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베드로전서 개관: 비 기독교사회에서 살아가기
요즈음 시대에서도 많은 곳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초대교회 신앙공동체가 이웃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오직 유일신 하나님만 섬기며 새로운 준거집단인 교회를 형성하고 하나님의 윤리적 가치관을 지켜나갔던 그들은 반 사회적이고 심지어 파괴적인 집단으로 오인되었다.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지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으로부터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삶으로 복귀하라는 회유와 압력을 받았다. 베드로전서는 이러한 압력에 맞서 그리스도안에서 그들이 가진 위대한 영광과 특권 및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의 공의안에서 그들에게 가져올 유익을 상기시킴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지속적인 헌신을 촉구하는 편지이다.
<저자>
저자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유일한 베드로인 시몬 베드로이다. 그는 열두제자중 지도자로서 주님께서 왕국의 열쇠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이이며 주님을 세 차례나 부인하였다가 그리스도에 의해 다시 부름 받았다. 그후 사도행전의 처음 열두장이 기술하는 바와 같이 사도들 중의 수장으로서 특히 유대인대상의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다. 초대교회 전승은 베드로가 60년대 중반이나 후반에 로마에서 네로에 의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당했다고 전한다.
<기록 연대>
우리는 초대교회에 대한 로마제국의 국가적이고 대대적인 박해의 시작을 64년에 시작된 네로의 박해에서 찾는다. 따라서 본서의 단서는 과연 네로 대박해 이전인지 이후인지를 살펴보는데 있다. 본 서신에 나오는 상황은 네로 박해라기보다는 이른 시기의 핍박에 관련된다. 베드로전서속에는 국가나 그 밖의 힘에 대한 박해가 진행되었다는 점에 대한 아무런 단서가 없고 로마제국에 충성하라는 권면(2:13-17)등으로 보아 로마 대화재 사건으로 발발된 네로의 대 박해시작인 64년보다 앞선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대박해인 64년전 박해의 전조가 수면에 떠오르는 때인 62-63년경에 쓰여졌다고 여겨진다.
<기록 장소 및 수신자>
5:13은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노라”고 선언한다. 요한계시록이 로마제국에 대한 암호로 사용했던 용어가 바벨론 이었고(계17:5), 베드로가 그의 사도로서의 사역을 로마에서 끝마치고 마가가 60년대 중반에 바울과 함께 로마에 왔으며(딤후 4:11) 그가 베드로가 이 서신을 쓸 때 마가와 같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5:13) 베드로는 로마에서 이 서신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수신자로는 1:1 에서 북부 소아시아(현대의 터키)라고 규정한다. 이것은 아마 북부 소아시아의 초승달모양 지역을 포함한 지역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된 신약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일 것이다.
<상황>
베드로전서의 내용은 공식적인 박해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보다는 전반적인 사회로부터 직면한 적대감을 의미한다. 기독교인들은 공식적인 로마정부를 중심으로 한 준(準) 종교적인 관습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당시 유행하던 제국의 관습들을 단호하게 대적했으며 자주 자기들끼리 모여 주의 만찬을 기념했기 때문에 의심과 적대감의 대상이 되었다. 아마도 베드로전서의 독자들은 비난과 조롱, 차별을 받으며 심지어 날조된 죄목으로 법정에 섰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성도들이 때로는 실제적인 용기와 신실함이 부족하다는 것을 베드로는 알았다. 마침 실루아노가 이 지역을 여행할 계획이 있었으며(5:12), 이번 기회에 저자는 고난 중에 있는 이들에게 그들의 정체감에 대한 가르침(1:1-2:10)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윤리적 가르침도 주려고 의도한다.
<목회적 방향>
이러한 상황속에서 베드로는 그의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그들이 맞닥뜨린 심각한 시련과 함께 그들이 소지한 위대한 특권을 주지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그 특권이 얼마나 탁월하고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줌으로 크게 낙심한 성도들을 격려하는 길을 택한다. 신자들이 낙심한 한가지 중요한 이유는 그들을 바라보는 이웃의 차가운 시선이었다. 베드로전서에는 모욕과 비방 및 여러 형태의 언어적 폭력이 유난이 많이 나타난다. 그리스도인들은 비정상적이고 악한 반사회적 존재로 소외당한채 주변인으로 머물러 있었으며 모욕과 따돌림이라는 사회적 통제수단의 희생양이 되었다. 세상과 이웃들은 이런 방식으로 그들이 세속적 풍습 및 가치관과 일치하는 삶으로 돌아오도록 회유하고 협박하였다. 역설적이게도 모든 우상적 종교 및 악이 만연된 환경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의 방식은 세상사람들로부터 무신론적이고 반사회적 집단이라는 오해의 눈초리를 받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이 기독교를 대적하는 목적은 성도들로 하여금 창피를 주어 그 지역의 전통적 가치관과 신앙을 회복하도록 하여나름대로 새로운 회심자가 생기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변환경 속에서 신자는 신앙의 가치관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신앙의 약속이 자신이 겪고 있는 현실적 부당함을 상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회의감에 몰입될 수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 이러한 사회적 압력과 기대에 부응하여 어느 정도의 일탈 또는 전적인 변절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베드로는 이러한 압력에 맞서 성도들의 신앙을 견고케 하기 위한 목회적 분투로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개요>
- 문안 인사(1:1-2)및 축복(1:3-12)
- 고난에 대한 첫번째 반응: 거룩한 공동체를 창조하기(1:13-2:10)
(1) 거룩한 삶으로의 초대(1:13-25)
(2) 생기 있는 공동체의 창조(2:1-10)
3. 고통에 대한 두번째 반응: 사회속의 매력 있는 증인(2:11-4:19)
(1) 복음 전파를 위한 선한 행실(2:11-12)
(2) 권위에 복종하는 구체적 사례(2:13-3:7)
① 정부와 시민의 관계(2:13-17)
② 주인과 노예의 관계(2:18-25)
③ 남편과 아내의 관계(3:1-7)
(3) 부당한 고난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원리들(3:8-4:6)
① 순종적이고 원수를 갚지 않는 정신(3:8-12)
②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에 대해(3:8-12)
③ 예수님의 사례(3:18-22)
④ 그의 대속의 승리가 우리를 가능케 한다(4:1-6)
(4) 권면적 요약(4:7-11)
(5) 교리적 요약(4:12-19)
4. 마지막 권면 및 맺는 말(5:1-14)
<주요 메세지>
앞에서 살펴본 초대교회 당시의 성도들의 상황과 다르지 않게 오늘날을 살아가는 성도들 역시 사회적 반대에 직면해 있다고 볼 수 있다. 후기 기독교사회라고 불리우는 이 때에 우리는 정당한 신앙공동체를 확립하고 보존하기 위해 어떤 전략과 방향을 세워야 할 것인가? 베드로전서는 두 가지 면에서 우리들에게 통찰력을 제공한다. 먼저 내부로 서로 돕는 공동체를 견고하게 세우는 일이다. 시대가 어려울수록 우리는 우리의 신앙적 내공을 강화하고 교회내 지체들간의 긴밀한 관계성을 형성해야 한다. 베드로는 외딴섬과 같이 망망대해에 던져진 것 같은 초라한 교회공동체이지만 하나님의 집안에 거하는 존재로서 서로 사랑함(1:2; 2:17; 3:8)과 환대(4:9), 영적 은사를 통한 서로의 섬김(4:10-11) 그리고 다른 성도의 고통을 아는 것(5:9)등을 권면함으로 진리를 공유하는 성도들 사이에 촘촘한 성도의 교제와 상호 돌봄과 섬김이 우선시 됨을 피력한다. 이것이 전제되고 그리함으로 진리의 터에 우리의 신앙을 확고히 세우고 흔들리지 않는 내적인 견고함을 확인할 때 우리는 힘있게 서서 복음전선을 확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여기서 끝나면 결코 거센 세속의 도전속에 진보를 나타낼 수 없다. 주님의 복음이 세상을 향해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서 세상을 참되게 변모시켜 이 땅의 천국을 회복시키는지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초대교회 당시의 성도들은 외부로부터 불어 닥치는 비난과 조롱, 그리고 핍박 등으로 인해 말할 수 없는 심적 압박속에 견뎌야만 했을 것이다.
이 고난의 폭풍속에서 믿음이 파선되지 않고 신앙의 순수함을 유지하는 것이 어쩌면 일차적인 목표, 즉 생존의 필요성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외부세력의 압력에 의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려는 유혹에 맞서 복음의 위대함에 대한 변함없는 확신에 머물러야 했다. 멸망의 길로 되돌아가지 않기 위해 엄청난 분투를 해야 했다. 그 가운데서 그들은 그들에게 닥치는 그 고난의 의미를 해석하고 이해해야 했다.
그 고난은 그리스도의 모범에 기초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하는 선결조건이기에(4:13) 확신속에서 맞이할 뿐 아니라 그 고난은 크게 보아 자신의 삶과의 영적 전쟁의 일부라는 큰 틀 속에서 보아야 했다(5:8-9). 그러므로 이러한 사회적 압력에 대한 굴복은 마귀에게 본질적으로 승리를 헌납하는 행위임으로 결코 꺾이지 않는 자세로 임하는 것이 필수적이고 일차적인 일임을 강조한다. 사회적 압력은 단순한 사회적 현상이 아니라 영적인 현상이다. 베드로는 이것을 주지 시킨다.
그렇다면 세상속에 힘을 발휘하고 있는 사탄의 무자비한 횡포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추구점을 지향할 것인가? 세상을 마귀의 손아귀에 잡힌 영역임으로 적대시하거나 단순히 그 영향력을 막는 데에 치중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비록 사단의 세력이 강하게 넘실되는 세상이지만 그곳을 향해 복음의 바람을 불어 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탄의 영향력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들이 견지한 우상숭배적 가치관을 훌쩍 뛰어넘는 도무지 기대하지도 않는 우월한 도덕적 삶의 양태를 그리스도인들이 펼쳐 보임으로 자신들의 삶과 성도들의 삶에 대한 충격적 비교에 휩싸이고 그리함으로 성도들에게 품었던 의심의 눈초리를 완화하고 제거 시켜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 아닌가?
교인들을 광신자라고 오해했었는데 그들 속에서 뿜어 나오는 품격 높은 삶을 바라볼 때 기독교에 대한 왜곡된 오해의 눈이 녹듯이 녹아 내리고 불신 세계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복음에 대한 심도 있는 관심에 빠지지 않겠는가? 우리들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데도 무엇인가 세상의 가치관을 고도로 상회하는 비범함 삶의 족적이 나타난다면 그것이야말로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동시대의 사람들이 복음을 향한 열린 마음으로 우리의 믿음체계를 관찰하는 계기가 되지 않겠는가? 비본질적인 문제로 세상과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사회에 대한 본질적 대답을 제시하고 실천함으로 우리는 시대의 마음을 돌리고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시대에도 적절한 교훈이다. 본질을 제시하자. 신앙의 비본질적인 면에 집착하고 세상과 충돌하는 것이 참된 의미의 강성신앙이 아니다. 사탄의 세력과 영향력이 난무하는 세대속에서 그 사탄의 속임수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참되신 마음이 펼쳐지는 삶으로 매진할 때 비 기독교사회에서도 복음의 진정성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왜 베드로는 유아기와 같은 초대교회시대에 매몰차게 불어오는 엄혹한 고난의 바람속에서 그것이 사탄의 사역임을 밝히 알려주면서도 성도들의 품격 있는 삶을 강조했겠는가?
주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에 출현할 때만,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우리를 통해 선포될 때만 사탄의 영역은 현저히 축소되고 하나님 나라는 실제적인 추동력을 얻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이 땅에서 그분의 나라를 확장해 가신다.
주님의 품격이 우리를 통해 세상에 스며들기를 바라시면서.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