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열전
상군열전 (商君列傳)
사마천 사기열전의 여덟 번째 열전.
상앙의 일대기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진(秦)의 법가 정치가. 관중, 왕안석, 장거정 등과 더불어 중국사에 이름을 남긴 개혁가이기도 했다.
○ 상군열전(商君列傳)
1.不能任用 不會殺之(불능임용 불회살지),
-나를 임용할 능력도 없으니 죽일 능력도 없다.
상군(商君)은 위(衛)나라 서얼(庶孼) 공자다. 이름은 앙(鞅)이고 성은 공손(公孫) 씨다. 그의 조상은 원래 주나라 왕족과 같은 희(姬) 성이다. 공손앙(公孫鞅)은 어려서부터 형명학(形名學)을 좋아했다. 후에 위(魏)나라 상국 공숙좌(公叔座)를 섬겨 그의 중서자(中庶子)가 되었다. 공숙좌는 그가 현능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위왕에게 천거하지는 않았다. 이윽고 공숙좌가 병이 들자 위왕이 몸소 거동하여 문병하며 물었다.
「공숙께서 만일 병상에서 일어날 수 없다면 누구에게 사직을 맡겨야 하겠습니까?」
공숙좌가 대답했다.
「저의 중서자 공손앙은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재능이 뛰어나니 원컨대 그에게 나라를 맡기십시오.」
위왕이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위왕이 돌아가려고 하자 공숙좌가 주위 사람들을 물리치고 말했다.
「왕께서 앙을 쓰지 않으시려거든 반드시 그를 죽여 결코 나라 밖으로 내보내지 마십시오.」
위왕이 공숙좌의 말대로 하겠다고 대답한 후에 돌아갔다. 왕이 돌아간 뒤에 공숙좌가 공손앙을 불러 사과하며 말했다.
「오늘 왕이 나의 후임으로 누구를 상국으로 삼았으면 좋겠냐고 묻기에 내가 그대를 천거했으나 왕의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소. 나는 군주에게 먼저 충성을 다하고 후에 밑의 사람들을 돌봐야 한다고 생각해서 만일 공손앙을 쓰지 않으시려거든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말했소. 왕이 내 말대로 하겠다고 대답하고 돌아갔소. 그대는 빨리 이곳을 떠나시오. 그렇지 않으면 왕에게 잡혀서 죽게 되오.」
공손앙이 대답했다.
「왕께서 대감의 말을 받아들여 나를 쓸 능력도 없는데 어찌 대감의 말을 듣고 나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공손앙은 결국은 달아나지 않았다. 혜왕이 궁궐로 돌아가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했다.
「공숙좌가 병이 들어 정신이 혼미하니 참으로 슬프도다! 과인에게 나라를 공손앙에게 맡기라고 하다니 황당한 일이로다!」
2.治國三術(치국삼술)
-상앙이 진효공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세 가지 술법을 유세하다.
공숙좌가 죽고 얼마 후에 상앙은 진나라의 효공(孝公)이 나라 안에 령을 내려 인재를 구해 목공(穆公)의 공업을 계승하여 동쪽의 빼앗긴 땅을 수복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상앙은 곧바로 서쪽의 진나라로 들어가 총신 경감(景監)을 통하여 효공의 접견을 청했다. 효공이 위앙을 불러 만났으나 위앙의 말이 장황하고 지루하여 효공이 때때로 졸면서 듣지 않기도 했다. 접견이 끝나고 위앙이 물러가자 효공은 경감을 불러 꾸짖었다.
「그대가 천거한 객은 망령된 자라 어떻게 쓸 수 있단 말인가?」
이에 경감이 위앙을 책망하자 위앙이 대답했다.
「제가 전하께 요순(堯舜)의 제도(帝道)를 가지고 말씀드렸는데 그 뜻을 깨닫지 못하신 듯합니다.」
그리고 5일 후에 다시 경감이 진효공에게 위앙을 불러 다시 접견해주기를 청했다. 위앙이 효공을 만나 유세했는데 전보다는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효공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다시 효공의 꾸중을 듣게 된 경감이 위앙을 책망했다. 위앙이 말했다.
「나는 우(禹), 탕(湯), 문(文), 무(武)가 행한 왕도(王道)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만 마음에 들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이에 경감이 다시 한 번 상앙을 위해 접견을 청했다. 효공을 접견한 상앙이 유세를 행하자 효공이 좋아하기는 했으나 곧바로 등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접견이 끝나고 상앙이 물러가자 효공이 경감을 불러 말했다.
「너의 손님은 매우 훌륭하다. 그와 함께 말을 나눌만 하다.」
이 말을 전해들은 상앙이 경감에게 자기가 효공에게 말한 내용을 설명했다.
「제가 패도(覇道)를 설명하자 전하께서는 그것을 채용하려고 합니다. 한 번만 더 뵙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았습니다.」
위앙이 효공을 다시 접견했다. 효공이 위앙과 대화를 나누는데 열중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그의 무릎이 자리 앞으로 나오는지 알지 못했다. 효공은 몇 날을 상왕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도 결코 싫증을 내지 않았다. 접견을 끝내고 나온 상앙을 보고 경감이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전하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까? 전하께서는 매우 기뻐하시고 계십니다.」
「제가 전하께 제왕의 도를 행하면 하은주(夏殷周) 삼대에 버금가는 공업을 이룩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전하께서는 ‘너무 멀구나!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릴 수 없다. 마땅히 현명한 군주라면 각기 자신의 당대에서 공적을 이루어내어 이름을 천하에 떨치려고 한다. 그런데 어찌 답답하게 수십 년이나 수백 년 동안을 기다려야만 성취할 수 있다는 제왕의 도를 채택할 수 있단 말이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국강병의 술을 전하께 말씀드렸더니 전하께서는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역시 은(殷)이나 주(周)가 이룩한 덕과 비교하기에는 매우 어렵습니다.」
3.醞釀變法(온양변법)
-변법을 준비하다.
효공이 위앙을 등용하여 변법을 시행하려고 했으나 천하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자기를 비난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위앙이 말했다.
「의심하면서 하는 행동에는 공명이 따르지 않고, 의심하면서 하는 사업에는 성공이 없습니다. 또 대체로 남보다 뛰어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본래부터 세상의 비난을 받게 마련이고 홀로 아는 지혜를 지닌 사람은 반드시 백성들에게 경멸을 받습니다. 또한 우매한 자는 일의 성과에 대해 어둡고 지혜있는 자는 일의 징조가 있기 전에 미리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란 함께 일을 의논할 수는 없으나 함께 일의 성과를 즐길 수 있습니다. 지극한 덕을 논하는 자는 속세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큰 공을 성취하는 자는 대중과 함께 의논하지 않습니다. 그럼으로 성인이 진실로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일이라면 그 옛 것을 법으로 지키지 않으며 백성들을 진실로 이롭게 할 수 있다면 구례를 쫓지 않는 법입니다.」
그래서 효공이‘좋소’라고 대답하며 상앙의 변법을 시행하려고 했다. 그러자 감룡(甘龍)이라는 사람이 변법에 반대하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인(聖人)은 백성들의 풍속을 고치지 않고도 교화시킬 수 있으며, 지혜로운 자는 변법을 행하지 않고도 치세를 이룰 수 있습니다. 백성들의 풍속에 따라 그들을 교화시키면 힘을 들이지 않고도 공업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미 있는 법에 따라 다스린다면 관리들은 익숙하여 백성들은 편안하게 됩니다. 」
위앙이 감룡의 말에 반박하며 말했다.
「감룡은 세속적으로 진부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범인들은 옛 습속에 안주하며 학자들은 알고 있는 일에만 빠져들게 됩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을 관리로 만들어 법을 지키게 할 수는 있으나 법 밖의 일을 더불어 의논할 수 없습니다. 삼대는 같지 않은 예로써도 왕이 될 수 있었으며, 오패는 서로 같지 않은 법으로도 패자가 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법의 지배를 당합니다. 현자는 예를 바꾸나 불초한 자는 예에 구애되는 법입니다.」
그러자 다시 두지(杜摯)가 반대하며 말했다.
「백 배의 이득이 생기지 않으면 법을 변경하지 않고, 열배의 공업을 이룰 수 없을 때는 그릇을 바꾸지 않습니다. 옛 법을 따르면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옛날의 예를 따르게 되면 사악함이 없게 됩니다.」
위앙이 말했다.
「세상에 치세를 이룰 수 있는 도는 하나만이 아니며 나라를 개변시킬 수 있는 방법은 옛 법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은나라의 탕왕이나 주나라의 무왕은 옛 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왕자가 되었고, 하와 은이 망한 이유는 옛 제도만을 고집하며 시세에 맞게 고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로 옛 제도에 어긋난다고 해서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없으며, 예를 쫓는 방법만으로 해서 그 행위가 정당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효공이 위앙의 말이 옳다고 여겨 위앙을 좌서장(左庶長)으로 삼아 마침내 변법의 법령을 제정하라고 명했다.
백성들을 모두10호를 십(什)으로 5호를 오(伍)로 짜서 서로 감독하게 하는 연좌제를 실시했다. 죄를 범한 자를 고발하지 않은 사람은 요참(腰斬) 형에 처하고, 고발한 사람은 전장에 나가 적의 수급을 베어 공을 세운 사람과 동일한 상을 내렸다. 법을 어긴 자를 숨긴 사람은 적에게 항복한 사람과 같은 죄를 주었다. 한 가정에 두 사람 이상의 장정이 있음에도 분가하지 않았을 경우, 그 세금을 두 배로 물렸다. 군공이 있는 사람은 그 공적의 크고 작음에 따라 각각 높은 작위를 받았다. 또한 사사로이 종족간의 싸움을 일으킨 자는 각기 그 경중을 따져 형벌을 내렸다. 백성된 자들은 온 힘을 다하여 본업에 종사하게 하고, 밭갈이나 베짜기를 하여 곡식을 많이 수확하고 비단을 많이 생산한 사람들은 자신의 노역과 부세를 면제했다. 이익만을 취하여 장사에 종사하며 게으름을 피움으로써 가난하게 된 자는 그 가족들과 함께 모두 잡아들여 노비로 만들었다. 공실의 귀족일지라도 군공을 세우지 못한 사람은 논의를 거쳐 족보에 올릴 수 없게 만들었다. 존비와 작위, 봉록의 등급을 분명히 하고 각각 규정을 두어 전답과 저택, 노비의 수, 의복의 종류 등에 따라 그 집의 직급을 정했다. 공이 있는 자는 영예를 누리고 공이 없는 자는 비록 부유하더라도 그 호사함을 누릴 수 없게 했다.
4.移木立信(이목입신)
-나무를 옮기게 해서 백성들에게 신의를 세우다.
법령은 이미 마련되었으나 백성들이 믿고 따르지 않을 경우를 걱정하여 반포하지 않고, 즉시 3장 길이의 나무를 도성의 남문 거리에 세워 놓고 그 나무를 북문으로 옮겨 놓는 백성에게는 10금의 상금을 주겠다는 방문을 걸었다. 백성들이 괴이하게 생각하여 감히 나무를 옮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방문을 걸었다.
「이 나무를 옮기는 자에게는50금의 상금을 주겠다.」
어떤 사람이 그 나무를 옮기자 즉시 50금 주어 나라가 백성들과의 약속을 어기지 않는 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마침내 법령을 포고했다.
법령이 반포되어 시행된 지 한 해가 지나자 진나라 백성들은 모두 처음에는 법령이 불편하다고 호소하는 자는 수천 명에 달했다. 그래서 태자가 일부러 법령을 범했다. 위앙이 말했다.
「법이 시행되지 않는 원인은 위에서 스스로 법을 어기기 때문이다.」
이어서 태자에게 죄를 물으려고 했으나 태자는 후에 나라를 이을 사람임으로 태자의 몸에 직접적으로 형을 가할 수 없어 그 태부(太傅) 공자건(公子虔)에게 죄를 묻고, 사부(師傅) 공손고(公孫賈)는 경형(黥刑)에 처했다. 그 다음날이 되자 진나라 사람들은 모두 상앙이 제정한 법령을 따르게 되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나자 진나라 사람들은 새로운 법을 지키게 됨을 매우 기뻐했다. 길거리에 물건이 떨어져도 주워가는 사람이 없게 되었고, 산속에는 도적이 사라졌으며, 백성들 모두는 부유하게 되어 풍족한 삶을 살게 되었다. 백성들은 국가가 벌이는 전쟁에 나가서는 용감하게 싸웠으며, 사사로운 싸움을 벌이는 행위를 두렵게 생각했다. 이윽고 나라는 성읍이나 향촌이나 잘 다스려졌다. 처음 변법이 시행되자 법령이 불편하다고 말했던 사람들이 그때는 법령이 편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위앙이 말했다.
「이런 자들이야 말로 백성들의 교화를 문란하게 하는 자들이다.」
위앙은 그들 모두를 변방으로 옮겨 살게 했다. 그 후로는 진나라 백성들 중 상앙의 변법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이 없어지게 되었다.
진효공은 그 공로를 인정하여 위앙의 작위를 대양조(大良造)로 올렸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위나라의 안읍을 포위한 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3년 후에 함양에 궁궐과 기궐(冀闕)을 새로 축조하고 도읍을 옹(雍)에서 함양으로 옮겼다. 다시 법령을 공포하여 성인으로써 부자나 형제가 한 방안에서 같이 혼숙하는 행위를 금했다. 작은 읍과 향들을 모아 현(縣)으로 만들어 그 장관에 현령(縣令)과 현승(縣丞)을 두었다. 진나라의 전국을 모두 31개 현으로 정비했다. 정전(井田)를 폐지하고 새로이 천맥(阡陌)으로 경계선을 삼아 황무지의 개간을 장려했고 부세의 부담을 공평하게 했다. 두통(斗桶), 권형(權衡) 및 장척(丈尺)을 통일했다. 그리고 4년이 지났을 때 공자건이 다시 법을 어겨 코를 베는 의형(劓刑)에 처했다. 그리고 다시 5년이 지나자 진나라 백성들은 모두 부강해졌다. 천자가 제사를 지낸 고기를 효공에게 보내와 진나라의 치세를 포상하자 제후들도 모두 축하했다.
5.詐俘故友(사부고우)
-사술을 이용하여 옛 친구를 포로로 잡은 상앙
그 다음 해에에 제나라가 위나라를 마릉(馬陵)에서 패배시키고 위나라의 태자 신(申)을 포로로 하고 그 장수 방연(龐涓)을 죽였다. 다음 해가 되자 위앙이 효공에게 말했다.
「진(秦)과 위(魏) 두 나라는 사람으로 비유해서 말하자면 서로 간에 마치 심복질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위나라가 진나라를 병탄하지 못한다면 진나라가 위나라를 병탄하게 되어있습니다. 어째서 그러겠습니까? 위나라는 서쪽의 험준한 지형에 의지한 안읍(安邑)을 도읍으로 삼았으며 진나라와는 하수를 경계로 삼아 산동의 지리적인 이점을 혼자 누리고 있습니다. 유리하면 서쪽으로 진출하여 진나라를 공격하고 피로해지면 동쪽으로 나아가 땅을 차지합니다. 지금 우리 진나라는 전하의 성스럽고 어진 덕으로 국세가 강성해졌습니다. 그러나 위나라의 군사는 작년에 제나라 군사에 의해 크게 무너졌기 때문에 제후들과 틈이 벌어졌습니다. 이때를 이용하여 위나라를 정벌한다면 위나라는 버티지 못하고 그 주력을 모두 동쪽으로 옮겨가야할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위나라가 나라를 모두 동쪽으로 옮겨간다면 진나라는 하수와 효산(殽山)의 험지에 굳게 의지하여 동쪽의 제후들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제왕의 대업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효공이 위앙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군사를 주어 위나라를 정벌하라고 했다. 위나라가 공자 앙(卬)을 장수로 삼아 진나라 군사를 막도록 했다. 진과 위 두 나라 군대가 보루를 세우고 대치상태로 들어가자 위앙이 편지를 써서 공자앙에게 보냈다.
「원래 나와 공자는 서로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였는데 지금은 모두가 적대국의 장수가 되었습니다. 제가 옛날 공자와 나눈 정리가 생각이 나서 차마 공격할 수 없습니다. 그저 공자와 서로 만나 대면하고 휴전을 기약하는 회맹이나 행하면서 술잔을 기우린 후에 군사들을 거두어 돌아간다면 진과 위 두 나라는 안전을 보장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공자앙이 믿고 비무장으로 회맹에 참석하여 술을 마시다가 위앙이 매복시킨 갑사들에게 기습을 받아 사로잡히게 되었다. 위앙은 대장이 없는 위군을 공격하여 크게 이기고 진나라로 개선했다. 당시 위혜왕은 위나라의 군사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제와 진 두 나라 군사들에게 참패당하여 국내는 텅 비어 있고 날이 갈수록 영토는 줄어들어 두려운 마음에 사자를 보내어 하서의 땅을 떼어 진나라에 바치고 강화했다. 그리고 드디어 위나라는 안읍을 버리고 대량(大梁)으로 도성을 옮겼다. 양혜왕(梁惠王)이 말했다.
「내가 공숙좌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한이 되는구나!」
위앙이 하동의 위군을 격파하고 개선하자 진나라는 그를 오(於)와 상(商) 등의 15개 읍에 봉하고 위앙을 상군(商君)이라 칭했다.
6.忠言逆耳(충언역이)
-조량의 충언을 듣지 않은 상앙
상앙이 진나라의 재상이 된지10년이 지나자 종실과 귀척들 중 그를 원망하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 조량(趙良)이라는 사람이 상앙을 방문했다. 상앙이 조량을 보고 말했다.
「나는 당신을 맹란고(孟蘭皐)의 소개로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당신과 가까이 지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 같은 비천한 사람이 어찌 감히 바랄 수 있겠습니까? 공자(孔子)의 말씀에 ‘어진 사람을 천거하여 받들어 모시면 자연히 백성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성공하게 되고, 불초한 자를 모아 왕 노릇을 하게 되면 결국은 실패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재주가 없는 비천한 사람이니 감히 공의 명을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또한 ‘앉아서는 안 될 사람이 높은 자리를 있는 행위를 탐위(貪位)라 하고, 가질 수 없는 명성을 누리는 행위를 탐명(貪名)이다.’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명을 받들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진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내가 탐탁하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반성하면서 다른 사람의 충고에 귀를 기우리는 행위를 총(聰)이라 하고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행위를 명(明)이라 하며, 자기 자신을 이기는 행위를 강(强)이라 합니다. 순임금께서도 ‘스스로를 낮추면 남으로부터 높임을 받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군께서 만약 순임금의 도를 행하지 않겠다면 저에게 구태여 물으실 필요가 있으시겠습니까?」
「원래 진나라는 융적의 풍습을 배워서 부자가 무별하여 같은 방에서 남녀가 같이 기거했던 풍습을 내가 고쳐서 남녀가 유별하게 만들었소. 함양에 기궐(冀闕)을 크게 축조하여 법령을 반포함으로 해서 진나라를 노(魯)나 위(衛)나라처럼 백성들로 하여금 중원문화를 알게 했소. 그대는 진나라를 다스리는 나와 오고대부(五羖大夫)를 비교해서 누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까?」
「천 마리의 양 가죽도 한 마리의 여우 겨드랑이 가죽보다 못합니다. 또한 천 사람의 아부하는 말보다 한 사람의 꼿꼿한 자세로 하는 직언만 못합니다. 주무왕은 신하들의 꼿꼿한 자세로 한 직언으로 창성했고 은의 주왕은 신하들이 입을 봉했기 때문에 망했습니다. 군께서 만일 무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제가 곁에 있으면서 하루 종일 직언만을 해도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이런 말이 있소. 겉으로 하는 말은 화려하고, 지극한 말은 진실되며, 입에 쓴 말은 약이 되고, 달콤한 말은 병이 된다고 했소. 당신의 말대로 하루 종일 나에게 바른 말만 해 준다면 이 사람에게는 약이 되오. 나는 당신의 말을 받들려고 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은 계속 사양하기만 하오?」
「그렇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고대부는 초나라의 미관말직의 비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진목공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한 번 보기를 원해 가려고 했으나 여비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진나라에서 온 손님에게 자신을 팔아 갈포로 만든 옷을 입고 소를 길렀습니다. 일 년이 지나서야 진목공이 알고 소를 기르던 그를 끌어 올려 만백성들의 위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진나라 백성들 중 아무도 감히 그를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진나라의 재상이 된지 6-7년이 되자 동쪽으로는 정나라를 쳤고, 당진(唐晉)의 군주를 세 번이나 앉혔으며, 중원에 가해지는 초나라의 침략을 물리쳤으며, 그가 베푼 덕화는 진나라 밖의 파인(巴人)에게 까지 미쳐 그들로 하여금 조공(朝貢)을 바치게 만들었으며, 제후들에게 덕을 베풀어 융족의 8개 부족을 복속시켰습니다. 유여(由余)가 소문을 듣고 동쪽으로 달려와 진나라의 관문을 두들기면서 접견을 청했습니다. 백리해는 미천한 처지에서 재상이 되었지만 피로해도 앉아서 타는 수레를 타지 않았으며, 날씨가 찌는 듯이 더워도 수레에 덮개를 덥지 않았습니다. 나라 안을 순행할 때도 호종하는 수레를 거느리지 않았으며 무기를 든 호위병들도 데리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의 공업과 명성은 기록되어 부고에 보관되었고 덕행은 후세에 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백리해가 죽자 진나라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동자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았고, 절구에 방아를 찧는 사람들은 구령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백리해의 덕입니다. 지금 군께서는 진왕을 접견하실 때 왕의 총애를 받던 경감(景監)에게 천거를 부탁한 일은 선비로써 명예로운 행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음에도 백성들을 위해 일을 하지 않고 기궐을 크게 지어 엄혹한 법령만을 남발했으니 그것이 공적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태자의 태부와 사부에게 각각 경형 등의 형벌을 가했고, 잔혹한 형벌로 백성들을 상하게 했으니 이것은 바로 백성들의 원한을 사서 그 화가 자신에게 미치게 하는 행위입니다. 당신의 호령은 군왕의 명령보다 깊고, 백성들은 군왕의 명령보다는 당신의 호령에 더욱 민첩하게 대합니다. 오늘 군께서 세운 제도는 도리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다시 법을 바꾸려고 해도 인정에 어긋나니 그것으로 백성들을 교화시킬 수 없습니다. 더욱이 군께서는 군왕의 자세로 남면하여 군왕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과인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매일 진나라의 공자들을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시(詩)에 다음과 같은 노래가 있습니다.
보건데 쥐도 사지가 있거늘
사람으로써 예의가 없구나
사람으로써 예의가 없으니
어찌하여 빨리 죽지 않겠는가?
相鼠有體 人而無禮(상서유체 인이무례)
人而無禮 何不遄死(인이무례 하불천사)
이 시에서 보건데 군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태자의 태부 공자건에게 묵형을 가하여 8년 동안 집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으며, 사부 공손고(公孫賈)는 처형했습니다. 또 시(詩)에 ‘인심을 얻으면 흥하고 인심을 잃으면 망한다(得人者興 失人者崩)’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군께서 지금까지 한 일들은 모두 인심을 얻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군께서 한 번 집 밖에 출타할 때는 뒤를 따르는 수레는 10여 대가 넘고 그 수레에는 무장한 군사들을 가득 싣고 힘이 장사인 무사들을 배석시켜 호위를 받으며 모(矛)와 극(戟)으로 무장한 군사들은 수레 옆에 붙어 달리게 하고 있습니다. 그 중 단 한 가지라도 갖춰지지 않으면 군께서는 결코 외출하지 않습니다. ‘서경'(書經)에 ‘ 덕에 의지하는 자는 번창하고, 힘에 의지하는 자는 망한다.’라고 했습니다. 군의 운명은 마치 아침이슬처럼 위태로운 처지에 놓였는데 여전히 직위를 탐하여 오래 살려고 하십니다. 어찌하여 상오(商於)의 15개 고을을 반납한 후에 전원으로 돌아가 화초에 물을 주며 남은 여생을 보내려고 하지 않으십니까? 동굴에 숨어 사는 처사들을 찾아 쓰도록 진왕에게 권하고 노인과 고아는 봉양하며 보살피며, 부모와 형제들은 서로 화목하여 살게 하고, 공을 세운 자들은 그 순서에 따라 상을 주고, 덕이 있는 자는 높인다면 조금은 백성들의 인심을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군께서는 상오에서 나오는 부를 탐하고 진나라에 시행한 법령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여 백성들로부터 원한을 계속 쌓아만 가고 있습니다. 만약 진왕이 하루아침에 군처럼 외국에서 손님으로 들어와 벼슬을 하고 있는 선비들을 버리고 세상을 등지기라도 한다면 진나라에서 군을 잡으려고 들고 일어서는 사람의 수효가 적다고 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군의 패망은 발돋움하고 기다리는 일처럼 조석지간에 있습니다.」
그러나 상군은 결국은 조량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7.作法自斃(작법자폐)
-자기가 만든 법에 저촉되어 목숨을 잃다.
그리고5개 월 후에 진효공이 죽고 태자가 그 뒤를 이었다. 공자건이 상군이 반역을 꾀한다고 고변을 하자 진왕은 관리를 보내 상군을 체포하려고 했다. 상군은 도망쳐 진나라의 관문 앞에 이르러 객사에 투숙하려고 했다. 객사의 주인은 투숙하려고 하는 사람이 상군인줄 모르고 말했다.
「상군의 법에 증명서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을 재워주면 죄를 받게 됩니다.」
상군이 듣고 한탄하며 말했다.
「아아 내가 만든 법의 폐해가 나에게까지 이르렀구나!」
상군은 관문을 빠져나와 위나라로 갔다. 옛날 상군이 공자앙을 속이고 위군을 무찌른 행위에 원한을 품고 있던 위나라 사람들이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상군이 삼국으로 가려고 하자 위나라 사람들이 말했다.
「상군은 진나라에 반역죄를 저지른 사람이다. 강대한 국력을 지닌 진나라의 반역자가 위나라에 들어왔으니, 그를 잡아 송환시키지 않는다면 후환이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위나라 사람들이 상군을 체포하여 진나라로 들여보냈다. 진나라에 송환되던 중 도망쳐 그의 봉지로 들어간 상군은 그를 따르던 무리들과 함께 봉지의 군사를 일으켜 정(鄭)을 공격했다. 진나라가 군사를 보내 상군을 공격하여 민지(黽池)에서 죽였다. 진혜왕은 상군의 시신을 가져와 거열형에 처하고 시중에 「상앙처럼 모반하지 말지어다.」라는 방과 함께 전시했다. 그리고 이어서 상군의 일가를 멸족시켰다.
태사공이 말한다.
상군은 그 성품이 각박한 자다. 그가 처음에 진효공에게 제왕의 도를 유세한 행위를 살펴보면 헛소리를 빌렸지 진심에서 우러나왔다고 할 수 없다. 더욱이 총신의 소개를 통해 임용되더니 공자건에게 형을 가하고 위나라 장수 공자앙을 속였으며 조량의 충고를 따르지 않은 행위를 보면 그는 역시 마음이 각박한 위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내가 일찍이 그가 저술한 ‘상군서'(商君書)중의 ‘개색'(開塞)과 ‘경전'(耕戰)편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은 그의 행적과 비슷했다. 상군이 결국은 진나라에서 악명을 떨치고 비명에 죽은 원인은 모두가 합당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 상앙의 생애
위나라 왕의 소실에게서 태어난 공손앙이라는 유명한 정치가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위앙이라 불렀다.
그는 진 효공에 의해 국상에 임명되었다. 그는 10년 동안 재임하면서 새로운 법을 추진하여 진나라의 세력을 크게 강화시켰다. 공손앙의 업적을 표창하기 위해, 진효공은 상지방의 땅 15읍을 그에게 하사하고, 그를 상군으로 호칭하였다. 이 때문에 그를 상앙이라 부르기도 한다.
상앙은 새로운 법을 정하였으나, 백성들이 이를 믿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는 세 길이나 되는 나무를 남문에 세우고 이를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 십금을 주겠다고 포고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 감히 옮기려는 자가 없었다. 상앙이 다시 50금을 상금으로 내걸자, 한 사나이가 나타나서 그 나무를 북문으로 옮겼다. 상앙은 즉시 그에게 상금을 주어 거짓이 아님을 내보였다. 이렇게 하여 신법을 공포하였다.
일년 후 백성들이 그 법령의 불편한 점을 고하며 도성으로 몰려와 1천 명을 단위로 헤아릴 정도였다. 이때 태자가 그 법을 어겼다. 상앙은 법이 잘 지켜지지 않은 것이 상류층 사람들이 범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태자를 처벌하려 했다. 그러나 왕위를 계승할 태자를 벌할 수가 없어서 그의 보좌관 건과 그의 스승 공손가를 자자형에 처하였다. 그 다음 날부터 백성들은 기꺼이 법령을 준수하게 되었다.
상군이 진나라 재상에 오른 지 10년이 되었다. 왕실의 일족이나 외척 중에는 상군을 원망하는 자가 많았다. 이 무렵 조량이라는 사람이 상군을 찾아왔다. 상군이 그에게 말을 꺼냈다.
“당신과 서로 교제하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소?”
조량이 대답하였다.
“굳이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불초하여 재상께 폐만 끼칠 것 같아 그렇습니다.”
“그대는 내가 진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불만이오?”
조량은 요순의 도와 주나라 무왕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상군에게 충고를 하였다.
“인심을 얻는 자는 흥하고, 인심을 잃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말씀드릴 몇 가지 일들은 인심을 얻는 행위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재상께서는 외출할 때에는 수행하는 수레가 십 수대에 이르고, 호위하는 수레에는 무장한 호위병을 싣고, 칼과 창을 가진 자들이 수레 옆에 붙어서 달리고 있습니다. 이런 것 가운데 하나만 빠져도 귀하는 절대로 외출하지 않습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덕을 믿는 자는 번창하고, 힘을 믿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재상의 목숨이 아침 이슬처럼 위태로운데도, 장수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나 상군은 조량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진나라 효공이 죽고, 혜왕이 즉위했다. 공자 건의 무리가 상앙이 모반하려고 한다고 밀고했다. 상앙은 그를 잡으려는 관리들을 피해 도망하여 함곡관 부근의 여관으로 들어갔다. 여관 주인은 그가 상앙인 줄 모르고 그의 숙박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상군의 법에 여행권이 없는 자를 숙박시키면 처벌을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상앙은 길게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 법을 만든 폐해가 이렇게 혹독할 줄이야.”
그곳을 떠나 위나라로 갔던 상앙은 위나라 사람들에게 붙잡혀 진나라로 돌려보내졌다. 그는 정나라의 민지라는 곳에서 진나라 군사에 의해 죽었다. 진 혜왕은 그의 시체를 거열형에 처하고 그의 일족을 멸했다.
○ 사자성어
1) 이목지신(移木之信)
.이목지신(移木之信), 나무를 옮기기로 한 믿음을 의미.
상군(商君: ?~기원전 338)은 전국시대 위(衛)나라 왕의 여러 첩들이 낳은 공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이름은 앙(鞅)이고 성은 공손(公孫)이다. 상군이 진(秦)나라 효공(孝公: 기원전 381~338)을 섬길 때의 일이다. 효공은 상군에게 나라를 개혁할 새로운 법을 제정하도록 하였다. 이에 상군은 가족법과 토지법, 도량형 통일법 등을 만들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개혁법에 반대하고 잘 따르지 않으려 하자 상군은 법의 확고한 시행을 알리기 위하여 한 가지 계책을 세웠다.
하루는 3장(약 9m) 높이의 나무를 남문 저잣거리에 세우고 이렇게 말했다.
“이 나무를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 10금을 주겠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것을 이상히 여길 뿐 아무도 옮기려고 하지 않았다. 상군은 다시 말했다.
“이것을 옮기는 자에게는 50금을 주겠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옮겨 놓자 즉시 그에게 50금을 주어 나라에서 법령을 시행하는 방법을 알게 하였다. 그리고는 새 법령을 널리 알렸다.
법령이 시행된 지 10년이 지나자, 백성들은 매우 만족스러워했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가지 않았으며, 산에는 도적이 없었고, 또 집집마다 풍족하고, 사람마다 넉넉하였다. 나라를 위한 싸움에는 용감하였으며, 개인 간의 다툼은 멀리하였다. 이와 같은 상군의 법령은 법치주의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부국강병책이었으며, 훗날 시황제가 천하 통일을 할 수 있었던 기틀이 되었다.
이목지신(移木之信)은 『사기(史記)』 「상군열전(商君列傳)」에 나오는 말로서, 남을 속이지 않고 신용을 지키는 것을 비유할 때 쓰인다.
2) 상앙지법(商鞅之法)
.스스로 만든 법에 의해 죽다.
상군이 진나라 재상에 오른 지 10년이 되었다. 왕실의 일족이나 외척 중에는 상군을 원망하는 자가 많았다. 이 무렵 조량이라는 사람이 상군을 찾아왔다. 상군이 그에게 말을 꺼냈다.
“당신과 서로 교제하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소?”
조량이 대답하였다.
“굳이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불초하여 재상께 폐만 끼칠 것 같아 그렇습니다.”
“그대는 내가 진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불만이오?”
조량은 요순의 도와 주나라 무왕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상군에게 충고를 하였다.
“인심을 얻는 자는 흥하고, 인심을 잃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말씀드릴 몇 가지 일들은 인심을 얻는 행위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재상께서는 외출할 때에는 수행하는 수레가 십 수대에 이르고, 호위하는 수레에는 무장한 호위병을 싣고, 칼과 창을 가진 자들이 수레 옆에 붙어서 달리고 있습니다. 이런 것 가운데 하나만 빠져도 귀하는 절대로 외출하지 않습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덕을 믿는 자는 번창하고, 힘을 믿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재상의 목숨이 아침 이슬처럼 위태로운데도, 장수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나 상군은 조량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진나라 효공이 죽고, 혜왕이 즉위했다. 공자 건의 무리가 상앙이 모반하려고 한다고 밀고했다. 상앙은 그를 잡으려는 관리들을 피해 도망하여 함곡관 부근의 여관으로 들어갔다. 여관 주인은 그가 상앙인 줄 모르고 그의 숙박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상군의 법(商鞅之法)에 여행권이 없는 자를 숙박시키면 처벌을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상앙은 길게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 법을 만든 폐해가 이렇게 혹독할 줄이야.”
그곳을 떠나 위나라로 갔던 상앙은 위나라 사람들에게 붙잡혀 진나라로 돌려보내졌다. 그는 정나라의 민지라는 곳에서 진나라 군사에 의해 죽었다. 진 혜왕은 그의 시체를 거열형에 처하고 그의 일족을 멸했다.
○ 사기 상군열전 상앙의 최후와 법가
상앙(商鞅)은 위(衛)를 떠나 진(秦)으로 가서 자신의 학술을 밝혔다. 그의 부국강병책으로 인해 진의 효공(孝公)은 천하의 패자가 되었고, 그의 법(法)은 모범이 되었다.
상군은 위(衛)의 여러 첩들한테서 난 공자(公子)들 중의 한 명이다. 이름은 앙(鞅)이고 성은 공손씨(公孫氏)이며 그 조상은 본래 희성(姬姓)이다. 앙은 어려서부터 형명(刑名)의 학(學)을 좋아했다. 위(魏)의 재상인 공숙좌(公叔座)를 섬겨 중서자(中庶子: 官名)가 되었다. 공숙좌는 앙이 현명함을 알았으니 위왕(魏王)에게 추천하기 전에 병이 들었다. 이 때 위(魏)의 혜왕(惠王: B.C. 370-335 在位)이 몸소 공숙좌에게 문병을 가서 짐짓 물었다.
“그대의 병이 악화되어 피할 수 없는 일이라도 생기면 장차 사직을 어떻게 하지요.”
공숙좌는 마침 잘되었다 싶었다.
“제 집에 중서자 벼슬에 있는 공손앙이라는 젊은이가 있습니다. 비록 젊기는 하나 천하의 기재(奇才)이지요. 원컨대 대왕께선 그에게 나라 일을 맡기면 큰 탈이 없을 것입니다.”
“글쎄…”
왕이 수긍하려 들지 않자 공숙좌는 왕의 좌우를 물리치고 나서 은밀히 말했다.
“만일 대왕께서 앙을 등용하지 않으시려거든 반드시 그를 죽이십시오. 국경 밖으로 내보내는 경우 위나라에게 큰 후환이 될 것입니다.”
“알겠소.”
왕이 돌아간 후 공숙좌는 급히 앙을 불렀다.
“잘 듣게. 지금 왕께서 내가 죽은 뒤에 재상이 될 만한 인물을 묻기에 내가 자네를 추천했네. 그러나 왕의 낯빛을 보니 내 말을 들어 주지 않을 것 같았어. 더구나 나는 군주를 먼저 하고 신하를 뒤로 해야 된다는 소신 때문에 자네를 등용하지 않겠다면 죽이라고 했어. 왕은 그러마고 하면서 떠났으니 자네도 죽기 전에 어서 이 나라를 떠나게.”
앙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대왕께선 어른의 말씀대로 신을 재상으로 임명하지 못했는데 어찌 어른의 말씀대로 죽이라는 말씀인들 들으시겠습니까.”
앙은 끝내 위나라를 떠나지 않았다. 혜왕은 돌아가서 좌우 신하들에게 말했다.
“공숙의 병이 몹시 무겁다. 그 이유로 그가 죽거든 나라의 일을 공손앙에게 물으라 했는데 어찌 올바른 정신으로써야 그런 말을 하겠는가.”
혜왕은 공숙좌의 건의를 노망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어느덧 공숙좌는 죽었다. 때마친 진(秦)의 효공(효공: B.C. 361-338 在位)이 전국에 포고령을 내려두고 있었다.
-선조 목공(穆公)이 이룩했던 위업을 다시 이룩하고 동쪽의 잃은 땅을 되찾으려 하니 이에 온 나라에 명령을 내려 현명한 인재를 구하는 바이다.
앙이 그 소문을 들었다. 그는 잠시도 지체 않고 서쪽의 진나라로 떠났다.
-중략-
효공은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진왕은 앙을 좌서장(左庶長: 卿大臣과 大良造 아래의 將軍職으로 모든 계급과 작위를 나타냄)으로 삼고 변법(變法)의 영(令)을 확정케 했다.
-열 집 혹은 다섯 집씩 묶어 한 조로 짜고 서로 죄를 적발하거나 죄에 연좌되게 하고 부정을 고발하지 않으면 요참(腰斬: 허리 자르는 형벌로 斬首보다 무거운 刑)에 처하며 부정을 고발하는 자는 적(敵)의 머리를 벤 자와 같이 상을 주고 부정을 감춘 자는 적에게 항복한 자와 같은 벌을 준다.
-백성으로 두 사람 이상의 남자가 한 집에 살면서 분가하지 않는 자는 그 부세(賦稅)를 두 배로 한다.
-군공(軍功)이 있는 자는 각각 그 공의 크고 작음에 따라 벼슬을 받는다.
-사사로운 싸움을 하는 자는 각각 그 경중에 따라 형벌을 받는다.
-어른이나 아이나 다 힘을 모아 밭갈이와 베짜기를 본업으로 삼고 곡식이나 비단을 많이 바치는 자는 부역(賦役)을 면제한다.
-상공업에 종사하여 이익만을 추구하거나, 게을러서 가난한 자는 모두 조사해서 관청의 노비로 삼는다.
-공실(公室)의 일족이라도 군공(軍功)이 없으면 심사를 거쳐 공족(公族)의 족보에 올릴 수 없다.
-가격(家格)의 존비.작위.봉록의 등급은 분명히 하고 각각 그 차등을 둔다.
-개인 소유의 전지(田地)와 택지의 면적, 신첩(臣妾)의 수, 남녀노비의수, 의복의 종류.형식은 가격의 등급에 따른다.
-유공자는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으나 무공자는 부유하여도 화려한 생활을 할 수 없다.
신법(新法)이 백성들에게 시행된지 일 년 만이었다. 새 법령이 불편하다면서 국도로까지 올라와 호소하는 자가 천을 헤아렸다. 바로 그 때에 태자가 법을 범했다.
“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것은 위에서 그것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상앙은 태자를 법대로 처단하려고 했다.
“태자는 인군의 후사(後嗣)이므로 처벌할 수는 없소.” 대신들이 말렸다.
“그렇다면 편법을 쓸 수밖에.”
그래서 태자 대신 부(傅: 太子의 보좌관)인 공자 건(虔)을 처형했다.
게다가 잘못 가르쳤다 하여 태자의 스승 공손가(公孫賈)를 경형(黥刑:얼굴과 몸을 바늘로 찔러 먹물로 죄명을 새기는 형벌)에 처했다.
상앙은 벼슬을 그만두기를 바라는 조량의 충고를 일소에 부쳤다. 다섯 달 후였다. 효공이 갑자기 죽고 태자가 섰다.
“상군(商君)이 모반하려 하고 있습니다. 군사를 보내 그를 포박하십시오.”
공자 건의 무리들이 들고 일어났다. 앙은 다급했다. 국경 밖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신분을 숨겨 함곡관 부근의 객사에 들러 숙박하려고 했다. 객사 주인은 그가 재상 상앙이란 사실을 알 까닭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손님. 여행증을 가지고 계신지요?”
“없는데…”
“아니 되겠습니다. 상군의 법에는 여권이 없는 분을 투숙시키면 안됩니다. 저는 연좌의 벌을 받게 됩니다.”
객사에서 쫓겨난 상앙은 서글피 탄식했다.
“아, 내가 만든 법의 폐해가 내게까지 미치는구나!”
상앙은 숨고 숨어서 위(魏)나라로 도망쳐 갔다. 위나라에서도 그를 반길 턱이 없었다. 그들은 상앙이 일찍이 공자 앙을 속여 죽인 데다 위군까지 쳐부순 것을 원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군을 받아 주지 말라. 그렇다고 타국으로 도망치는 것을 방치해서도 안 된다.”
“위나라에 잡아두는 것도 곤란하다. 상군은 진의 국적(國賊) 아닌가. 더더구나 진은 강국이다. 이를 핑계로 진나라가 위로 쳐들어올지 모른다. 후환을 없애려면 어서 진으로 돌려보내라.”
별수 없이 상앙은 다시 진으로 숨어 들어왔다.
“그렇다면 길은 하나다. 군사를 모아 독립할 수밖에.”
상앙은 상읍(商邑)으로 들어가 자기의 무리들과 읍병(邑兵)을 몰아 정나라로 쳐 나갔다. 거기서 발판을 마련할 작정이었다. 진의 군대가 먼저 들이닥쳤다. 정나라의 민지(黽池: 陝西省 華縣 북쪽)에서 부닥쳤으나 패해서 상앙은 사로잡혔다. 진의 혜왕(惠王)은 앙을 거열형(車裂刑)에 처하여 조리 돌려서 말했다.
“상앙처럼 모반하면 이 꼴이 된다.”
상앙의 일족이 멸문지화를 입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나 태사공[사마천]은 이렇게 생각한다. 상군은 천성이 각박한 사람이다. 효공에게서 벼슬자리를 얻기 위해 처음 마음에도 없는 제왕의 도를 늘어놓은 것은 속임수다. 효공을 만나는 부탁을 총신을 이용한 점도 교묘하다. 등용된 후에는 공자 건을 처형하고 위의 장군 앙(앙)을 속이고 조량의 간곡한 충고도 듣지 않았다. 이런 사실들 역시 상군에게 은정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일찍이 상군의 저서 ‘개색'(開塞) ‘경전'(耕戰) 등등을 읽었는데 그 내용은 그의 행적과 비슷한다. 상군이 결국은 진나라에서 악명을 떨치게 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하겠다. — 소설사기 김병총 장편역사소설 중에서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