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년 11월 24일, 프랑스의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Henri de Toulouse-Lautrec, 1864 ~ 1901) 출생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프: Henri de Toulouse-Lautrec, 1864년 11월 24일 ~ 1901년 9월 9일)는 프랑스의 화가이다.
–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Henri de Toulouse-Lautrec)
.출생: 1864년 11월 24일, 프랑스 알비
.사망: 1901년 9월 9일, 프랑스 셍-엉드헤-듀-부와 Château Malromé
.묘지: 프랑스 Verdelais
.부모: Alphonse Charles de Toulouse-Lautrec-Monfa
.직업: 포스터 디자이너, 석판화가, 화가, 예술가, 그래픽 예술가, 판화가, 제도사, 그래픽 디자이너, 도예가, 디자이너
.스승: Léon Bonnat, Fernand Cormon
.분야: 회화, 판화
.사조: 후기인상주의
.주요 작품: 카페 라 미에서, 물랭 루주에서, 물랭 루즈의 연기자, 여자 어릿광대 차-우-코
남부 프랑스 알비의 귀족 집안에서 출생한 그는 본래 허약한데다가 소년 시절에 다리를 다쳐서 불구자가 되었다.
그는 화가가 될 것을 결심하고 그림에 몰두하였으며, 파리로 나가 미술 학교에 다녔다.
○ 생애 및 활동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몽파는 1864년, 남프랑스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인 툴루즈 가문 출신의 알퐁스 샤를 드 툴루즈로트레크몽파 (Alphonse Charles, Count of Toulouse-Lautrec, 1838 ~ 1913)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뼈가 극히 약했던 그는 14살에 의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다리의 성장이 평생 멈춰 버리는 장애를 갖게 된다.
때문에 그의 아버지, 툴루즈로트레크 백작은 앙리가 어렸을 때 부터 그를 없는 아들 취급하였고 이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마음 고생이 심했다.
그나마 앙리의 어머니 아델 (Adèle Zoë Tapié de Celeyran, 1841 ~ 1930)가 앙리를 열심히 돌봤기에 어머니와는 관계가 매우 좋았다.
장애 때문에 외부 활동을 거의 할 수 없었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재능을 보였던 예술 활동에 몰두한다.
어머니의 후원으로 당대 파리의 거장 화가였던 레옹 보나 (Leon Bonnat)에게서 예술 교육을 받은 이후 몽마르트 언덕에 정착한다.
어머니와 달리 아들을 무시했던 아버지는 아들이 화가로 유명해질 무렵에 찾아와서는 집에 두었던 그의 여러 그림들을 태워버리기까지 했다.
당연히 앙리는 아버지를 증오했고 대화도 하지 않았다. 이래놓고 사후 아들의 작품들이 루브르 박물관에 진열되고 나서야 아들을 인정한다고 했으나 어머니는 이를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 시기 고흐와 교류를 갖기도 하면서 후기 인상주의 예술가들의 서클에 활발히 참가하던 그는 물랑 루즈의 포스터를 그려주면서 생계비를 유지하는 한편 무용수나 성매매 여성들을 그리면서 소외받은 아픔과 신체 장애에 대한 한을 달랬다.
이와 같은 도시 하층 계급 여성들에 대한 그의 지대한 관심을 놓고 훗날 앙리의 동료 에두아르 비야르 (Eduardo Vuillard, 1868 ~ 1940)는 “귀족적인 정신을 갖췄지만 신체에 결함이 있던 그에게 신체는 멀쩡했지만 도덕적으로 타락한 매춘부들이 묘한 동질감을 줬을 것이다.”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매춘과 더불어 앙리의 삶에 위안이 되어줬던 것은 술이었다. 그것도 압생트와 같은 독한 술을 즐겨 마셨다.
결국 잦은 폭음은 그의 건강을 빠르게 해치게 된다.
게다가 매춘에서 얻은 매독까지 더해지면서 결국 툴루즈는 1901년 9월 9일, 만 3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유언은 “Le vieux con!” (바보 같은 노인네). 이로 인해 아버지의 작위였던 툴루즈로트레크 백작위는 그의 동생이 승계하게 된다.
그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던 그림상 모리스 조이앵 (Maurice Joyant, 1864 ~ 1930)은 그가 죽자 그를 기리며 로트레크 미술관을 세웠으며 어머니도 여기에 많은 돈을 후원하면서 도와 아들의 이름을 남기고자 노력했다.
- 작품 세계
드가, 고흐와 친분을 맺어 그들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그는 귀족 사회의 허위와 위선 등을 미워하였다.
주로 서커스 · 놀이터 · 운동경기 · 무용장 · 초상화 등을 즐겨 그렸으며 포스터를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특히 그가 그린 물랭 루주 포스터는 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인상파에 속하고 색채 취급, 성격 묘사에도 뛰어났다.
유화 외에 파스텔, 수채화, 석판화도 독특한 스타일로 만들었다.
대표 작품으로는 《물랑 드 라 가레트》, 《이베지루벨》 등이 있다.
- 주요 작품
카페 라 미에서
물랭 루주에서
물랭 루즈의 연기자, 여자 어릿광대 차-우-코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