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 해석(25)
지금은 절개를 구할 때: 호세아서(25)
호 11:12-13:4 (히브리 본문 12:1-13:4)는 3개의 작은 문학 단위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단위마다 눈에 띄는 것은 이스라엘의 죄됨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대조이다. 이 본문의 서론격인 11:12 (히브리. 12:1)는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속임수로 나를 뺑 둘러쌌고, 유다는 하나님을 거슬러, 진실하신 거룩자를 거슬러 아직도 제멋대로 갈 길을 간다”고 벌써 백성과 하나님을 선명하게 대조한다. 이러한 대조는 일단 13:4까지 세 번에 걸쳐 본격적으로 나타나며 그 다음 13:5-14:8에 두 번 더 개진되며 회개권면 (14:1-3)과 최종적으로 이스라엘의 반역과 대비되는 앞으로 있을 야웨의 신실한 조치 (14:4-8) 및 저자의 나레이션 (14:9)에서 호세아서가 종결되기까지 계속 나타난다. 거의 모든 선지자들이 (동시대의 선지자인 이사야서에도 이러한 대조법은 극명하다) 이러한 대조점을 부각시키지만 호세아서는 이 책을 하나의 전체로 볼 때 뒷부분으로 갈수록 이스라엘의 반역과 하나님의 신실을 비교한다. 사실 호세아 전편이 하나님의 거룩과 이스라엘의 음란을 대조하지만, 특히 호세아는 책의 종결부분에 가서 역사회상을 하면서 이러한 대조점들을 부각시키는데, 이 점에 있어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다. 마치 함박눈이 며칠간 퍼부은 후에 푸른 소나무와 덮은 눈이 대조를 이루듯 이러한 대조를 뚜렷이 드러내는 책이 호세아서다.
‘아카브’의 야아콥 vs. 신실하신 야웨
첫째 대조는 야곱을 회상함으로 시작하여 북이스라엘의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되짚어보며 이루어진다 (11:12-12:10). 북이스라엘은 따지고 보면 그 조상이 야곱이기 때문이다. 야곱의 생애나 북이스라엘 (에브라임)의 삶이 그것이 그것이라는 말이다. 북이스라엘의 현재가 이모양인데 거슬러 올라가면 야곱도 그모양이었다는 뜻이다. 이 단락에서는 야곱이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은’ (아카브, ’qb에서 야아콥이란 이름이 붙음) 행위, 마치 항우 장사와 같은 인간적인 힘으로 하나님과 겨룬 내용에서 시작한다 (한글개역.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여기서 ‘장년에’는 문자적으로 by his strength [KJV]). 이것은 북이스라엘 (에브라임)의 거짓된 삶에 대한 고발로 이어진다. 거짓 저울을 가지고 속이기를 좋아하면서도 ‘나는 죄가 없다’, ‘깨끗하게 돈 벌었다’고 뻐기는 북이스라엘의 불신실을 호세아는 지적한다. 지금 북이스라엘이 이러한 기만에 찬 자들이지만 기실 거슬러올라가면 그 옛날 이들의 조상인 야곱이 벌써 출생 때부터 사기군이었다는 것이다!
반면 하나님은 그 야곱에 대해서 어떻게 하셨는가. 하나님 혹은 천사 (호 12:4)는 야곱의 환도뼈를 치셔서 위골시키시고 그를 신실히 징계하셨다 (창세기에는 어떤 ‘사람’ 혹은 ‘사람들’로 나타남 [단수, ‘이쉬’ 창 32:25혹은 복수, ‘아나쉼’ 32:29]).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야곱의 힘은 철저하게 꺾어버리시고, 하나님은 이제는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야곱이 승리자가 될 수 있도록 하셨다 (“겨루다” 히. “사라 srh”에서 “이스라엘 (‘sr’l)”이란 새 이름이 주어졌다). 창세기에는 없지만 호세아는 그때 야곱이 “울며 간구했다”고 증언한다 (히. “바카 바잇트하넨 로”). 호세아는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라고 역사에 신학적인 설명을 붙인다. 즉 하나님을 붙잡고 매달린 야곱을 벧엘에서 만나셔서 언약을 확증하시고 그에게 임재해 주셨던 그분은 지금도 앞으로도 쭈욱 계속하여 (“말씀하셨나니”는 히브리어로는 “예다베르” 즉, 과거형이 아니라 계속을 뜻하는 ‘미완료형’으로 쓰였음) 벧엘 곧 하나님의 집에서 ‘우리들’을 만나주시고 말씀하실 것이라는 의미다. 야곱이 ‘간구’하도록 하나님은 야곱을 다루셨는데 죄 속에 있는 현재의 북이스라엘도 ‘간구’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기억하시고 다시 이스라엘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이라는 말이다 ( 12:5의 “야웨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 [개역개정]이라는 말 [히. “지크로”는 ‘자카르’ <기억하다>에서 왔음]은 기도 시에 그 이름을 부름으로 하나님이 그 기도를 기억하게 하신다는 측면에서 사용되었다고 나는 본다. 참조. 사 62:6,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함마즈키림], 너희는 쉬지 말며…”; 대상 16:4도 참조. 예배가 기도 (개역개정에는 “칭송”으로 번역. 히. “울하즈키르” 문자적으로, ‘기억하게 하며’)와 감사와 찬양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5-6절의 권면,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는 야웨의 이름을 부르며 회개 기도를 함으로 그분이 기억하시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땅히 이 회개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인 인애와 정의의 삶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발뒤꿈치를 잡고 (“아카브”,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남의 발목을 잡고’) 인간적 힘을 쓰는 야곱에게 신실히 징계하시고 새사람 만드시는 하나님을 서로 대조한 호세아는 나아가 현실의 속이는 저울을 사용해서 돈을 버는 이스라엘과 그 이스라엘을 끝내는 고치셔서 명절날에 장막에 거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을 대조한다 (12:9). 이 명절은 초막절 (슥 14:16 이하)을 시사하고 결국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있게 될 천년왕국, 나아가서는 새 예루살렘을 시사할 것이다 (계 20:4-6; 21:3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호세아서의 영성
이러한 대조법들을 통해 생각하게 되는 것은 호세아서가 가르치는 영성이다. 이는 ‘대조법의 영성’이요, 신실하신 하나님 (11:12) 앞에 나의 심히 죄인됨 (12:2)을 깨닫는 영성이요,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고 다시 인애와 정의의 삶으로 나아가는 (12:6) 영성이다. 그리하여 세상에 소금으로, 지조 있는 소금으로 사는 영성이다.
이육사의 ‘광야’를 생각하다
호세아 12장을 묵상하다가 문득 고등학교 때 읽은 이육사 시인의 ‘광야’를 생각해 본다. “까마득한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때도 참아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일제에 변절하지 않았던 이육사, 해방 한 해 전 (1944)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시인이 윤동주처럼 기독교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 기독교적이다. 너무 호세아적이다!
최영헌 교수 (알파크루시스 신학대학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