모반하다 복주되었다. 처음에, 걸과 안이 대장군 곽광과 권력을 다투다 그를 해치려 하려고, 거짓으로 사람을 시켜 연왕 단이 글을 올려 곽광에게 죄가 있다고 말하게 하였다. 이때 상의 나이 14살이었지만, 그것이 거짓임을 알았다. 후에 곽광을 참소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상은 번번히 노하여 말하길 “대장군의 국가의 충신이며, 선제께서 (나를위해) 부탁하신 자이니, 감히 참소하여 헐뜯는 자가 있는 있으면, 그도 연좌시키리라”고 했다. 곽광이 이로 말미암아 충성을 다하였다. 이 말이 <연왕전>·<곽광전>에 있다.
겨울 10월, 조칙을 내려 이르길 “좌장군 안양후 상관걸·표기장군 상락후 상관안·어사대부 상홍양은 모두 수차례 간사하고 그릇된 일로 정사를 보필할 것을 간구(干求)하다가, 대장군이 이를 듣지 않자, 원망하는 마음을 품어 연왕과 통모(通謀)하여 역마를 두고 왕래하며 서로 약속을 맺었다. 연왕이 수서장(壽西長)과 손종지(孫縱之) 등을 보내, 장공주와 정외인(丁外人)·알자 두연년(杜延年)·대장군 장사 공손유(公孫遺) 등에게 뇌물을 주고 사사로이 서신을 교환하며, 함께 장공주를 시켜 주연을 베풀어서 복병을 숨겨두었다가 대장군 광을 살해하고 연왕을 불러 천자로 삼으려 했으니, 대역무도하다. 옛 도전사(稻田使)인 연창(燕倉)이 먼저 이 일을 알아 대사농 양창(楊敞)에게 고하고, 양창은 간대부(諫大夫) 두연년(杜延年;위의 알자 두연년과 다른 인물)에게 알리니, 두연년이 이 일을 알게 되었다. 승상 징사(徵事) 임궁(任宮)이 몸소 상관걸을 체포해 참수하였고, 승사 소사(少史) 왕수(王壽)는 상관안이 승상부 문 안으로 들어오게 꾀어서, 모두 이미 복주되었고, 이민들은 편안하게 되었다. 두연년·양창·임궁·왕수를 봉해 모두 열후로 삼으라”고 했다. 또 이르길 “연왕이 미혹하여 도를 잃어, 이전에 제왕의 아들 유택 등과 역모를 꾀해서 우러러 얼굴조차 들지 못하는 처지로, 왕위로 바라려면 정도(正道)로 되돌아가 스스로 일신해야 하는데, 지금 장공주 및 좌장군 걸 등과 함께 종묘를 위해하려 모의하였다.
연왕 및 장공주는 모두 스스로 제 죄를 자복했다. (연왕의) 왕태자 건(建)과 장공주의 아들 신(信) 및 종실의 자제를 사면하고, 연왕·상관걸 등과 모반한 자의 부모와 동산(同産; 형제)으로 연좌될 자들은 모두 사면하여 서인으로 삼으라. 관리로써 걸 등을 위해 잘못한 것이 있으나, 아직 발각되지 않아 관리의 직에 있는 자는 그 죄를 없애주라”고 했다.
원봉 2년(BC 79) 여름 4월, 상이 건장궁에서 미앙궁으로 옮기고, 큰 주연을 베풀었다. 낭종관(郎從官)에게 비단을 하사하고, 종실의 자식들에게 1인당 20만 전씩 하사했다. 이민들중 소와 술을 헌상한 자에게 비단을 1인당 1필 씩 하사했다.
6월,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조칙을 내려 이르길 “짐이 백성들이 아직 풍족치 못함을 불쌍히 여겨, 전년에는 조운 3백만 석을 감해주었다. 차츰 수레용 말이나 원마(苑馬)를 줄여, 변방의 군과 삼보의 역마(傳馬)를 보충하라. 군국에 영을 내려 금년의 마구전(馬口錢)을 거두지 말게 하고, 삼보 및 태상의 관할 군에서는 곡식(菽과 粟)으로 부세를 감당하게 하라”고 했다.
원봉 3년(BC 78) 봄 정월, 태산에 있는 큰 돌이 저절로 일어나 섰고, 상림에선 말라죽어 쓰러졌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나 살아났다.
중뢰원(中牢苑)을 파하고 (그곳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주었다. 조칙을 내려 이르길 “요즘 백성들이 수재를 입어 자못 먹을 게 없다하니, 짐은 창고를 비워 사자를 시켜 곤핍(困乏)한 백성들을 진휼케 했다. 4년간 조운을 운반치 말라.
3년 이전에 진대해 주었던 소(牛)로써, 승상이나 어사가 주청했던 바가 아니면, 변방의 군에서 받았던 소는 모두 거둬 받지 말라”고 했다.
여름 4월, 소부(少府) 서인(徐仁)·정위 왕평(王平)·좌풍익(左馮翊) 가승호(賈
勝胡)가 모두 반역자를 풀어준 일에 연좌되니, 서인은 자살하고, 왕평과 가승호는 모두 요참되었다.
겨울, 요동의 오환(烏桓)이 반란을 일으키니, 중랑장(中郞將) 범명우(范明友)를 도료(度遼)장군으로 삼아, 북쪽 변방 7개 군의 2천여 기를 거느리고 이를쳤다.
원봉 4년(BC 77) 봄 정해일, 황제가 원복(元服; 冠)을 더해쓰고, 고묘에 알현했다. 제후·왕·승상·대장군·열후·종실에서 아래로 이민들에 이르기까지 금과 비단·소·술을 각각 차등있게 하사했다. 중 2천석 이하 및 천하의 백성들에게 작을 하사했다. (원봉) 4년과 5년엔 구부전(口賦錢)을 거두지 말도록 했다.
(원봉) 3년 이전에 경부(更賦)가 밀려 내지 않았던 자에게 모두 이를 거둬 들이지 않게 했다. 천하에 영을 내려 5일간 크게 먹고 마시게 했다.
갑술일, 승상 전천추(田千秋)가 훙했다.
여름 4월, 조칙을 내려 이르길 “도료장군 범명우는 전에 강기(羌騎)교위로 강족의 왕후와 군장 이하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익주의 반역자를 치고 노획하였으며, 후에 다시 (이들을) 거느리고 무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저인들을 쳤는데, 지금은 오환을 격파하여 적들을 베고 사로잡아 공이 있다. 범명우를 봉해 평륙후(平陸侯)로 삼으라. 평락(平樂)감 부개자(傅介子)는 부절을 가지고 사신으로 가, 누란왕(樓蘭王) 안(安)을 베어 죽이고, 돌아와 그 목을 북쪽 궁궐에 걸어 놓았으니, 의양후(義陽侯)에 봉하라”고 했다.
5월 정축일, 효문묘의 정전에서 불이 나니, 상과 군신들이 모두 소복을 입었다
. 중 2천석 관리에서 선발하여 오교(五校)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수리하게 하니, 6일만에 완성되었다. 태상 및 (효문)묘의 영(令)·승(丞)·낭(郎)·리(吏)가 모두 대불경(大不敬)하다고 탄핵되었는데, (6월의 사면령을) 만나 사면되었지만, 태상 요양후(요陽侯) 강덕(江德)은 파면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6월,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원봉 5년(BC 76) 봄 정월, 광릉왕(廣陵王)이 입조하니, 그의 봉국에 1만 1천호를 더해주고, 2천만 전·황금 2백 근·검 2자루·안거 1승·말 8필을 하사했다.
여름, 크게 가물었다.
6월, 삼보 및 군국의 무뢰한 자제와 관리 중 고발되어 도망한 자를 징발해 요동에 주둔시켰다.
가을, 상군(象郡)을 파하고, 울림(鬱林)·장가군에 나눠 속하게 했다.
겨울 11월, 큰 벼락이 쳤다.
12월 경술일, 승상 왕흔(王흔)이 훙했다.
원봉 6년(BC 75) 봄 정월, 군국의 도형을 받은 죄수를 모집해 요동에 현토성을 쌓게 했다.
여름,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조칙을 내려 이르길 “무릇 곡적(穀賊)이 농사를 해치니, 지금 삼보와 태상의 곡식으로 곡적을 줄이고, 숙속(菽粟)으로 금년의 부세를 감당케 하라”고 했다.
우장군 장안세(張安世)가 숙위함에 충성스럽고 근후하니, 부평후(富平侯)에 봉했다.
오환이 다시 요새를 침범하니, 도료장군 범명우를 보내 이를 치게 했다.
원평(元平) 원년(BC 74) 봄 2월, 조칙을 내려 이르길 “천하는 농상을 근본으로 삼는다. 일전에 씀씀이를 줄이고, 급하지 않은 관직을 파하며, 밖에서 요역하는 것을 줄였더니, 농상하는 자들이 더욱 많아졌지만, 백성들은 아직도 집집마다 풍족치 못하니, 짐이 이를 애처로이 여기는 바이다. 구부전을 감하라”고 했다. 유사가 10분의 3을 줄일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허락했다.
갑신일, 새벽에 유성이 있어서 크기가 마치 달만 했는데, 뭇 별들이 모두 서쪽으로 따라 갔다.
여름 4월 계미일, 황제가 미앙궁에서 붕어했다.
6월 임신일, 평릉(平陵)에 장사지냈다.
찬(贊)하여 가로되 “옛날 주나라 성왕(成王)은 어린 아들로 왕위를 잇게 되었더니, 관(管)·채(蔡)의 4나라에서 유언비어의 변란이 있었다. 효소제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더니, 또 연왕·개장공주·상관걸의 역란(逆亂)의 모의가 있었다. 성왕은 주공(周公)을 의심치 않았고, 효소제는 곽광을 믿고 맡겨서, 각각 그 때로 인한 명망을 이루었으니, 크도다! 효무가 여축(餘蓄)을 낭비하고 군대를 피폐케 한 뒤를 이어서, 해내는 텅 비고 호구는 반으로 줄었지만, 곽광이 시무(時務)의 요지를 알아, 요역과 세금을 가벼이 해 백성과 더불어 휴식을 취했다. 시원·원봉 연간에 이르러선, 흉노와 화친하여 백성들은 충실해졌다. 현량·문학을 천거케 하고, 백성의 고통스런 바를 들으며, 염철에 대해 의논해 각고관을 파하였으니, 존호를 ‘소(昭)’라 함이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 참고할 내용
– 전한 소제
.지위: 전한의 제8대 황제
.재위: 기원전 87년~기원전 74년
.전임: 무제
.후임: 폐제
.부친: 무제
.모친: 효소태후
.배우자: 효소황후
○ 전한 소제(昭帝)
기원전 87년 8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즉위전 여태자가 역모로 죽임당하고 장성한 아들 창읍애왕마저 병으로 죽자 장성한 다른 아들 연날왕 유단, 광릉여왕 유서가 있음에도 구익부인 조씨 소생의 어린 아들 불릉을 태자로 내정하였다. 한무제는 어린 아들에게 젊은 모(태후)가 있으면 외척의 발호와 폐단이 있을 것이라 하여 구익부인 조씨를 자결하게 하고 그의 인척들을 축출하였다. 그 뒤 곽광(霍光)·김일제(金日磾)를 아들의 후견인으로 지정하였다.
한무제의 막내아들로 후궁 구익부인 조씨(鉤弋夫人 趙氏) 소생. 하지만 무제의 아들 여태자 유거와 창읍왕 유박이 잇따라 죽자 무제는 기원전 87년 2월 12일 조서를 내려 어린 유불릉을 태자로 삼고 곽광을 대사마, 대장군에, 김일제를 거기장군에, 상관걸(上官傑)을 좌장군으로 삼아 어린 유불릉을 보필하도록 지시했고, 이틀만인 14일에 한무제는 사망했고 결국 유불릉은 8살에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두 형 연왕(燕王) 유단(劉旦)과 광릉왕(廣陵王) 유서(劉胥)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버젓이 살아 있는 상태로, 소제는 만만찮은 반란에 시달렸는데 무제가 죽은 다음해인 기원전 86년부터 익주에서 원주민 반란이 벌어졌고, 바로 같은해 연왕의 제위 찬탈 시도 사건이 벌어진다. 연왕 유단은 한무제의 사망을 알린 새서를 받자 그 새서의 봉투가 작다는 핑계로 의심을 시작하더니, 소제가 13,000호의 식읍과 30만전을 보내는 조서를 보내자 “나는 황제가 되어야 하는데, 무슨 하사인가?”라며 본색을 드려냈다. 그 뒤 종실 가운데 유장(劉長, 중산애왕의 아들)과 유택(劉澤, 제효왕의 손자)과 모의해서 유불릉이 무제의 아들이 아니라는 모함을 퍼트린다. 이후 유택은 청주에서 청주자사 준불의(雋不疑)를 죽이고 거병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 계획을 병경후(缾敬侯) 유성(劉成)이 알고 준불의에게 고하였다. 준불의는 유택을 잡아 이 사실을 고하고 소제는 연나라에 대홍려(관직 이름)의 승을 파견해서 연왕 유단을 체포한다, 다만 연왕은 처벌을 면했고, 유택 등은 복주됐으며, 유성은 봉읍을 더 받았다.
무제로부터 새 황제를 부탁받은 세 사람 중 김일제는 다음해인 기원전 86년 9월 2일 사망했기 때문에 곽광, 상관걸이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처음에는 상관걸은 아들 상관안을 곽광의 딸과 결혼시킬 정도로 두 사람은 매우 친했다. 그래서 상관걸은 두 사람 사이에 낳은 딸을 소제의 황후로 집어넣기 위해 곽광에게 협조를 요청했지만, 곽광은 외손녀가 어리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결국 상관걸의 손녀가 황후가 되긴 했지만, 이 사건은 결국 두 사람이 원수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당시 소제는 황제의 측근인 내조의 수장 곽광만을 신임했으며, 이에 상관걸과 상홍양(桑弘羊)이 연합하여 그나마 세력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다 무제 시절 실시했던 염철주 전매제도의 폐지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크게 맞붙게 된다. 엄청난 논쟁이 벌어진 끝에 염철회의는 술의 전매만 중단되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그러나 40년 가까이 유지됐던 굳건한 염철주 전매제도가 훼손됐다는 것은 곽광과 상관걸-상홍양 사이의 권력차가 커지고 있다는 반증이었으며, 소금과 철의 전매도 중단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렇게 되자 상관걸-상홍양 진영은 불안에 떨게 된다.
기원전 81년, 염철회의가 결론이 나자 상관걸 측은 반격을 위한 행동에 돌입했다. 그들은 사전에 소제의 이복누나인 개장공주(蓋長公主)와 앞서 제위 탈환을 시도했던 연왕 유단을 포섭하여 곽광을 참소하였다. 곽광이 황제 친위대인 우림군(羽林軍)을 검열하고 그 과정에서 교위를 하나 불러 새로운 직위를 준 것을 역모로 둔갑시킨 것. 그러나 소제는 연왕의 이름으로 올라온 상소를 보고, 10만리나 떨어진 연경(지금의 북경)에서 장안에서 최근에 벌어진 일을 알고 상소할 수는 없다고 말하며 여전히 곽광을 신뢰하였다. 소제는 상소문을 올린 경위를 파악했고, 거짓 상소문을 올린 일당은 도주했다. 그 이후에도 상관걸, 상관안, 상홍양은 끊임없이 곽광을 참소했지만, 소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참소가 계속되자 불같이 화를 냈다. 소제는 “곽광은 내 어버이같은 신하이므로 그를 참소하는 건 용서치 않겠다”고 선언했다.
상관걸 일당은 소제가 있는 한 곽광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정변을 결심했다. 곽광을 죽인 후 소제를 폐위시키고 자기들과 한패인 연왕을 황제로 올린다는 내용이었다. 기원전 80년 상관걸 등은 개장공주 집에서 연회를 연 뒤 곽광을 초대하고 미리 배치한 자객들로 하여금 곽광을 죽인다는 작전을 실행하였으나, 내부고발로 누설이 되고 말았다. 대로한 소제는 승상 전천추(田千秋)에게 명해 곽광 암살을 기도한 무리를 모두 잡아들이고 삼족을 멸하도록 했다. 이로써 상관걸, 상관안, 상홍양 모두 처형당해 기시(棄市, 시체를 저잣거리에 버리는 형벌)됐고, 연왕과 개장공주는 각각 자결했으며 연나라는 폐지됐다. 상관씨와 상씨 집안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곽광의 외손녀인 효소황후 뿐이었다. 이로서 대장군 곽광은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으며, 상홍양이 그토록 애썼던 염철주 전매는 모두 폐지된다.
곽광은 막강한 권세를 누리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재능과 학식이 부족한 편이었다. 그러나 공평무사하고 항상 몸을 삼가는 자세를 취하였으므로 소제의 치세동안 나라는 안정되었다. 그러나 그의 막강한 권세는 뒷날 곽씨 일가의 전횡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기원전 74년 소제는 21살의 나이로 요절한다. 그의 뒤는 소제의 조카이자 유박의 아들인 창읍왕 유하가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정권을 장악하려는 행각으로 인해 얼마되지 않아 곽광에게 폐위되었다. 이후 여태자의 손자 유순이 뒤를 이어 황제가 되니 그가 한나라 선제(宣帝)다.
○ 가족관계
.부 : 무제
.모 : 효소태후(구익부인)
.황후 : 효소황후 상관씨(孝昭皇后 上官氏)
○ 연호
시원(始元) 기원전 86년 ~ 기원전 80년
원봉(元鳳) 기원전 80년 ~ 기원전 75년
원평(元平) 기원전 74년
○ 평가
역대제왕도권에 첫번째로 나오는 황제다.
썩 칭찬할 것이 없는 군주이므로 닮지 말라는 의미에서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