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진 목사 칼럼

던바의 수 (Dunbar’s Number) [2]
● 목회의 적절한 수는 얼마일까요?
던바의 수 (Dunbar’s Number) 150명은 ‘한 개인이 맺을 수 있는 전체 관계의 총합’을 의미합니다.
즉, 교회 지인 150명, 친구 150명, 직장 동료 150명을 각각 가질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내 삶에 들어와 있는 모든 그룹을 통틀어 우리가 ‘안정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최대치’가 약 150명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교인 100명과 깊은 유대감을 갖고 목회한다면, 나머지 사회적 관계 (가족, 친구, 동료 등)에 할당할 수 있는 여유분은 50명 남짓으로 줄어들게 됩니다.
● 그러면 목회의 적절한 수는 얼마일까요?
75명의 법칙: 일부 연구에서는 목사가 심방하고, 상담하며, 일상을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숫자를 75명 내외로 봅니다. 어떤 전도학 교수님은 40명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밀착 돌봄 / 50~70명 / 모든 교인의 사정을 깊이 파악 가능
.인격적 인지 한계 / 150명 / 목사가 얼굴과 이름을 매칭할 수 있는 마지노선
.조직적 관리 / 200명 이상 / 시스템과 소그룹 리더를 통해서만 돌봄 가능
● 교인이 적절한 돌봄의 한계치를 넘어서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품질 (돌봄)의 저하: 식당에 손님이 너무 많으면 서비스가 엉망이 되듯, 교인이 감당 안 되게 많아지면 소외되는 사람이 생기고 상처받는 이들이 방치됩니다.
.메시지의 타협: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듣기 좋은 말만 하거나 진정한 변화보다 위로에만 치중하는 ‘마케팅적 설교’를 하게 될 유혹에 빠집니다.
.소진 (Burnout): 목회자 개인의 ‘던바의 수’를 초과한 인원은 결국 목회자의 영적, 정신적 소진을 불러옵니다.
● 무서운 전염병처럼 만연되어 있는 대형화 추구는 다음과 같은 현상을 초래합니다.
1. ‘목양’이 아닌 ‘마케팅’의 지배, 즉 비즈니스적 사고가 작동하게 됩니다.
.교인의 도구화: 성도를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교회를 키우기 위한 ‘일꾼’이나 ‘자원’으로 보게 됩니다.
.투자 대비 효율: 에너지가 많이 드는 ‘아픈 양’을 돌보기보다,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될 만한 ‘유능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선별적 목회가 나타납니다.
2. ‘현재’가 없는 징검다리 목회
.장사하는 사람이 오늘 번 돈으로 내일 더 큰 가게를 차릴 생각만 하듯, 성장 지향적 목회자는 ‘지금 여기’에 있는 교인들과의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안식의 부재: 현재의 공동체에 만족하지 못하니 목회자 스스로 늘 조급하고 불안합니다. 그 불안은 고스란히 교인들에게 “더 전도하라, 더 헌신하라”는 압박으로 전달됩니다.
.관계의 결핍: 교인은 목사님과 마음을 나누고 싶어 왔는데, 목사님은 더 큰 건물을 짓거나 숫자를 채우는 ‘프로젝트’에만 몰두해 있어 정작 정서적 지지와 영적 돌봄은 공백 상태가 됩니다.
3. 소형 교회의 축복을 인식하지 못하는 비극
소형 교회는 그 한계치 안에서 최고의 밀도를 만들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인데 이 축복을 버리고 비즈니스 모델을 따르게 될 때 다음과 같은 모순에 부딪치게 됩니다.
.시스템의 조기 도입: 30명밖에 안 되는 교회에서 대형 교회의 행정 시스템을 흉내 내느라 인격적 관계 대신 서류와 보고 중심의 딱딱한 조직이 되어버립니다.
.공동체의 해체: 가족 같은 끈끈함이 소형 교회의 최대 장점인데, 숫자를 늘리려다 보니 기존 교인들이 소외감을 느끼고 떠나가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 운영이 반복됩니다.
● ‘전염병’처럼 번진 대형화의 욕망
한국 사회의 고도성장기와 맞물려 교회 안에도 ‘성장=축복=능력’이라는 등식이 신앙의 공식처럼 자리 잡았습니다.
.생존의 공포: 임대료와 유지비를 감당해야 하는 개척 교회의 현실에서 숫자는 곧 존립의 문제입니다.
.비교와 명예욕: 목회자 그룹 내에서도 교회 크기가 계급이 되고, ‘성공한 목회’의 척도가 교인 수로 치환되면서 목회자들은 끊임없는 열등감과 과시욕 사이에서 중독되어 갑니다.
● ‘목자’는 사라지고 ‘CEO’만 남은 현실
대형화 추구 속에서 목회자는 더 이상 양의 이름을 부르는 목자가 아닙니다.
대형 교회 목사를 초빙하여 집회를 하고 목회자 세미나를 하지만, 목회 세미나가 아니라 목회 기업 운영 세미나입니다.
.관객과 연출자: 교인은 목양의 대상이 아니라 주일 예배라는 ‘쇼’를 채워주는 관객이 되고, 목사는 그 무대를 화려하게 만드는 연출자가 됩니다.
.서류상의 양들: 교인은 데이터베이스 속의 숫자로 관리될 뿐, 그들의 삶에 묻은 먼지와 상처를 닦아주는 목자의 손길은 시스템 (부교역자나 소그룹 리더) 뒤로 숨어버립니다.
● 슬픔 너머의 대안: ‘작음’의 영성
이 전염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근 일부에서는 ‘탈성장’과 ‘작은 교회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장이 아닌 성숙: 숫자가 늘어나면 기꺼이 교회를 분립하여, 목사 한 사람이 인지할 수 있는 안에서 관계의 밀도를 유지하려는 시도입니다.
.흩어지는 교회: 모이는 숫자에 집착하지 않고, 교인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작은 예수’로 살아가도록 파송하는 구조입니다.
결론: ‘작음’의 가치를 잃어버린 시대
“작은 교회는 큰 교회로 가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성된 가치를 지닙니다. 대형화된 조직 속에서 작은 자는 무시됩니다. 교회의 존재 의미는 상실되고 세속화의 앞잡이가 되는 위험에 노출됩니다. 대형화의 욕망이 목회자의 영성을 철저하게 오염시키고 교회를 무너뜨렸습니다. 주님께서 항상 강조하신 작은 자로 돌아갈 때입니다.

이상진 목사 (시드니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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