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20)
데이비드 머리 라이얼 목사(1876. 1. 2-1921. 8. 29)
한국명: 나대궐 (羅大闕) 목사, 진주 1909-14; 마산 1914-21
라이얼은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회 해외선교위원회의 의장을 오랫동안 역임한 애들레이드(Adelaide)의 제임스 라이얼 목사(Rev. James Lyall)의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마가레트 화이트크로스 패튼 부인(Mrs. Margaret Whitecross Paton)1의 자매였다. 라이얼은 1907년 호주학생기독교운동(ASCM)의 순회총무로 일하고 있을 때, 처음으로 부산의 호주선교회를 방문하였다.2 1908년 11월 12일 그는 목사안수를 받고 1909년 2월 10일에 디커니스 앨리스 로리머(Deaconess Alice G. Lorimer)와 결혼하였다. 그들은 4월 8일 한국에 도착하여 며칠간 초량의 아담슨 목사 가정에 머물렀고 4월 15일에 진주로 떠났다.
그가 도착했을 때 진주교회는 한 무리의 백정들을 교인으로 받아들인 것이 문제가 되어 분쟁이 생겼고, 다수의 다른 교인들이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있었다. 이 분쟁 시기에 메리 켈리와 넬리 스콜스에게 한 데이비드 라이얼 목사의 조언과 지원을 아주 중요했다. 그는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한국과 진주교회, 그 주변 지역에 대해 가능한 많은 것을 공부했다.
이듬해 그는 남해의 교회들을 방문했고 향후 10년 동안 그 교회들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11년 라이얼은 남해, 하동, 곤양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보살피는 책임을 맡았고 건축을 포함하여 진주 선교지부에 관한 일반적인 역할을 나누었다.
라이얼은 팀 사역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감사하고, 칭찬하며, 격려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열심히 일하는 일꾼이었고 신뢰를 받는 조직가였으며 전략가였다. 그는 현명하지 않다고 판단한 제안들에 대해 반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진취적이었고 에든버러 대회에서 발표된 선교 정책들에 대해 헌신하는 에큐메니칼적 인물이었다. 라이얼은 해외선교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한국에 학생기독교운동을 발전시키는데 노력했다.
1911-12년에 교회는 빠르게 성장했고 라이얼은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예비자문답을 허락했다. 그는 1911년 후반에 남해 지역을 한번 방문해서 111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러나 하동과 곤양지역의 교회들은 특별히 읍내 교회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14년 초, 라이얼은 건강악화로 사임한 아담슨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마산으로 이전했다. 라이얼은 마산 지역의 교회들, 마산교회와 창신학교를 감독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는 동료 선교사들과 교회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다. 창신학교는 라이얼과 학교 발전을 위해 애쓴 그의 공헌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라이얼 기념학교(the D M Lyall Memorial School)라고 명명되었다. 1915년 초 엥겔이 휴가를 떠났을 때 그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7주간을 가르쳤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그는 1916년 중반에 휴가를 받아, 해외선교위원회의 허락을 받은 후,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에 있는 군사기지에서 YMCA 현장봉사 활동을 했다. 1917년 6월 그는 호주로 돌아와서도 계속하여 3개월 동안 YMCA를 위해 일하면서 그 사역의 영적인 측면을 교회에 알렸다. 안타깝게도 그는 건강이 나빠서 그 과제를 완수하지 못하고, 짧은 휴식을 취한 후, 1918년 1월 부인과 함께 마산으로 돌아왔다.
그후 라이얼은 3년간 더 마산에서 일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호주로 돌아갔고 1921년 8월 29일에 사망했다. 데이비드 라이얼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충실하며 지혜로운 에큐메니칼 지도자였다. 그는 이어지는 여러 해 동안 깊은 사랑을 받았고 심한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