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헤테로토피아
미셸 푸코 / 문학과지성사 / 2014.5.30
– 사유 실험 속에서 탄생한 푸코의 논쟁적이고도 다성적인 에세이!
익히 알고 있듯이, 완벽한 세계 혹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에 반하는 가치를 갖는 세계, 그러나 실제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우리는 ‘유토피아’라고 부른다.
일종의 현실화된 유토피아라고 이야기하는 ‘헤테로토피아’는 푸코가 유토피아와 대비되는 공간으로 독자적인 개념화를 시도했다가 일찌감치 포기해버린 미완의 개념으로, 현실에 존재하는 장소이면서도 동시에 모든 장소들의 바깥에 있는 곳을 의미한다.

『헤테로토피아』는 헤테로토피아와 관련된 논의를 담은 푸코의 에세이들을 모아 번역한 책이다. 헤테로토피아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는 두 편의 강연 원고 《헤테로토피아》와 《다른 공간에서》를 비롯하여, 유토피아와의 관계 속에서 몸이라는 ‘장소’를 현상학적으로 서술한 《유토피아적인 몸》, 공간과 건축에 대한 푸코의 시각이 잘 드러난 폴 래비나우와의 인터뷰, 헤테로토피아에 대한 다니엘 드페르의 해제 등 흥미로운 글들이 실려 있다.
○ 목차
일러두기
헤테로토피아
유토피아적인 몸
다른 공간들
인터뷰 공간, 지식, 권력ㅡ폴 래비나우와의 인터뷰
해제 「헤테로토피아」ㅡ베니스, 베를린, 로스앤젤레스 사이, 어떤 개념의 행로(다니엘 드페르)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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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 미셸 푸코 (Michel Paul Foucault)
기존 사회이론의 문제제기와는 전혀 새로운 시각을 제기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프랑스 쁘와띠에에서 태어났다.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 심리학, 정신병리학 등을 공부했으며, 니체, 하이데거, 바따이유, 바슐라르, 깡길렘, 알튀세르 등의 영향을 받았다. 파리대학 반센 분교 철학교수를 거쳐 1970년 이래 꼴레주 드 프랑스 교수를 지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정신의학에 흥미를 가지고 그 이론과 임상(臨床)을 연구하는 한편, 정신의학의 역사를 연구, 『광기(狂氣)와 비이성(非理性)―고전시대에서의 광기의 역사』(1961)와 『임상의학의 탄생』(1963) 등을 저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각 시대의 앎[知]의 기저에는 무의식적 문화의 체계가 있다는 사상에 도달하였다.

그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 약간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구조주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 철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사회 구조나 언어 구조 등의 ‘구조’가 우리 사회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구조란 ‘짜여진 어떤 틀’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의 자아나 관념 역시 이 틀 안에서 탄생하고 전개, 소멸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의 모든 논의의 중심에는 인간의 신체가 있었다. 그는 신체야말로 권력의 시발점임과 동시에 저항의 시발점이라고 말한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저서인 『광기의 역사』는 근대 서구사회에 있어서 나병의 쇠퇴와 나병의 폐쇄에 따른 광인을 감금하는 장소가 개설된 사실에서 이론적 비판을 전개한 논문이다. ‘광기’의 개념이 형성되고 유포된 과정을 고고학적 방법으로 추적하여, 이성주의의 ‘차별과 배제의 논리’를 역으로 드러낸다. 어째서 이성은 비이성을 질병으로 치부했을까? 어째서 감금하고 억압하고 마침내 침묵 속에 가두었을까? 이성의 독단에 대한 강력한 경고와 ‘타자/외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켰다.
『감시와 처벌 : 감옥의 역사』에서 푸코는 정신병원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인간적 장치가 아니라 이성중심적 사회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가치기준으로 광인을 추방하고 감금해온 장소로서 인간에 대한 권력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억압적 수단의 필연적 산물이라고 분석한다. 또한 감옥은 범죄자들의 단순한 수용소가 아니라 권력의 사회통제를 위한 전략의 소산이며 그 범죄자들은 경제적, 정신적으로 유용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존속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기관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언어와 사물』(1966)과 『앎[知]의 고고학(考古學)』(1969)에서 무의식적인 심적 구조(心的構造)와 사회구조, 그리고 언어구조가 일체를 결정하며, 주체로서의 인간이라든가, 자아라고 하는 관념은 허망이라고 하는 반인간주의적(反人間主義的) 사상을 전개하였는데, 이것이 구조주의 유행의 계기가 되었다.
정상적인 자기가 어떤 지식의 배치를 통하여 마련되는지에 대한 분석을 푸코의 초기라고 본다면, 중기에는 니체의 권력, 힘 개념을 재해석하면서 근대 사회에 작용하는 미시권력의 다양한 장치와 테크놀로지를 추적한다. 주로 포스트 구조주의자들을 연구하고 많은 논문을 써온 양운덕 선생은 근대인이 어떻게 태어나는가라는 질문에서부터 푸코는 권력이야기를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에 대한 답으로 푸코는 규율 지키기와 몸 길들이기를 통해서 근대를 살아가는 ‘주체’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즉 권력이 근대 주체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푸코는 개인의 몸에 작용하는 일정한 관계망 속에서 권력의 작용을 살필 수 있다고 말한다. 푸코에게 있어 권력은 작용할 대상을 일정하게 형성하고 그 대상이 스스로 권력을 수행하게 된다고 말한다. 즉 권력은 억압하고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생산적, 긍정적인 힘인 것이다.
『성의 역사』는 ‘성’과 그것을 행하는 ‘인간’ 그리고 그것들을 조직하는 권력(혹은 담론 – 힘있는 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저작으로 ‘성정치학’ 논의에 기초가 되는 아주 중요한 저작물이기도 하다. 3부작으로 이뤄진 『성의 역사』에서 푸코는 “성은 억압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성의 역사는 오히려 선동과 증대의 역사다. 억압 대신 선동과 증대가 이뤄지고 거기로부터 수많은 ‘말’ 그리고 ‘권력 망’이 생겨났기 때문에 오히려 성이 ‘억압의 역사’를 가진 듯이 보인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노동력이 이전보다 훨씬 많이 필요하게 되고, 불필요한 노동력을 사용하게 하는 수음을 금지하게 하거나(실제로 그런 캠페인이 있었다), 그것의 사례로 얘기되는 청교도주의나 금욕주의의 전개에 대해 푸코는 우선 의심했으며, 그 이면을 파헤쳤다. 그 결과 일반적인 견해와는 달리 당시에는 ‘성 담론’이 급격히 증가했으며 고해, 성의학, 정신분석학 등 수많은 지식들이 그것을 이야기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 밖에 『광기와 문화』『정신병과 심리학』『비정상인들』『사회를 보호해? 한다』『자기의 테크놀로지』등의 저서가 있다. 또한 푸코를 다루는 저서들도 많이 출간되었다. 푸코는 1984년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으로 사망하였다.
○ 독자의 평
유토피아는 세상이 없는 상상의 공간, 그에 비해 헤테로토피아는 엄연히 존재하지만 주류에 비해 이질적이어서 마치 없는 듯 여기는 ‘다른’ 공간이다. 장르 문학작품이나 sns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헤테로=異’ 다르다는 뜻이다. “말과 사물” 서두에 인용한 보르헤스 글처럼 푸코는 헤테로토피아에 대해 정의 내리면서 그런 공간을 예로 들어 나열하고 있다. 근대적 박물관이나 도서관이 나와 흥미롭다. 사실 최근에 이 책을 제주 여행 때 들고 갔는데 비행기에서 서두를 읽은 후 제주 올레길 위에서 아무도 없어 고요한데 바람만 부는 오름 정상이나 종종 마주칠 수 있는 묘지를 만날 때 ‘이게 헤테로토피아가 주는 느낌인가?’ 싶은 지점들이 있었다. 하루키,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서 주인공이 우물에 내려가거나 “해변의 카프카”서 등장인물들이 숲속에 들어갈 때 갑자기 완전 다른 공간에 들어간 듯한 느낌과 비슷한가 싶기도 했다. 일상 중 매우 익숙하게 내가 잘 아는 세계가 아니라 낯선 공간을 가리킨다고 이해했다. 푸코는 아래에서 특히 근대 이후에는 일탈의 헤테로토피아, 축제의 양식으로 시간과 연계된 헤테로토피아를 만들어내고자 했다고 주장했다.
“극장이 그렇고, 시장 또한 그러하며, 마을의 변두리나 어떤 경우엔 심지어 마을 한가운데 있는 멋진 공터가 그러하다. 거기에 가건물, 좌판, 온갖 희한한 물건들, 격투사, 뱀여인, 그리고 점쟁이들이 일 년에 한두 번씩 들어찬다. 더 최근에 우리 문명사에는 휴양촌이 있다… 예컨대, 제르바 섬의 [휴양촌] 오두막은 어떤 의미에서는 도서관이나 박물관과 같은 계열이다. 영원성의 헤테로토피아-사람들은 인류의 가장 오랜 전통과 다시 관계를 맺도록 초대된다-라는 점에서 말이다. 동시에 그것은 모든 도서관, 모든 박물관에 대한 부정이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시간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지우고 벌거숭이로 원죄의 순수함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21쪽.
“그러니까 장소 없는 지역들, 연대기 없는 역사들이 있다. 이런 저런 도시, 행성, 대륙, 우주. 어떤 지도 위에도 어떤 하늘 속에도 그 흔적을 복구하는 일이 불가능한 이유는 아주 단순히 그것들이 어떤 공간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우리는 순백의 중립적인 공간 안에서 살지 않는다… 서로 구별되는 이 온갖 장소들 가운데 절대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들에 맞서서, 어떤 의미로는 그것들을 지우고 중화시키고 혹은 정화시키기 위해 마련된 장소들. 그것은 일종의 반反공간이다. 이 반공간, 위치를 가지는 유토피아들. 아이들은 그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 그것은 당연히 정원의 깊숙한 곳이다. 그것은 당연히 다락방이고, 더 그럴듯하게는 다락방 한 가운데 세워진 인디언 텐트이며,…“, 11-13쪽.
“파라과이에서 예수회 수도사들은 실제로 경이로운 식민지를 건립했다. 그 안에서는 삶 전체가 완전히 규제되었고 토지와 가축이 모두의 것으로 선포되었으니 가장 완벽한 공산주의 체제가 지배하는 셈이었다. 각 가정의 몫으로는 오직 작은 뜰만 분배되었다. 집들은 십자로 교차하는 두 길을 따라 일정한 대열로 배치되었다. 마을 중앙 광장 깊숙한 안쪽에는 교회가 있었고, 한쪽 옆에는 학교가, 다른 쪽에는 감옥이 있었다. 예수회 수도사들은 식민지 주민들의 삶 전체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다시 저녁부터 아침까지 세심하게 규제했다. 아침 다섯 시면 잠을 깨우는 종소리가 울렸다… 실제로 인구가 번창했다. 예수회의 식민화 초창기에 13만 명이었던 인디언들은 18세기 중반에 40만 명이 되었다.”, 25쪽.
며칠 전 “안전, 영토, 인구”를 읽어서 특히 눈에 잘 들어왔던 대목이다. 푸코는 그 책에서 16-17, 18세기 통치성과 통치기술 변화 양상을 분석하고 있다. 위 사례에서 예수회 수도사들이 식민지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시공간을 어떻게 세심하게 배치하고 거기에 따라 사람들이 움직이도록 만들었는지 잘 나타나 있다. 16-17세기에 효과적인 통치 결과 지표 중 하나는 ‘인구 증가’였다. 인구는 노동력이기 때문이다. 중상주의자는 많은 국민을 좋은 노동자로 만들어야 국부에 관해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요즘 푸코 책을 집중적으로 몰아 읽다보니, 푸코가 했던 특정한 발언들이 어느 한 시기에만 관심사라서 충동적으로 발언했던 게 아니라 그의 생애를 사로잡고 있던 중요한 주제가 있었고 그 맥락을 따라 신중하게 (반복해서) 했던 발언이라는 점을 배우고 있다. 나는 푸코가 연구할 때 시공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활용했다고 생각한다. 시간에 있어서 그는 지식의 고고학과 권력, 주체의 계보학 방식에서 어떤 주제나 소재에 관해 문헌을 뒤져 구체적 사실들을 시대별로 나열하고 거기서 의미를 찾아내는 연구 방법을 활용했다. 공간에 있어서 푸코는 잘 알려져 있듯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과 같은 저작에서 근대 ‘규율권력’ 행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특정 효과를 노리고 만든 공간들(감옥, 병원, 군대, 학교 등등)을 다루었다. 푸코 저작과 강의에서 그는 자주 진리가 정해져있지 않고 만들어갈 자유가 있다는 맥락에서 ‘구축’과 같은 건축 용어를 썼다. 이런 저런 이유 때문인지 당대 건축가들 눈에 들어 어느 건축학회에서 발언했던 강의 원고를 정리한 내용이 이 책 서두 ‘헤테로토피아’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중반부는 ‘공간’이나 ‘건축’에 관해 레비나우와 수행한 인터뷰를 실었는데 ‘헤테로토피아’에 대한 논의와 연결되는 내용이다. 푸코 논의에서 자유, 비판, 저항(대항)과 같은 개념에 특히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의 다른 인터뷰에서도 인상 깊게 보았던 내용을 푸코 자신이 아래에서도 비슷하게 발언하고 있어서 인상 깊었다. 다른 글에서 푸코는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를 비판하면서 ‘해방’이 자연스럽게 자유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자유로워질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줄 뿐이다. 해방 이후에 주체는 자유에 관한 내용을 스스로 구축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는 실천”이라는 발언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마찬가지로 건축에서도 저절로 그 공간에 있는 이용자를 자유롭게 만드는 그런 건축은 없다고 믿으며, 거기 있는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실천’하느냐가 자유 여부를 가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레비나우: 과거나 현재의 건축 프로젝트 가운데 당신이 보기에 자유 혹은 저항의 힘을 표상하는 것이 있습니까?
푸코: 나는 어떤 것은 ‘해방’의 층위에 속하고 또 어떤 것은 ‘억압’의 층위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강제수용소처럼 확신을 가지고 그것이 해방의 도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주어진 체계가 얼마나 공포를 부추기든 간에, 어떠한 저항도 사전에 막아버리는 고문과 처형을 제외한다면, 언제나 저항과 불복종, 대항 세력화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이는 일반적으로 간과되는데-고려해야만 합니다.
반대로 나는 기능상 근본적으로-그 진정한 본질에 있어서-해방적인 무언가가 존재한다고도 믿지 않습니다. 자유는 실천입니다. 따라서 언제나 이런저런 제약들을 조정하고 더 유연하게 만들거나 심지어 깨부수고자 하는 많은 기획들이 있지만, 이러한 기획 가운데 어떤 것도 단순히 그 본성상 사람들에게 자동적으로 자유를 보장해줄 수는 없으며, 기획 그 자체만으로 자유가 확립되게끔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의 자유는 결코 그것을 보장해주는 법이나 제도에 의해 확보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법과 제도는 거의 모두 반대의 목적으로 쓰일 수도 있습니다. 이는 그것들이 모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는 행사되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72-73쪽.
책 마지막 부분은 푸코 생전에 20년간 푸코의 연인이었던 사회학자의 해제를 덧붙였다. 이 필진은 푸코가 한창 주목을 받고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할 때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헤테로토피아’ 논의와 관련해 그가 보고 들어 기억하고 있는 내용들을 덧붙여 이 글에 대해 설명하고 있어서 푸코 논의 이해에 도움을 주고 있다. 요 며칠 “성의 역사 2”를 읽고 있어서 아래 내용이 눈에 잘 들어왔다. 작년 2학기에 호네트, “인정투쟁: 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형식론”을 읽는 동시에 대학원 강의를 들으면서 현대 정치에서 (그런 시각이나 거기 따른 방식의 옳고 그름을 접어두고) ‘정체성’을 빼놓고 논의하기란 점점 어려워질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미국이나 한국 정치 논의에서 ‘녹(환경)보(페미니즘)’ 문제가 매우 중요한 이슈이며 그 문제들에 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의 정치적 성향을 유추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번 주에 읽은 “위험하지 않은 몰락”에서 강상중과 우치다 타츠루는 앞으로 국민국가가 액상화 되면서 같은 종교+문화를 오래 유지해온 나라들이 손을 잡고 ‘제국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보고 있다. 푸코 자신이 성소수자이기도 했으니 그가 남기고 간 논의들은 그 자신이 원치 않을지라도 후대 사람들에 의해 아래와 같이 읽히기도 하는 듯하다. 크게 보면 ‘이런 식으로 (과도하고 부적절하게) 통치당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 삶을 자유로운 주체로 만들어가기’ 위해 최전선에서 저항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이고, 푸코 논의는 그들 투쟁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모양이다.
“… ”성의 역사“ 2, 3권의 번역이 그와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고는 이 이력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책들에서부터 푸코는 미국인들이 ‘정체성의 정치학’이라고 이름 붙인 것의 참조점으로 삼는 저자가 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운동, 동성애 운동, 소수민족 집단들은 헤테로토피아 개념이 다시금 기입되고 평가받는 새로운 그물망을 구성했다. 푸코가 개시한 주체화 양식의 역사는… 과 같은 텍스트를 가로지른다.”, 123-124쪽.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