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원주민선교의 이해와 한인교회의 역할(3)
II. 호주원주민 역사와 선교적 상황 그리고 사회적 문제점
2. 호주 원주민선교의 시대적 상황과 선교방법의 문제점
호주 최초 원주민선교 사역을 전개한 리차드 존슨(Richard Jonson)목사는 1788년 영국 식민지 통치가 공식적으로 진행되던 1786년 뉴사우스웨일즈 교도소 종교책임자로 임명되어 호주에 처음 도착하게 되었으며, 이후 후임으로 임염된 사무엘 마스던(Samual Marsden) 목사가 뒤를 이어 1794년 도착하였다. 도착 당시 원주민 대량학살에 따른 유혈사태와 폭력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던 이들은 원주민 부족 파괴와 강도, 강간, 그리고 잔혹한 학대 현장을 기록한 자료를 많이 남겼다. 그러나 이후 도착한 대다수의 영국계 백인 선교사들은 대영제국의 이익을 대변하고 영국 식민지정부 정책을 옹호하는 경향이 높았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850년까지 호주에서 활동했던 총 16명의 선교사 중 8명이 독일 출신인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독일의 개신교 선교단체는 1830년부터 1880년대까지 독일왕실의 독립 전까지 영국과 네델란드 식민지역을 관할하던 선교단체를 통해 간접적인 선교사 파송을 지원하였다. 이들은 1820년대 초반 시작된 원주민 보호정책과 기독교 개종교육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당시 총 16개의 원주민학교 중 7개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1830년대 호주에 파송된 성공회와 1840년대 가톨릭 출신 선교사들은 기존의 독일선교사들의 선교방식에 대한 신학적 대립과 논쟁이 불가피 해지면서 그 선교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에 속했던 복음주의 선교단체인 바젤선교회(Basel Mission Society)에서 훈련받아 1831년 호주에 도착한 죤 핸딧(Johann Handt) 목사는 당시 이교도로 규정되었던 원주민과 초기 유럽계 이주민을 구분하여 선교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보호구역에 수용된 원주민에 대한 지나친 보호정책에 대한 방법적인 부분에 수많은 이의가 제기되고 있던 실정이었다. 교도소 원주민 어린이들을 돌봐왔던 리차드 목사와 사무엘 목사는 금식과 참회를 통해 원주민 선교방법에 대한 경건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였지만, 웨슬리선교회(Wesleyan Mission Society)에서 1821년 파송한 윌리암 월커(William Walker) 목사는 이들의 주장과 선교방법에 많은 부분 이견을 같이하지 못한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특히 수적으로도 턱없이 열세를 보였던 선교사들은 원주민 피해를 최소화하고 그들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 식민정부의 시설과 건물을 임대해 원주민 수용을 증대했으며, 식량, 의류, 생활용품 제공과 기독교 개종, 개화교육을 시실하면서 다양한 원주민 종족의 야외 집단 활동을 극도로 제한시켰다.
대다수 유럽사회에서 낮은 사회적 신분에 포함되었던 선교사들에 대한 낮은 신뢰성은 영국의 호주대륙 정복과 식민지 건설을 지지했던 많은 영국인들에게 큰 방해요인으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철저히 무장한 영국군인과 원주민 부족 간 대치상황에 놓인 분쟁지역에서 원주민 보호목적을 위해 각종 구호물자를 지원했던 선교사들은 백인이주자들에게 있어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는 부정적 이미지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선교사들의 원주민 보호구역 설치 요청이 영국 식민정부의 승인을 얻어 정부에서 운영하는 ‘원주민 보호구역’(Aborigines Protection Boards)이 설치되었다. 소수의 선교사들에게 있어 피해 원주민을 효율적으로 관리 감독할 수 있었던 보호구역 설치는 원주민 종족을 보호할 수 있는 그나마 적절한 해결책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원주민 보호라는 명목 하에 백호주의가 폐기되던 1970년대 초반까지 장기 강제수용 조치를 단행한 호주정부의 원주민들에 대한 부당한 인권침해와 주권제한에 대한 문제가 크게 제기되면서 그 책임을 상당부분 교회가 감수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원주민 보호구역 설치와 구제 사업은 호주사회를 개건하기 위해 영국으로부터 경제적 정치적 재정적 지원을 받았던 식민지정부 선교사들에게 있어 원주민을 보호하고 섬기며 정의와 평화를 옹호하는 가시적 효과를 거두었다. 반면 원주민 보호수용소 안에 십자가를 걸어놓고 더 많은 시설 확충과 더 많은 구제, 교육 사업을 운영하기 위해 영국 식민지정부와 타협하고 물질로 세속화 되어버린 ‘교회예배 현장의 타락’을 지적할 수 있다. 호주 원주민 영토를 수탈하는 과정에서 원주민 부족을 대상으로 활동했던 선교사들의 설득이 주요했다는 주장은 아직까지 분쟁 중인 원주민 영토권회복에 있어 기독교선교에 대한 배신감과 불신을 씻어내지 못하는 큰 장애요소로 보인다.
원주민과 유사한 경험이 있는 한국의 잃어버린 36년으로 규정되고 있는 일제강점기를 통해 한민족의 정체성, 언어, 문화, 민족의 기상과 얼이 일제에 의해 상당부분 훼손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1900년대 중반 이후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기독교학교 교과서에서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국토와 역사를 수호하기 위해 애국심을 강조하였다. 이에 비해 약 150여년 가까이 지속되어온 가혹한 식민시대 통치역사 속에서 호주기독교학교에서는 원주민을 개종하는 과정 중 유럽 백인사회의 역사와 사상, 풍속, 습관을 교육시킨 결과로 원주민 정체성과 정신이 무참히 사라져 버린 아픔이 더 크다 할 수 있다. 더욱이 영국 백인 정복자들이 자행했던 원주민 대량살상, 인권침해, 영토강탈 등을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로 그들은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정복한 땅과 주민을 마음대로 처리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원주민 여자와 자녀들을 잡아 노예로 삼고 갖은 해악을 저지른 일 뿐만 아니라 강제개종 과정에서 자행했던 폭력과 학살 역시 하나님의 이름으로 미개한 원주민 이교도를 정죄해도 된다는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명분을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1900년대 중반 더욱 강화된 원주민 개화정책은 강제로 빼앗은 원주민 아이들이 그들의 부모 품으로 영원히 돌아갈 수 없게 만들었으며, 비단 정부와 선교단체가 운영하는 보호수용소와 고아원에서 자란 원주민아동의 신체적ㆍ정신적ㆍ성적 폭력이 자행되었다. 이러한 잃어버린 세대는 그 동안 선조들에 의해 전해 내려오던 원주민사회의 전통 풍습, 정체성, 언어, 문화를 강제로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초기 영국 식민지정부의 힘을 입어 정복과 약탈을 가능케 했던 잘못된 흔적을 지우기 위한 백인 호주교회의 모습에는 아직까지 커다란 변화가 없어 보인다. 호주사회 원주민의 급격한 인구성장과 심각한 사회적 문제는 전 지구적 선교를 향해 달려가는 호주교회에 심각한 부담을 안겨 주면서 그 발목을 제대로 붙잡고 있는 실정이다. 호주 원주민 복음화와 원주민선교 정책에 관한 한 명백한 가해자로 지목되는 백인들의 호주 원주민에 대한 복음전파는 매우 힘들고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더욱이 백인 선교사들은 정책적으로 원주민을 영적인 지도자로 훈련하고 양육하지 않았으며, 아직까지 원주민교회 중 자립하는 교회는 소수에 불과한 실정이다.<다음호에 계속>
강재원 박사(뉴사우스웨일즈대학교 / 사회과학·정책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