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1년 12월 6일, 잉글랜드의 왕 헨리 6세 (Henry VI, 1421 ~ 1471) 출생
헨리 6세 (Henry VI, 1421년 12월 6일 ~ 1471년 5월 21일)는 잉글랜드의 왕이다.
헨리 5세와 발루아의 캐서린의 외아들로, 왕비는 앙주의 마거릿이다.
외조부이자 프랑스왕 샤를 6세의 사망으로 프랑스 왕위 요구자 앙리 2세 (Henri II)로서 백년전쟁을 지속하였다.

– 헨리 6세 (Henry VI)
.출생: 1421년 12월 6일, 영국 윈저
.사망: 1471년 5월 21일, 영국 런던 런던 탑
.부모: 헨리 5세, 카트린 드 프랑스 왕녀
.배우자: 마르그리트 당주 공녀 (1445년–1471년)
.자녀: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형제자매: 제1대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
*잉글랜드 국왕, 아일랜드 영주
.대관식: 1429년 11월 6일
1차재위: 1422년 8월 31일 ~ 1461년 3월 4일
.전임: 헨리 5세 / 후임: 에드워드 4세
2차재위: 1470년 10월 30일 ~ 1471년 4월 11일
.전임: 에드워드 4세 / 후임: 에드워드 4세
*프랑스의 왕 (논란)
.재위: 1422년 10월 21일 ~ 1453년 10월 19일
백년전쟁 말기와 장미 전쟁 시기의 잉글랜드 왕국 랭커스터 왕조 국왕.
갓난아기 때 왕위에 오른 뒤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굴곡이 심한 치세를 누리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 생애 및 활동
헨리 6세는 태어난 지 아홉달 만에 아버지를 잃었다.
그는 여덟 살의 나이에 대관식을 치르고 잉글랜드의 통치자가 되었지만 당시 잉글랜드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헨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고 그는 통치 기간 동안 잉글랜드가 가지고 있던 프랑스의 땅들 대부분을 샤를 7세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며 무능력하다고 평가하기 시작했다.
1453년 여름, 헨리 6세는 신경쇠약을 일으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의 정신병은 외할아버지였던 프랑스의 샤를 6세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에 아들 에드워드가 태어났지만 그는 아들에게 축복을 내리기를 청하는 버킹엄 공작이나 왕비 앞에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아들의 대부였던 켐프 대주교가 사망한 뒤 자신이 직접 새 대부를 선택했음에도 켐프 대주교가 죽었다는 사실을 잊기도 했다.

결국 1461년 삼종제 에드워드에게 왕위가 넘어갔고 1465년 에드워드 4세의 최측근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에 의해 런던 탑에 갇혔다.
그러나 워릭 백작이 에드워드 4세와 프랑스 공주와의 혼담을 주선하기 위해 프랑스에 건너간 사이, 에드워드 4세는 잉글랜드의 귀족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했고 프랑스의 적 부르고뉴와 동맹을 맺었다.
에드워드 4세의 처사에 분노한 워릭은 헨리 6세에게 다시 권력을 돌려주고 자신의 딸을 헨리 6세의 아들 에드워드 왕자와 결혼시켰다.
이로 인해 헨리 6세는 1470년 복위했지만 워릭 백작이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반년도 되지 않아 다시 런던 탑에 유폐되었고, 1471년 5월 사망했다.
공식적으로는 우울증으로 인해 죽었다고 발표되었으나 실제로는 암살되었다고 여겨진다.
1911년 발견된 헨리의 유골은 두개골에 머리카락이 피로 엉겨붙어 있어 그 추측을 뒷받침하고 있다.
헨리의 아들 에드워드 또한 전장에서 달아나던 도중 살해당했다.
헨리 6세는 재위 중에 이튼 칼리지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킹스 칼리지를 세웠다.

- 부인과 자녀
– 앙주의 마르그리트(1430 ~ 1482): 앙주 공작 르네와 로렌 여공작 이자벨의 딸.
장미 전쟁에서 랭커스터파의 맹주로서 활약했지만 1471년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생포된 뒤 남편이 갇혀 있었던 런던 탑에 감금되었다가 1475년 루이 11세가 몸값을 지불한 덕분에 풀려난 뒤 프랑스로 돌아가 앙주에서 7년간 여생을 조용히 보냈다.
– 웨일스 공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1453 ~ 1471): 헨리 6세와 앙주의 마르그리트의 외동아들.
어머니와 함께 요크파에 맞서 싸웠지만 1471년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살해되었다.
헨리 5세 사후, 의회는 헨리 6세의 모후 카트린이 헨리 6세의 허락없이 재혼할 경우 재혼한 남성의 지위를 빼앗고 재산을 몰수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모든 정치적 판단은 섭정단이 결정했기에, 이는 카트린의 재혼을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카트린은 1428년 의회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재혼했다. 상대는 헨리 5세의 종자였던 웨일스 출신의 기사 오언 튜더였다. 카트린은 오언과 함께 지내며 1430년에 에드먼드 튜더를, 1431년에 재스퍼 튜더를 낳았다. 카트린은 1437년 1월 3일에 막내 아이를 낳고 출산 후유증으로 숨을 거뒀다. 이후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는 카트린이 재혼했다는 소문을 듣고 조사에 착수한 끝에 소문이 사실임을 밝혀냈다. 오언 튜더는 감옥에 갇히고 벌금형을 받았다.
하지만 헨리 6세는 1439년 오언 튜더를 사면하고 연금을 받게 했으며, 에드먼드와 재스퍼를 자신의 이부형제로 인정하고, 에드먼드를 리치먼드 백작, 재스퍼를 펨브로크 백작에 선임했다. 이후 두 형제는 장미 전쟁 시기에 헨리 6세를 위해 요크파를 상대로 끝까지 항전했다. 또한 1455년 에드먼드를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인 보퍼트 가문의 유일한 후손인 마거릿 보퍼트와 결혼시켰는데, 두 부부는 훗날 장미 전쟁을 종식시키고 튜더 왕조를 열 헨리 7세를 낳았다. 헨리 7세는 잉글랜드 왕실의 혈통과 거리가 상당히 멀었지만, 자신이 에드먼드 튜더의 아들이자 헨리 6세의 조카란 사실을 계승권 주장의 근거로 삼았다. 그래서 거기에서 따온 헨리 7세를 즉위명으로 삼았고, 자신의 둘째 아들(미래의 헨리 8세)의 이름도 다시 헨리라고 지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