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신학
인문학과 신학 – 인문학에서 바라보는 신학과 신앙
I. 추천도서
1. 종교란 무엇인가?, 오강남, 김영사, 2012
2. 한국교회–인문주의에서 배운다, 양명수, KMC, 2014
3.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김경집, 시공사, 2013
4. 포스트모던 하나님 포스트모던 기독교, 데이빗 그리핀, 강성도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2002
5.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 이길용, 꽃자리, 2016
6. 교회에서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 이야기, 구미정 등, 자리, 2012
7. 지금–한국의 종교, 김근수 외, 메디치, 2016
II. 신학과 인문학의 기본 개념에 대한 이해
1. 신학은 신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인문학은 인간을 연구의 대상으로 여긴다. 요한 깔 뱅은 어느 쪽에서 출발하던 결국 그 둘은 서로 만난다고 했지만 그러나 그가 말한 ‘인간연구’란 ‘기독교적 인간관’에 기초한다. 즉 인간을 피조물과 죄인으로 규정하는 기독교 인간관 위에서 보는 인간이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문학적 인간이해는 아니다.
2. 학문이란 관찰, 실험, 이론을 세워나가는 이성적 작업이다. 여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에 대한 정의, 방법론, 체계론이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신학도 반드시 Logical, Reasonable, Scientific, Analytic, Synthetic하게 접근해야 한다.
3. 그런데 전통적으로 신학에서는 ‘믿으면 알게 된다’고 한다. 철학에서는 ‘알아야 믿을 수 있다’고 한다. 신학과 철학은 긴장관계를 갖는다. 교부철학자(Patristic Philosophy)들 중에서 테르톨리아누스(Terutulianus, 160-222)는 말한다.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는 어리석기 때문에 믿는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는 말했다. ‘믿어라 그럼 알게 된다’(credo ut intelligas). 이 경우 믿음을 사랑으로 대치해도 될 것이다 – 사랑하면 이해된다. 미워하면 이해가 않된다. 이렇듯 신학은 지식 앞에다 믿음을 둔다.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으로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자신을 보여줌으로만 알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을 계시종교라고 한다. 그러나 인문학은 지식을 믿음 앞에다 둔다. 데카르트는 방법론적 회의를 주장했다. 신학은 ‘믿으라’고 하고 인문학은 ‘의심하라’고 한다. ‘앎’이라고 하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이 둘은 제 각기 다른 접근을 시도한다.
4. 신(神)이란? 종교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는 어떤 초자연적이며 절대적 능력을 지닌 존재로써 자연계의 변화를 비롯하여 인간의 출생, 삶, 죽음, 죽음 이후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믿는 존재이다. 기독교에서는 흔히 ‘아버지’라는 호칭을 쓰며 남성적으로 받아 드린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는 신이 하나 뿐이라는 유일신(唯一神) 사상을 갖고 있다. 고대인들, 가나안 사람들, 그리스 신화, 북유럽 신화,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와 인도의 힌두교 등에서는 다신교(多神敎)적 신앙을 지니고 있다. 신이란 무엇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디에 존재하는가? 그의 생김새와 크기는 어떻게 되어 있고, 언어는 무엇을 쓰고 있으며, 그의 말씨는 어떠한가?
5. 신의 속성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초월성, 영원성, 신비성, 거룩성, 불변성, 사랑, 공의, 사랑과 공의의 공존성, 최고 선, 최고의 진리 등으로 말해진다.
6. 기본적으로 인문학자들과 종교학자들은 신앙과 신학은 개인의 체험과 그 체험에 대한 개별적 믿음에 근거한다고 본다. 따라서 신학의 방법론은 말씀, 기도, 찬양, 묵상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결국 신학과 신앙은 학문적 일반성과 보편성을 지니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학문으로써 자리매김을 할 수는 없다고 본다. 이런 생각을 지닌 대표적인 철학자는 칸트와 슐레이르마하이다.
7. 신학은 신 개념, 신의 존재와 그 증명, 신들의 종류, 신의 속성, 신인식론 등에 대하여 이성적, 이론적, 합리적, 과학적 및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과연 학문으로써, 혹은 학문적 방법론으로 가능하겠는가?
8. 일반적으로 철학과 인문학에서는 신을 연구의 주제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 인간 의 삶, 윤리, 도덕, 가치, 형이상학적 개념 중에서도 이데아론, 존재론, 인식론 같은 것들을 철학의 주제로 여긴다. 신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취급한 것은 중세 기독교철학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규명하려고 했다. 그는 via ex motu(운동을 통한 증명), via ex causa efficientis(원인을 통한 증명), via ex possibilli et necessario(우연과 필연을 통한 증명), via ex gradu rei(비교를 통한 증명), via ex finesive(목적론적 증명) 등 5가지로 신학과 철학의 접촉을 시도했다. 그러나 계몽주의 이후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이나 ‘도덕적 한계 내에서의 종교’ 등에 서신의 문제는 철학적 연구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인간의 도덕적 삶을 위해서 ‘요청된 신’(The postulate God)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슐라이에르마하(F. Schleiermacher, 1768-1834)는 종교란 절대의존의 감정이라고 했다. 그는 종교의 본질은 ‘사유’(Denken)나 ‘행위’(Handeln)가 아니라 ‘직관’(Anschaunung)이나 ‘감정’(Gefuhl)이라도 보았다. 현대철학과 인문학에서는 신의 존재나 부재 자체는 그 증명이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오히려 현대 윤리학에서는 ‘만약 신이 없다면 인간은 부도덕하게 살게 되는가? 우리는 신 때문에 착하게 사는가?’하는 문제를 주로 논의한다.
9. 기독교신학 –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유교 기타 다른 종교들과 구분되는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신학, 혹은 그 신학체계를 이르는 개념이다. 그 핵심교리 중 하나는 ‘신(하느님)이 사람이 되었다’고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론이다. 예수가 누군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긴 신학적 논의가 이어왔다. 예수 자신의 자칭적 자기소개로부터 베드로와 마르다를 비롯한 제자들과 초대 그리스도 교회에서의 예수에 대한 고백들은 아주 다양하다. 1) 초대 교회이후 가장 길게 논의해온 양성론에 대하여 살펴보자. 세계공의회(Ecumenical Councils, Concilium Ecumenicum과 Regional Council, Concilium provinciale의 차이)는 325년 니케아에서부터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모두 21번의 모임이 있었으나 그 중에서 특히 처음 4번의 공의회는 모두 예수의 양성론이 핵심의제였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 제3차 에페소 공의회(431년), 제4차 칼케톤 공의회(451년)는 모두 로마의 황제가 소집했다. 한 인격적 존재 속에 신성과 인성이 공존한다고 하는 것이 과연 학문적으로 논증 가능한 일인가? 아니면 이것은 그냥 신앙적으로 수용해야 할 것인가? 2) 예수가 누군지를 논의하는 기독론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복음서 중에서 두 가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The Sayings of Jesus와 The Life of Jesus, 이 두 가지가 촛점이다. 여기에는 예수가 가르친 교훈으로써 하나님의 나라, 사랑, 정의, 구원, 심판, 영생을 비롯하여 예수 자신의 삶과 죽음, 고난과 부활, 승천과 부활에서 본 ‘그의 존재와 인격과 목표’가 나타난다.
10. 기독교 신학 – 분류체계로는 이론신학과 실천신학을 중심하여 다양하게 나누인다. 이 론신학은 다시 성서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등으로 분류되고 실천신학은 목회학, 선교학, 예전학, 종교교육, 종교음악 등으로 나뉘어진다. 그러나 그 어떤 분야이던 18세기 계몽주의 이후의 현대신학은 ‘비평적 연구’(Criticism)와 함께 학문적 다양성의 길을 걸어온다(예: 구약에서의 문서설, 신약에서의 자료설과 편집설로부터 시작하여 예 배, 선교, 음악 등에서 새로운 모습들이 펼치어진다. 더 나아가 D. Crossan과 J. Spong을 중심한 예수세미나에서의 역사적 예수연구 등은 전통적 신학까지도 귀납적 방법을 도입하는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
11. 그러나 다른 한편 기독교 근본주의 Christian Fundamentalism는 이런 현대적이며 비평적 성서연구를 거부하며 그들의 신앙을 ‘근본주의 5대 강령’ 속에 담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 다섯 가지이다. 1) 예수의 동정녀 탄생, 2) 예수의 대속적 죽음, 3) 예수의 육체적 부활, 4) 예수의 육체적 재림, 5) 성서의 축자영감설과 무오설 같은 것들이다. 대부분의 한국교회의 신앙 바탕과 기독교 신학은 이런 근본주의 위에 서있다. 한국교회의 이런 신학적 보수주의는 정치와 경제, 자유와 평등, 전쟁과 평화를 포함하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보수주의적 가치를 선호하게 된다. 문재인 보다는 박근혜, 촟불집회 보다는 태극기 집회를 옹호하고 친미주의적 성향을 드러낸다(이 부분에서 우리는 구미정 등이 지은 ‘교회에서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 이야기’를 읽어 볼 필요가 있다).
12. 여기에서 나타나는 한국 기독교 신학은 ‘교조주의’(Dogmatism)적 성격과 모습이다. 그리고 그런 신학에 기초한 교회는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상식과 합리성을 결여 한 ‘이상한’ 종교집단이 되어버렸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독선적, 배타적인 모습은 거의 종교적 광신집단이 되어가고 있다. 여기에 이어서 필연적으로 파생되는 것이 도덕적 타락이다. 그들은 이를 신비적으로 감싸고 신화적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종교의 기능을 현실 문제에 대한 적극적 참여에서부터 내세적인 피안의 세계로 옮겨가려고 한다.
13. 인문학은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인간들이 남겨놓은 문사철과 시서화를 중심하여 인간 존재의 목적과 바람직한 인간상과 인간 공동체를 추구해 나간다. 여기에서는 당연히 언어, 역사, 문학, 종교, 철학을 포함하여 음악, 미술, 건축 등 거의 모든 인간들의 행위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 방법론은 철저하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리를 바탕으로 한다.
Ⅲ. 인문학적 시각에서 본 기독교의 신학과 교회의 문제점들
오늘의 추천 도서들 중에서 김경집의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과 양명수의 ‘한국 교회–인문주의에서 배운다’라는 두 권의 책을 중심하여 인문학적 입장에서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 신학과 기독교회가 지닌 문제점들을 찾아보기로 한다.
1. 신·구교를 막론하고 한국의 기독교회는 근본주의, 교조주의, 그리고 그에 따른 신학적 배 타성과 무비판적 수용이 제일 큰 문제다.
2. 둘째는 신학, 교회의 행정과 직제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신학자, 목사, 신부를 중심한 성직자 중심주의가 유교적 권위주의와 결합하여 복종의 종교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이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순종이 아니라 소위 성직자라는 집단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신앙심인양 만들어 내게 되었다.
3. 이것은 꼭 기독교에서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특별히 한국의 기독교회는 지나치게 서구 중심적이다. 가톨릭은 로마 중심적이고 개신교는 미국 중심적이다. 이는 서구 제국주의적 기독교회에 대한 자기 성찰의 기회를 잃게 만들었다.
4. 한국기독교의 신학은 성서에 대한 학문적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 성서에 대한 비판적연 구가 전무한 상태이다. 본문비평, 자료비평, 양식비평, 편집비평, 독자중심의 성서읽기 등에 대해서 전혀 훈련이 되어있지 않다.
5. 김경집이 지적하고 있는 몇 가지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예수가 태어난 자리와 그 시대는 어떠했는가? 예수는 가난과 억압의 구조 속에서 태어났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예수가 죽은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지나치게 속죄론적으로 해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사랑과 정의를 위하여 죽으셨다./오병이어의 기적에는 무슨 의미가 담겨있는가? 나눔과 베품, 사랑과 자비가 종교의 힘이다./기도란 진정 무엇인가? 탐욕적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헌신과 섬김의 근본적 동기와 출발점은 어딘가? 당신은 진정으로 구원받고 은혜받은 사람인가?/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8복을 다시 읽어보아라!/이원론적이며 이분법적 접근이 문제다. 예수는 좌파인가? 우파인가? 예수는 진보인가? 보수인가? 신학적 진보주의는 정치적 좌파나 공산주의가 아니다! 이단도 아니고 반교회적이지도 않다. 그들은 성서와 신학에 대한 정직한 접근과 고뇌에 찬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다. 인문학은 말한다. 그 어느 경우에도 한쪽은 다 옳고 다른 한쪽은 다 틀리는 경우란 없다. ‘이 땅이 다시는 좌파가 정권을 잡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지켜주시옵소서’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MB의 기도문 중 한 구절이다.
6. 종교학자 James W. Fowler에 의하면 인간의 종교성, 혹은 신앙은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쳐 성장, 성숙해진다. 첫째는 ‘직관적–투사적 단계’이다. 유아기다. 논리적 사고가 약하고 환상적이고 마법적인 상징들이 지배하는 단계이다. ‘너 엄마 말 잘 안들으면 하나님이 벌 주셔!’ ‘너 아빠 말 잘 들으면 하나님이 너 갖고 싶은 장난감 주실거야’–일반적으로 한국교회 신자들은 이런 유아적 신앙 단계에 있다. 기복적 신앙 단계이다. 둘째는 ‘신화적–문자적 단계’이다. 초등학생 단계이다. 자신의 생각과 상상력에다 모든 것들을 대입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단계이다. 세상은 넓고 다른 사람들의 말과 생각에도 일리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드리지 못한다. 자신의 주장에 집착하고 타인을 무시해 버린다. 개인적 독선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셋째는 ’종합적–인습적 단계’이다. 사춘기 단계이다. 신앙이나 신념을 어떤 영웅적이며 대중적인 흐름에 따라서 만들어가는 단계이다.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른 뛰어난 사람의 말, 행동, 선행, 간증 같은 것들에 휩쓸려서 따라감으로 열심히는 하지만 변하기도 쉽고 오락가락하는 때를 말한다. 넷째는 ‘개별적–반성적 단계’이다. 청년기 혹은 장년 초기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나름대로 자신의 독립적 사고를 시작하는 단계이다. 나의 사고의 틀을 갖추기 시작하고 자신을 비신화화 한다. 그리고 그 틀과 일치되는 사람들이나 공동체를 찾아본다. 그러나 아직은 미숙한 단계이다. 다섯째는 ‘결합적 신앙 단계’이다. 장년기다. 자기 확실성이 분명해지고 자기와 다른 것들을 자신 속에서 통합해 보려고 한다. 포용, 조화, 경청, 개방성을 지향한다.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고 생각과 삶이 너그러워진다. 여기에서의 위험성은 이해와 포용에 대한 교만 혹은 자기만족이다. 마지막 여섯 번째는 ‘보편적 신앙의 단계’이다. 노년의 신앙이다. 유연하다. 모든 것에 대한 애정, 관심, 헌신, 희생을 실천하는 단계이다. Erich Fromm식으로 말하면 소유가 아니라 존재로써 기뻐하는 단계이다(혜민스님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서 기도드릴 때 ‘예수님 부처님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제각기 다른 두 종교의 신앙의 대상을 통합하여 호칭한다. 힌두교나 우파니샤드에서는 ‘네가 무슨 신을 믿어도 다 괜찮다. 그건 결국 다 나를 믿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7. ‘내장은 샤마니즘이고 가슴은 불교이고 머리는 유교이고 겉껍데기는 기독교’라는 말이 있다. 정말 그런가? ‘기독교는 좋지만 교회는 싫다’고 한다. ‘예수는 좋지만 예수쟁이들은 싫다’고도 한다. 이미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전이 아니라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버렸다고 한탄한다. 지나친 말인가? 어떻게 해야 할까? 도저히 지성을 지닌 사람들과 양심과 상식에 따라서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는 집단이 교회라고 한다. 그래서 이제 한국 교회는 급격하게 ‘기독교 이후 시대’로 접어 들어가고 있다. 현재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지극히 습관적 신자들이거나 자기들끼리의 클럽이나 동아리 형태의 사람들이라고 비난 받는다. 한번 ‘가나안 교인’들이 된 사람들을 다시 ‘교회에도 나가는 교인’이 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오늘날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는 교회학교, 중고등부, 청년부 등의 감소 현상은 미래의 한국 교회를 매우 어둡게 만들고 있다.
8. 양명수는 말한다. ‘종교는 인문주의와 함께 가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은 힘과 권력 을 섬기는 종교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물질주의, 출세주의, 성공주의, 그리고 기복주의적 신앙에 빠져든 결정적인 이유는 인문주의적 토양이 약한 데서 온 것이다’ ‘기독교의 목표가 윤리적 삶은 아니지만 윤리적 삶은 기독교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진정한 믿음은 행함으로 들어나게 되고 옳바른 삶은 참된 믿음을 가져 온다’ ‘개별적 종교 중 하나인 기독교가 주장하는 그들의 특수한 진리가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진리에 맞는지 아닌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에 맞추어 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신학, 고민하는 설교가 없이는 절대로 기독교는 세상을 섬기는 참된 종교가 되지 못할 것이다.’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