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941년 7월 11일, 크레타섬의 미노스 문명을 발굴한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번스’ (Arthur John Evans, 1851 ~ 1941) 별세
아서 에번스 경 (Sir Arthur John Evans, FRS, 1851년 7월 8일 ~ 1941년 7월 11일)은 영국의 고고학자이다.
크레타에서 크노소스의 왕궁을 발굴한 것으로 유명하다.

– 아서 에번스 (Arthur John Evans)
.출생: 1851년 7월 8일, 영국 Nash Mills
.사망: 1941, 7월 11일, 영국 Boars Hill
.수상: Copley Medal, Royal Gold Medal
.형제: Joan Evans, Lewis Evans
.학력: Harrow School, University of Oxford
.업적: 크레타에서 크노소스의 왕궁 발굴
아서 존 에번스 경 (Sir Arthur John Evans, 1851 ~)은 영국의 고고학자이자 청동기시대 에게 문명 연구의 선구자였다.
그는 그리스 크레타의 크노소스 궁전을 발굴한 것으로 가장 유명하다. 그곳과 지중해 동부 전역에서 발견된 구조물과 유물을 바탕으로 Evans는 미노아 문명과 미케네 그리스를 구분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Evans는 초기 글리프뿐만 아니라 Cretan 문자 Linear A 및 Linear B를 정의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아서 존 에번스는 크레타섬의 크노소스 궁전을 발굴하여 크레타섬의 중요성을 증명하였다.
저서에 ≪크노소스에 있는 미노스의 궁전≫이 있다.

○ 생애 및 활동
아서 에번스 경 (Sir Arthur John Evans, FRS, 1851년 7월 8일 ~ 1941년 7월 11일)은 고고학자 조지 에번스의 아들로 1851년 7월 8일, 영국 Nash Mills에서 출생했다.
옥스퍼드 대학교와 괴팅겐 대학교 등지에서 공부했으며 1884년부터 1908년까지 모교 옥스퍼드 대학교의 애슈몰린 박물관 관장 (Keeper)으로 재직했다.
1898년 크노소스 왕궁을 발굴하기 시작한 그는 이후 35년 동안 그곳에 머물며 왕궁과 그곳 벽에 그려진 벽화를 복원했다.
19세기 중엽만해도 전설 속에 묻혀있던 에게 문명을 1870년 하인리히 슐리만이 소아시아 서북부에 있는 트로이아로 지목되는 곳을 비롯하여 9개의 성채와 도시를 발견했다.
이에 1900년부터 아서 에반스는 크레타 섬 북부에서 크노소스를 발굴하여 ‘미노스왕의 미궁’으로 알려진 궁전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고고학적 발견으로 인해 트로이아 전쟁의 사실성이 확실해지고 그리스 문화보다 앞선 시기에 에게 해 주변에 고도의 청동기 문명이 성립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에반스는 크레타 섬 발굴에서 선형 문자 (線上 文字)가 기록된 여러 점토판 문서 (土版 文書)를 발견하였다.
1894년부터 1941년 사망할 때까지 Evans는 지금은 철거된 Yulbury에 있는 그의 집에서 살았다.
그는 대공황 동안 지역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Jaan Mound와 주변 야생 정원을 지었다.
전 세계 종의 서식지인 이 마운드와 야생 정원은 현재 Oxford Conservation Trust가 소유하고 있다.
Evans는 자신의 재산 일부를 Boy Scouts에 맡겼고 Yulbury Camp는 여전히 Boy Scouts에서 사용할 수 있다.
고고학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1911년 기사작위 (Knight Bachelor)를 받았다.

○ 미노스 문명 (Minoan civilization) 발굴
‘미노스 문명’은 그리스 최초의 문명이자 유럽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문명으로 대략 기원전 3000년경에 크레타 섬에서 생겨났다.
이후 기원전 1900년경부터 ‘궁전 시대’가 시작되며 크노소스를 비롯해 파이스토스, 자크로스, 말리아 등의 도시에서 화려한 궁전을 건축하고 문명을 발전시켜나갔고, 원시 크레타 상형문자와 선형문자 A도 이 시기부터 발견된다.
기원전 1750년경부터는 궁전의 증축이나 재건의 흔적같은 대규모 토목공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기원전 1450년경 부터는 북쪽에서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원시 그리스어를 쓰는 미케네인들이 침입하여 사회의 주도권을 차지한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1100년경에 다른 청동기 문명들처럼 멸망하고 만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크노소스 궁전이 있다.
‘미노스 문명’ (Minoan civilization, 기원전 3650년경 ~ 기원전 1170년경), 미노아 문명 또는 크레타 문명은 그리스의 크레타섬에 있었던 그리스 청동기 시대의 고대 문명이다.
미노스 문명은 기원전 2700~1500년경 동안 번성했다. 그 후로는 미케네 문명이 크레타섬의 미노스 문명의 영역을 지배하였다.
미노스 문명은 20세기 초에 영국 고고학자 아서 에반스의 발굴에 의해 재발견되었으며, 1939년 윌 듀런트는 미노스 문명을 “연속된 유럽의 첫 고리”라고 하였다.
에게해의 키클라데스 제도의 하나로 테라라고 하는 섬에서 기원전 2000년 무렵이라고 추측되는 오랜 옛날, 큰 분화가 일어났다. 그때 매몰된 도시가 1866년부터 7년에 걸쳐 프랑스인에 의하여 발굴되었으며, 용암 속에서 장식 무늬가 있는 도자기의 조각도 발견되었다.
2년 후, 후기 청동기 시대 (이른바 미케네 시대)의 분묘가 로도스섬의 이말리수스에서 새로 발견되어, 특색 있는 도자기가 출토되었다.
이어서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은 트로이 발굴 후인 1876년에 미케네의 발굴을 시도하여, 이름 높은 사자문 (獅子門)의 남쪽에 있는 왕족의 분묘에서 대량의 금은과 기타 세공품을 발견했다.

슐리만의 발굴로 그리스 태고문화 탐구가 점차 활기를 띠고 진행되어, 1900년, 영국인 아서 에번스는 크레타섬의 크노소스 유적 발굴에 손을 댔다.
에번스는 그리스 본토 및 그 밖의 여러 섬들의 소위 ‘미케네 문명’보다도 더 오랜, 한층 세련된 문화를 거기서 발견하였고, 이것이 에게 세계의 구명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에번스는 크노소스 출토의 유품, 특히 항아리의 형태나 장식 양식의 변화에서 크레타 청동기 시대의 연대 구분법을 안출 (案出)하고, 또 크레타 문명에 ‘미노스 문명’이란 이름을 붙였다.
미노스인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칭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미노스의”를 뜻하는 “미노안” (Minoan)이라는 낱말은 아서 에반스가 크레타 섬의 전설적인 왕의 이름인 미노스 (Minos)에서 만들어낸 말이다.
미노스는 그리스 신화의 미로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인데, 아서 에반스는 그 곳이 크노소스라고 비정했다. 혹자는 시리아 마리 (Mari) 문서고에 나오는 고대 이집트의 지명 “케프티우” (Keftiu)와 셈어 “카프토르” (“Kaftor” 혹은 “Caphtor”) 그리고 “카프타라” (Kaptara)가 크레테 섬을 이르는 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미노스 문명이 멸망한 지 수 백년 뒤에 나온 오디세이아에는 크레테 원주민을 “에테오크레테 사람” (Eteocretans, “진짜 크레테 사람”)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이 아마도 미노스인의 후손일 것이다.
미노스 문명의 궁전들은 이 섬에서 발굴된 유적 중 가장 유명한 건물이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거대한 장서고를 통해 이 곳이 행정 기능을 담당하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발굴된 각 궁전은 제각각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다른 건물들과 분리되어 있다. 궁전은 내외부 계단, 작은 우물, 육중한 기둥, 창고와 정원을 갖춘 다층 건물도 있다.
미노스 사람들은 미케네 그리스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가령 초기 그리스의 문자인 선문자 B는 미노스 문명의 선문자 A를 받아들인 것이다.

○ ‘미노스’에 대하여
그리스 신화에서 미노스 (고그: Μίνως)는 크레타섬의 전설적인 왕이었다. 그는 제우스와 에우로페의 아들로, 그의 형제 라다만튀스와 사르페돈들과 크레테의 아스테리온 왕에 의해 길러졌다.
그리스 최초로 함대를 만들어 에게 해 대부분을 통제하고, 퀴클라데스 군도를 정복하여 대부분의 섬에 식민지를 세웠다.
미노스가 이름인지 왕이라는 크레타어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학자들은 미노스와 고대 이집트의 왕 메네스, 독일의 마누스, 인도의 마누 등과 흡사하다고 주장한다.
미노스가 다스리고 있었던 크레타에는, 괴물 미노타우루스가 미궁에 갇혀 살고 있었는데, 영웅 테세우스가 크레타로 와서 미노타우루스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미노스의 딸인 아리아드네가 테세우스를 돕고자 다이달로스를 찾아갔으며, 다이달로스는 아리아드네에게 실 뭉치 하나를 주고 사용법을 알려 주었다. 그래서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실과 칼을 주었다. 이윽고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루스를 죽인 뒤 아리아드네와 함께 달아나자 분노한 미노스는 그들을 도와준 다이달로스를 이카로스와 함께 가뒀는데 두 사람이 탈출하자 또다시 분노하여 다이달로스를 잡을 꾀를 냈다. 미노스는 고둥 껍데기를 실로 꿰면 상을 준다는 사실을 모든 나라에 알렸다. 그리하여 다이달로스가 은신하고 있던 시칠리아 카미코스의 왕 코칼로스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다이달로스는 실을 꿰어 주었다.
그리고 코칼로스는 실이 꿰어진 고둥을 코칼로스로부터 받고 카미코스로 가서 다이달로스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일단 코칼로스는 미노스를 다이달로스가 만든 목욕탕으로 들여보내고 다이달로스에게 방법을 강구했다. 다이달로스는 끓는 뜨거운 물을 욕조로 보내라고 했다. 그래서 미노스는 결국 목욕을 하던 도중 뜨거운 끓는 물이 쏟아지는 바람에 그만 화상을 입어 죽고 말았다.
사후에 그는 그리스의 지하세계인 하데스의 판관이 되었다. 미노스 문명은 그의 이름을 따서 이름이 지어졌는데 그의 아내 파시파에와의 사이에서 아리아드네, 안드로게오스, 데우칼리온, 패드라, 글라우코스, 카트레우스, 아카칼리스 등을 낳았다.

– 미노스 문명의 중심 ‘크노소스’
크노소스 (그: Κνωσός)는 그리스의 크레타 섬에 있는 현존하는 것들 중 가장 규모가 큰 청동기 시대 유적지로, 유럽 최고 (最古)의 도시라 불린다. 미노스 문명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크노소스라는 이름은 크레타의 주요 도시를 기록한 고대 그리스 문서에서도 발견될 정도로 그 내력이 유구하며, 그 존재는 청동기 시대부터 전승 기록과 초기 발굴 장소 근처와 케팔라 언덕에서 대량으로 발견된 로마 동전에 그려진 미노타우로스와 라비린투스, 미노스의 묘사로 확인할 수 있으며, 크노시온 (Knosion) · 크노스 (Knos)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로마인들은 크노소스를 식민지로 삼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크레타에 처음으로 궁전이 건설된 시점은 미노스 시대 중기 초반에 해당하는 기원전 2000년경 직후로 여겨진다. 크노소스 외에도 말리아, 파이스토스, 자크로에도 궁전이 세워졌다. 이들 궁전은 이전까지 일반적이었던 신석기 촌락 형태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이며, 기원전 2000년부터 1000년 동안 크레타와 그리스에서 나타난 궁전 조직의 패턴을 제시했다. 궁전의 건축물은 전보다 부가 증대되었으며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권위가 집중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형태는 유프라테스강 상류의 마리와 시리아 해안의 우가리트의 궁전처럼 동방의 모델을 따랐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초기의 궁전은 기원전 1700년경 이전의 어느 시점인 중기 미노스 시대 2기에 파괴되었다. 그 이유는 크레타섬에서 종종 발생하는 지진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기원전 1650년경 궁전은 더욱 큰 규모로 재건되었고, 두 번째 궁전의 시대(기원전 1650년~1450년)는 미노스 문명의 절정기였다. 모든 궁전에는 큰 중정이 있어서 공공 행사를 위해 쓰거나 스펙터클의 장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정 주변에 생활 공간, 창고, 행정 관서가 배치되었으며 숙련공을 위한 작업 공간도 있었다.
크노소스 궁전은 크레타에서 가장 큰 궁전으로, 중심 건물만 해도 3에이커를 차지하며, 개별 건물까지 합치면 5에이커에 이른다. 장대한 계단이 위층의 응접실로 이어진다. 종교 의식 장소는 지상층에 있다. 궁전의 상점은 6개의 방을 점유하고 있는데 이곳의 주된 특징으로 5피트 높이에 이를 정도로 큰 저장 항아리인 피토스가 있다. 피토스는 주로 기름, 양모, 포도주, 곡물을 저장하는 데 쓰였다. 납을 칠한 함에는 작은 귀중품이 들어 있다. 궁전은 욕실과 변소, 배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크노소스에는 400명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이 세워졌다(파이스토스에서 더 이전에 세워진 극장이 있다). 극장의 연기 공간(오케스트라)은 후대 아테네의 형태와 달리 직사각형이며, 종교 무용을 위해 쓰였을 것이다.
크노소스의 건축 기법은 전형적이다. 기단과 벽돌 아래층은 석조로 되어 있고 전체는 들보와 기둥의 목구조로 건설되었다. 주요 구조는 굽지 않은 큰 흙벽돌을 쌓아 만들었다. 지붕은 나뭇가지 위에 두꺼운 진흙층을 얹어 평평했다. 내부의 방에는 채광정을 두어 빛이 들게 했고 세로 홈이 새겨진 나무 열주는 지지대 역할을 하는 동시에 건물의 위엄을 세워주었다. 방과 복도는 일상 생활과 행렬 장면을 그린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었다. 이 시대의 옷차림은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성의 묘사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들은 머리를 정교하게 다듬고 주름 치마와 부푼 소매가 있는 긴 옷을 입었다. 허리에 달라붙는 조끼를 입었으며 가슴을 노출했다.

크노소스의 번영은 일차적으로 크레타 현지에서 나는 기름, 포도주, 양모와 같은 자원을 개발한 덕분이다. 무역의 확대도 한 가지 요소가 되었다. 헤로도토스는 전설에 나오는 크노소스의 왕 미노스가 해상 제국을 건설했다고 썼다. 투키디데스는 이 전승을 받아들이고 미노스 왕이 해적을 평정했으며 무역 흐름을 증대하고 에게 해의 많은 섬을 식민지로 삼았다고 기술했다. 고고학적 증거도 이 전승을 지지하는데, 미노스 문명의 도기가 이집트, 시리아, 아나톨리아, 로도스, 키클라데스 제도, 시칠리아, 그리스 본토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노스 문명은 로도스, 밀레토스, 사모스와 밀접한 연관을 가졌던 것 같다. 크레타의 영향은 키프로스에서 발견된 최초의 문자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크레타 제품의 주요 시장은 키클라데스 제도였는데, 여기에서는 도기, 특히 돌 화병의 수요가 있었다. 키클라데스 제도가 크레타에 예속되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무역 상대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서 크레타의 영향력이 강력했음은 분명하다.
그리스 본토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전승이나 고고학적 조사 모두 크레타와 아테네의 강력한 연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한 미노타우로스 전설에서 아테네는 크노소스에 예속되어 공물을 바친다고 나와 있다. 전설에 따르면 반은 사람이고 반은 황소인 괴물이 미궁에 살고 있다고 한다. 황소는 크노소스에서 발견되는 도기와 프레스코화에 자주 나타나는 주제이며, 궁전의 정교한 배치는 미궁을 연상하게 한다. 흔한 의례 상징이며 궁전 벽에도 종종 보이는 양날 도끼는 라브리스(labrys)라고 하는데, 이러한 형태의 도구나 무기를 가리키는 카리아어 낱말이다.
크레타의 세력이 절정에 이른 기원전 1450년경 말리아, 파이스토스, 자크로의 궁전은 다른 곳의 더 작은 주거지와 마찬가지로 파괴되었다. 오로지 크노소스 궁전만 남아 기원전 1370년경까지 존속했다. 크노소스가 파괴된 시점에 이곳은 그리스인들이 점유했는데, 예술 및 장례에서 무기와 전쟁을 강조하는 데서 그리스인이 등장했음을 보여준다. 미케네식 석실묘가 도입되었으며 도기 양식에도 그리스 본토의 영향이 나타난다. 마이클 벤트리스가 선문자 B 서판을 해독하고 이 언어가 이전의 선문자 A와 상당히 다른 그리스어의 초기 형태임을 보여주자 이러한 변화는 문서 형태로도 확증되었다. 아서 에반스는 크노소스에서 선문자 B 서판을 발견했다. 선문자 B는 파이스토스나 다른 곳의 선문자 A와 달랐지만, 에반스는 전자에서 발전한 형태라고 생각하여 ‘선문자 B’라고 명명했다.
크노소스가 산토리니의 화산 분출로 말미암아 파괴되었다는 가설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크노소스가 멸망한 원인은 아르골리스에서 온그리스인(미케네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의 침략으로 보고 있다. 크노소스는 기원전 1370년경의 멸망 이후에도 무역과 예술 면에서 번영했다. 크노소스의 멸망에 대한 설명은 가설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만 한 가지 그럴듯한 이유로 당시 본토에서 번성한 미케네인이 경쟁 국가인 크노소스를 제거하기로 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다.

– 미노스의 문화
미노스인은 해상무역에 종사하였고 도자기 제조술이 뛰어났다. 미노스 사회는 전체적으로 활달하고 유복하고 상류층은 쾌적한 생활을 보냈다. “미노스의 예술은 화려하고 생생하며, 인간성과 개성에 충만해 있다. 바다와 태양, 수목과 꽃, 축제와 스포츠에 도취되어 있었다.
위와 같이 미노스 예술은 고대 이집트의 영향을 받았으나, 곧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걸었다. 미노스 예술의 대표적인 사례는 궁전의 프레스코화이다.
크노소스의 궁전은 낮고 가파르지 않은 언덕 위에 있다. 궁전의 가운데에 장방형의 커다란 뜰이 있고, 거실이나 침실·목욕탕 내지는 신전 (神殿) 등, 여러 종류의 방들이 둘러싸고 있다. 방의 배치가 아주 불규칙하여 전체적으로 긴밀한 통일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통풍이나 채광을 위한 고려 (考慮)를 비롯하여 완전한 하수 (下水)장치 등 위생시설에 대한 깊은 관심이 엿보인다.
그리고 저장실 (貯藏室)에는 술·기름·곡물류를 넣는 커다란 항아리가 길게열을 지어 있어, 크레타 왕족의 부유함을 말해 주고 있다. 크노소스의 궁전은 현재로는 옛날의 양식을 기초로 하여 부분적으로 복원 (復元)되어 있다. 아름답게 장식된 옥좌 (玉座)가 놓인 방의 건축에 있어서, 크레타인은 석재 (石材)뿐 아니라 목재도 사용했다. 흥미있는 것은 낮은 주춧돌 위에 고정시켜 세운 나무기둥이, 상부 (上部)에서 하부 (下部)를 향해 차차 가늘게 되어 있는 점이다.
크레타인은 대리석이나 청동의 큰 조상 (彫像)은 만들지 않았다. 벽화를 보면 그들이 특히 자연이나 동물에 대해서 친숙한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옥좌가 놓인 방의 벽화에서는 기복 (起伏) 있는 땅 위에 백합 비슷한 꽃이 피어 있고, 옥좌의 양측에 우아한 형체를 가진 신화·전설상의 동물이 가로누워 있다. 또한 크레타의 벽화에는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나 남녀의 행렬 등을 그린 것도 있다. 남자는 허리가 호리호리하고, 대체로 허리에 띠만을 두르고 있다. 여자는 꼭 끼는 옷을 입었고, 그 스커트에는 이따금 꼰 끈이나 레이스의 장식이 붙어 있다. 크노소스의 궁중 여관 (宮中女官)을 그린 벽화에서는, 여자들이 화려한 의복을 걸치고, 값비싼 장신구를 붙이고 있다. 여기서도 크레타 문명의 세련된 일면과 동시에 여자가 차지한 사회적 지위가 높았음이 엿보인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