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1년 5월 5일, 프랑스의 전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éon Bonaparte, 1769 ~ 1821)가 유배지인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타계
나폴레옹 1세 (Napoléon Bonaparte, 1769년 8월 15일 ~ 1821년 5월 5일)는 코르시카 소귀족 출신으로 프랑스 혁명 당시 이탈리아와 이집트 등지에서 전례 없는 승리들을 거두었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에 정치적 지지 세력을 규합한 그는 1799년 쿠데타를 일으켜 제1통령, 나아가 종신통령에 취임하였고 1804년 12월 2일에는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의 통치는 대내적인 개혁과 대외적인 정복으로 이어져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였으나 1812년에 실시한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한 이후 1814년에 몰락하였다.
1815년 잠깐 다시 정권을 장악하지만 워털루 전투 패배 후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가서 1821년에 사망하였다.
– 나폴레옹 1세 (Napoléon I)
.출생: 1769년 8월 15일, 코르시카 공화국 아작시오
.사망: 1821년 5월 5일 (51세), 영국령 세인트헬레나 롱우드
.가문: 보나파르트 가
.부모: 카를로 보나파르트 / 레티차 보나파르트
.배우자: 조제핀 드 보아르네, 마리루이즈 도트리슈
.자녀: 나폴레옹 2세
.종교: 로마 가톨릭
*프랑스인의 황제
.재위: 1804년 5월 18일 ~ 1814년 4월 6일
.대관식: 1804년 12월 2일
.전임: 본인 (제1공화국 제1통령) / 후임: 루이 18세 (부르봉 왕정복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의 황제, 군인이다.
이탈리아계 프랑스인으로 프랑스 왕국에서 변두리였던 코르시카 섬에서 법률가 (변호사)의 자녀로 태어나 1789년 프랑스 혁명의 혼란한 시대 속에서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통해 프랑스 혁명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이후 1799년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통해서 집권하였다. 이후 스스로 황제에 올라 혁명을 퇴보시켰지만, 동시에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서 프랑스 혁명을 통해 수립된 자유주의 이념을 유럽에 전파시켰다. 이때 천재적인 군사적 재능을 통해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어 당대 세계적 강대국들이 몰려 있던 유럽을 석권하고 프랑스 제1제국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과도한 패권주의적 외교와, 프랑스 혁명의 산물인 자유주의와 내셔널리즘의 확산을 두려워하는 유럽의 강대국들의 견제에 직면했고, 1815년 워털루 전투의 패배에 따른 백일천하의 종식으로 몰락했다.
– 생애 및 활동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éon Bonaparte, 1769년 8월 15일 ~ 1821년 5월 5일)는 프랑스 제1공화국의 군인이자 1804년부터 1814년, 1815년까지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였다. 흔히 나폴레옹 (프: Napoléon)으로 불린다.
코르시카 섬의 하급 귀족 가문 출신의 군인으로, 프랑스 혁명 시기에 벌어진 전쟁에서 큰공을 세우며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쿠데타를 통해 제1통령이 된후 종신통령을 거쳐서 황제에 즉위했다. 그가 남긴 나폴레옹 법전은 전 세계의 민법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는 군사적으로 현대전에까지 영향을 끼쳤고 (클라우제비츠, 투하체프스키, 슐리펜 계획) 전술과 전략, 훈련, 조직, 군수, 의복과 포상 제도를 발전시켰다. 그의 프랑스 육군은 효율적으로 조직된 군대로 평가된다.
나폴레옹은 파리 육군사관학교에 재학중에 육군 포병 소위로 임관하였다. 프랑스 제1공화국 시절인 1793년에 툴롱 포위전에 참여하여 승리를 이끈후 준장으로 진급하여 24살에 장군이 되었다. 1796년에는 이탈리아 원정에서 대성공을 거두는 등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강력한 반 프랑스 동맹군을 상대로 연승하면서 군인으로서 승승장구하였다.
19세기의 첫 10년 동안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는 나폴레옹 전쟁을 주도하였다. 유럽의 강대국들을 상대로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를 통해 프랑스가 유럽의 패권국가 자리에 오르게 만들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유럽의 각국들을 분할하고 서로 견제하게 만들었고, 자신의 측근들과 친척들을 유럽 다른 나라들을 통치하게 해 프랑스의 위상을 유지했다.
프랑스 혁명기 혁명 정부 (총재 정부, 5명의 총재가 통치하고 있던 기간)는 나폴레옹의 인기가 너무 높아지자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를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떨어뜨려 놓기 위해 이집트로 파병 명령을 내렸다. 명목은 영국과 인도를 잇는 길을 차단함으로써 영국의 인도 지배를 방해하고 그 세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었다.
1798년 5월 나폴레옹은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에 상륙한 후, 지역의 호족들을 쳐부수고 카이로에 입성하여 피라미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때 나폴레옹이 대동한 180명 가량의 학자들은 이집트의 고대 유적을 비롯하여 이집트에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 고대 이집트의 역사나 풍속 등을 조사하였다.
이때 발견된 로제타석이 결국 고대 이집트 문명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이 로제타석은 세 면으로 나뉘었고, 윗면은 고대 그리스어, 둘째 면은 이집트의 평민어였던 데모닉 그리고 마지막은 이집트의 고대어 하이에로글리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돌은 나폴레옹의 시리아 원정의 실패 후 이집트에 주둔한 영국군에 의해 대영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나폴레옹은 이 비문을 해석하길 적극 권장했으나 살아서 이 돌의 해석을 보지 못하고, 후에 프랑스의 천재 언어학자 샹폴리옹에 의해 완벽히 해석된다.
한편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 나간 동안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사면초가에 빠져 있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다시 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왕정복고를 명분으로 프랑스를 위협하였다. 이때 주변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던 나폴레옹은 다음 원정인 인도 원정을 취소했다.
7월 프랑스 해군이 아부키르 만에서 호라시오 넬슨의 영국 함대에 패하고 프랑스 지중해 함대 주력이 전멸한다.
이 승리로 영국 해군이 해당지역의 재해권을 장악하게 되고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큰 차질을 빚게 된다. 이때 프랑스 해군 전열함들이 전멸 당하고 두척만 생존한다. 이로 말미암 나폴레옹과 이집트 원정군은 아프리카에 고립되고 만다. 나폴레옹은 본국과 연락이 끊기자, 혁명 정부의 명령도 받지 않고 혼자 몰래 이집트에서 탈출하고서 10월에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당시 오백인회와 원로원은 이 문제로 말미암아 거의 매일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정국을 지켜보고서 동생인 오백인회 의장 루시앵과 시에예스, 탈레랑의 도움으로 1799년 11월 9일 의사당에서 자신의 정부를 승인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오백인회는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군대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중간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그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이미 그가 장악한 군대와 30여 명의 테르미도르파 의원들의 지지로 그는 오백인회를 해산시켜 헌법을 폐기하고 3명의 통령을 두는 새 헌법을 만들어 국민 투표에 부쳤다.
나폴레옹은 개인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프랑스 원로원으로부터 10년 임기의 제1통령으로 임명되어 불과 30세 나이에 사실상 프랑스 정권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통령 정부가 3명의 통령으로 이루어졌으나, 제2통령과 제3통령은 명예직에 불과하였고 권력은 제1통령인 나폴레옹에게 모아졌다.
제2통령은 법무, 제3통령은 재정을 책임지는 반면, 제1통령은 내정과 외교, 군사 등을 책임졌으므로 그 권한은 다른 통령에 비하여 더욱 막강하였다.
5년 뒤에 프랑스 원로원이 그를 황제 자리에 앉혔다. 19세기의 첫 10년 동안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제국은 나폴레옹 전쟁을 주도하였다.
유럽의 모든 강대국이 이 전쟁에 휘말렸으며, 많은 승리 뒤에 프랑스는 유럽의 지배적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유럽의 각국들을 분할하고 서로 견제하게 만드는 한편 자신의 측근들과 친척들을 유럽 다른 나라들을 통치케 하여 프랑스의 위상을 유지시켜나갔다.
하지만 스페인의 무장시민들의 끈질긴 쿠데타와 1812년의 러시아 원정 실패는 나폴레옹의 삶을 완전히 돌려놓았다.
그의 대육군은 스페인과 러시아에서의 실패로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손실을 보았으며 이후 재건된 프랑스 군대는 규모는 여전히 러시아 다음으로 유럽에서 가장 큰 육군이었으나 내실에서는 결코 전성기 때 만큼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1813년에 라이프치히에서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의해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그 동맹이 파리에 입성하였고, 나폴레옹을 정권에서 내려오게 하고 엘바섬으로 유배 보냈다.
1년이 채 되지도 않았을 때 그는 엘바섬에서 도망쳐 나오고 권력을 다시 잡았지만, 1815년 6월에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완전히 상실한다.
이후 나폴레옹은 삶의 마지막 6년을 영국 왕실에 의해 구속된 채로 세인트 헬레나섬에서 1821년 5월 5일 사망한다.
부검 결과 사인은 위암으로 결론이 났으나, 그의 사인은 상당한 논쟁을 일으켰으며, 일부 학계 측에서는 비소 (만신재) 중독설도 제기되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