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3년 8월 30일, 프랑스의 왕 루이 11세 (Louis XI, 1423 ~ 1483) 일명 ‘신중왕’ (le Prudent) 타계
루이 11세 (프: Louis XI, 1423년 7월 3일 ~ 1483년 8월 30일)는 신중왕 (프: le Prudent)이라고 불린 프랑스의 왕이다.

– 루이 11세 (Louis XI)
.별명: 신중왕 (le Prudent), 교활왕 (le rusé), 세계의 거미 (l’universelle aragne)
.출생: 1423년 7월 3일, 프랑스 왕국 베리 부르주
.사망: 1483년 8월 30일 (59세), 프랑스 왕국 플레시레투르 성
.매장지: 오를레앙 인근 클레리생탕드레 클레리 성모 교회
.가문: 발루아 가문
.부모: 부) 프랑스 국왕 샤를 7세, 모) 앙주의 마리
.배우자: 스코틀랜드의 마거릿, 카를로타 디 사보이아
.자녀: 부르봉 공작부인 안, 프랑스 왕비 잔, 프랑스 국왕 샤를 8세
.종교: 로마 가톨릭교회
*프랑스 국왕
.재위: 1461년 8월 31일 ~ 1483년 8월 30일
.대관식: 1461년 8월 31일(랭스)
.전임: 샤를 7세 / 후임: 샤를 8세
1461년에 샤를 7세가 사망하자, 루이는 프랑스 왕국에 대한 그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부르고뉴 궁전을 떠났다.
음모에 관한 그의 취향과 짙은 외교적 활동은 그에게 “교활왕” (프: le rusé)과 그의 적들이 그가 공모와 음모의 거미줄을 돌려 놓았다고 비난하며 “세계의 거미” (프: l’universelle aragne)라는 별칭을 얻게 하였다.
1472년에 다음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이 경쟁자인 루이를 상대로 무기를 들었다.
그러나 루이는 샤를의 동맹인 에드워드 4세와 1475년 피키니 조약을 체결하며 그를 고립시킬 수 있었다.
그 조약으로 백년 전쟁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1477년 낭시 전투에서 용담공 샤를의 사망으로, 부르고뉴 공작가도 끝나게 되었다.
루이는 부르고뉴 본토와 피카르디를 포함한 많은 부르고뉴의 영토를 차지하는데 이 상황을 이용했다.
외국과의 직접적인 위협이 없었던 루이는 그에게 반항적인 봉신들에 대한 제거, 왕가 권력의 확대, 경제 개발 강화등을 할 수 있었다.
그는 1483년에 사망했고 아들 샤를 8세가 그 뒤를 이어받았다.

○ 생애 및 활동
프랑스 왕국의 국왕이다.
발루아 왕조의 제6대 왕이며 샤를 7세의 아들이다.
능력을 보면 명군인 아버지만큼 뛰어나서 귀족들의 반항을 분쇄하고, 프랑스 절대왕정의 기반을 닦은 왕이었다.
- 즉위하기 이전
부왕 샤를 7세가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에 밀려 쫓겨다니던 엄혹한 시절에 태어난 왕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못해 급기야 그가 싫어하는 아버지의 애첩인 아녜스 소렐에게 칼을 들고 죽이려 난동을 부렸을 정도로 사이가 몹시 나빴다.
물론 이 일로 루이는 화가 난 아버지에 의해 궁전에서 쫓겨나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1440년 17세 때 귀족들의 반란인 프라그리의 난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여 이후 17년 동안 도피네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에도 역시 음모에 가담하여 1456년 부르고뉴국으로 도망가 7촌 아저씨되는 선량공 필리프 3세의 비호를 받았다.
그후 아버지인 샤를 7세와는 평생동안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 공익동맹과의 대결
아버지 샤를 7세가 1461년에 죽자 루이 11세는 프랑스로 돌아온 후 왕위에 올라 부왕의 측근 세력을 일소하고, 제후 세력들을 억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자 1465년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집결하여 공익동맹 (ligue du Bien Public)을 결성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부르고뉴국의 ‘선량공’ 필리프 3세의 아들인 샤롤레 백작 ‘용담공’ 샤를과 루이 11세의 동생인 베리 공작 샤를이 명목상 최고 통수권자로서 공익동맹을 이끌었다.
가스통 4세 드 푸아-베아른 (Gaston IV de Foix-Béarn)의 효과적인 지원을 받은 루이 11세는 30,000여명의 병력을 조직했다.
1465년 5월과 6월에 전쟁이 개시될 때, 루이 11세는 부르봉 공작 장 2세의 중심지를 타격했다.
그후 왕은 프랑수아 2세의 브르타뉴 공국군과 부르고뉴 공국군에 맞서 수도 파리로 향했다.
그들의 군대가 만나기 전에, 왕은 샤롤레 백작 샤를 (‘용담공’ 샤를)이 이끄는 부르고뉴군과 맞닥드렸다.
전투는 1465년 7월 16일 파리 남쪽에 있는 몽틀레리에서 벌어졌다. 그 전투는 혼란스러웠고, 양측에서 승리를 주장했다.
샤롤레 백작은 전장의 승리자로 남았지만, 루이 11세는 부르고뉴군의 병력수를 경감시켰으며, 야밤에 조심스럽게 전략적인 후퇴 명령을 내려, “승리”한 군대와 함께 파리로 돌아왔다.
프랑스의 군주는 위태로웠던 수도에서 왕의 위신을 강화시켰다. 하지만 전투 이후, 왕의 위세는 약해졌으며, 특히 7월 19일에 부르고뉴군과 브르타뉴군의 합류를 막아낼 수 없었다.
곧 아르마냑 백작 장 5세, 알브레 백작 샤를 2세, 로렌 공작 장 2세도 동맹군에 합류하게 되었다.
7월 18일 파리에 입성한 루이 11세는 방어선을 구축했고, 공익동맹의 봉건영주들은 파리 공성전을 시작했다.
루이 11세는 8월 10일에 파리를 떠났다. 그는 노르망디의 루앙으로 가 전쟁 준비를 하던 왕족 세력들을 결집시켰고, 8월 28일에 강력한 지원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동맹 세력들이 퐁투아즈와 루앙을 점령하는 걸 막아내지 못하자 9월 3일에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양측은 이 분쟁을 끝내는 법을 완전히 모르고 있었다.

루이 11세는 양보하는 척 했다. 그래서 왕은 세 차례 평화조약을 맺었다.
1465년 10월 5일에 샤를루아 백작 및 샤를 드 프랑스와 콩플랑 조약을 체결했다.
24일 뒤인 10월 29일에는 봉건영주들과 생모르 조약을 체결했고, 12월 23일에는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캉 조약을 체결했다.
베리 공작 샤를 드 프랑스는 노르망디 공국을 받았고, 부르고뉴국의 샤롤레 백작 샤를은 그와 그의 후계자를 위해 200,000크라운으로 되찾은 솜과, 불로뉴, 긴, 로에, 페론, 몽디디에르 영지를 얻었다.
또한 로렌 공작 장 2세는 무종, 생트므누, 네프샤토를 획득했고,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는 몽포르, 에탕프를 얻었으며, 그의 모든 영지를 회복했다.
부르봉 공작 장 2세는 동쉐리, 오베르뉴의 봉건권 및 랜스 300개, 그리고 100,000 크라운을 얻었으며, 느무르 공작 자크 다르마냑은 파리 및 일드프랑스의 행정권을 받았다.
한편 아르마냑 백작 장 5세는 루에르그 일대의 여러 성들을 얻었으며, 생폴 백작 루이 드 뤽상부르는 ‘콘네타블’ (프랑스 육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하지만 루이 11세는 공익동맹에 유리한 이 형세가 오래 가지 않을 거라고 보았다.
왕은 반역자들의 일부를 용서했지만, 또한 일부를 벌했다.
루이 11세는 공익동맹을 지원한 앙부아즈 가문을 벌하기 위해 피에르 당부아즈의 쇼몽 성을 파괴시켰다.
하지만 4년 뒤에 왕은 그들을 용서하고, 심지어 쇼몽 성을 재건하는 비용을 지원해주었다.

1465년, 파리와 바스티유 감독관 샤를 드 믈룅은 드 라 리비에르에게 자리를 물려주었으나 공익동맹의 지도자들과의 연결로 인한 유죄 판결을 받아, 1468년 앙들리에서 처형당했다.
그의 재산은 몰수되어 앙투안 드 샤반느에게 주어졌다.
1466년 3월, 샤를 드 프랑스는 브르타뉴 공작과의 분쟁으로 인해, 루이 11세와의 협상을 못한 체 노르망디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는 브르타뉴로 도망갔다.
1468년, 용담공 샤를은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4세의 지원과 함께 샤를 드 프랑스, 알랑송 공작 장,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함께 새로운 동맹을 조직했다.
그러나 루이 11세는 4월 투르에서 삼부회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으며, 동맹에서 프랑수아 2세와 샤를 드 프랑스를 떨어트려 놓는 데 성공했다 (앙세니 조약).
느무르 공작이자 라마르슈의 백작인 자크 다르마냑은 왕에게 여러 차례 용서를 받았었다.
1475년, 새로운 반역 행위로 분노를 일으켜, 그는 포위를 당했고, 칼라 성을 잃고 말았다.
느무르 공작 자크는 바스티유에 투옥되었고, 1477년 파리 광장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1475년 루이 11세는 잉글랜드 요크 왕조의 초대 왕인 에드워드 4세와 피키니 조약을 체결하여 백년전쟁을 완전히 종결시켰다.
1477년 반란을 주도하던 부르고뉴국의 ‘용담공’ 샤를 1세가 부르고뉴 전쟁 중 스위스 용병과의 낭시 전투에서 패배하며 참혹하게 전사하자 본격적으로 제후들을 향한 공세를 펼쳤고, 1480년 마침내 왕국 내 봉건세력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1483년에는 부르봉 공작 장 2세를 프랑스의 콘네타블로 임명했다.
공익동맹을 분쇄시킨 루이 11세는 훗날 우편제도의 창설, 민병제도의 확충, 그리고 상공업 육성 등의 정책을 통해 중앙집권적인 요소를 확립시켜 훗날 번영하게 될 프랑스 절대왕권의 기반을 닦았다.

- 국내 업적과 노년
프랑스 내에서 제후들의 저항을 분쇄한 루이는 이제 마음대로 자기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루이 11세는 추상적인 왕권 개념에 대해 언급하는 가운데 근대적인 국가관을 표명했다.
그는 전통을 되살려 ‘성 ‘(聖) 샤를마뉴의 축일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성 미카엘 기사단을 창설했다.
하지만 그의 시대에는 개인적 충성심에 바탕을 둔 봉건적 유대 대신 신하가 군주에게 복종하는 새로운 군신관계가 뚜렷하게 대두되었다.
중앙집권제가 발전했으며 이전에는 영주가 보유하던 재판권을 왕실회의의 한 분과가 관장했다.
행정부서의 역할이 확대되었고 국왕에게서 직책을 받은 관리들이 영향력있는 계급을 이루기 시작했다.
루이 11세는 사자 (使者)들의 연락망을 통해 모든 사태의 전개를 눈으로 보듯 파악할 수 있었고, 또한 왕국 전역을 자주 순회했다.
1472년 교황과 새로운 종교협약을 체결해 주교임명권을 장악했으며 단독 권한으로 세금을 올려 왕실의 수입을 늘렸다.
귀족들의 회의와 신분의회는 단지 자문 역할을 할 뿐이었다.
그러나 루이 11세는 부르주아 계급의 지지를 얻었으며 그들 중 몇몇은 루이가 가장 신뢰하는 조언자 역할을 했다.
부 (富)가 권력의 필수적 요소라는 생각에서 그는 길드를 장려하고 산업발전을 위해 많은 법령을 공표했으며 광산개발을 권장하고 리옹과 투르에 견직산업을 도입하는 한편 1470년 소르본에 인쇄소를 세웠다.
또한 그는 루앙이 잉글랜드 및 한자 동맹 도시들과 통상하는 것을 촉진시켰으며 리옹의 시장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지중해 연안에 향료무역을 담당할 회사를 세울 구상도 했다.
루이 11세는 몸은 약했지만 지칠 줄 모르는 일꾼이었으며, 과로로 인해 뇌동맥경화증이 악화되면서 결국 목숨을 잃은 것 같다.
마지막 2~3년 동안 그는 투렌의 플레시레투르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1483년 8월 30일 숨을 거두었다.
○ 평가
발루아 왕조의 제6대 왕이며 샤를 7세의 아들 루이 11세의 능력을 보면 명군인 아버지만큼 뛰어나서 귀족들의 반항을 분쇄하고, 프랑스 절대왕정의 기반을 닦은 왕이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