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90)
리타 스튜아트 부인(1915. 7. 13)
한국명 문의덕 선생, 마산 1955-59; 부산 1960-68
리타는 푸츠크레이(Footscray)에서 태어나 빅토리아 시골에서 자랐고, 로체스터(Rochester)와 에쿠카(Echuca)에서 학교를 다녔고, 그 후에 멜번 대학에서 학사(BA)와 교육학 디플로마를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시골 고등학교에서 4년 동안 가르친 후에 롤런드 하우스에 들어가서 디커니스 훈련을 마치고 신학사(BD) 학위를 받았다. 그녀는 1952년 3월 디커니스로 임명되었고 벤디고의 세인트 앤드류 교회에서 1952-4년에 디커니스로 섬겼다.
그곳에서 문로는 한국을 섬기기 위해 지원했고 선교사로 승인되어 1955년 4월 15일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서울에서 한국어를 공부한 후에 그녀는 마산에 임명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시골 교회들의 여성지도자들을 위한 여러 사경회에서 가르쳤다.
1957년 4월 1일에 리타는 알란 스튜아트 목사와 결혼하기 위해 호주로 돌아왔다. 그들은 1957년 7월 27일에 벤디고, 세인트 앤드류 장로교회에서 결혼을 했다. 그들은 1957년 12월 7일에 한국에 도착했다.
그 후 2년 동안 비록 알란은 그의 시간의 대부분을 서울과 부산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보냈지만, 그들은 마산지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 당시 리타는 마산에서 일하면서, 특별히 마산 감옥에서 여성 죄수들을 방문하는 베스 던을 보조했다.
1960년 선교회는 알란과 리타를 부산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알란은 그곳에서 부산성경학교와 신학교에서 가르치며 경남노회/부산노회 지도자들과 함께 가깝게 일할 수 있었다. 그들의 장남 크리스토퍼 존(Christopher John)은 1959년 5월 16일에 태어났고 둘째 아들 그램 로버트(Graeme Robert)는 1961년 6월 22일에 태어났다.
부산에서 병원에 가까이 있는 리타와 알란의 집 대문은 시골 목사들과 또한 특별히 회의, 여행, 건강 체크를 위해 부산을 방문하는 다른 센터의 선교사들에게 항상 열려있었다. 리타의 친절은 그녀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은총을 반영하고 있었다.
비록 선교부는 선교사들의 부인들에게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요구하지 않았지만, 많은 부인들은 자발적으로 일을 했다. 리타는 한동안 선교회의 회계 일을 보았다. 신학적으로 성서적으로 소양이 있었던 리타는 선교회에서 정책토론이 늘 지혜와 은혜와 관계가 되도록 했다. 그러나 특별히 자녀들이 도착한 이후, 리타는 가정교육에 집중했고, 후에는 빅토리아 교육제도의 통신 부서를 통해 자녀 교육에 전념했다.
1968년 호주로 귀국한 후 리타는 “펀사이드”(Fernside)에 묵는 휴가 중인 선교사들에게 안주인 역할을 계속했다. 한편 알란은 호주 남부의 장로교선교부의 지역임원(Area Officer)이되었다. 1977년 스튜아트 가족은 링우드 이스트(Ringwood East)로 이사해서 알란은 6년간 목회를 했고, 다음은 왕가라타(Wangaratta)에서 목회했다. 지금 그들은 가족들 근처 뉴캐슬(Newcastle)에서 활동적인 은퇴생활을 하고 있다. 리타의 활동은 시력 약화로 인해 다소 제한을 받고 있다.
정병준 교수
(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