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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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Anzac day” 정신
1916년부터 영국 정부는 영국과 독일이 싸웠던 제 1차 세계 대전에 호주와 뉴질랜드 청년들도 참전할 수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많은 호주 젊은이가 입대를 위해 수도였던 멜본으로 몰려욌다. 잘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세계에 해가 질 날이 없던 대영제국”은 같은 동족이기는 하여도 “Australia”라고 하면 영국인들은 죽음의 땅으로 인식되었고 시드니의 아름다운 해변도 “Fatal Shore” (죽음의 해안)으로 간주 했다. 호주는 죄인 유배지였기 때문이다. 호주 젊은이들 생각은 “대영제국의 군대”가 되면 모든 것이 새로워 질것이라고 확신 하였다.
입대하기 위해 시드니 동부 Waverly에 살았던 Emile Harris는 서기 (Clerk)로 일하던 중 직업을 버리고 입대수속을 했는데 그 당시 15세 10개월 인데 18세로 속이고 입대하다 Gallipoli 전투에서 1918년 8월 8일 사망했다. 나이를 늘렸다 줄였다는 보통이고 여자가 남자고 변신하여 입대하려던 사건은 유명하다. Maud Buler라는 16세 소녀는 “뉴카슬” 옆에 석탄 광산촌인 Kurri Kurri에 석탄광부 딸로 태어났다. 그는 1916년 12월 성탄절을 며칠 남기고 호주군복을 사서 입고 머리를 남자처럼 깎고 1차 세계 대전에 참석하기 위해 많은 호주군들을 운송하는 배 (HMAT)에 몰래 타서 2일이나 항해 했다. 그는 구명보트에 몰래 숨었다. 그러나 기여코 잡히고 만다. 그는 기자들에게 나는 “전쟁을 하기 위해서 배를 탄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고져 하는 ‘간호병’을 위해 배를 탓다”고 말한다. 내가 사는 Kuri Kuri에서는 간호 기술을 배울 학교가 없었다고 그는 기자들에게 말한 것이 전해지고 있다.
입대한 호주 군대는 그 당시 영국과 군사동맹을 맺었던 일본 수송으로 서부호주 항구로부터 출발했다. 그 당시 영국은 넓은 식민지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군대는 얼마든지 필요했다. 호주는 영어가 통하고 문화가 같은 앵클로 색슨으로 영국 군대로서 절대 필요 했던 것이다. 이집트 카이로에 도착한 첫 번째 호주군과 뉴질랜드군 15,000명은 국가의 첫째 ANZAC 부대라 명하고 얼마간 훈련을 시킨 후 충분한 주급도 지불했다. 카이로 시내를 거닐면서 충분히 돈을 쓰고 맛있는 것, 재미있는 것을 마음껏 즐겼다. 1918년 4월 24일 도착한 곳은 영국, 프랑스군 20여만 명이 독일군과 오스만 터키군과 대치하고 있는 Gallipoli 지역이였다. 이곳은 영국의 연합군 러시아 군대가 흑해를 넘어오도록 길을 열어주는 작전이였다. 바로 이 작전에 ANZAC 부대가 포함되었다. 영국이나 프랑스 군대들은 충분한 땅을 파서 숨을 수 있는 참호가 있지만 새벽 4시 상륙명령을 받은 ANZAC 부대는 이곳에 지형과 전투 경험없이 새벽에 상륙했다.
당시 처음 기관총으로 무장한 독일군과 터키군들은 인해 전술로 오는 ANZAC 부대를 무참히 살해하기 시작했다. 삽시간의 4-5천명의 군대가 죽어 갔다. 조금까지 말을 나누었던 전우가 피를 흘리며 한마디 말도 없이 죽어가는 것이다. 어떤 이는 죽어갈 때 “우리 가정을 부탁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돌보던 사람은 “걱정하지 마” 하면서 죽어가는 전우를 안고 눈물을 흘린다. 부상자는 사망자의 3배정도이다. 아침이 되어 안전한 지대에 모인 Anzac군들은 새벽 전투로 수 많은 전우를 잃은 아픔에 아무나 서로 끼어 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렀다. “전우여 잘가라”
1차 세계 대전은 “탱크”가 없었던 전쟁으로 인구 500만도 채 안된 호주에 6만 명이 사망했고, 2차 대전에는 4만 명이 사망해서 양대 전쟁에 10만 명의 호주 젊은이들이 피를 흘렀다. 전쟁을 통해 호주는 “MateShip”이 생기고 국가 정체성이 확립되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호주에서 영국군 지원자 수도 많이 줄어들었다.
호주군 역사학자 Peter Stanley는 호주에서 “Anzac Day” 정신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Gallipoli 전투에서 생존자와 유럽 서부 전선 (프랑스 수비)에서 수많은 호주군이 전사를 했을 때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들의 전우를 기억했던 1920대는 모든 호주인들이 Anzac day (4월 25일 아침 4시경)을 기억하였다. 또한 그들의 가족까지도 도움을 주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는 Anzac 행사에 살아있는 사람들이 군복을 입고 행진하는 모습에 대하여 아들을 잃었거나 남편을 일었거나 부친을 잃은 가족은 오히려 마음이 더욱 아파하면서 행진의 모습에 거부 반응도 보여왔다. 1960년대 와서는 전쟁 자체가 죄가 된다는 논리와 호주가 아닌 특정국가의 이익을 위해 죽어가는 군대로 묘사되기도 하였으며, 특히 1970년대 미국의 무모한 월남전을 위해 군사 동원령까지 내린 호주에 대한 거부감은 심각했다.
1980년대 이후 아세아 지역 국가의 대량 이민으로 인해 “Anzac Day” 개념은 점점 시들어가고 있는데 2022년부터 인디안 이민자들이 많이 호주에 오고 있다. 인도는 100만 명 이상 영국군과 같이 싸워온 나라이기 때문에 Anzac Day가 다시 살아날 수도 있다고 말한다. Anzac 에 흘린 피가 강대국 간섭 없이 오늘의 넓은 영토와 넓은 바다를 영유하게 된 이유이다.
높아진 물가로 서민 생활 어렵다
호주 중앙은행은 금리 0.1%를 2024년까지 계속할 것을 발표했다. 그러나 작년부터 10번의 이자를 올려 현재 3.6%까지 올렸다. 많은 젊은이들이 싼 이자에 집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시드니와 멜본 집값은 “Covid-19” 기간에도 크게 올라 100만 불 선을 넘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해 자유우방국가들은 “Covid-19” 기간 중 막대한 금액을 실업자와 정부의 통제령 (Lockdown)으로 문을 닫은 기업과 자영업자에게 많은 금액을 지불해 주었다. 호주도 국민총생산액 (GNP)의 14%가 되는 3,000억불을 지원해 주었다. 미국은 민주당이 집권하고부터 개인당 미화 4,000불을 지원해 주어 이들의 소비력이 크게 신장 되었다. 코로나 2년 가까이 생산이 크케 줄고 값싼 세계 공장인 중국의 생산력이 줄자 물자가 귀해지고 값이 폭등하기 시작 했다. 더욱이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은 물가 상승을 부채질 했다.
물가가 크게 오르자 소비를 줄이기 위해 은행이자를 높일 수밖에 없다, 호주 연방은행 (RBA)은 2025년까지 물가 상승이 2-3%가 될 때 까지 은행이자 올리기를 계속하겠다고 경고 했다. 은행 이자가 크게 오르자 집을 구매한 사람들은 전보다 14,000불 이상의 이자를 더 내야 한다. 집을 마련한 젊은이들이 이제는 커피 한잔이라도 줄여야 하는 실정이다. 서민들은 크게 오른 생필품을 구하기가 어려워 졌다. 연방 은행은 소비를 줄이기 위해 “인건비”를 올리지 말라고 경고하고 근래 유학생을 비롯해 이민자 일시 체류자 100만 명이 유입되는 것도 크게 우려하고 있다.
더욱이 유입된 사람들이 시드니, 멜본, 브리스베인 등에 “세”를 얻기 위해 셋 값이 크게 오르자 대도시 집값도 고이자에도 불구하고 다시 오르기 시작한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금년 3월 분기에는 작년 12월 분기보다 물가 상승률이 7.8%에서 7%로 하락되었다고 통계청은 발표했다. 금년 3월 분기 3개월 동안 1.4%만 올라 상당히 희망적이기도 하다. 가장 많이 오른 것은 “음식값과 알콜”가 8%를 기록하고 있다. 작년 12월 분기에는 음식값이 9.2%이다.
품목별로 크게 오른 것은 우유와 치즈로 14.9%이다. 이민자 증가에 따른 셋집이 크게 부족 되어 시드니 4.6%, 멜본 3.1%, 브리스베인 7%로 크게 올라 세를 사는 사람에게 큰 어려움을 주고 있다. 과거에는 정부 주택이 일반주택에 비해 9% 였으나 지금은 4%에 불과해서 주택 부족은 대도시에서 매년 문제가 되고 있다. 3월 분기 교육비가 5.3% 올랐다. 이중에 대학학비가 9.3% 올랐고, 중고등학비가 4.9% 오른대 비해 초등학교와 유치원은 오히려 0.8%가 하락되었다. 해외 여행비는 8.2% 하락되었고, 가구 값도 전분기 보다 4.6% 하락되고 옷값도 3.2% 하락되었다. 그러나 전기값과 가스 (Gas) 비가 문제이다. 시드니는 전기값이 25.7%가 오르고, 가스비가 21% 오른데 비해 멜본은 전기값 7.7%, 가스비가 35.8% 올랐다.
물가가 오르고 은행이자가 크게 올랐어도 호주의 취업률이 좋은 편이다. 작년부터 아직까지 실업률은 3.5%로 유지하고 있다. 50년 전인 1978년 아래 낮은 실업률이다. 1999년에는 실업률이 7%이고 2003년은 6%인 것을 고려 할 때 실업률은 크게 줄었다. 은행이자가 올라 기업들이 고통을 받는데도 실업률이 하락된 이유는 무엇일까? 정부가 “코로나 기간” 엄청난 돈을 기업이나 작은 자영업자에게 투자했다. 그 여력뿐 아니라 코로나 기간에는 국경봉쇄로 인해 이민자가 없어 인구는 크게 하락되었기 때문에 실업률도 크게 하락된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더 어려운 경제 여건이 되면 실업률도 오를 것이라는 전문가들 이야기도 많다. 계속 은행이 이자를 올리면 도산하는 기업이 늘어나 실업자는 15만 명 증가될 것이라고 한다.
특히 NSW주에는 남자 실업률 3.4%, 여자 실업률이 2.8%에 불과하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크게 성했던 2020년 중반에 여성근로자 해고 통지는 무려 14만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의료분야, 관광, 노인보호, 관광업, 교육 분야 등 각 분야의 여성 직원이 필요하게 되어 여성취업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특히 대학교육에 여성 진출이 오래 전부터 정보통신 (IT) 분야, 교사 등 남자를 능가해서 점점 고위직에 여성 직종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NSW주 노동당 정부에서는 남녀의 의원 배분을 50:50으로 여성의원이 22명으로 (49.40%)에 이르고 있고, 자유당에도 9명 (36%), 네쇼널 2명 (18%)으로 여성의원의 진출이 활발하다. 문제는 호주에서 여성 직업인이 남성보다 임금의 13%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고용자들은 여성들은 분만 휴가 등 남자처럼 일에 전념하는 기간이 짧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여성 단체들은 임금이 남자와 동일하게 해 줄 것을 바라고 있다.
취업률이 높지만 계속 은행이자 상승을 강행하며 15만 실업자 (실업률 1%)가 실업이 될 것을 예측하고 있다. IMF에서도 호주는 금년에 1.6% 경제가 성장되고 내년도에는 1.7%로 계속 어려움을 갖게 될 것을 예측하고 있다. 지금에 어려움이 세계적인 어려움이니 만큼 잘 인내력을 가지고 이기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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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명호 (SBS 방송인,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