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택 목사의 신학논단 : 천로역정강해 (제10강의)

“천국의 꿈에서 현실로의 초대”
- 존 번연의 시대와 순례의 상상력 : 새로운 존재의 형성 (formation)을 향한 여행
존 번연 (1628–1688)은 르네상스 시대의 인물이 아니라 종교개혁 이후 청교도 전통 속에서 살아간 인물이었다. 그는 영국 내전과 왕정복고를 경험하였으며, 국교회가 청교도를 숙청하고 압박하는 과정에서 숙청과 설교금지자의 대상이 되어 체포돼 12년간 (1660년 체포, 1672년 석방)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하게 된다.
『천로역정』은 바로 이러한 박해의 현실 속에서 탄생하였다. 그러나 번연은 현실에 갇히지 않았다. 그는 꿈과 비유라는 문학적 기법을 사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상상하게 하였다.

번연은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환상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하나님 나라가 현재의 삶을 변화시키는 희망의 상상력을 제공하였다. 꿈은 거짓이 아니라 초월적 진실을 담는 언어이다. 존번연이 작품에서 이렇게 말한다.
“As I walked through the wilderness of this world, I lighted on a certain place where was a den, and laid me down in that place to sleep: and as I slept, I dreamed a dream.” (내가 이 세상의 광야를 걷다가 우연히 어느 굴에 이르러 잠이 들었는데, 잠든 동안 한 꿈을 꾸었다).
여기서 동굴 (den)은 존 번연이 실제로 갇혀 있었던 감옥 (prison)을 암시하는 상징으로 해석한다. 번연은 약 1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천로역정을 집필하였다.
성경에서 꿈은 종종 하나님이 인간에게 진리를 보여주는 통로였다.야곱은 벧엘에서 사닥다리의 꿈을 꾸었다. 요셉은 애굽의 미래를 꿈으로 해석하였다.다니엘은 하나님의 나라를 환상 속에서 보았다. 요한은 계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환상으로 보았다. 따라서 번연이 사용한 꿈은 허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진리를 표현하는 상징적 언어였다.
『천로역정』은 단순한 교리서가 아니다. 존 번연은 교리를 설명하기보다 신앙이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를 보여주고자 꿈과 상징의기법으로 크리스찬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고있다. 그는 수도원에서 신앙이야기를 쓰고 있지 않다. 그는 장망성이라는 현실 속에서 살아갔다. 가족과 이웃이 있었고, 사회가 있었으며, 다양한 유혹과 갈등이 존재하였다. 허영의 시장도 현실 세계 속에 있다. 신앙은 이러한 삶의 현장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도가 처음 성경을 읽고 죄의 짐을 깨닫게 된 것도 현실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의 신앙은 추상적인 사상이 아니라 삶의 고통과 불안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천로역정』의 핵심은 구원의 장소 (destination)을 향한 순례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존재의 형성 (formation)을 향한 여행이다. 즉 ‘구원받은 사람이 어떤 존재로 형성되는가?’를 보여주는 여정 (순례 巡禮)이다.
다음에서 천로역정에 나타나는 자기형성의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2. 죄책감에서 은혜의 사람, 관계적 존재로
장망성의 기독도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그는 죄의식에 눌려 있었다. 그러나 십자가 아래에서 짐이 벗겨진다. 이것은 단순한 죄사함의 사건이 아니다. 자신을 죄인으로만 보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 정체성이 바뀌는 사건이다. 새로운 존재의 형성 (formation)을 향한 여행이었다.
기독도는 장망성을 떠난 후 동일한 사람이 아니었다. 십자가 아래에서 죄의 짐을 벗었고, House Beautiful (아름다운 집)에서 말씀을 배웠으며, 아폴리온과의 전투를 통하여 믿음을 훈련받았고, 허영의 시장에서 세상의 가치를 분별하는 법을 배웠다. Faithful (진실이)의 죽음을 통하여 순교의 의미를 보았고, Hopeful (희망이)과의 동행을 통하여 성도의 교제와 공동체의 중요성을 배웠다. 결국 순례는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이 과정을 통하여 존재의 형성이 이루어져 갔다. 기독도는 수도원이나 신학교에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실제 과정을 거쳐가며 신앙을 배워갔다.

그는 두려움이 많았고, 자주 넘어졌으며, 잘못된 길로 가기도 하였고, 때로는 의심과 절망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순례의 과정 속에서 그는 점점 변화되어 갔다. 이 변화는 단순히 지식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변화되는 과정이었다. 즉 자기형성이란 “하나님과의 만남과 삶의 경험을 통하여 인간의 존재와 인격이 점차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과정”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개발 혹은 자기실현 (self-actualization)과는 다소 다르다. 『천로역정』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에 의한 새로운 존재의 형성”으로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바울사도가 말한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그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한 존재가 자기 성숙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처음 기독도는 혼자 길을 간다. 그러나 곧 Faithful (진실이)을 만나고, 나중에는 Hopeful(희망이)을 만난다. House Beautiful House(아름다운 집)에서는 공동체를 경험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혼자 믿는 사람”에서”함께 순례하는 사람”으로 변화된다. 관계적 존재 (Relational Being)로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구원 받은자의 중요성은 공동체 속에 일원이 되면서 홀로인 자가 아니라 관계적 존재가 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가 됨을 알게 된다. 관계적 존재가 될 때 용서를 배우게 되며, 화해의 중요성을 이해하게 되며, 타자을 섬기는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하게 된다. 관계속에서 기독도는 이웃의 일부가 되어 함께 순례의 길을 간다. 영혼의 친구가 없이는 홀로는 고독한 존재이다. 희망이와 기독도는 서로가 영혼의 친구가 되어 서로 격려하고 도와주며 그 험준한 순례의 여정을 걸어간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영혼의 동반자가 되라. 가정에서는 부부가, 사회에서는 선후배가, 교회에서는 성도간에, 인간관계에서는 친구가 서로 간에 영혼의 친구가 되는 것이다.
3. 소비자의 정체성에서 순례자의 정체성, 출애굽 여정
허영의 시장에서 사람들은 사고팔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도는 말한다.”우리는 이곳에서 살 것이 없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변화이다.그는 더 이상 소비자가 아니다. 그는 순례자이다. 세상을 소비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는 새로운 역사관을 가지게 된다. 기독교의 역사관은 단순한 순환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순례의 역사이다. 이러한 순례의 원형 (archetype)은 출애굽 사건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내셨다. 그리고 모세를 통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을 보여주시며 새로운 미래를 향해 인도하셨다. 출애굽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노예의 정체성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되는 존재의 형성 과정이었다.
그러나 광야의 여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정착을 원하였다. 광야의 불확실성과 고난 속에서 그들은 오히려 과거의 애굽을 그리워하였다.”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떡을 배불리 먹던 때가 있었는데” (출애굽기 16:3). 그들은 자유보다 익숙한 노예 생활을 선택하고 싶어 하였다. 약속의 미래보다 과거의 안전을 더 원하였다. 그 결과 백성들은 반복적으로 모세와 충돌하였다.
더욱 상징적인 사건은 시내산에서 일어났다. 모세가 산 위에서 하나님과 만나며 계명을 받고 있을 때, 산 아래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예배하였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출애굽기 32:4).
금송아지는 단순한 우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신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었다. 광야를 함께 걸으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신을 원한 것이다.그들은 광야 한가운데서 정착의 축제를 벌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착의 하나님이 아니라 출애굽의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과거에 묶어 두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약속의 미래로 이끄셨다. 하나님은 항상 길 위에 계시는 하나님, 순례자와 함께 걸으시는 하나님이셨다. 순례자의 하나님은 순례자에게 모든 길을 다 이해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그분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따라가는 것이다.

이러한 출애굽의 구조는 『천로역정』에서도 반복된다. 기독도 역시 장망성을 떠나 천성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그 길 위에는 허영의 시장 (Vanity Fair)이 기다리고 있다. 허영의 시장은 단순한 상업 시장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정착하고 싶어 하는 공간이다. 그곳에는 돈과 권력, 명예와 쾌락, 성공과 안락함이 넘쳐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순례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시장에 머물러 정착하기를 원한다. 허영의 시장은 광야의 금송아지와 같은 장소이다. 금송아지가 광야에서의 거짓 정착이었다면, 허영의 시장은 세상 속에서의 거짓 정착이다.
출애굽의 백성들이 애굽을 그리워하였듯이, 허영의 시장의 사람들도 하나님 나라보다 현재의 만족을 선택한다. 그들은 미래의 약속보다 현재의 소비를 사랑한다. 그러나 기독도와 Faithful은 달랐다. 그들은 시장의 물건을 사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세상의 상품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였다. 그들은 정착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 순례하였다. 이 점에서 출애굽과 천로역정은 같은 신학적 구조를 가진다.
둘 다 “정착”과 “순례”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둘 다 “과거에 대한 향수”와 “약속된 미래에 대한 희망” 사이의 긴장을 보여준다. 둘 다 인간이 눈에 보이는 안전을 선택할 것인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것인지를 묻는다.
결국 허영의 시장을 통과하는 기독도의 여정은 광야를 지나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순례를 재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셨고, 허영의 시장을 통과하는 순례자와도 함께하신다. 그러므로 신앙은 정착이 아니라 순례이며, 하나님은 언제나 약속의 미래를 향해 우리를 이끄시는 출애굽의 하나님이시다.
출애굽과 천로역정은 모두 “어디에 도착하는가”보다 “어떤 존재로 변화되는가”에 초점을 둔다. 애굽의 노예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형성되듯이, 기독도 역시 허영의 시장과 광야 같은 삶의 여정을 통과하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형성된다. 따라서 순례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속에서 새로운 존재로 빚어지는 형성의 과정이다. 이것이 순례자가 말하는 살아있는 신앙의 여정이다.
4. 청교도들 단순히 천국만 바라본 것이 아니다 ; 천국의 꿈에서 현실로의 초대
많은 사람들은 『천로역정』을 읽으면서 기독도가 천국에 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맞는 설명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독도는 장망성을 떠난 후 단순히 “죽어서 천국에 가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순례의 과정 속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어 간다. 그는 십자가를 만나고, 공동체를 경험하고, 허영의 시장을 지나고, 아폴리온과 싸우며 점점 새로운 가치관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된다. 즉 순례는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삶의 변화이다. 존 번연은 천국을 매우 간결하게 묘사한다. 빛이 가득한 도시 ,열린 문, 왕의 환영, 노래하는 성도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천국의 구조나 모습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천국이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관계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완성의 현장으로 존 번연은 이해하고 있다. 『천로역정』은 꿈으로 시작하여 꿈으로 끝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천국을 꿈 속에서 본 것으로 마무리한다. “Then I awoke, and behold it was a dream.”(내가 깨였는데 그것은 꿈이였다).
번연은 천성의 영광스러운 장면을 보여준 후 갑자기 “그리하여 내가 깨어 보니 그것은 꿈이었다” (Then I awoke, and behold it was a dream) 라고 말하며 이야기를 마친다. 독자는 천국의 아름다움 속에 더 머물고 싶지만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번연의 의도는 독자를 실망시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천국의 비전을 본 사람이 이제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 지를 묻기 위함이다. 천국의 꿈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변화시키는 희망의 상상력이 된다.
천성에 들어간 사람은 기독도이지만, 꿈에서 깨어난 사람은 번연이다. 그리고 책을 읽는 독자도 현실로 돌아온다. 즉 번연은 독자를 천국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 세계로 다시 돌려보내고 있다. 이것은 House Beautiful이 순례자를 다시 세상으로 파송하는 것과 비슷한 구조이다. 따라서 작품의 마지막은”천국에 도착하였다” 라는 종결이 아니라,”이제 당신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끝내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번연의 꿈은 도피적 환상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변화시키는 희망의 상상력이며, 살아있는 신앙의 실천으로 독자를 초대하는 문학적 장치라고 이해할 수 있다.
1620년에 Mayflower Voyage (메이훌라워호) 타고 영국을 떠나 미국 신대륙으로 떠나기 시작한 청교도들은 흔히 “천국만 바라본 사람들”로 이해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영국을 떠나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갔다. 왜 그렇게 위험한 여행을 하였는가? 단순히 죽어서 천국 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다. 새로운 학교를 세웠고, 새로운 마을을 만들었고, 새로운 교회를 세웠고,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 즉 청교도들에게 순례는 세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었다.

청교도들이 신대륙으로 향한 여정은 역사적으로 『천로역정』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천로역정』은 이미 청교도들 안에 존재하던 순례 정신과 소명 의식을 가장 탁월하게 표현한 작품이었다. 18세기 미국에서는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 가운데 하나가 『천로역정』이었다고 평가된다. 존 번연은 영국의 감옥에서 『천로역정』을 썼지만, 그가 그려낸 순례자의 상상력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 청교도들의 정신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번연은 실제로는 미국에 가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 청교도 정신 속으로 들어갔다.
순례 (Pilgrimage),약속의 땅 (Promised Land), 광야 (Wilderness), 하나님 나라 (Commonwealth of God) 라는 개념은 미국 청교도들의 자기 이해와 깊이 연결되었다. 청교도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새로운 땅으로 파송된 순례자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대륙 개척은 단순한 이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향한 신앙적 순례의 연장이었다. 따라서 『천로역정』은 미국 청교도 정신의 원인이라기 보다, 그 정신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문학적 증언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음호에서는 천로역정에서 나오는 교회와 파송이라는 성찰로 천로역정을 쓰게 될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이상택 목사
(아이오나 콜럼바 대학 학장, 신학과 실천신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