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인문학과 문학 : 시와 삶의 자리
들어가는 말
한글에서 ‘본다’라는 보조동사가 한문에서는 7가지 정도 나온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견시관(見視觀)이다. 그 뜻은 각각 볼견(見), 볼시(視), 볼관(觀)이다. 첫 번째, 볼견(見)은있는그대로보는것이다. 어떠한 것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 식견대로 보는 것이며, 다른 견해(見解)로 인한 의사충돌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 두 번째, 볼시(視)는차원이다르게다양한각도에서바라보는방법이다. 즉 사람들이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을 수렴할 때 다양한 식견을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세 번째, 볼관(觀)은 내면을 깊이 들어가 보는 것이다. 편견과 아집을 떠나 본질을 보려는 시각이다. 이는 자기 주장과 견해도 필요하다(見). 그리고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는 폭넓은 시각도 필요하다(視). 문제는 여기 끝나는 것이 문제다. 다시말하자면 내면 깊이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볼견(見)과 볼시(視)의 과정들을 통해서 내면을 볼 수 있는 볼관(觀)의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견시관(見視觀)을 통해서 삶의 원리와 이치 그리고 가치까지 통전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다.
선종(禪宗)에서 추구하는 가르침 중에 ‘무시선 무처선(無時禪 無處禪)’이라는 말이 있다. 즉 ‘어느때나 어디서나 참마음’을 가지라는 뜻이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면, 곱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노자의 가르침 중에도 ‘기자불립 과자불행(企者不立 跨者不行)’이라는 가르침이 있다. ‘까치발을 딛고 서서는 오래 서지 못하고, 다리를 벌리고는 오래 가지 못한다’곧 아무리 훌륭한 진리와 이치가 있어도 자연스럽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시선이나 삶의 방법들이 한 쪽으로 기울면 버겁게 느껴진다.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 성서에서는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마6:26-28)” 라고 한다. 곧 존재의 이유와 본질을 보라는 주님의 말씀이다. 이런 것이 시심(詩心)이 가지는 담론들이다.
‘시란 무엇인가?’ ‘시인이란 누구인가?’ ‘시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가?’ ‘시를 어떻게 작성할 수 있는가?’이런 무거운 명제 앞에 짧은 지면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시문학을 한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다. 다만 시(時)도 문자를 수단으로 사물이나 사람의 감정과 사상을 표현한다는 면에서는 다른 문학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래서 필자는 시를 이해하고 감상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삶의 자리’를 이해하지 않고는 시의 시심을 올바르게 감상하고 해석할 수 없다고 보고 작가의 삶의 자리를 통해서 시심을 살펴보려 한다.
1. ‘삶의 자리’(Sitz im Leben)와 죽음의 자리(Sitz im Tode)
‘삶의 자리’란? 성서해석학 담론 중에 하나로 어떤 말씀이나 이야기에 있어서 ‘삶의 자리, 맥락, 배경’을 뜻하는 독일어 단어다. 즉 성서를 이해하려면, 성서가 쓰여진 시대적 상황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성서비평학의 한 형식인 양식(genres)비평에서 독일의 구약성서학자 헤르만 궁켈((Hermann Gunkel)이 맨 처음 사용한 용어로 구약문학은 본래 다른 민족 또는 민중적인 전승에서 발생한 것이기에 이러한 정황이 역사적 연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성서의 문체 연구에만 국한하지 않고(Context in Text) 그 배후에 놓인 광범위한 사회적 문화적 관심(Text in Context)을 중시하고 그것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8:1-11:1과 마가복음 12:1-12의 예수의 비유 해석은 주석 방법론의 양식사에 해당하는 연구 분야로 현재의 문학 형태가 존재했던 ‘삶의 자리’에 대해서 탐구한다. 이렇게 양식사 연구의 초점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문헌의 형식이 가지고 있었던 사회학적인 접근을 필요로 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그 문학형식을 만들어낸 주인공의 삶의 자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다. 주석가들의 논쟁은 예수의 비유를 다루면서 그 문학 형식이 예수 자신의 말(ipsissima verba)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역사적인 예수에게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기록되던 당시 상황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주석가들은 예수의 비유가 기독론이나 교회론적인 의미로 해석될 경우에는 역사적인 예수에게서 그 기원을 찾기보다는 알레고리적인 의미가 가미된 교회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한다. 전통적 해석인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할 것인지 아니면 당대의 삶의 자리인 사회와 문화를 살펴보는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볼 것인지의 문제다. 즉 누가 그 구절을 말했는지, 그들이 삶에서 맡고 있었던 역할은 무엇인지, 그들의 청중은 어떠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비롯한 여러 정황 등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 해방신학에서 사용하는 ‘죽음의 자리’(Sitz im Tode)도 있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을 가리킨다. 죽음 이후의 삶보다 죽기 이전의 죽음에 더 관심 갖는다는 것이 기독교의 의무라는 뜻이다. 이렇게 쓰여진 배경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을 알아야 성서와 예수를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삶의 자리’(Sitz im Leben) 뿐 아니라 ‘죽음의 자리’(Sitz im Tode) 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성서해석학적 ‘삶의 자리’와 ‘죽음의 자리’를 살펴보는 연구는 오늘날 다양한 학문으로 넓혀 적용하는 연구가 활발하다. 특히 신학, 사회학, 경제학, 법학 또한 문학에서도 이런 관점에 재해석하려는 방법론이 활발하다.
2. 시의 영역(領域)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은 시를 정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시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 쉽지 않다. 시는 다른 문학장르처럼 문자를 매개체로 아무도 찾아내지 못한 것을 찾아내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어서 ‘새로운 이름 붙이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은 언어의 연금술라 말하기도 한다.
아리스토 텔레스는 그의 저서 「시학」에서 “시는 모방이다’라고 했다. 그 당시 시란 무대에서 상연되는 다소 긴 서사시의 스토리텔링을 의미했었다. 오늘날로 이해하면 작가의 임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가와 문인을 문체의 차이가 아닌 사건을 다루는 입장의 차이로 구분했다. 역사는 일어난 사건에 대한 이야야기고 문학은 일어날 수 있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도 역사란 ‘무엇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고증으로 뒤돌아보는 과거라면 문학은 ‘무엇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에 대한 가정으로부터 시작되는 미래의 성격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의 모방(Mimesis)론은 단순한 복사를 의미하지 않는다. 작가가 보고 표현한 사물은 이제 단순한 흉내내기가 아니라 작가의 확신, 즉 ‘왜 이것은 존재해야하는가?’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무엇을 수단으로 삼느냐에 따라 장르가 정해진다. 색채와 형상을 수단으로 삼으면 미술, 목소리와 언어를 수단으로 삼으면 시와 음악, 리듬만 사용하면 춤이다. 이때 모방(imitation)은 재현(representation)과 동의어이다.
오늘날 문학장르의 기초를 놓았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시란 폭넓은 개념으로 서사시, 서정시 뿐 아니라 비극, 희극도 시라고 본다. 당대의 사람들은 시의 기준을 ‘운율’에서 두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오히려 ‘모방’에 두었다. 누군가 철학적 역사책을 운율에 넣어 쓰더라도 그건 시가 아니며 또 시에 운율에 넣어 쓰더라도 그건 시가 아니며 또 시가 운율이 없어도 ‘모방’(Mimesis)만 있으면 시가 된다는 것이다. 즉 시는 인생의 보편적 요소를 개연적이고 인과적 연결을 통해서 재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참고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으로 구분한 문학장르를 시작으로 현대에 와서 6대 문학장르는 시, 소설, 희곡, 수필, 평론, 시나리오 등이 있다. 그리고 시의 형식상의 갈래는 정형시, 자유시, 산문시 등이며, 시의 내용상 구분은 서정시, 서사시, 극시가 있다. 끝으로 성격상으로는 순수시와 사회시(참여시)가 있다.
3. 시(詩)의 세계
시의 세계는 시의 이론이나 정서나 시론을 설명하거나 시의 정의나 원리 또는 구성이나 어조에 대한 것을 밝히거나 세부적인 면의 비유이나 은유적이며 상징적인 가치를 논하는 것은 시문학에 있어서 학문적 연구 분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문학을 논할 수 있는 것은 문학자들이나 또는 문학 평론가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다만 그들의 전문지식과 작품 평가 그리고 문제제기에 대해서 우리는 간과(看過)해서는 안된다. 왜냐면 적어도 시문학이 올바르게 자기의 삶의 자리에서 보다 더 균형과 발전 그리고 참여를 유도하는데 전문지식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의 세계의 원천은 생명의 근원인 마음에서 진실을 찾지 않으면 시상(詩想)의 이미지를 형상화하여 아름답게 포장은 할 수 있겠지만 진정한 시문학의 존재가치에는 거리가 멀다. 작가의 삶의 자리에서 뜨거운 가슴으로 받아 함께 살아가는 주변의 모든 사물과 인간의 만남을 통해서 의미를 부여하고 내면 깊은 뜻을 영혼의 노래로 표현할 때 시의 세계는 사물의 조화와 이치와 깊이를 탐구하여 개성 있는 의미와 뜻을 살려 표현하려는 세계이며 사상이다(정택/시인).
4. 시심(詩心)의 세계
시 “해변의 묘지”로 유명한 폴 발레리(Paul Valéry )는 “시의 내용이 되는 미적(美的)감동은 다른 감동이 오직 흥분으로 끝나는 것과는 달리 스스로가 여러 가지 모습과 질서를 스스로 지으려 드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고 말하고, 이에 덧붙여서 “이러한 시적 감흥이라 하여도 그대로 놓아두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영구히 사라지고 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아름다운 순간, 또 그 신묘한 지각(知覺)을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끄집어내어 항구적으로 보존하려는 것이 바로 시를 쓰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폴은 시 작업을 통해서 작가의 미적 감동인 ‘감동’과 ‘감흥’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삶의 자리에서 순간순간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동과 감흥을 포말로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것으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가 참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훌륭한 시란 뼈를 저미는 고통이 작업에 빚어지고 예지(여기서는 작가의 자질이나 뛰어남을 가리킴)와 끝없는 노력의 기념비요, 의지와 분석의 소산”이라고 했다. 폴은 작가가 시를 쓰려는 불 같은 본능적인 욕구가 있어도 개별적으로 지적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감동과 감흥으로 내면으로부터 불처럼 토해내는 언어가 시일지라도 절박한 말이 전부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공놀이가 축구가 아닌 것처럼 축구에는 그 나름의 규칙이 필요하듯이 시에도 규칙이 필요하다. 물론 그 규칙은 최소한이어야 한다. “말이 시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이란 ‘오직 한 번만 토해낼 수 있는 말”이어야 한다(김상욱 춘천교대교수).
서두에서 말했듯이 시는 ‘새 이름 짓기’이다. 누구나 다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시가 아니다. 아무리 해박한 논리와 지식과 형식을 갖춘 시일지라도 그것은 시가 아니다. 절절한 절박함과 해방과 아름다움이 포함했을지라도 시와는 상관이 없다. 문제는 ‘새 이름 짓기’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태양을 태양으로 표현하면 누구나 표현하는 방식이 된다. 태양을‘정열의 불꽃’ ‘사랑의 불꽃’으로 표현하면 시가 아니다 이미 누군가 그렇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내 영혼에 밝게 빛나는 생명’이라고 표현해야 시가 된다. 시의 규칙대로라면 ‘그리움’을 ‘그립다’라고 표현하면 이미 시가 아니다.‘그리움’이 없이 그리움을 표현해야 시가 된다. 누구도 표현하지 않은 자기만의‘그리움’ 없이 그리움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그리움이 절박하고 괴로워도 그리움이 들어가는 순간 이미 시는 아니다.
시는 언제나 언어와 언어의 경계에 놓여 있다. 시는 이 언어도 아니고 저 언어도 아닌 새로운 언어의 경계에서 상투적인 한 마디 언어로 담아낼 수 없는 마음의 공간, 마음의 사이를 가지고 있다. 어느 누구도 표현하지 않았던 “새로운 이름 짓기’를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시심(詩心)의 세계를 보는 새로운 마음의 창 하나를 갖게 된다.
5. 작가의 시 세계
수 많은 시인들의 작품을 여기서 다 소개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필자가 선별한 것은 현대시를 기준으로 삼았으며, 일제강점기때 친일논란이 있거나 군사독재 정부시절 참여했던 시인의 작품은 배제했다. 그리고 한 두편으로 시를 평가한다든가 한 시인의 시 세계를 평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배기로 소개하면서 시의 흐름을 가볍게 전개해 보겠다.
1) 국수 / 백석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싸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얀 흰 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러났다는
먼 녯적 큰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 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녯적 큰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1941.4)
최근 작가들의 작품에 나오는 음식을 중심으로 새로운 음식문화를 만들어가려는 운동도 활발하다고 한다. 필자도 이런 음식문화에 관심이 있기에, 첫 장을 백석의 작품 중에 ‘국수’를 소개한다. 면을 소재로 하는 국수종류는 참 많다. 그러나 작품에서 나오는 음식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삼천포로 빠지기 쉽다. 2018년 남북정상이 판문점에서 처음으로 만나면서 평양냉면이 선풍적인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백석의 시 제목도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일반적인 ‘국수’다. 그러나 백석의 시 ‘국수’는 우리식의 국수가 아니다. 평양에서는 ‘냉면’을 그냥 ‘국수’라고 부른다. 시 안에는 평안도식 사투리와 고유어들을 사용하고 있어 당대의 평안도 쪽 사투리와 고유어를 이해하지 않고는 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사용하는 현대어로 재해석하면 그 맛과 멋이 살아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백석의 시는 “지방적이고 민속적인 것에 집착하여” “특수한 일경지를 개척하였고 그것으로 성공한 시인”이다(백철). 백석의 시의 특징은 첫째로 모더니즘 시풍이 문단을 주도하던 당시 상황에서 1930년대 후반 토속적인 세계라는 독보적인 시세계를 지니고 있다. 둘째로 백석의 시에서 선명하게 재현되는 것은 식민지 시대의 보편적인 정서인 ‘고향상실감’의 고통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셋째로는 백석의 독특한 시적 형상화 방법은 극단적 이미지즘의 물질이나 비인간화의 시로 나아가 포스트모던니즘의 해체시에 이르는 현대시의 조류에서 더 나아가 인간적인 정서의 복원이라는 서정시로의 방향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2) 종과 주인 / 김남주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던 김남주 시인은 노동운동을 하다가 15년형을 선고받고 9년의 감옥생활을 했으며 출옥 후에 5년여의 짧은 생을 살다 세상을 떠났다. 감옥살이 동안에 칫솔 끝을 뾰족하게 밀어 만든 철필로 은박지에 시를 써서 세상 밖으로 내보내어 알려진 시들이다.
이러한 1980년의 저항시나 노동시를 지금에 와서 감상한다는 것은 참 가슴 아픈 상채기를 들추는 것과 같다. 어느 문학이든 시대를 반영하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저항시와 노동시들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이런 저항시와 노동시들은 현재 진행형임을 간과(看過)해서는 안된다.
이 시는 그의 시집 「나의 칼 나의 피」에서 나오는 시로, 제목「종과 주인」만 보면 헤겔의「정신현상학」에 나오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생각나게 한다. 물론 이 시의 종과 주인은 노동계급과 자본가 계급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가 말하는 계급투쟁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김남주는「각주」에서 헤겔은 게르만 세계에서는 모두 사람이 자유롭다고 하였고,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만인이 자유롭다고 하였지만 이 두 철학자 모두 식민지 사회에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종과 주인」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철학에 대한 김남주식 비판이며 이 두 철학에 대한 변증법적 반론이다.
시에서 종과 주인의 관계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그리고 이의 역전으로서의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을 바닥에 깔고 있으면서도 이 둘의 변증법적 관계를 뛰어 넘는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과는 달리 김남주의 시의 종은 주인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3) 노동의 새벽 / 박노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가도
끝내 못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땅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줏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박노해는 ‘노동의 해방’이라는 뜻을 가진 필명으로 얼굴 없는 노동시인으로 유명하다.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은 생존이 위협받을 정도로 열악한 현실에 놓여 있는 노동자의 삶을 표현한 시이다. 절망적인 노동 현실과 현실에 대한 분노를 노동자의 관점에서 표현한다는 점에서 신동엽의 ‘종로 오가’와 공통적이나, 「종로 오가」는 노동자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과 동정심을 노래한 데 비해, ‘노동의 새벽’은 인간다운 삶이 보장된 세계를 염원하며 미래에 대한 희망과 단결 의지를 노래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특히 제목에서 풍기는 이미지도 노동이라는 고통과 차별의 아픔을 새벽이라는 희망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다. 산문체와 일상언어를 활용해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유사한 어구와 표현을 반복하여 시상을 극대화 시킨다. 이 시는 서정적인 참여 노동시라고 할 수 있다.
4) 섬진강 1 / 김용택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이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물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걸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산 사이
작은 들과 작은 강과 마을이
겨울 달빛 속에 그만그만하게
가만히 있는 곳
사람들이 그렇게 거기 오래오래
논과 밭과 함께
가난하게 삽니다.
겨울 논길을 지나며
맑은 피로 가만히 숨 멈추고 얼어 있는
시린 보릿잎에 얼굴을 대보면
따뜻한 피만이 얼 수 있고
따뜻한 가슴만이 진정 녹을 수 있음을
이 겨울에 믿습니다.
달빛 산빛을 머금으며
서리 낀 풀일들을 스치며
강물에 이르면
잔물결 그대로 반짝이며
가만가만 어는
살땅김의 잔잔한 끌림과 이 아픔
땅을 향한 겨울 풀들의
몸 다 뉘인 이 그리움
당신,
아, 맑은 피로 어는
겨울 달빛 속의 물풀
그 풀빛 같은 당신
당신을 사랑합니다.
(『섬진강』, 창작과비평사, 1985)
김용택의 시는 몇 가지 특색이 있다. 그 특색은 80년대를 필두로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환경과 서정에 따라서 달리 나타나고 있다. 그 본질은 그리움과 농촌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80년대 작품들은 섬진강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농촌의 빚. 가난 등 농촌 모습을 직시하는 시사적인 풍자와 고발의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90년대에 와서는 서정성이 많이 가미된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첫 시집「섬진강」과는 달리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한 시심의 세계가 확연하게 그려진다. 작가에게는「그대 거침없는 사랑」이었고 일상에서 삭막하게 돌아가는 고단한 삶에서의 진정한 쉼인지 모른다. 그리고 기다림과 그리움 속에서 강과 산사이의 경계에서 오는 절박함이 오히려 새로운 세계를 여는 창이었다.
시인 김용택은 고백한다. “나는 그 강길에서 내 새파란 청춘을 다 보냈다. 누구나 그렇듯 청춘시절의 견딜 수 없는 외로움과 절망과 고독함들을 나는 혼자 문학에 기대어 지냈다. 내 젊은 청춘시절은 온통 책과 외로움 뿐이었다. 내 주위에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단에 나가기까지 나는 혼자 절망하고 혼자 일어섰다. 그것은 캄캄한 절망과 눈부신 비상이었다. 나는 캄캄한 그 작은 마을 작은 방에서 부활을 꿈꾸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가려는 나는 견딜 수 없는 외로움에 떨었었다. 거기 강이 있었다. 강은 내 유일한 삶의 위안이었고, 세상을 향한 길이었다. 나는 외로움을 달래려고 늘 강물을 따라 걷고 강가에 나가 헤매었다. 사랑을 잃었을 때도, 사랑을 얻었을 때도, 기쁘고 슬플 때도, 강물은 내 진정한 동무였다.
5) 풀꽃 / 나태주
풀꽃1
자세히 보아야
이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풀꽃 2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풀꽃. 3
기죽지 말고 살아봐
꽃 피워봐
참 좋아.
나태주의 시세계는 짧으면서도 단아하고 섬세하다. 단어가 많아야 구구절절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절제하고 침묵하는 단어가 더 울림이 크다. 침묵의 깊이는 절대적으로 크고 깊다. 예쁘다는 가벼운 말부터 사랑한다는 어려운 말까지 미완으로 완성되는 아름다운 여백으로 가득하게 하는 것은 나태주만의 시심이다.
눈과 마음을 크게 떠야 겨우 볼 수 있는 풀꽃 하나에도 가치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시심은 대단하다. 그래서 작고 보잘것 없지만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한다. 결국은 관심과 애정으로 보는 세상은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본질을 보려는 눈과 마음이 아름다울 때 작고 볼품없어도 시각의 대상은 늘 아름다운 법이다.
6) 폭설 /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오탁번의 시세계는 형언할 길 없는 원시성의 마력이, 남루한 일상을 해학적이며 초월적으로 건너가게 한다.(진순애 문학평론가) 삶의 애환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본질적으로 누구나 같다. 폭설이 주는 공포감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탄성과 절규가 폭설이라는 낭만적이지만 않은 오지의 시골풍경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상황은 긴장하게 만들지만 그 아픔과 고통을 함께 풀어가려는 인간의 저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절규는 절박하기만 하다. 그런 절박함 속에서도 술 한 잔에 인간적인 애정으로 삭혀가는 원시적인 감각들이 폭설이 주는 원시적인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그래서 풍자와 해학은 공포와 두려움을 이기는 힘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해학과 초월은 원시성의 마력이 만들어내는 해탈일 수도 있고, 원시성의 시학에서 비롯된 미학일 수도 있으며 시원의 세계가 모티프로 작용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오탁번은 고백한다. “소설을 피해서 도망다니면서 나는 버리지 못하는 버릇처럼 받아볼 사람 없는 연서를 쓰듯 시를 썼다. 이상하게도 시가 자꾸 쓰여졌다. 소설이 무서워서 도망다니다가 시가 생각날 때면 나는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시를 밖으로 드러내놓고 쓰지 않겠다던 나의 마음도 무너졌고 죽기 전에 한 권쯤만 더 만들겠다던 생각도 바뀌어서 1991년 봄에 미학사에서 세 번째 시집「생각나지 않는 꿈」을 냈다. 도망병의 수첩 같기도 한 그 시집에는 나의 눈물과 추억이 배여 있어서 다시 모든 것을 출발시키는 심정으로 요즘은 나 스스로에 대하여 겸허하게 생각하고 있다. 무슨 생각하느냐고 스스로 물어도 나는 얼른 대꾸할 수 없으나 이제야말로 하늘과 땅의 모습이 온전히 보이기 시작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습이 해맑게 보이는 나이가 되고 보니, 내가 아직 확신 못하는 나의 운명과 비로소 일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시인이며 소설가인 이유 그리고 대학교수이자 시인이며 소설가가 바로 ‘나’인 이유를 스스로 밝혀나가는 마지막 작업을 위하여 아주 조용하고 무력하게 오늘 밤 책상머리의 등불을 홀로 밝히고 있다”.
나오는 말
필자는 국문학자도, 문학평론가도, 더더욱 시인도 아니다. 다만 시를 사랑하고 고백하며 아끼는 사람으로 시가 취미였고 재미 있어 쓴것이 아니라 평생을 시와 함께 동고동락한 사람일 뿐이다. 한국의 사물놀이 일인자인 김덕수는 말한다. “북이 아름답게 울릴때까지 치는 것이 아니라 북이 나를 울리게할 때까지 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시도 마찬가지다. ‘시가 나를 불러 울림이 될때 시를 쓰는 것이다’이때가 시심이 동한 때인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시드니 인문학 강좌를 통해서 시의 ‘삶의 자리’와 ‘죽음의 자리’를 살펴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시인이란 누구인가?’라는 물음 앞에 몇 가지 유형의 시인이 있다고 본다. ‘시보다 앞서 가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시를 따라가는 시인’, ‘시와 함께 가는 시인’도 있다. 또한 자기가 읽고 싶은 시를 쓰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지나치게 독자를 의식하는 시인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시인이란? ‘시를 쓰게 만드는 시를 쓰는’ 시인일 것이다.
다음의 몇 가지 질문으로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
1)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는 왜 시가 나오지 않는가?
2) 시는 문학가나 시인들의 전유물인가?
3) 왜 우리는 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4) 나도 시인이 될 수 있는가?
▷ Questions, Comments & Sharing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