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초대시

“마지막 원수는 죽음이다” (고린도전서 15:20–2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주님 부활후 마지막 일곱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인간 역사 가운데 가장 깊고도 거대한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인간은 왜 두려워하는가?
왜 사랑하면서도 끝내 불안해하는가?
왜 모든 문명은 화려하게 빛나다가 결국 폐허가 되는가?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인간은 죽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존재입니다.
젊음은 사라지고, 기억은 흐려지고, 사랑하던 사람들은 하나둘 우리 곁을 떠나갑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문화와 철학과 정치와 종교는 어쩌면 하나의 질문을 반복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가?”
오늘 사도 바울은 그 질문 앞에서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린도전서 15:20)
“그러나 이제.”
이 짧은 말 속에는 우주가 뒤집히는 소리가 들어 있습니다.
역전되었다는 겁니다.
뒤집어졌다는 겁니다.
세상은 늘 죽음이 마지막이라고 말했습니다.
제국도 죽었고, 왕도 죽었고, 철학자도 죽었고, 시인도 죽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랑도 결국 무덤 앞에서는 침묵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마치 긴 겨울 끝에
얼어붙은 땅 밑에서 들려오는 아주 작은 봄의 균열처럼 표현합니다.
1. 고린도라는 도시, 욕망의 항구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은 추상적 교리가 아닙니다.
이 편지는 역사적으로 실제 도시, 실제 인간들, 실제 상처 속에서 기록되었습니다.
고린도는 당시
로마 제국의 화려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돈이 흘렀고, 철학이 흘렀고, 욕망이 흘렀습니다.
부유한 자들은 자신의 성공을 자랑했고,
가난한 자들은 그 그림자 속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교회조차 세상의 논리를 닮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는 은사를 자랑했고,
누군가는 자신의 지식을 과시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몸의 부활 같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헬라 철학은 육체를 하찮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영혼만 중요하고 몸은 감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아니다”
하나님은 영혼만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찢긴 몸도,
상처 입은 역사도,
무너진 관계도
다시 살리시는 분이라고 당착게 증거합니다.
그래서 부활은 단순히
“죽어서 천국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선언입니다.
2. 첫 열매의 신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첫 열매”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깊은 유대적 상징이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농부는 추수 전에 가장 먼저 익은 열매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첫 열매는 단순한 일부가 아니라
전체 수확의 약속이었습니다.
첫 열매가 나왔다는 것은
곧 들판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들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한 사람의 기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다시 살리기 시작하셨다는 신호입니다.
봄은 아직 완전히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 설교처럼
기독교 신앙은 “이미와 아직 사이”의 신앙입니다.
이미 부활은 시작되었지만,
아직 죽음은 남아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는 왔지만,
아직 눈물은 흐르고 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는 승리하셨지만,
아직 우리는 병들고 넘어지고 상처받습니다.
신앙은 바로 이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3.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22)“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안에서”입니다.
아담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 주인이 되려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합니다.
아담의 정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중심이다.
다른 사람은 이용 대상이다.
힘이 진리를 결정한다.
공포가 질서를 유지한다.
이것은 생명의 정치가 아니라 죽음의 정치입니다.
어떤 지도자든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통치할 때
바울의 말씀 앞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공포를 조성할 때
사회를 적과 동지로 구분할 때
자신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배제할 때
진실보다 권력 유지를 우선할 때
약한 자들의 눈물을 외면할 때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고린도전서 15:24)
하나님 앞에서 모든 권력은 상대적입니다.
어떤 지도자도 궁극적 주권자가 아닙니다.
역사의 마지막 왕은 인간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십니다.
죽음의 정치는 언제나 같은 언어를 사용합니다.
“두려워하라.”
“적을 제거하라.”
“나만이 너희를 구할 수 있다.”
“질문하지 말고 복종하라.”
그러나 주님은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서로 발을 씻기라.”
한쪽은 죽음의 질서를 세우고,
다른 한쪽은 생명의 공동체를 세웁니다.
인간은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의 탐욕이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한 사람의 폭력이 역사를 피로 물들입니다.
전쟁은 결코 혼자 일어나지 않습니다.
탐욕도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존재입니다.
저는 규법안에 갇힌 목회자입니다…이중성
아담은 단지 한 개인이 아닙니다.
인간 욕망의 상징입니다.
하나님 없이 스스로 신이 되려는 욕망.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망.
끝없이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
그 욕망이 결국 죽음을 낳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음은 단지 숨이 멎는 사건이 아닙니다.
관계가 죽는 것입니다.
사랑이 식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도구로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세계를 보십시오.
기술은 발전했지만 인간은 더 외로워졌습니다.
정보는 넘치는데 진실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연결되었지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죽음의 권세가 여전히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얻으리라.”
예수 안에서 새로운 인간성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4.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은 십자가를 지우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고통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실제로 버림받으셨습니다.
실제로 침묵 속에서 울부짖으셨습니다.
(막15:34)“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절규는 인간 실존의 가장 깊은 심연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죽음을 압니다.
그래서 불안합니다.
우리는 성공을 통해 죽음을 잊으려 하고,
권력을 통해 무력함을 숨기려 하며,
소비를 통해 공허함을 덮으려 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언제나 인간 문명의 뒤편에 그림자처럼 서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은 말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간 고통 속으로 들어오신 사건이고,
부활은 그 고통이 마지막 언어가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로마제국은 힘과 공포로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제국은 결국 한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십자가는 제국의 폭력이었지만,
부활은 하나님의 반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죽음을 이용하여 통치했지만,
나는 생명으로 너희 권세를 무너뜨린다.”
5. 마지막 원수
오늘 본문의 중심은 아마 이 말씀일 것입니다.
(26절)“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죽음이라.”
바울은 죽음을 자연 현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죽음은 원수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하나님 창조의 본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사랑을 파괴합니다.
기억을 끊어냅니다.
어머니의 품에서 자녀를 빼앗고,
연인의 손을 떼어 놓고,
한 시대의 이야기를 침묵시킵니다.
그래서 인간은 늘 슬픕니다.
장례식장에 가보십시오.
사람들은 단지 한 사람의 생물학적 종말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닙니다.
“더 이상 함께 있을 수 없음” 때문에 웁니다.
죽음은 관계의 단절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그 죽음조차 마지막에는 무너질 것이라고.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로마 제국도 죽음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철학도 죽음을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과학도 인간의 근원적 두려움을 완전히 없애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죽음은 마지막 왕이 아니라는 겁니다.
6. 모든 권세를 무너뜨리시는 하나님
본문은 계속 말합니다.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여기서 “권세”는 단순한 정치 체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구조입니다.
탐욕의 권세.
폭력의 권세.
차별의 권세.
절망의 권세.
오늘 세계는 발전했지만 여전히 고통스럽습니다.
사람들은 숫자로 평가되고,
효율로 인간 가치를 판단하며,
돈 없는 사람은 쉽게 버려집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경쟁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서로 짐을 지는 나라입니다.
예수께서는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높은 곳의 권력이 아니라
낮은 곳의 사랑으로 세상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7. 하나님이 만유 안에 계시려 함이라
그리고 마침내 바울은 우주적 결론에 도달합니다.
(28절)“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이것은 단순한 종교 문장이 아닙니다.
이것은 존재 전체의 회복 선언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분열합니다.
나라와 나라가 싸우고,
이념과 이념이 충돌하며,
가족과 가족이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심지어 인간 내면조차 분열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희망하면서도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모든 것을 회복시키십니다.
여기서 바울은 단순히 “개인의 구원”만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정치의 최종 목적은 권력 유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유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즉,
분열 대신 화해입니다
증오 대신 사랑입니다
공포 대신 자유입니다
죽음 대신 생명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정치입니다.
우주적 화해를 말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찢긴 창조의 회복. 눈물 없는 세계.
8. 우리의 삶은 무엇을 향해 가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결국 어디를 향해 가고 있습니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성공입니까?
그 모든 것은 결국 지나갑니다.
그러나 사랑은 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은 단지 미래의 천국 티켓이 아닙니다.
부활 신앙은 지금 여기서
죽음의 방식으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미워하지 않는 것.
포기하지 않는 것.
상처 입은 사람 곁에 머무는 것.
세상이 경쟁하라고 말할 때 함께 울어주는 것.
그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9. 결론 — 이미 시작된 봄
죽음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두렵게 하고,
분열시키고,
권력을 유지하는 모든 체제와 지도자는
결코 최종 승자가 될 수 없습니다.
역사 속 모든 통치자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권력은 지나갑니다.
제국은 무너집니다.
선전은 침묵합니다.
그러나 생명은 남습니다.
사랑은 남습니다.
하나님은 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은 더 이상 왕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그날,
눈물은 닦일 것이며,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며,
하나님께서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은 여전히 겨울 같습니다.
전쟁이 있고,
눈물이 있고,
상실이 있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무너집니다.
기도해도 응답 없는 것 같고,
삶이 끝없는 어둠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이 두 단어가 기독교의 심장입니다.
무덤이 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절망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눈물이 영원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이미 새 창조를 시작하셨다는 첫 신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포기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눈물은 헛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사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공허 속에 흩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원수는 죽음이지만,
마지막 승리는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오늘도
죽음의 정치 한가운데서
죽음의 신학 한가운데서
생명의 정치
생명의 신학
생명의 복음이
조용히 생명의 봄을 피워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