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신학
왜 신앙과 신학은 인문학적 이해가 필요한가?
나는 정신으로서, 사랑으로서, 만물의 근원으로서 이해되는 신을 믿는다.
나는 신이 내속에 있으며, 또 내가 신속에 있음을 믿는다.
나는 또 인간의 참된 행복은 신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에 있으며
신의 의지라는 것은 인간이 서로 사랑하고
남을 자기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 톨스토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Friedrich Nietzsche)
한국 기독교 사회와 교계안에는 암묵적으로 ‘인간적’이라는 말을 터부시 해왔다. 그래서 목회자들의 설교나 가르침에서 ‘인간적’이라는 단어는 금기시 되어 왔고, ‘인간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왠지 신앙이 없어 보이거나, 세속적으로 비쳐 지는 것 같이 이해되어져 왔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삶에 있어서도 성도들 앞에서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성도들 또한 목회자들의 인간적인 면들을 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오히려 목회자들 에게 어떤 신적인 모습을 기대하기 까지 한다. 심지어 문학이나 예술, 영화, 소설 등을 설교에 인용하면 많은 경우 성도들은 그러한 설교는 ‘인간적인 설교’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심하게는 다른 종교의 경전을 인용하여 결론을 맺으면 그 설교는 ‘인간적’을 넘어 ‘이단적’이라고 까지 비판 된다. 이와 같이 한국 기독교와 교회안에 ‘인간성’, 혹은 ‘인간적인 말’을 극도로 터부시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필자가 꼽는 주된 이유로는 ‘바른 신앙’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의 부족으로 여겨진다. 과연 기독교신앙은 ‘신 중심’일까? ‘인간 중심’일까? 여기에 대한 결론은 차차 풀기로 하고 ‘신 중심’이라는 말의 논리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신 중심, 하나님 중심?
우리는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에게서 곧잘 ‘하나님 중심’ ‘하나님 뜻대로’라는 말들을 자주 듣는다. ‘하나님 중심’ ‘하나님 뜻대로’라는 말에는 자기 인생의 모든 결정을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 뜻’에 따라서 결정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의도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사람 외에는 일반적으로 ‘성서’나 성서를 풀어 설명하는 목회자의 ‘설교’에 의존한다. 물론 좀 더 열심있는 사람들은 기도를 하거나 독서나 교회의 역사(전통)들을 찾아보고 또는 믿음 좋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등 개인적인 열심을 내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성서’와 ‘설교’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 그러나 ‘기도’의 경우에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도’를 한다고 하나님께서 ‘오늘 이것을 해라’, ‘저것을 선택하라’ 등 직접적인 계시를 내려주는 경우는 드물다. 물론 기도하는 중 마음이 편안해 지거나,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갈 수 있지만 그러한 경험들도 ‘성서’를 통해 검증하지 않고 직접적인 계시로 받아들인다면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한국교계 안에서 벌어지는 모습가운데 공통적인 패턴가운데 하나는, ‘하나님 중심’ ‘신본주의’(한국교회 내에서 흔히 회자되는 기독교 신앙은 ‘인본주의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니고 신본주의’라고 강조된다)를 강조하는 사람들에게서 유독 ‘교회 세습’이 많고 ‘목회자의 부패’ 사실이 많이 발견되어 진다는 사실이다. 이들에게 ‘신본주의’의 본질이 무엇일까? 무엇이 정말 신을 위한 것일 까? 아이러니하게도 교회가 가장 타락했던 중세시대는 ‘신의 이름’으로 모든 악이 행해지던 시대였다. 중세는 ‘신의 이름’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던 시대였다. 이처럼 중세는 한마디로 “신 중심”, “신본주의” 사회였다. 당시 중세 종교지도자들은 ‘신의 이름’을 빌어 무지한 대중들을 속이고 착취하였다. 종교가 모든 세속적 권위 위에 군림하고 있었고 성직자들이 넘쳐나는 시대였다. 모든 음악과 미술, 예술의 주제는 종교와 신이었다. 그러나 성서의 신은 인간을 사랑하고, 신의 뜻은 인간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신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인간이 착취당하고 가장 압제 당하는 시대가 중세였다. 이처럼 ‘하나님 중심’을 외쳐 댔지만 이때의 ‘신본주의’는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도구로서의 말잔치에 불과했다. 지금도 위선적인 종교인일수록 ‘신본주의’를 강조하고 ‘신의 이름’뒤에 숨어 자신의 치부를 감추는 것이 현실이다.
‘목사의 딸’을 쓴 고 박윤선 목사의 딸의 이야기는 사뭇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나는 아버지 박윤선 목사의 진실과 가족의 이야기를 사실대로 기록해, 아버지를 우상처럼 떠받드는 사람들이 아버지를 판단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가장 적게는 나를 비롯해 많게는 수많은 교회와 교인에게 영향을 끼친 아버지는 과연 어떤 분이었는가? 일단 그분은 태생적인 신앙의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의 약점은 한국에서 보수적인 교회나 칼빈주의 또는 복음주의 성향을 지닌 교회가 갖는 약점이기도 하다. 이들 교회를 배경으로 목회하는 사람들은 아버지를 선두로 ‘신본주의’와 ‘성경주의’를 주창했고, 인본주의를 들러리로 세워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결사적으로 하나님만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왔다. 이것은 교회의 양적인 성장을 불러왔고, 동시에 목회자들의 권위도 크게 강화시켰다. 목회자들은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회의 성장을 추구했다. 심지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과 자신의 권위를 공고화하는 것을 동일시하기까지 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자랑하는 대형교회들의 문제점은, 목회자가 마치 황제처럼 군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의 대형화 현상은 자랑거리가 아니라 한국교회의 추락을 부추기는 장애물인 셈이다. 목회자가 자신의 영향력이 확장되는 것을 보면서 두려워하지 않거나 무감각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는, 최근에 물의를 일으킨 몇몇 대형교회 사건만 봐도 잘 알 수 있다.”(박혜란, ‘목사의 딸’ 프롤로그 중에서)
작가 박혜란씨는 한국교회가 존경하는 박윤선 목사의 딸이요, 그 역시 목사다. ‘목사의 딸’은 그가 자기 아버지를 폄훼하려고 쓴 책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밝히듯이, 한국교회가 아버지를 우상처럼 떠받들고 있는 것이 오히려 한국교회에 유익이 되지않고, 아버지가 외쳐댔던 ‘신본주의’가 얼마나 위선덩어리인 지를 밝혀 기독교의 참다운 복음을 제시하고자 쓴 책이다. 필자도 박윤선 목사가 세간에 회자되는 ‘세습목사’들이나 비리에 연유된 ‘부패목사’들 보다는 훨씬 훌륭하신 분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자신들의 위선을 치장하려는 자들은 유독 ‘하나님 중심’ ‘신본주의’를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인간성’과 ‘인간의 모습’을 배제한 채 오직 신을 중심으로 하는 설교와 목회자, ‘신본주의’ 신자들을 양산하기 위해 애를 써왔는데 이러한 한국교회가 거룩하고 세상의 존경을 받는 공동체로 인정받고 있는가? 여기에는 많은 회의가 들 수밖에 없다. 과연 기독교신앙이 ‘신본주의’만 말하고 있고 실제 성서는 ‘인간’과 ‘신’을 대립하는 구조로 묘사하고 있는가? 왜 ‘신본주의’ 신앙은 오히려 위선이라는 탈속에서 갇히기 쉬운가?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신앙은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자 한다.
기독교 신앙의 배타성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받고 있는 가장 큰 비판들은 ‘폐쇄성’과 ‘윤리의 부재’이다. 한국 기독교는 유독 폐쇄적이다. 기독교 자신만이 절대적 진리라고 생각하면서 기독교와는 다른 일체의 것들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닫고 소통하려고 하지 않는다. 현대사회는 다원화된 사회이다. 종교적으로도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섞여 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다원화된 세상에서 살아갈 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일지라도 서로 인정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신앙은 지키되 다른 사람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실 다른 사람에 대한 경직된 폐쇄성은 근본적으로 열등감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
1095년 십자군 원정이 있기 전 중세교회는 이슬람이 점령하고 있던 에스파니아 남부지역을 회복하기 위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까지 쳐들어갔다. 이때 이베리아 지역에서 무슬림을 쫒아낸 후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지역에 이미 토착 기독교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모자라브(Muzarab는 아랍화된 사람들이라는 의미) 문화’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기독교인들이 공존하고 있었고 아랍 문화속에서 토착 기독교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는 기독교와 이슬람뿐만 아니라 유대교까지 공존하고 있었다. 학자들은 8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공존하고 있었던 다문화를 ‘콘비벤 시아(convivencia: 공존)’라고 부른다. 이것은 각기 다른 종교인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실례라 할 수 있다. 무엇이 폐쇄성을 가져오는가? 그것은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는 과도한 배타주의적 사고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미 8세기에 그것도 이슬람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무슬림과 기독교, 유대교가 공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현대 기독교를 부끄럽게 한다. 그동안 기독교가 여타 다른 종교들과 맺었던 관계방식은 주로 ‘배타주의’와 ‘폐쇄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개신교의 경우 ‘복음’과 ‘진리(그리스도)’의 절대 우위성을 강조한 나머지 타자들에 대해 자연스레 부정하게 되었고, 혼합주의에 대해서도 경멸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특히 보수적인 교회와 신앙인 일수록 배타성과 폐쇄성은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태도는 일반적인 사회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신 중심’ ‘신본주의’를 외치는 자들은 인간과 신을 대립하는 구조로 보고 세상 사회와의 소통을 극히 인간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에게 친히 내려오신 예수의 ‘성육신(Incarnation)’ 사건으로 시작한다. ‘성육신’은 일종의 세상과의 ‘소통’ 사건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과 소통하기 위하여 인간으로 오신 사건이다. 그리고 그 소통의 방법은 극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고, 인간의 문화와 육체를 통하여 인간과 소통하고자 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인간과 소통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신이 친히 인간적이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출발부터 인간적, 즉 인문학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는 신과 인간의 대립구조를 환영하지 않는다. 특히 예수와 바리새파와의 논쟁은 종교에 있어서 인간이 핵심이라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막 2:27). 어디 이뿐인가? 안식일날 배가고파 밀 이삭을 잘라먹은 제자들을 비판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는 안식일의 중요성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역설하고(마 12:1-8), 역시 안식일날 손 마른사람을 고치는 행위를 통해서 종교의 핵심은 인간을 살리는 것임을 설파한다(마 12: 9-13).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핵심은 바리새파들이 강조하는 형식적으로 ‘신본주의’를 외치고 외형을 추구하는 율법 종교가 아니라(바리새파들은 ‘하나님 중심’을 외치는 신본주의 신학을 내세웠지만 거기에는 인과 신을 버리는 우를 범했다)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서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 자신보다 인간 자체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 연구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길은 인간을 발견하는 일과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예수의 사역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칼빈도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향하게 함(칼빈, ‘기독교강요-상’, 77).
이것은 인간학이 곧 신학이고, 하나님을 알기 위한 신학은 인간학, 인문학과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은 결국 인간의 진정한 가치와 삶의 궁극적 의미를 탐구하는 학문이며,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인간의 삶의 본질은 무엇이고, 인간의 본성과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목회자는 아무리 ‘신 중심’ ‘신본주의’를 외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보면 예수시대의 바리새인처럼 인간을 종교를 위한 희생물이나 부산물정도로 취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앙, 신학 그리고 인문학
교회안에서 자란 목회자들은 상식을 벗어나는 것이 마치 신앙이 좋은 것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있다. 상식이란 모든 사람이 암묵적으로 공유하고 인정하는 보편성을 기준으로 한다. 즉 인간이라면 대다수가 인정하는 지식이나 윤리, 사회규범 등 보편적인 판단력이나 사리분별이다. 그런데 유독 이러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집단이 바로 종교인, 그 중에서도 목회자그룹이라고 한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회속에서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보편적인 지식이나 교양, 가치 체계와 소통할 수 없다는 뜻이며, 나아가서는 사회에 배타적이고 대립하는 모습으로 귀결된다. ‘신 중심’ ‘신본주의’를 외치는 자들일수록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보편적인 상식을 무시하고 자기 독단과 편협함으로 일관하는 경우가 많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안수, 안찰이 라는 신앙행위를 통해 사람을 죽이게 하는 경우까지 매스컴 보도를 통해 접하기도 한다. 한국 교회는 안타깝게도 교회안에 미신이 판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인터넷에 떠도는 설교를 보면 버젓이 김XX 목사는 “십일조를 안하면 암 걸린다”라고까지 설교한다. “일본과 네팔이 지진이 난 것은 우상을 많이 섬기는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성도들이 더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극단적인 신앙주의에 빠지면 맹목적이 되어 상식이 마비되고, 인간의 합리성과 비판적 이성은 신앙에 반하는 행위로 간주된다. 맹목적인 신앙에 빠진 자일수록 소통이 어렵고 편협한 자기 경험의 주관에 갇히는 경우가 많다. 이상하게도, 교회 안에는, 이처럼 신앙을 갖는 데에 인간의 이성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인간의 합리적 이성과 질문은 신앙을 오히려 병들게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었을까?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필자가 짐작하기로는 신앙은 “의심없이 믿어야 하는 것”인데 질문하고 의심하는 것은 신앙을 병들게 할 수 있다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신앙의 근거는 지식(Knowledge)이지 경건한 무지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소위 겸손한 태도를 가진 무지를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신앙이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요 17:3)이지, 교회에 대한 존경이 아니다. 그들 교회가 ‘맹신’이란 것으로 어떤 미로를 만들어 냈는가를 우리는 안다. 무엇이든지 -가장 무서운 오류까지도- “교회”라는 딱지를 붙여서 속여 넘기면, 무지한 사람들은 무분별하게 신령한 것으로 받든다. 이런 경솔한 맹신이 파멸 일보직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변명하며, “이것이 교회에 대한 신앙이다”라는 조건만 붙으면, 무엇이든지 확실한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자기들이 가진 오류를 진리인 것처럼, 암흑을 광명인 것처럼 무지를 바른 지식인 것처럼 착각한다(칼빈, ‘기독교강요-중’, 19).
칼빈은 중세교회의 ‘미신적 맹신’은 바른 신앙이 아니고 바른 신앙은 성서의 내용에 기초한 바른 지식, 즉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신뢰하고 그의 인격과 삶을 바로 깨닫고 따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오히려 잘못된 맹신과 무지한 경건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현장과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볼 때 인문학은 바른 신앙과 신학에 접근할 수 있는 혜안을 가져다준다.
인문학과 기독교와의 만남
신앙과 신학하기 등의 행위가 ‘신 중심’ ‘교회중심’이라는 단일한 사고에 빠지거나, ‘신령한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마치 세상과 사회와는 전혀 소통하지 않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으로 착각하는 자들이 있다. 사실 초대교회 때는 임박한 종말의식으로 인해 세상사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승천하신 예수가 곧이라도 다시 올 것이라는 종말의식은 세상에 대해 초연하게 했다. 그들은 곧 다가올 하나님 나라가 오면 이 세상나라는 다 무너져 버릴 것이기에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리고 순교를 할 수 있었고, 불타 없어질 세상과 현재의 통치 질서에 대해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불의한 사회구조와 사회악에 대해서도 개혁의지를 가지고 싸우려 하지 않았다(초대교회는 ‘세상’을 멸망할 것으로 보고 또 자신의 낙관주의를 천년왕국에 대한 소망으로 표현하였기 때문에, 지상의 세계를 패배주의적 시각으로 보았다. 이러한 소망이 약해기지 시작하고, 교회가 정치적, 경제적 생활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하는 상황이 닥쳐오자 기독교적 이상이란 이름아래 기존의 사회관습과 관계들에 대해 도전하는 경향이 줄어들었다; 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114-15).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이 세상은 불타 없어지고 하나님 나라가 내려오면 다 해결될 것이라는 소극적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후 100년이 지나도록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계 22:12) 약속한 임박한 종말론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초대교회의 이러한 신앙양태와 문화는 지금까지 교회 공동체의 신앙을 가르는 중요한 표지가 되었다. 세상에 대한 성도들의 육체적 욕망과 사회적 욕망은 ‘불신앙’의 표출로 인식되었고, 이러한 욕망은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다 버려야 할 세속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필자도 초보신앙을 가졌을 때 가졌던 생각은, 모름지기 신앙이 깊은 사람은 세속사회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인간의 모든 욕구를 절제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묵상하는 수도자가 가장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한국교회의 이원론적 신앙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신앙주의’ ‘신 중심’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돈과 물질’ 등 세상의 욕심에 더 집착하는 것은 무엇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져본다.
기독교 신앙을 신과 인간의 대립, 교회와 사회의 분리라는 틀로 바라보는 ‘신앙 제일주의’는 바른 신앙일 수 없다. 인문학은 신과 인간이 함께 가고, 교회와 사회는 소통해야 하며, 바른 신앙은 상식이 통하고 이성적으로 설명이 가능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중세의 안셀무스는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지도자들은 특별히 더욱 성서를 해석하고 기독교 신앙을 전수함에 있어서 인문학적 소양의 확대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자국어로 번역된 성서는 보통의 교육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쉽게 읽는다고 모든 내용이 쉽게 이해되거나 해석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학적 통찰력 및 건전한 인간 이성이 필요하다. 오히려 신학적 기반도 없는 사람이 이성을 사용하지 않고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성서해석은 위험하기 그지없다. 많은 경우에 있어 이단 사이비들의 가르침이 여기에 해당된 다고 할 수 있다.
목회자뿐만 아니라 기독교신앙을 가진 자들은 성서를 해석하고 신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자신들의 인문학적 소양의 확대를 통해 다양한 지평을 경험할 수 있다. 사실 성서 자체도 인문학의 보고라 할 수 있다. 성서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보다 인간자체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적 성서읽기를 통해 인간을 발견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발견하는 길이고 성서의 핵심 메세지인 예수가 전한 하나님나라와 인간구원이 무엇을 의미하고, 하나님이 창조시 기대했던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인문학적 접근과 독서들은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훨씬 더 넓어지게 하고, 성서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깊게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실제 경제학과 사회학에 관한 독서는 경제와 신학이 얼마나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경제문제와 사회문제가 신학과 신앙의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있음을 배울 수 있다. 필자의 경우에 있어서도 실제 사회, 경제학 책읽기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뒷면에 자리 잡고 있는 인간의 탐욕의 정체에 대해서 깊이 있는 깨달음을 갖게 해 주었다. 사실 인간의 탐욕의 문제는 신학적 주제인 인간의 욕심과 죄라는 신학적 주제와 맞물려 있고 최근 한국사회에서 이슈되고 있는 ’정치문제’가 결국 탐욕과 경제문제가 신앙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해주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직시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무신론이나 타종교에 대한 이슈보다도 우상숭배에 대한 문제가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미 한국교회는 ‘돈’이라는 ‘우상’에 잠식되어 있다. 하나님 중심이라고 하면서 ‘돈’이라는 ‘우상’을 하나님보다 더 우위에 둔 것처럼 행동하고 살아가는 교회들이 부지기수다. 이러한 것들을 인문학과 경제학 공부를 통하여 현대 기독교가 어떻게 돈에 잠식되어 왔는지 깨달을 수 있다. 사실 성서의 하나님은 가난하고 억압받고 유리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하나님이었다.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울부짖던 백성들의 피울음을 들으시고 수탈과 착취의 구조로부터 평등의 삶으로 인도해 내신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기본적인 성서읽기를 무시하고 출애굽을 ‘영적’인 것으로만 치환해서 해석하는 무지는 인문학적으로 성서를 읽는 눈이 없어서이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는 성서가 전하는 해방과 평등, 그리고 자유의 메세지에는 눈을 감고 ‘가나안’을 단지 신자들이 죽어서 가는 ‘천국’으로만 대치해서(아이러니하지만, 사실 구약을 믿는 유대인들은 내세를 믿지 않는다) 전하기에 급급하다. 또한 신앙을 가지게 되면 질병을 고치거나 개인의 성공과 부의 획득이 주어진다는 세속적 욕망의 도구로 희석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 ‘백화점 왕(존 워너메이커)’이 되고, ‘석유 왕(록펠러)’이 되고, ‘철강 왕(앤드류 카네기)’이 된다고 오히려 잘못된 신자유주의 경제의 구조악을 신앙의 성공인양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행위는 단지 세속적인 부를 획득하거나, 질병을 고치는 것보다 더 고상하고 숭고한 목적이 있다. 거기에는 단지 죽어서 천국가기 위해 보험을 드는 행위로서의 신앙도 거부한다. 이처럼 인문학적 사고가 없는 신앙과 신학은 단지 머리만을 변화시키거나, 가슴만을 뜨겁게 하는 데에서 그칠 수밖에 없다. 신학은 하나님에 대해 탐구하고 알아가는 학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에게 있다. 인문학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관계들에 대한 이해와 인간에 대한 탐구이다. 다시 말해 인문학은 인간학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적 이해가 없는 신앙과 신학은 이 세상에 대한 깊이 있고 균형잡힌 이해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인문학에 눈을 뜨고 인문학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재차 강조하지만 인간을 발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발견하는 길이고,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야 말로 인간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주경식 교수(호주비전대학 Director)
ks.jo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