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무 목사의 주일묵상
무너진 성소 타락한 목자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종교가 외면받는 현실은 단순한 종교 인구 감소라는 통계적 수치를 넘어선다. 시민들이 신을 등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영혼의 안식처여야 할 종교가 본연의 가치를 상실하고 탐욕의 사슬로 전락한 것에 대한 처절한 심판이다.
종교의 타락은 한 개인의 타락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의 도덕적 보루를 무너뜨리고, 나아가 국가의 정신적 근간을 뒤흔드는 국가적 재앙의 전조이다. 종교가 비판받는 핵심은 신성함을 상품화하는 종교 사기꾼들의 존재다.
이들은 신도들의 순수한 신앙심과 불안을 먹잇감 삼아 거대한 자본의 성을 쌓는다. 헌금과 시주라는 명목하에 모인 자금이 공익이나 돌봄이 아닌 교주의 사욕과 세습, 호화로운 생활을 위해 유용되는 순간에 종교는 이미 영성을 잃은 이익 집단에 불과해진다.
맹목적 복종의 강요는 비판적 사고를 마비시키고, 신적 권위를 앞세워 신도를 가스라이팅하는 행위는 영적 학대다. 권력과의 유착 또한 정치권력과 결탁해 이권을 챙기거나, 특정 진영 논리를 신의 뜻으로 포장해 사회 갈등을 부추기는 행태는 종교의 사회적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다.
종교는 사회의 마지막 양심의 보루여야 한다. 하지만 종교가 부패하면 사회의 도덕적 기준점 자체가 실종된다. 성공과 축복을 오직 물질적 풍요로만 정의하는 기복신앙은 우리 사회의 황금만능주의를 심화시킨다.
진리와 공의를 가르쳐야 할 종교가 당연히 감당할 책무를 외면할 때, 국가 공동체의 결속력은 처참히 파괴되기 시작한다. 합리적 비판을 마귀의 속삭임으로 치부하는 반지성주의는 사회 전반의 소통을 가로막고 갈등을 고착화시킨다.
결국 영적 지도자들이 부패한 사회는 국민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이는 곧 국가 경쟁력의 약화와 사회적 안전망의 붕괴로 치닫게 된다. 역사가 증명하였듯, 종교가 극도로 부패했던 시대에 그 문명은 예외 없이 멸망의 길을 걸었다.
우리는 종교 사기꾼들을 직시해야 한다. 그들이 쌓아 올린 바벨탑은 신의 은총이 아니라 대중의 눈물과 탐욕으로 세워진 것이다. 신은 죽었다고 일갈한 니체의 외침은 이제 종교가 죽었다는 대중의 냉소로 바뀌었다. 더 이상의 기만은 통하지 않는다.
따라서 종교는 투명성 확보를 재고해야 한다. 모든 회계와 행정은 법과 상식의 테두리 안에서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화려한 성전이 아니고, 고통받는 이웃의 곁으로 돌아가야 하고, 권력자의 줄이 아니라 평민들의 손을 잡아야 한다.
종교의 타락은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정신적 암세포다. 내부 썩은 환부를 스스로 도려내지 못한다면 사회적 외면과 법적 단죄라는 필연적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깨어있는 시민과 신도들은 더 이상 이 거대한 사기극의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온갖 부조리를 고발하고, 참된 가치를 복원하라는 요구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국가의 운명은 국민의 정신에 달려 있다. 그 정신을 맑게 유지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종교인들이여, 당신들이 팔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니면 탐욕의 배설물인가. 이제는 모두 정신을 차리고 규모가 크고 작고를 떠나 참과 거짓을 구분하여, 자기 설 자리를 바르게 할 때다.
율법의 끝에서 시작되는 자유
손에 잡히는 규칙, 눈에 보이는 기준
사람은 늘 무엇인가를 붙들려 한다.
스스로 증명하려는 보이지 않는 저울 위에
자신을 올려놓고 하루를 살려 한다.
그러나 복음은 그 손을 놓는 순간에 비로소 생명이 시작된다.
판단의 세계는 냉정하다.
옳고 그름이 칼날처럼 나누고, 서로를 재고, 스스로 재단한다.
너는 충분한가라는 질문은 끝내 답을 허락하지 않으나
그때 한 음성은 그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소리를 울린다.
그러나 기준은 이미 끝났으니,
사람이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한 분이 완성하심으로,
우리가 붙들던 질서는
더 이상 우리를 붙들 수 없게 되었고
정죄의 언어는 십자가 앞에서 침묵하게 되었다.
율법은 그림자였으니, 다가올 빛을 예고하던 희미한 윤곽
절기와 안식일, 모든 규례는 방향을 가리켰을 뿐
그리고 어느 날, 빛이 스스로 걸어 들어왔기에
그림자는 그 순간, 사라진 게 아니라 완성을 이루게 되었도다.
완전함을 요구하던 법, 한 조각의 실패도 허락하지 않던 기준
인간은 늘 경계선 위에 서 있다.
넘어지면 끝나는 세계 속에서,
한 사람이 그 경계선을 넘어섰다.
완전한 순종으로 그리고 완전한 희생으로 모든 벽을 허물었다.
골고다의 십자가는 더 이상 요구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값은 이미 치러졌고, 정죄는 이미 소멸되었기에
하늘은 더 이상 우리에게 빚을 들춰내지 않는다.
그날 이후 율법은 말할 자격을 잃고 복음을 펼치는 힘이 되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전환이기에,
묶여 있던 관계가 끊어지고
새로운 숨이 시작되는 지점,
우리는 더 이상 외부의 명령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내면에서 살아나는 생명, 그것이 우리를 이끈다.
율법은 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복음은 살게 한다고 속삭인다.
억지로 걷던 길이 아닌 자연히 흘러가는 생명의 방향,
의무에서 존재로, 명령에서 생명으로, 존재의 축이 바뀌었다.
그래서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흩어지는 삶이 아니라 새롭게 중심을 얻는 일,
죄가 두려워서 떠나는 게 아니라
그 아래 살 수 없기에 떠나며
본질이 바뀌었기에, 새 하늘 새 땅에서 구원을 누려야 한다.
율법은 여전한 거울로,
우리를 비추고 우리의 한계를 들춰낸다.
그러나 다닐 길일 뿐 구원의 문은 아니다.
우린 거울 앞에서 구원의 한 분을 찾아야 하고 찾게 된다.
율법의 끝, 그 경계선 위에서 우리는 한 존재를 만난다.
완성이신 분, 시작이신 분, 끝내시는 그 분.
이제 우리는 뭘 지키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사람답게 살아갈 자존의 자유인으로,
되돌려지지 않는 은혜 안에서 영원까지 자유의 날을 산다.

한상무 목사
(시드니생명나눔교회, smhan21@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