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택 목사의 신학논단 : 천로역정강해 (제6강의)

절망의 거인, 의심의 성
- 샛길 (By-Path Meadow): 인간 지혜의 유혹
기독도와 소망은 순례의 길 위에서 점점 험해지는 여정을 마주하였다. 돌과 진흙으로 가득한 길은 그들의 발걸음을 무겁게 하였고, 육체적 피로와 심리적 부담을 동시에 가중시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들은 길 옆으로 이어진 평탄한 길, 곧 샛길 (By-Path Meadow)을 발견하게 된다. 이 길은 본래의 순례길과 나란히 이어지는 듯 보였으며, 무엇보다도 훨씬 쉽고 안전해 보였다. 그들은 잠시 망설였으나, 결국 보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보이는 선택을 따르기로 결정하고 울타리를 넘어 샛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이 선택은 단순한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순례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키는 사건이었다. 처음에는 안락함과 안정감을 제공하던 샛길은 점차 어둠과 혼란으로 이어졌고, 결국 그들은 의심의 성 (Doubting Castle)에 이르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절망의 거인 (Giant Despair)에게 붙잡혀 감금되었으며, 신앙의 확신을 흔드는 깊은 내적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이 장면은 단순한 모험담이 아니라, 십자가 이후의 신앙 여정 속에서 발생하는 의심과 절망, 그리고 확신의 붕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중요한 신학적 서론이다.

소망: “형제여, 이 길은 너무 험하지 않습니까?
저기 옆에 보십시오. 훨씬 평탄한 길이 있습니다.”
기독도: “과연 저 길이 우리가 가는 방향과 맞겠습니까?”
소망: “보기에 같은 방향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훨씬 수월해 보입니다.
굳이 이 어려운 길을 계속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기독도: “… 그렇다면 잠시 저 길로 가 봅시다.
아마 더 쉽게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소망: “좋습니다. 조금이라도 편한 길을 택하는 것이 지혜 아닙니까?”
마침내 그들은 울타리를 넘어 샛길로 들어섰다.
기독도와 소망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더 나아 보이는 길을 선택한 것이 지혜로운 길이라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신앙의 문제가 생긴 것이다. 더 쉬운길, 이 길은 나에게선 어려운 길이야, 내겐 너무 벅차, 때로는 희망이 없어보이지 않는가, 나는 더이상 이렇게 어렵게 살고 싶지 않아, 이제 나이도 있고 좀 편하게 사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좋아, 그렇게 사람들도 조언하고 있지 않은가 등등 갖가지의 유혹이 기독도들에게는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하게 접근해 온다. 이것은 모두 기독도와 소망이 만나게 되는 샛길의 유혹들이다.
이 샛길로 들어서는 신앙의 위기는 악에서 시작되기보다, 더 좋아 보이는 선택 속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쉽고 안일하고 지름길 같아 보여 결정한 것이 결국은 절망의 길에 이른 파국의 길에 이르게 된다.
- 의심의 성에서의 시련
기독도와 소망은 샛길을 따라 들어온 성이 바로 절망의 거인이니 살고 있는 의심의 성이였다. 이들은 그에게 붙잡혀 결국은 어두운 감옥에 감금되었다. 그 감옥은 빛이 거의 들지 않는 폐쇄된 공간으로,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심리적 압박이 극심하게 작용하는 장소였다. 거인은 그들을 주기적으로 찾아와 심하게 위협하고 구타하였으며, 그들의 신앙과 여정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말을 반복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으며,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모두 헛된 것이었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언어적 폭력과 매를 맞았다. 이런 고난은 그들의 내면에 의심과 자기 부정을 심어 주는 역할을 하였다.
절망의 거인: “누가 내 땅에 들어왔느냐? 이곳은 의심의 성이다. 너희는 여기서 나갈 수 없다.”
기독도: “우리를 용서해 주십시오 … 우리는 길을 잃었을 뿐입니다 …”
절망의 거인: “용서? 너희 같은 자들에게는 그런 것은 없다. 너희의 길은 이미 끝났다.”
소망: “아직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절망의 거인 (분노하며): “희망이라고? 헛된 소리다! 너희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모두 실패였다. 너희 하나님은 너희를 버렸다. 아무도 너희를 구하러 오지 않는다.”
절망의 거인: (잠시 침묵 후,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
“이 고통을 끝내고 싶다면 스스로 끝내라 (자결하라). 살아갈 이유가 없다. 이 길 밖에는 나갈 길은 없다.”
기독도와 소망이 의심의 성에서 겪는 상황은, 구약에서 사무엘상 17장에 등장하는 골리앗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골리앗은 “사십 일을 조석으로 나와서” (삼상 17:16)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모욕하며 두려움을 심어 주었다. 이는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믿음을 흔드는 영적 도전이었다. 이와 같이 순례자의 여정에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골리앗’이 있다. 사도 바울 역시 내면의 깊은 절망에 부디친 적이 있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4)라고 탄식하였다. 이는 신앙인이 겪는 실존적 위기를 잘 보여준다.

의심의 성에서 절망의 거인이 휘두르는 몽둥이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절망의 몽둥이, 질병의 몽둥이, 고난과 실패의 몽둥이, 의심의 몽둥이, 그리고 때로는 경제적 위기까지 포함된다.
더 나아가 이단의 유혹과 세상이 주는 정신적 · 신앙적 · 육체적 유혹, 잘못된 습관 압박도 순례자를 흔든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여호와께 속한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삼상 17:47).
싸움의 결과는 인간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
의심의 성에서 기독도가 듣는 절망의 거인의 폭언은 단순한 외적 위협이 아니라,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신앙의 위기적 음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순례자의 싸움은 두려움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믿음의 싸움이다.
- 신앙의 확신이 일시적 흔들림 : 우리의 구원은 감정에 기초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있음
청교도 신학은 구원의 확실성을 인간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이해하였다. 신자는 때로 의심과 낙심 속에서 확신이 흔들릴 수 있으나, 그것은 구원의 상실이 아니라 확신의 약화일 뿐이다. 윌리엄 퍼킨스는 믿음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세워진 확신”이라 하였으며, 청교도들은 감정의 변화보다 말씀의 객관적 진리를 붙드는 것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신앙의 회복은 새로운 감정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으로 돌아가는 데 있다.
청교도 신학은 이러한 상태를 구원의 상실이 아니라 확신 (assurance)의 일시적 흔들림으로 해석하였다.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 “참된 신자는 깊은 어둠 속에 떨어질 수 있으나, 결코 완전히 버려지지 않는다” (John Owen, The Works of John Owen, vol. 6 [Edinburgh: Banner of Truth, 1967], 11)고 하였다. 토마스 왓슨 역시 “하나님의 자녀는 넘어질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손에서 떨어지지는 않는다” (Thomas Watson, A Body of Divinity [London, 1692; repr., Edinburgh: Banner of Truth, 1958], 245)고 말한다. 이러한 통찰은 신앙의 위기가 존재론적 파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적 긴장임을 보여준다.
성경은 이와 같은 경험을 잠시 동안의 시련으로 설명한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벧전 1:6)라고 말하며, 신앙의 여정 속에서 겪는 고난이 궁극적 상태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롬 11:29)고 선언함으로써, 구원의 근거가 인간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음을 강조한다.
- 약속의 열쇠를 되찾은 기독도
다음은 의심의 성에서 약속의 열쇠를 발견하는 기독도와 소망의 대화입니다.
기독도 (깊은 절망 속에서): “우리는 여기서 끝인가… 더 이상 길이 없는 것 같네…”
소망: “형제여, 아직 하나님을 기억하시오. 약속을 잊지 마시오.”
(잠시 침묵 후, 기독도가 몸을 더듬는다)
기독도 (놀라며): “잠깐… 내 가슴에… 무엇인가 있다!”
소망: “무엇이오?”
기독도 (눈이 밝아지며): “약속의 열쇠다! 내가 이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잊고 있었구나!”
소망 (기쁨으로): “그렇다면 시도해 보시오! 주께서 길을 여실 것이오!”
(기독도가 떨리는 손으로 문에 열쇠를 넣는다)
기독도: “주님의 약속을 의지합니다…” (문이 열리는 소리)
소망: “열렸다! 길이 열렸다!”
기독도: “우리는 버려진 것이 아니었다. … 약속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약속의 열쇠를 발견한 순간은 신앙 회복의 본질을 보여준다. 기독도는 새로운 길을 얻은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약속을 다시 기억하였다. 절망은 길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약속을 잊은 상태이다. 믿음은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데서 다시 살아난다.
약속의 열쇠로 탈출한 사건은 신앙 회복의 본질을 성서적으로 잘 보여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이미 탈출의 길을 주셨음을 선언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13). 이는 의심의 성이 궁극적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준비하신 길 안에서 극복될 수 있는 시련임을 의미한다. 청교도 신학 역시 이 점을 강조한다. 윌리엄 퍼킨스는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세워진 확신”이라 하였으며 (William Perkins, A Golden Chain [Cambridge, 1591; repr., Edinburgh: Banner of Truth, 1968], 23–25). 조엘 비키는 “신앙은 그리스도의 객관적 사역에 근거한다”고 설명한다. 결국 절망을 이기는 길은 내면의 회복이 아니라, 십자가와 약속으로 다시 돌아가는 데 있다 (Joel R. Beeke, The Quest for Full Assurance [Edinburgh: Banner of Truth, 1999], 52–53). 히브리서 역시 “우리가 소망의 고백을 굳게 잡자 …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라” (히브리서 10:23)고 권면한다. 결국 약속의 열쇠는 인간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은혜의 신뢰이다.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나게하시며 믿음을 붙들도록 용기를 주신다. 열쇠는 하나님의 말씀의 재 발견에서 오는 것이요 믿음의 회복을 뜻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자녀됨의 신분은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
의심의 성에서의 탈출은 하나님의 자녀됨의 신분이 결코 취소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기독도는 샛길로 들어서고 절망에 빠졌으나, 그의 신분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구원은 인간의 상태나 감정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절망의 성은 신분의 상실이 아니라 확신의 흔들림의 장소였다. 그러나 약속의 열쇠를 통해 그는 다시 길을 발견하였다. 이는 신자의 회복이 새로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신분과 약속으로 돌아가는 과정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로마서 8:38–39에서 말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렇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실패 속에서도, 어떤 절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의심의 성은 구원의 상실이 아니라 약속을 잠시 잊은 상태이다. 그러나 복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탈출의 길을 주시며 (고전 10:13), 십자가를 통해 이미 그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셨다. 결국 신앙의 회복은 새로운 무엇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은혜의 약속으로 돌아가는 데 있다.
더 나아가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로마서 11:29)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 흔들리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따라서 의심과 절망 속에서도 구원은 상실되지 않는다. 그 어려움 중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품안에 살아 있는것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용기를 내시요. 절망의 거인을 두려말고 우리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인간의 힘보다도 강하다.
그 은혜는 절망의 거인의 몽둥이보다도 강하며, 모든 두려움과 억압의 권세를 무너뜨린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린도후서 12:9). 또한 그는 선포한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로마서 8:37). 그러므로 순례자의 승리는 자신의 힘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가 절망을 무너뜨리고, 다시 일어나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 “참된 신자는 깊은 어둠 속에 떨어질 수 있으나, 결코 완전히 버려지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John Owen, The Works of John Owen, vol. 6 [Edinburgh: Banner of Truth, 1967], 11.), 토마스 왓슨 역시 “하나님의 자녀는 넘어질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손에서 떨어지지는 않는다” (Thomas Watson, A Body of Divinity [London, 1692; repr., Edinburgh: Banner of Truth, 1958], 245) 고 말한다. 이러한 통찰은 신앙의 위기가 하나님 자녀됨이라는 존재론적 정체성의 상실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되는 일시적 긴장임을 드러낸다. 누가복음15장에서 탕자의 타락이 아들의 신분을 결코 바꿀 수 없었다.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는 아들로 환영하시었다.
- 기독도는 성을 떠나며 길가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기독도와 소망은 마침내 약속의 열쇠를 가지고 잠긴 철문을 열고, 의심의 성을 탈출하여 정상적인 순례의 길에 들어선다. 그들은 죽음의 늪에서 벗어난 것이다. 평안과 확신을 가지고 잃은 길를 되찾아 천성을 향한 순례의 길을 계속하게 된다. 이 경험은 그들을 성숙한 믿을 갖는 기회도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뒤에 오는 사람들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샛길에 경고문을 남기다. “결코 샛길로 들어서지 마라 거기에는 의심의 성이 있으며 절망의 거인인 너를 기다리는 곳이다”.
이 경고문을 다음과 같이 성찰하여 정리할 수 있다.

샛길을 따르지 말라
쉬워 보이는 길이
항상 옳은 길은 아니었다
유혹의 길은
빛처럼 보였으나
그 끝은 어둠이었다
샛길은 절망의 거인이 기다리는
유혹의 길이다.
그러나 네 손에는 이미
약속의 열쇠가 주어졌다
그러므로 순례자여
그 약속의 열쇠를 굳게 잡고
사망에 이르는 샛길에서
지금 돌아서라
목자의 지팡이가 너를 안위하시니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라
순례자의 길을 멈추지 말라
이 길만이
참된 축복으로 인도하는
너의 평안과 승리의 미래이다
의심의 성 사건은 십자가 이후 신자의 신분은 변하지 않으나, 확신은 흔들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절망은 약속을 잊게 만드는 거짓이며, 회복은 말씀으로 돌아갈 때 이루어진다.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으시다. 그분의 신실하심을 의지하라. “천성을 향해 가는 신도들아 앞길에 장애를 두려말아라 성령이 너를 인도하시리니 (찬송 401)”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고 순례의 여정을 계속하라. 다음호에서는 순례자들이 기쁨의 산에서 목자들의 영접을 받는 신앙의 공동체의 역활에 관하여 쓰게 될 것이다. (다음에계속)

이상택 목사
(아이오나 콜럼바 대학 학장, 신학과 실천신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