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4년 11월 26일, 스페인 (에스파냐) 통일의 기초를 만든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 (Isabel I de Castilla y Aragón, 1451 ~ 1504) 일명 ‘가톨릭 여왕’ 타계
이사벨 1세 데 카스티야이아라곤 (스: Isabel I de Castilla y Aragón, 아: Isabel I de Castiella y Aragón, 카: Isabel I de Castella i Aragó eta Aragoikoa, 1451년 4월 22일 ~ 1504년 11월 26일)는 트라스타마라 왕가 출신의 카스티야 여왕 (재위: 1474년 – 1504년)이다. 별명은 가톨릭 여왕이다. 남편 페르난도 2세와 더불어 부부 군주, 가톨릭 군주로 불린다. 레온과 카스티야의 상속녀였던 이사벨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결혼하여 공동 군주가 되었고 이를 통하여 스페인 (에스파냐) 통일의 기초를 만들었다.
1492년 그라나다를 점령함으로 레콩키스타를 완성하였다. 지난 800년간의 북아프리카의 이민족이자 이교도에 의한 이베리아 반도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대단한 업적을 이루어 냈다.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을 지원하여 신대륙의 존재를 유럽에 알렸으며 이를 통하여 스페인의 해외영토 개척의 기초와 16세기의 번영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 생애 및 활동
이사벨 1세는 1451년 4월 22일 카스티야 연합왕국의 카스티야 마드리갈 데 라스 알타스 토레스, 아빌라에서 카스티야의 후안 2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이사벨 데 포르투갈 사이에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1세 (1357~1433)의 손녀였다. ‘이사벨’이라는 이름은 어머니에서 딸에게로 계승되어 온 이름이며, 이사벨 1세는 7대째였다. 이사벨 1세는 부계로는 카롤링거 왕조의 먼 외후손인데 이탈리아의 군주 베렝가리오 1세의 20대 외손녀이자, 그의 외손자 베렝가리오 2세의 직계 18대 손이 된다.
베렝가리오 2세의 아들 아달베르토 2세의 미망인 게르베르가 (Gerberge de Chalon)가 앙리 1세 드 부르고뉴 공작와 재혼하여 본남편의 아들 오토굴리엘무스에게 부르고뉴 동쪽 땅 일부를 분할하여 부르군트 백작에 봉했다. 오토 윌리엄의 아들들 중 레몽은 레온과 카스티야의 통치자였던 히메네스가의 우라카 여왕과 결혼하여 얻은 알폰소 7세에게 레온과 카스티야의 왕위를 넘겨주었는데, 이사벨의 15대조 알폰소 7세부터 아들로 전해지면서 이사벨 1세의 아버지 카스티야의 후안 2세까지 14대를 아들로 이어졌다.
이사벨의 고조부 카스티야의 엔리케 2세는 원래 트라스타마라 백작으로, 카스티야의 알폰소 11세의 정부 레오노르 데 구스만이 낳은 14번째 서자였다. 그러나 알폰소 11세의 적자이자 이복 형 페드로를 쿠데타로 축출하고 카스티야 연합왕국의 왕이 되었다. 고조부 엔리케 2세가 후궁의 아들이자 트라스타마라 공작을 지냈기에 이사벨의 집안은 보르고냐가라 하지 않고 고조부의 작위에서 이름을 따서 트라스타마라가라 부른다.

– 통치
- 카스티야 왕위계승전
1474년 12월, 카스티야의 엔리케 4세 사망 후, 엔리케 4세의 이복동생인 이사벨 1세와 엔리케 4의 딸 후아나(1462~1530) 사이에서 왕위계승 다툼이 벌어졌다. 분쟁이 벌어진 핵심 원인은 후아나가 선왕 엔리케 4세의 친딸이 아니라는게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엔리케 4세는 성불구자로서 당사자의 주장과는 달리 진짜 후아나의 생부는 초대 알부케르크 공작 벨트랑(1443~1492)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카스티야의 왕권을 탐한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는 후아나와 결혼한 후 후아나의 권리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1475년 5월, 카스티야를 침공해왔다.
1476년 3월, 남편 페르난도 2세와 함께 토로 전투에서 승리하며 승기를 잡는 듯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주앙 왕자가 지원군을 이끌고 와서 양쪽은 다시 대치하였고 지리한 공방전이 지속되었다. 육상과 더불어 해상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카스티야가 계속 밀렸다. 전쟁이 3년간 지속되자 포르투갈과 알카소바스에서 만나 종전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였다. 1479년에 알카소바스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분쟁 지역인 대서양에서 포르투갈에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서 카스티야의 왕위를 인정받으며 전쟁을 종결 지은 후 레콩키스타에 집중하였다.
- 통합왕국의 탄생
1479년 시아버지 후안 2세가 죽자 남편이 페르난도 2세가 되어 아라곤의 왕위를 계승하였고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 즉 스페인 (에스파냐) 왕국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 스페인은 아직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군주끼리 결혼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이사벨과 페르난도 두 군주의 공동통치제 성향을 띠고 있었다. 정치 (행정, 입법, 사법 등)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완전한 통합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아직도 제각기 두 군주의 통치를 받았다. 이는 훗날 이사벨이 죽은 후에 상속 문제가 일어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사벨은 자신은 왕비가 아니라 여왕이며, 페르난도보다 더 연상이라는 사실을 항상 잊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 레콩키스타 완성
1492년 1월, 이베리아 반도 남부에 아직 남아있던 이슬람 국가인 그라나다 왕국을 제압, 마침내 800년에 걸친 레콩키스타를 마무리 지었다. 당시 무슬림과의 전쟁에 관심을 기울였던 이사벨은 전장을 누비는 남편을 위해 군자금과 물자 조달 등에 국력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그 위업 덕분에 1496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부터 칭송받은 두 사람은 가톨릭 공동왕 (Los Reyes Católicos)이라는 칭호를 하사받게 된다. 이후 이사벨은 ‘가톨릭교도 이사벨’ (Isabel la Católica)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 콜럼버스 후원
이사벨 1세은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을 지원하였다. 그 덕분에 콜럼버스는 1492년 10월 12일에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귀국한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영토분쟁에 휩싸인다. 분쟁은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하며 원만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또한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으로 인해 훗날 스페인의 해외 식민지 개척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러나 이사벨 1세의 살아생전에는 기대와 달리 경제적인 큰 실익은 없었다. 추가적으로 이루어진 3차례 항해에서 콜럼버스가 말한것 처럼 많은 금이 발견되지 않았고 향신료도 가지고 오지 못했다. 콜럼버스가 원주민들에게 잔혹한 짓을 하거나 살육을 행하자 이를 심하게 문책하기도 했다.
- 알함브라 칙령
1492년 3월, 스페인에 거주중인 유대인들에 대해 강제개종 혹은 4개월 내에 떠날 것을 명령했다. 오랜 전쟁으로 부족한 국고를 채우고 공신들에게 줄 재물이 필요했기에 유대인 재산을 수탈하고자 했다. 재산을 자유롭게 처분하고 국외 반출까지 보장했으나 짧은 4개월 내에 처분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당시 스페인 인구가 약 1000만명이었는데 떠난 유대인은 17만 명 (1.7%) 이었지만, 이들의 다수는 상공업에 종사했고 금융·유통망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추방 이후 스페인 경제가 침체하기 시작했다. 이때 상당수의 부유한 유대인들은 포르투갈 주앙 2세의 도움으로 포르투갈로 이주하였다.

- 혼인동맹
포르투갈과 원만한 관계유지를 위해 큰 딸 이사벨을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와 혼인시킨다. 그러나 혼인 전 포르투갈 내 유대인 추방을 제1조건으로 제시하였고 이로 인해 1506년 리스본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큰 비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때 약 7,000명의 유대인들이 희생당했다. 막내딸 캐서린/카탈리나을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자와 혼인시켜 양국 관계를 돈독하게 하였다. 왕세자 아서가 결혼 후 사망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는 했으나 다시 헨리 8세와 재혼을 하게 되었다. 둘째 딸 후아나 (광녀 후아나)는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 미남공 펠리페와 혼인시켰다. 이 결혼은 1494년 국력이 강해진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전쟁을 일으키자,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 막시밀리안 1세가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서 이루어졌다. 이 결혼을 통하여 훗날 16세기에 풍운아 카를 5세 (1500 ~ 1558)가 탄생하게 되었다.
– 사망
1504년 11월 26일 메디나델캄포에서 사망하였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