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6월 14일, 일본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川端康成, 1899 ~ 1972) 출생
가와바타 야스나리 (일: 川端 康成 かわばた やすなり, 1899년 6월 14일 ~ 1972년 4월 16일)는 일본의 소설가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 (川端康成かわばた やすなり)
.출생: 1899년 6월 14일, 오사카부 오사카시 텐진바시
.사망: 1972년 4월 16일 (72세), 가나가와현 즈시시
.국적: 일본
.직업: 소설가
.학력: 도쿄 대학
.수상: 기쿠치 간상 (1944), 일본 예술원상 (1952), 노마 문예상 (1954), Goethe Plaque of the City of Frankfurt (1959), Officer of Arts and Letters (1960), 문화훈장 (1961), 문화공로자 (1961),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1962), 노벨 문학상 (1968), 훈1등 욱일대수장 (1972), 기쿠치 간상 (1958)
.배우자: 가와바타 히데코
.친지: 가와바타 가오리 (사위)
.주요 작품: 이즈의 무희, 설국, 센바즈루, 고도, 잠자는 미녀, 산소리
일본의 소설가.
아름답고 유려한 문장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설국 등의 유명한 작품들을 통해 1968년 일본인 최초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오사카부 오사카시 기타구의 차화정 (此花町, 지금의 덴진바시 부근)에서 태어났다.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요코미쓰 리이치 등과 함께 『분게이지다이 (文藝時代)』를 창간하여 당시 유럽의 허무주의, 미래파, 표현주의 영향을 받아서 생긴 문학 유파였던 신감각파 (新感覺派)의 대표적 작가로서 활약하였다.
『이즈의 무희 (伊豆の踊子)』, 『설국』, 『천 마리의 종이학 (千羽鶴)』, 『산소리 (山の音)』, 『잠든 미녀 (眠れる美女)』, 『고도 (古都) 』 등 죽음이나 유전 속 ‘일본미 (日本美)’를 표현한 작품을 발표했고, 1968년 (쇼와 43년)에 일본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72년 (쇼와 47년)에 만 72세 (향년74세)로 사망하였다.
国境くにざかいの長ながいトンネルを抜ぬけると雪国ゆきぐにであった。夜よる底そこが白しろくなった。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 설국 中

○ 생애 및 활동
1899년 (메이지 32년) 6월 14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였던 에이키치 (榮吉)이고 어머니는 겐(ゲン). 누나는 와카코(芳子)였다. 1901년(메이지 34년)에 아버지가 죽고 외가가 있던 오사카부 니시나리군(西成郡) 도요사토무라(豊里村, 지금의 오사카시 히가시요도가와구)로 옮겼으나 이듬해에 어머니마저 죽고 할아버지 미하치로(三八郞), 할머니 가네(カネ)와 함께 미시마 군(三島郡) 도요카와무라(豊川村, 지금의 이바라키시)로 옮겼다. 1906년(메이지 39년) 도요카와 심상고등소학교(豊川尋常高等小学校, 지금의 이바라키 시립 도요카와 소학교)에 들어갔는데, 이때 동급생으로는 사사가와 료이치(笹川良一)가 있었고 할아버지와는 함께 바둑을 두는 등 사이가 좋았지만, 9월에 할머니가 죽고 1909년(메이지 43년)에는 따로 살고 있던 누나마저 사망하는 비극이 이어졌다. 1912년(메이지 45년) 오사카 부립 이바라키 중학교(지금의 오사카 부립 이바라키 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2년 뒤 할아버지까지 죽자 도요사토무라의 구로다(黒田) 집안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중학교 기숙사에 들어가 그곳에서 생활했다. 하급생으로 오오야 소이치(大宅壮一)가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도라타니(虎谷)’라는 이름의 책방이 있어 얼마 안 되는 돈을 털어 그곳까지 책을 사러 가곤 했다고 한다.
작가에 뜻을 두게 된 것은 중학교 2년때의 일로 1916년(다이쇼 5년)부터 『교한신보(京阪新報)』에 단편, 『분쇼세카이(文章世界)』에 단가를 투고하게 되었다. 1917년(다이쇼 6년)에 졸업하자 도쿄로 상경해 아사쿠사 구라마에(蔵前)의 사촌 집에서 얹혀 살면서 예비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여 제1고등학교의 1부 을(乙) 영문과에 들어갔다. 이듬해 가을에 이즈를 여행하다가 떠돌이 예인과 만나 교유한 경험은 훗날 『이즈의 무희』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 뒤 10년 동안 유가시마(湯ヶ島) 온천 여관을 드나들게 되었다.
1920년(다이쇼 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지만, 이듬해 국문과로 전과했다. 대학 동기로는 기타무라 기하치(北村喜八), 혼다 아키라(本多顕彰), 스즈키 히코지로(鈴木彦次郎) 등이 있었다. 입학한 해에 곤 도코(今東光), 스즈키 히코지로 등과 함께 동인지 『신사조(新思潮)』(제6차) 발행을 기획하여 국문과로 전과한 이듬해에 실행에 옮겼고, 그곳에 발표한 작품 「초혼제일경(招魂祭一景)」이 기쿠치 간에게 인정받아 『분게이슌주(文芸春秋)』(1923년 창간)의 동인이 되어 문인의 길에 들어섰다. 1924년 대학을 졸업하고(졸업 논문은 「일본소설사 소론日本小説史小論」) 요코미쓰 리이치, 가타오카 갓페이(片岡鉄兵), 나카가와 요이치(中河与一), 사사키 모사쿠(佐佐木茂索), 곤 도코 등 14명과 함께 동인지 『분게이지다이(文芸時代)』를 창간, 「이즈의 무희」를 지면에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했다.

초기에는 왕조문학이나 불교 경전의 영향을 받아 허무한 슬픔과 서정성이 넘치는 작품을 많이 썼다. 이후 비현실적인 미의 세계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전환해 「설국」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37년 「설국」이 일본의 문예간담회상을 수상하였고, 1944년(쇼와 10년)에 「고향(원제: 故園)」, 「석일(원제: 夕日)」 등의 작품으로 기쿠치 간 상을 수상한다. 이 무렵 미시마 유키오가 가져온 「담배(원제: 煙草)」를 호평하였는데, 미시마에게 있어 가와바타는 그를 문단에 데뷔시킨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다. 1945년(쇼와 20년) 4월에 일본 해군보도반(海軍報道班) 반원(소좌 대우) 자격으로 가지마(鹿島)까지 따라가 가미카제를 취재하기도 했다. 이때 함께 갔던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荘八)는 그 자신의 작가관까지 바뀔 정도의 충격을 받았고, 가와바타는 이때의 일을 토대로 「생명의 나무(원제: 生命の樹)」를 집필하였다. 그 뒤 「천 마리의 종이학」, 「산소리」 등을 단속적으로 발표하면서, 패전 뒤인 1948년에는 일본 펜클럽 제4대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1957년에는 도쿄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 대회에서 주최국 일본측의 회장으로서 활약하여 이듬해에 기쿠치 간 상을 또 한 번 수상한다. 1958년에 국제 펜클럽 부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1962년 세계평화 어필 7인 위원회에 참가하였고, 1963년에는 새로 생긴 일본근대문학관(日本近代文学館)의 감사(監事)역을 맡게 되었다. 1964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 대회에 출석하였다. 단속적으로 작품 「단포포(たんぽぽ)」의 연재를 『신조(新潮)』에 시작하였다. 1965년에 일본 펜클럽 회장직을 사임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맹장염으로 도쿄대학 병원에 입원하였다.
무려 12년간이나 창작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설국》은 가와바타의 미의식이 절정을 이루는 작품으로, 그 문학성이 인정되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68년 10월,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일본인의 심정의 본질을 그린, 몹시 섬세한 표현에 의한 서술의 탁월함(for his narrative mastery, which with great sensibility expresses the essence of the Japanese mind).”이 노벨상 위원회의 수상평이었다. 12월 스톡홀름에서 열린 수상식에서 가와바타는 연미복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수여한 문화 훈장이 달린 몬쓰키하오리하카마(紋付羽織袴) 차림으로 수상에 임했고, 기념 강연 「아름다운 일본의 나(美しい日本の私) 그 서론」을 행했다.
이후 1969년부터 1974년에 걸쳐 신초샤에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전집」(전19권)이 간행되었고, 타이베이의 아시아 작가 회의뿐 아니라 1970년에 한국에서의 서울 국제펜클럽 대회에 출석하였으며 일본 근대 문학관의 명예 관장으로도 취임했다. 하지만 노벨상 수상 뒤에 발표한 작품은 단편 몇 개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는 노벨상 수여에 따른 중압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2012년 9월 4일, 스웨덴 아카데미가 NHK의 공개 청구에 응하여 개시한 노벨 문학상 전형 과정의 자료를 통해 가와바타가 노벨상을 수상하기 7년 전인 1961년에 이미 노벨상의 후보로 결정되어 있었음이 밝혀져 NHK 뉴스를 통해 보도되었다.
노벨 문학상 3년 뒤인 1972년 4월 16일, 가나가와현 즈시시의 맨션 「즈시 마리나」의 자택 작업실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가스에 의한 자살. 향년 73세였다.
계명은 문경원전고산강성대거사 (文鏡院殿孤山康成大居士), 대도원수예문화강성거사 (大道院秀藝文華康成居士).
1973년에 재단법인 가와바타 야스나리 기념회에 의해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이 제정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5년에는 이바라키 시립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관’이 개관했다. 또한 이바라키시 명예 시민으로도 임명되었다.

– 사망에 대하여
사망 당시 그의 사인은 자살로 보도되었고 이것이 통설이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가와바타의 사망 전후 상황으로 볼 때 자살이 아닌 사고사가 아니냐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자살설
교제가 깊었던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 자살 (이때 가와바타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여겨지며, 미시마의 장례식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71년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마했던 자유민주당 후보 하타노 아키라(秦野章)의 지원 활동에 떠밀려 나간 것에 대한 수치(하타노는 낙선했다. 다만 가와바타가 본래 정치에 관심이 있었다고 하는 형적은 없다)
늙음(창작 의욕의 감소)에 대한 공포 등으로 인한 강한 정신적 동요
가와바타가 좋아했던 가정부의 퇴직(이는 1977년 우스이 요시미의 소설로도 각색되었으나 유족들로부터 명예훼손 소송을 당해 합의 조건으로 절판).
이상이 가와바타의 자살 동기로서 거론되는 정황 증거들이지만, 자살설을 비판하는 측에서는 첫 번째 증거는 일시가 너무 떨어져 있고 두 번째 증거는 자살 동기로서는 너무 약하고, 세 번째 증거는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문예 평론가의 해석일 뿐 구체적 증명은 없으며 네 번째 증거도 주관적 기술에 불과하며 사실 검증은 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사고사설
이전부터 가와바타는 줄곧 수면제를 복용하고 있었다(심야에 집필하는 일이 많은 작가들에게서 수면제 복용은 드문 것이 아니다).
유서가 없었다.
보통 스스로 조작한적 없는 난방 기구의 사용 착오(가스 스토브의 미연소 가스가 방에 가득했다고 여겨진다).
가와바타 일본 펜클럽 회장으로 있을 때의 부회장이었던 세리자와 고지로(芹沢光治良)는 추도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죽음(川端康成の死)」에서 자살은 아니었을 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가와바타의 죽음 전후로 그를 만났던 여러 관계자의 증언에서 가와바타가 자살했음을 암시해주는 어떤 징후도 없었다는 것이다(가와바타 자신도 그 해 가을에 개최된 국제 펜클럽 대회의 준비에서 책임자로서 여러 일을 하고 있었다).

○ 일화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 문학사에 찬연히 빛나는 수많은 명작을 남긴 근현대 일본 문학의 중요한 작가로 오늘날까지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쓴 작가로 소개되곤 한다. 주요 작품은 대부분 문단의 연구 대상이 되었고 본인도 전문 잡지 등에 기고한 창작에 관한 수필 등에서는 약간 요설(饒舌)에 기술하는 것이 있었기에 작품 속에 다소 각색된 모델이나 로케이션, 등장 사물이 순전한 창작(가공의 사건)에 의한 것은 아니었음이 구체적으로 판명된 경우도 많다.
부립 이바라키 중학에 수석으로 입학하여 신동으로 불렸다. 다만 수필 등에서 나오듯이 가와바타의 관심은 입학한 뒤에 곧장 예술이나 어른들의 세계로 향하고 있었고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그의 졸업 성적표에 보면 가와바타의 작문 성적은 53점으로 전학생 88명 가운데 86등이었다.
교토 안에 현존하는 유일한 양조장 사사키 주조(佐々木酒造)에서 만든 일본술을 맛보고 “이 술의 풍미야말로 교토의 맛이다”라며 작품 이름을 「고도」라 지었다. 만년에 가와바타는 숙박지에서 구와바라 다케오(桑原武夫, 교토대 명예교수)와 면회했을 때에 “고도라는 술을 알고 계신가?” 라고 물어서 모른다고 대답한 구와바라에게 그 술을 맛보여 주고자 추운 밤에 직접 30분 걸리는 길을 걸어서 사러 갔다고, 구와바라는 회상하고 있다.
일본 기원(日本棋院) 내에 있는 대국용 방에는 가와바타가 쓴 「심오유현(深奥幽玄)」이란 족자가 있다. 바둑을 좋아하여 당시 조선인 출신으로 일본에서 문명을 떨치고 있던 김소운(金素雲)이 가와바타의 집에 갔다가 바둑판을 발견하고 “바둑을 얼마나 두십니까?” 라고 묻자 가와바타는 “그저 조금 두지요.”라고 대답했고, 당시 8, 9급 수준도 되지 못했던 김소운은 자신 정도의 실력이려니 짐작하고 “언제 한 수 배울까요?” 하고 그에게 대국을 제안했고 가와바타는 “네, 연락 드리지요.” 하고 승락했다. 하지만 돌아와서야 가와바타가 명인전(名人戰)의 기보(棋譜)까지 쓸 정도의 아마추어 최상급의 바둑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실수했음을 깨달았고, 마침 가와바타가 전화를 걸어 지난 번 약속대로 바둑을 두자고 하는 것에 다른 핑계를 대고 빠져버린 뒤, 『분게이슌주』에 수필을 실어서 가와바타에게 답했다고 한다.
전쟁 중에 가노야 해군항공대(鹿屋海軍航空隊)에 첩보반으로서 부임하고 있었을 무렵, 부대 소속의 소위 스기야마 유키테루(杉山幸照)는 그에게 예전 연료 보급을 위해서 착륙한 스즈카에서 오랜 비행으로 지쳐 얼굴이 창백한 와중에도 사관 식당에서 나온 카레라이스를 기운이 다 빠진 상태에서 깨끗이 비웠던 경험을 말하며 ‘특공의 비인간성’에 대해 가와바타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당시 스기야마는 원래 특공대 쇼와대 소속으로, 전속 명령이 나와 가와바타와 함께 야타베의 해군 기지로 가는 중이었다). 스기야마는 훗날 자신의 저작에서 가와바타가 끝까지 특공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유감이었다고 적고 있다. 가와바타는 부임전에 일본군 본영의 보도부 소속 다카도(高戸) 대위로부터 “특공을 잘 봐 두십시오. 다만 쓰고 싶지 않으면 쓰지 않으셔도 좋다. 언젠가는 이 전쟁의 실상을 글로 써주셨으면 좋겠다”라는 통고를 받았던 것이다. 후에 다카도는 “섬세한 신경이었기에 (특공에 관해서) 붓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다.
○ 수상 경력
1937년 – 「설국」으로 문예간담회상 수상
1944년 – 「고향」, 「석양」 등으로 기쿠치간상 수상
1952년 – 「천 마리의 종이학」으로 예술원상(芸術院賞) 수상
1954년 – 「산소리」로 제7회 노마 문예상(野間文芸賞) 수상
1958년 – 도쿄 국제 펜클럽에서 활약한 데에 대한 노고 치하로서 제6회 기쿠치간상 수상
1962년 – 「잠든 미녀」로 제16회 마이니치 출판 문화상(毎日出版文化賞) 수상
1968년 – 노벨 문학상 수상

○ 작품 목록
– 주요작품
이즈의 무희(伊豆の踊子)
설국(雪国)
고도(古都)
단포포(たんぽぽ)
산소리(山の音)
여자라는 것(女であること)
명인(名人)
이즈의 여로(伊豆の旅)
무희(舞姫) 등 다수
*作品
各参考文献内の年譜、経歴内などで言及されている作品を中心に記載。
– 作文・習作
箕面山(1911年)
読書(1912年1月)
友人に登山を勧む(1913年)
桃山御陵参拝記(1913年)
大正二年と三年(1913年)
春夜友を訪ふ(1914年3月)
弔詩(1914年)
白骨を迎ふ(1914年)
藤村詩集(1914年)
詩人たらむ(1914年)
雨だれ石を穿つ(1916年)
H中尉に(1916年3月)
淡雪の夜(1916年)
むらさきの茶碗(1916年)
月見草の咲く夕(1916年)
雪報(1916年)
自由主義の真義(1916年)
青葉の窓より(1916年)
少女に(1916年)
永劫の行者(1916年)
生徒の肩に柩を載せて(1917年) – のち1927年3月に「学窓ロマンス 倉木先生の葬式」と改題し再発表。1949年に「師の柩を肩に」として『東光少年』に再発表。

– 小説・自伝作品
※ 太字は中編・長編小説。自伝作品は★印
ちよ(1919年6月)
ある婚約(1921年2月)
招魂祭一景(1921年4月)
油(1921年7月)★
一節(1922年3月)
湯ヶ島での思ひ出(1922年夏の草稿)★
林金花の憂鬱(1923年1月)
精霊祭(1923年4月)
男と女の荷車(1923年4月)
会葬の名人(のち「葬式の名人」と改題)(1923年5月)★
南方の火(1923年8月)★ – 改稿同名作が他に3編あり(1編は未発表)。
日向(1923年11月)
篝火(1924年3月)★
生命保険(1924年8月)
弱き器(1924年9月)
火に行く彼女(1924年9月)
鋸と出産(1924年9月)
バッタと鈴虫(1924年10月)
非常(1924年12月)★
髪(1924年12月)
港(1924年12月)
金糸雀(1924年12月)
写真(1924年12月)
白い花(1924年12月)
月(1924年12月)
星を盗んだ父(未発表、1924年頃と推定) – モルナール・フェレンツの戯曲「リリオム」(Liliom)の翻案。
落葉と父母(のち「孤児の感情」と改題)(1925年2月)★
十七歳の日記(のち「十六歳の日記」と改題)(1925年8月-9月)★
青い海黒い海(1925年8月)
二十年(1925年11月)
朝鮮人(のち「海」と改題)(1925年11月)
お信地蔵(1925年11月)
滑り岩(1925年11月)
万歳(1925年12月)
有難う(1925年12月)
白い満月(1925年12月)
伊豆の踊子(1926年1月-2月)
白い靴(のち「夏の靴」と改題)(1926年3月)
母(1926年3月)
心中(1926年4月)
龍宮の乙姫(1926年4月)
処女の祈り(1926年4月)
霊柩車(1926年4月)
雀の媒酌(1926年4月)
恋を失ふ(のち「伊豆の帰り」と改題)(1926年6月)
神います(1926年7月)
帽子事件(1926年7月)
屋上の金魚(1926年8月)
祖母(1926年9月)★
大黒像と駕籠(1926年9月)
彼女の盛装(1926年9月)★
蚕女(1926年9月)
犠牲の花嫁(1926年10月)
五月の幻(1926年12月)
女(1927年2月)
恐ろしい愛(1927年2月)
歴史(1927年2月)
学窓ロマンス 倉木先生の葬式(1927年3月)
美しい!(のち「美しき墓」に改編)(1927年4月)
梅の雄蕊(1927年4月) – 副題:「婚礼と葬礼」の二。『春景色』の一部分
柳は緑 花は紅(1927年5月) – 副題:「婚礼と葬礼」の二――「梅の雄蕊」のつづき。『春景色』の一部分
結婚なぞ(1927年5月)
暴力団の一夜(のち「霰」と改題)(1927年5月)★
馬美人(1927年5月)
百合の花(のち「百合」と改題)(1927年5月)
処女作の祟り(1927年5月)
神の骨(1927年7月)
海の火祭(1927年8月-12月)
薔薇の幽霊(1927年10月)
盲目と少女(1928年2月)
死者の書(1928年5月)
母国語の祈祷(1928年5月)
故郷(1928年6月) – 同名の別作品あり。
叩く子(1928年9月)
秋思ふ春(1928年10月) – 「梅の雄蕊」「柳は緑 花は紅」と併せて『春景色』となる。
笑はぬ男(1928年)
貧者の恋人(1928年)
美しき墓(1929年3月)
級長の探偵(1929年3月)
日本人アンナ(1929年3月)
死体紹介人(1929年4月-1930年8月)
顕微鏡怪談(1929年8月)
踊子旅風俗(1929年9月)
温泉宿(1929年10月)
浅草紅団(1929年12月-1930年2月)
花のある写真(1930年4月)
水族館の踊子(1930年4月)
鶏と踊子(1930年5月)
針と硝子と霧(1930年11月)
縛られた夫(1930年)
白粉とガソリン(1930年)
浅草日記(1931年1月-2月)
水晶幻想(1931年1月・7月)
落葉(1931年12月)
父母への手紙(1932年1月、4月、9月。1933年9月。1934年1月)★
抒情歌(1932年2月)
雨傘(1932年3月)
喧嘩(1932年3月)
化粧(1932年4月)
妹の着物(1932年4月)
それを見た人達(1932年5月)
浅草の九官鳥(1932年6月-12月)
浅草に十日ゐた女(1932年7月)
化粧と口笛(1932年9月-11月)
慰霊歌(1932年10月)
浅草の姉妹(1932年11月)
二十歳(1933年2月)
開校記念日(1933年2月)
寝顔(1933年4月)
夏の宿題(1933年7月)
禽獣(1933年7月)
学校の花(1933年9月-12月)
散りぬるを(1933年11月-1934年5月)
キャラメル兄弟(1933年12月)
薔薇の家(1934年2月)
南方の火(1934年7月)★ – 一回掲載でそのまま放置されたもの
虹(1934年3月-1936年4月)
水上心中(1934年8月-12月)
浅草祭(1934年9月-1935年3月)
扉(1934年10月)
姉の和解(1934年12月)
雪国(1935年1月-1937年5月。1940年12月-1947年10月)
舞姫の暦(1935年1月-3月)
田舎芝居(1935年5月)
童謡(1935年10月)
イタリアの歌(1936年1月)
花のワルツ(1936年4月-7月。1937年1月)
むすめごころ(1936年8月)
父母(1936年10月)
夕映少女(1936年12月)
女性開眼(1936年12月-1937年7月)
乙女の港(1937年6月-1938年3月)
牧歌(1937年6月-1938年12月)
高原(1937年11月-1939年12月)
金塊(1938年4月)
花日記(1938年4月-1939年4月)
故人の園(1939年2月)
美しい旅(1939年7月-1942年10月)
母の読める(1939年10月-1940年1月)
旅への誘ひ(1940年1月-9月)
正月三ヶ日(1940年1月)
母の初恋(1940年1月)
女の夢(1940年2月)
ほくろの手紙(1940年3月)
夜のさいころ(1940年5月)
燕の童女(1940年6月)
夫唱婦和(1940年7月)
日雀(1940年7月)
子供一人(1940年8月)
ゆくひと(1940年11月)
年の暮(1940年12月)
寒風(1941年1月-1942年4月)
朝雲(1941年2月)
名人(1942年8月-1947年4月。1951年8月-1954年5月)
父の名(1943年2月-3月)★
故園(1943年5月-1945年1月)★
夕日(1943年8月-1944年3月) – 『名人』の中の一部
ざくろ(1943年5月)
東海道(1943年7月-10月)
十七歳(1944年7月)
わかめ(1944年7月)
小切(1944年7月)
さと(1944年10月)
水(1944年10月)
女の手(1946年1月)
挿話(のち「五十銭銀貨」と改題)(1946年2月)
再会(1946年2月-7月)
さざん花(1946年12月)
生命の樹(1946年7月)
夢(1947年11月)
再婚者の手記(のち「再婚者」と改題)(1948年1月-8月)
少年(1948年5月-1949年3月)★
南方の火(1948年8月)★ – 『海の火祭』(全11章)の「鮎」の章を独立させて改稿した完結編(「篝火」「非常」「霰」と重複する内容あり)
足袋(1948年9月)
手紙(のち「反橋」と改題)(1948年10月)
かけす(1949年1月)
夏と冬(1949年1月)
生きてゐる方に(1949年1月)
しぐれ(1949年1月)
住吉物語(のち「住吉」と改題)(1949年4月)
千羽鶴(1949年5月-1951年10月)
骨拾ひ(1949年10月) – 執筆は1916年
山の音(1949年9月-1954年4月)
天授の子(1950年2月-3月)★
水晶の玉(1950年3月)
虹いくたび(1950年3月-1951年4月)
笹舟(1950年4月)
卵(1950年5月)
地獄(1950年5月)
蛇(1950年7月)
舞姫(1950年12月-1951年3月)
たまゆら(1951年5月)
岩に菊(1952年1月)
日も月も(1952年1月-1953年5月)
富士の初雪(1952年12月)
川のある下町の話(1953年1月-12月)
無言(1953年4月)
波千鳥(1953年4月-1954年7月) – 『千羽鶴』の続編
水月(1953年11月)
みづうみ(1954年1月-12月)
東京の人(1954年5月-1955年10月)
離合(1954年8月)
ある人の生のなかに(1955年1月-1957年3月。1964年1月)
故郷(1955年4月)
雨だれ(1956年1月)
女であること(1956年3月-11月)
風のある道(1957年1月-1958年10月)
弓浦市(1958年1月)
並木(1958年1月)
眠れる美女(1960年1月-1961年11月)
匂ふ娘(1960年11月)
美しさと哀しみと(1961年1月-1963年10月)
古都(1961年10月-1962年1月)
秋の雨(1962年11月)
手紙(1962年11月)
隣人(1962年11月)
木の上(1962年11月)
乗馬服(1962年11月)
人間のなか(1963年2月)
かささぎ(1963年7月)
片腕(1963年8月-1964年1月)
不死(1963年8月)
月下美人(1963年8月)
地(1963年8月)
白馬(1963年8月)
雪(1964年1月)
たんぽぽ(1964年6月-1968年10月未完)
めづらしい人(1964年11月)
たまゆら(1965年1月-1966年3月)
髪は長く(1970年4月)
竹の声 桃の花(1970年12月)
隅田川(1971年11月)
雪国抄(1972年8月)

– 評論・随筆
南部氏の作風(1921年12月)
大火見物(1923年11月)
日本小説史小論(1924年3月)
新しき生活と新しき文藝――創刊の辞に代へて(1924年10月)
新進作家の新傾向解説(1925年1月)
掌篇小説の流行(1926年1月)
熱海と盗難(1928年2月)
芥川龍之介氏と吉原(1929年1月)
新人才華(1929年9月。1930年6月)
上野桜木町へ(1929年11月)
嘘と逆〈自己を語る〉(1929年12月)
「伊豆の踊子」の映画化に際し(1933年4月)
末期の眼(1933年12月)
文学的自叙伝(1934年5月)
梶井基次郎(1934年9月)
純粋の声(1935年7月)
旅中文学感(1935年11月)
純文藝雑誌帰還説(1935年12月)
軽井沢だより(1936年10月)
本因坊名人引退碁観戦記(1938年7月-1939年3月)
四つの机(1940年7月)
日本の母(1942年10月)
「日本の母」を訪ねて(1942年12月)
英霊の遺文(1942年12月。1943年12月。1944年12月)
島木健作追悼(1945年11月)
武田麟太郎と島木健作(1946年5月-7月)
哀愁(1947年10月)
横光利一(のち「横光利一弔辞」と改題)(1948年2月)
新文章講座(のち「新文章読本」と改題)(1949年2月-1950年11月)
月下の門(1952年2月-11月)
古賀春江と私(1954年3月)
敗戦のころ(1955年8月)
東西文化のかけ橋――新しい年への期待(1957年1月)
雨のち晴――国際ペン大会を終つて(1957年9月)
世界の佳人(1958年1月)
岸惠子さんの婚礼(1961年1月-9月)
枕の草子――落花流水(1962年10月)
秋風高原――落花流水(1962年11月-1964年12月)
伊豆行――落花流水(1963年6月)
行燈――落花流水(1964年2月)
パリ郷愁(1964年7月)
パリ安息(1964年7月)
水郷(1965年7月)
一草一花――「伊豆の踊子」の作者(1967年5月-1968年11月)
秋の野に(1968年12月)
夕日野(1969年1月)
ハワイだより(1969年4月)
思ひ出すともなく(1969年4月)
伊藤整(1969年1月)
夜の虹(1969年6月)
鳶の舞ふ西空(1970年3月)
独影自命(1970年10月)
三島由紀夫(1971年1月)
志賀直哉(1971年12月-1972年3月)
夢 幻の如くなり(1972年2月)

– 講演・声明
文化大革命に関する声明(1967年2月) – 三島由紀夫、石川淳、安部公房と共同執筆。
美しい日本の私―その序説(1968年12月)
美の存在と発見(1969年5月)
日本文学の美(1969年9月)
源氏物語と芭蕉(1970年6月)
以文会友(1970年6月)
新人でゐたい(1972年6月)
– 脚本・台本
狂つた一頁(1926年7月)
船遊女(1954年9月)
古里の音(1955年1月)
– 翻訳・現代語訳
Oasis of Death(1922年1月) – 原作・ロード・ダンセイニ
竹取物語(1937年8月)
小公女(1953年) – 野上彰との共訳
小公子(1955年) – 度々、各・新版再刊した
ラング世界童話全集(1958年) – 野上彰との共訳
– 作詞
生きてゐるのに(1968年6月)
京都の都ホテルで作詞。翌1969年(昭和44年)4月に三田レコード制作部より、北條暁作曲・歌唱でレコード化されたもの。
カレッジフォークグループのエマノンズがカバーした。エマノンズ版の音源は東芝EMIファミリークラブから発売された通販限定CD-BOX『カレッジポップス クロニクル』や2006年に日本コロムビアから発売されたCD『フォーク歌年鑑 ’69 Vol.2 フォーク&ニューミュージック大全集 5』[注釈 45]などに収録されている。
– 未発表作品
内は執筆日
感情の乞食
新晴(1922年6月24、25日)★ – 「篝火」の元
時代の祝福(推定1927年5月以降の年内)
南方の火(1923年)★ – 最初の1923年7月発表の「南方の火」の続編の断片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