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샤먼과 대만 타이페이 & 한국 백제유적 방문기 (6)
필자는 지난 2025년 10월 15~31일 사이에 중국 샤먼 (Xiamen, 厦門 하문)과 대만 타이페이 (Taipei, 臺北 대북) 그리고 한국방문 일정으로 여행했다. 이중 중국 샤먼시와 대만 타이베이 방문중 인상깊었던 부분과 한국에서 방문한 백제유적 (공주, 부여)에 대해 몇 편 기록하고자 한다. _ 편집자 주.

한국 백제유적 (공주편) 방문
중국과 대만 방문 후 한국에 도착해 2025년 10월 24일과 25일에는 백제 유적지를 찾았다.
공주와 부여를 중심으로 백제유적지를 방문하고자 여러 번 계획했으나 잘 성사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기회가 온 것이다.
오랫동안 바랬던 것을 반백 여년만에 이룬 것이다.
이번 백제유적 방문에는 공주 (공주산성, 무령왕릉과 공주 왕릉원, 공주박물관)와 부여 (정림사지 오층 석탑, 백제문화단지, 부여박물관)를 중심으로 일정을 잡았다.
무엇보다 부여박물관에 소장중인 금동대향로를 보는 것이 마음에 컸다.

첫 일정, 공주산성 (공산성) 둘러보기
10월 24일, 복잡한 시간을 피해 백제 유적 방문 일정을 나섰다. 숙소가 있는 경기도에서 공주까지는 자가용으로 3시간 정도 소요됐다. 보통 2시간 거리인데 중간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점심도 하니 시간은 더 소요됐다.
백제유적 첫 행선지는 공주산성 (공산성)이다. 공주 공산성 (公州 公山城)은 사적 제12호로, 대한민국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에 소재하고 있는 성이다. 해발고도는 110m이다.
삼국시대의 성곽으로, 백제의 문주왕 원년 (475) 한성에서 웅진으로 이주한 후 성왕 16년 (538년)에 사비로 옮길 때까지 도성이었으며 그 후 신라·고려·조선 시대에도 행정과 군사적 요충지였다. 백제시대 토성 735m, 신라시대 석성 1925m, 총둘레 2,660m의 포곡형 산성이다.
산성의 북쪽에는 금강이 흐르고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하는 천연의 요새로서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성곽의 길이는 2,660m이며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포곡형으로 원래 백제 시대에는 토성이었으나 조선 시대 대부분 석성으로 개축되었다고 하다.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WHC)에서 백제역사유적지구 총 8개의 유적지 (공주 2곳 <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부여 4곳 <관북리 유적 및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나성>, 익산 2곳 <왕궁리 유적, 미륵사지>)가 세계 유산 등재 심사를 최종 통과했다. 이번 세계 유산 등재는 충청권에서는 최초로 선정되었다.
공산성은 강 건너 북쪽에서 보면 마치 한자의 귀인 공자와 같다 하여 공산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하지만 이는 후에 지명이 한자로 변한 다음에 생긴 이야기로 생각된다. 원래는 공주의 옛 명칭이 웅진 (熊津)이어서, 곰나루 (고마나루)였던 것처럼, 공산도 원래는 곰산이었다. 공주도 이런식으로 해석해보면 곰의 고을이라는 뜻이 된다.

임진왜란 당시 공주성의 영은사에서 승병들을 훈련시켰다.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인조는 공주로 파천을 하였다. 인조는 한양에 입성하여 경복궁 옛터에서 선조의 열 번째 아들 흥안군 제 (興安君 瑅)를 왕으로 세웠다. 공산성 내의 가장 높은 곳에서 있는 쌍수정에 머물러 금강 건너편을 바라보며 반란 진압 소식을 기다렸다. 인조는 7일 동안 공주에서 머물렀다.
공산성 입구에는 일명 ‘금서루 입구 비석군’이 있다. 공주와 관련된 인물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들이다. 공주시 곳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송덕비와 제민천교영세비 등 47기가 있다. 대다수는 인물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을 새긴 송덕비인데, 여기에는 “영세불망비. 청간선정비, 거사비, 만세불망비, 유애불망비, 청덕선정비” 등의 글이 새겨져 있다. 우의정, 도순찰사, 관찰사, 암행어사, 목사, 판관, 군수, 우영장, 중군 등 주로 충청감영과 공주목 관에 배치되었던 관리의 송덕비가 많다.
공산성안에는 백제시대 추정 왕궁지와 연못 2개소가 발굴조사 되었으며, 임류각·추정왕궁지·연지·쌍수정·쌍수정사적비·명국삼장비·광복루·진남루·동문루·금서루·영은사·광북루·만하루 등 수많은 신라, 고려, 조선 유적이 남아 있다.
공산성을 둘러보다 보니 금방 어둑해지고 해가졌다. 공산성 아래 찻집을 찾아 잠시 티타임 후 다음날 일정을 정리하고 공주의 야경을 둘러보았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전날 느슨한 일정으로 오늘 하루 공주와 부여를 둘러보는 무리한 일정을 잡았다. 숙소에서 조식 후 공주 왕릉원을 향했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대한민국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동에 위치한 백제의 왕릉들로 추정되는 고분들로 현재 1, 2, 3, 4, 5, 6, 7호 분이 복원이 되어 있다. 이 중 7호분은 무령왕릉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공주 송산리 1호분 (公州 宋山里 一號墳)은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송산리에 있는, 백제 중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석실분이다. 1~4호분은 무령왕릉에서 약 1km 떨어진 독립된 구릉 위에 위치하며, 서로 인접하게 열지어 배치되어 있다. 특히 1호분과 2호분은 구조와 규모 면에서 중심성이 뚜렷하다. 남쪽으로 면한 구릉의 사면 (斜面)을 파고, 직사각형 묘실을 활석으로 쌓고 벽면에 회칠을 했는데 천장은 안으로 좁혀든 (內傾) 네 벽 위에 얹은 한 개의 돌로 이루어졌고, 배수구 (排水構)가 연문에서 시작하여 연도의 중앙을 지나 밖으로 뽑아지고 있다.
일제강점기 공주 고등보통학교 교사였던 가루베지온이 1927년 3월에 처음 확인한 것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보고했고, 같은 해 10월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당시 동서방향으로 5기의 고분이 자리하고 있었다. 현재는 4기만 복원되어 있다.
벽돌로 쌓은 묘실은 가로 세로의 크기가 거의 같은 정사각형의 형태이며, 남벽의 우측에 묘실로 들어가는 통로인 널길이 달려있다. 벽면과 천장에는 백회를 발랐으며, 바닥에는 자갈을 깔았다. 조사 당시에 금제와 은제, 그리고 금동제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6호분은 무령왕릉과 함께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무덤으로 굴식 벽돌무덤이다. 무덤의 내부에는 벽화가 있다. 공주고보 (현재의 공주고) 한문교사로 재직한 일본인 가루베 지온 (輕部慈恩)이 무단도굴하였다.
6호분은 일제 강점기였던 1932년에 처음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이후 1971년 무령왕릉 발굴과 함께 비교 연구의 중심 대상이 되었다. 초창기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고분으로 분류되었으나, 구조적 안정성과 기술적 완성도로 인해 왕실 관련 인물의 묘일 가능성이 제기되어 왔다. 최근에는 6호분이 무령왕의 가족 구성원, 특히 순타태자의 묘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7호분, 무령왕릉 (武寧王陵)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 가운데 7번째로 발견된 고분으로, 백제 무령왕과 그 왕비의 능이다. 1971년 7월 7일 처음 발굴되었다. 지석이 발견되어 축조연대를 분명히 제시해주었기 때문에 삼국 시대 고고학 편년연구의 기준 자료가 되고 있으며, 국보로 지정된 금제관식, 금제뒤꽂이, 금제 심엽형이식 (귀걸이), 지석, 석수, 청동신수경 등을 포함하여 총 2900여 점의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국립공주박물관이 대부분 보관하고 있다. 무령왕릉을 포함한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사적 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치는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옛지명 : 송산리)이다. 1990년대 초기까지만 일반 방문객들은 모여서 요청하면 관리자가 동행하여 고분 안의 유리벽으로 막힌 석실 바로 앞에 고분의 벽돌 바닥면을 밟으며 유적 관람이 가능하였다.

무령왕릉 발굴
1971년 7월 5일 송산리 5, 6호분의 배수로 공사중 우연히 벽돌무덤 1기가 발견되었다. 무덤입구는 벽돌과 백회로 빈틈없이 밀봉되어 있었고,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은 상태였다.
7월 7일 무덤의 아치형 입구를 발견하였다. 호우가 내리기 시작하였으므로 자정까지 배수로를 팠다.
7월 8일 날이 밝자 발굴을 다시 시작하여 오후 3시경 입구를 막는 벽돌의 바닥까지 발굴을 하였다. 위령제를 지낸 후 4시경에 입구를 막는 벽돌 하나를 들어내자 하얀 연기가 나왔다. 계속해서 벽돌을 들어내자 널길의 중앙에서 돌짐승을 발견하였다.
무덤의 입구를 열었을 때 왕과 왕비의 지석 2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지석에는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이라는 명문과 함께 백제 무령왕과 왕비가 돌아가셔서 이곳 대묘에 안장했다는 내용이 수려한 남조풍 (南朝風) 해서체로 새겨져 있었다. 1442년 만에 무령왕과 왕비의 실존이 밝혀졌다. 이후 발굴팀은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에게 왕릉의 발굴을 발표하였다. 이후 혼란 속에서 밤을 세워 유물을 수습하였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08종 2,906점이다. 연도에는 왕과 왕비의 지석(誌石) 2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으며 그 위에 오수전 한 꾸러미가 얹혀 있었다. 지석 뒤에는 돌로 만든 짐승 (石獸: 석수) 모양이 남쪽을 향해 서 있었다.

묘실의 관을 올려 놓은 대위에는 왕과 왕비의 관을 만들었던 나무 조각이 가득 놓여 있었다. 목관의 판재들 밑에서는 왕과 왕비가 착용하였던 장신구와 몇 점의 부장유물이 출토되었다.
중요 장신구류로는 금제관식, 금제이식, 금은제 허리띠, 금동장신발, 은제팔지 등이 있고 왕의 허리에서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용봉문대도가 출토되었다.
그 밖에 왕과 왕비의 베개 및 발받침가 목관 안에 놓여 있었고 그 외에 중요 부장품으로는 청동거울 3면과 은제탁잔 등이 출토되었다
공예품으로는 각종 금은 장신구가 태반이고 다음에 청동제품, 이기류 (利器類), 도자기, 목제품의 순으로서 지금까지 자료가 빈약했던 백제 금속공예의 면모를 뚜렷하게 밝힌다. 금제투작 초화문관식은 백제 왕관의 독자적인 양식이라 할 온화하고 우아한 특성을 보이는 대표적인 장신구로 손꼽힌다.
그 외의 장신구로는, 아홉 마디의 금목걸이, 금팔찌, 은팔찌, 금귀고리, 금제 뒤꽂이, 거울 (銅鏡), 금두식곡옥 (金頭飾曲玉) 등이 뛰어난 세공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가운데 곡옥은 백제에서는 처음 나타난 신례 (新例)로서 정교한 세공을 보이며, 금제 뒤꽂이는 연화문 또는 타출보상당초문 (打出寶相唐草紋)이 섬세하게 전개되고 있다. 또한 주목되는 것은 용 (龍)의 양각과 음각 명문 (陰刻銘文)이 있는 은제 팔찌이다.
벌집 모양의 금박선 (金箔線) 안에 각종 무늬 (飛天·鳳凰·蓮花紋)를 그린 왕비의 베개 (頭杭)와 베갯머리에 꽂은 한 쌍의 봉황두(鳳凰頭) 역시 희귀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봉황두의 머리는 흑 (黑) · 주 (朱) 칠을 한 위에 금박을 입혀 거의 원형을 잃지 않고 있으며, 크기는 높이 10센티미터밖에 안 되지만 정교하게 깎아 만든 솜씨가 뛰어나다.
무령왕릉에서는 무령왕의 유해로 추정되는 뼛조각도 발견됐지만 상태가 좋지 않아 사료 측정 불가를 받았다.
무령왕릉에 매장된 무령왕이 일본에서 출생하고 일본과 긴밀한 관계였기에, 무령왕릉은 발굴부터 지금까지 일본 측의 높은 관심을 받았다. 특히 아키히토 천황이 2001년 회견에서 자신의 선조인 간무 천황의 어머니 다카노노 니가사 (高野新笠)가 백제 무령왕의 10대손이라는 《속일본기》의 내용을 인용한 이후, 일본 천황가에서 무령왕과 무령왕릉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2004년에는 일본의 구황족인 아사카 도모히코가 대한민국을 방문해 무령왕릉을 참배한 후, 제사를 지내고 천황가의 제사용품을 충청남도 공주시에 기증하였다.

공주박물관
무령왕릉과 공주 왕릉원 방문 후 공주박물관으로 향했다. 직선거리로 약 500미터로 짧은 거리지만 차로 이동해 박물관 주차장에 주차하고 근처 한옥마을을 둘러본 후 박물관에 입장했다. 공주박물관은 2004년 현재의 웅진동 박물관으로 신축하여 개관했다고 한다. 무료입장이지만 박물관 시설은 참 깨끗하고 유물들은 시대와 종류별로 잘 전시되어 있었다.
백제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1934년에 만들어진 공주고적보존회를 모태로 출범하였다고 한다. 1940년 조선총독부박물관 공주분관으로 개관하였고, 해방 후 1946년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을 거쳐 1975년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2004년 현재의 박물관으로 신축하여 개관하였다. 입장료는 따로 받지 않으며 무료 관람이라도 관람질서 유지 및 이용객 안전 등을 위해 ‘무료 관람권’을 발행한다. 따라서 표 받는 곳에서 무료 관람권을 발급받아 입장해야 한다. 단, 기획전시는 경우에 따라 유료일 수 있다.
공주박물관에서는 왕릉원에서 출토된 진묘수와 금제관식 등 국보급 진품 유물들을 관람할 수 있었다.
주요 소장품으로는 무령왕릉 출토유물들, 공주 송산리 고분군출토유물들, 공산성 출토유물들, 정지산 유적 출토품들, 石槽 (돌을 깎아서 물을 담아 쓰도록 만든 큰 그릇) 2기, 석조여래입상 석탑 등이 있다.
공주에서 공주산성, 무령왕릉과 공주 왕릉원, 공주박물관 등을 방문후 부여로 향했다. 부여에서는 정림사지 오층 석탑, 백제문화단지, 부여박물관 등을 방문한다. 특히 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금동대향로를 본다는 생각에 마음이 많이 설랬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임운규 목사
호주성산공동체교회 시무, 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