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리안 (Barbarian), 새이해에 대하여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의 인식을 넘어서”
리처드 루드글리의 ‘바바리안 : 야만인 혹은 정복자’와 존 배그넬 베리의 ‘바바리안의 유럽침략’의 관점
바바리안 (barbarian)은 야만을 가리키는 영어 낱말이다. 야만인, 이방인 등을 가리키는데 어원은 그리스어의 바르바로이 (BARBAROI, 야만, 단어 속에는 ‘폭력, 비겁, 미개’ 등의 의미가 들어 있다)로 뜻은 “참고 듣지 못할 말을 하는 사람”이다. 어떤 문헌에선 “개처럼 짖는 사람”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리스인들이 듣기에는 마케도니아인 등 오랑캐들 말이 바르바르로 들린다는 뜻으로 바바리안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그리스 때에는 바바리안이란 말이 단순히 비 (非)그리스인이란 뜻에 더 가까워서 오랑캐와 마찬가지로 경멸의 뜻도 있지만, 그렇다고 현대인들이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다른 의미다. 그리스인들이 얼마나 자존심이 센지 알 수 있다.
고대의 로마 제국에서도 주변의 야만족들을 바바리안이라 칭했으며, 제국 말기에 로마를 침공하였던 여러 이민족들을 모두 묶어서 바바리안이라 칭하기도 한다. 대체로 게르만족을 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고트족, 프랑크족, 반달족, 앵글로색슨족, 훈족 등이 로마 말기에 출몰한 대표적인 바바리안들로 손꼽힌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 현재는 코난 사가의 여파로 바바리안 하면 가죽옷을 입고 돌격하는 호전성의 의미로 변질되었다. 하지만 일부 부족을 제외하면 나름대로 갑옷이나 옷을 입고 싸웠다.
그리고 그리스·로마가 야만인으로 멸시했던 바바리안이란 단어 뜻에는 찬란한 고대 문명을 가진 페르시아와 이집트도 포함되었고, 켈트·게르만·슬라브·훈족들도 어디까지나 그리스·로마에 비해 체계적인 국가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을 뿐, 이들도 나름대로 거주 환경에 적합한 문명 수준을 갖고 있었다.
○ 바바리안에 대한 다른 이해

– 리처드 루드글리의 ‘바바리안 : 야만인 혹은 정복자’ (우혜령 역, 뜨인돌, 2004년 3월 25일)
리처드 루드글리의 ‘바바리안 : 야만인 혹은 정복자’ (우혜령 역, 뜨인돌, 2004년 3월 25일), 이 책에서는 유럽의 현 지형을 이룩한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사적으로 아직까지도 폭력적이고 미개한 종족이라고 인식되고 있는 바바리안들에 대한 왜곡된 역사를 다룬다. 리처드 루드글리는 일방적 시각에 의해서 쓰여진 바바리안들에 대한 왜곡된 역사를 그대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성 아폴리나레 교회의 모자이크, 트란실바니아에서 발견된 바바리안들의 보석 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보물들은 폭력적이고 미개했다는 바바리안들도 로마 못지않은 훌륭한 사회문화유산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한다.
그래서 로마에 의해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며 무지’한 것으로만 표현되는 바바리안들의 이미지는 일차원적인 캐리커처일 뿐, 바바리안들도 훌륭한 사회문화 유산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저자 리처드 루드글리는 영국 왕립지리연구학회의 특별연구원으로 채널 (Channel) 4의 다큐멘터리 시리즈인 ‘석기시대의 비밀’과 ‘암흑기의 비밀’을 집필했다. ‘석기시대 잃어버린 문명’ 등으로 많은 사람들의 갈채를 받았던 그는 현재 런던에 살고 있다.
“게르만 족의 뿌리는 영국 문화의 구조와 뒤엉켜 있다. 잉글랜드에 거주했던 앵글로색슨 족의 조상을 추적하기 위해 나는 주요 유적지에 남아 있는 그들의 자료를 찾아 독일을 여행했다. 내가 처음 방문한 곳은 베데르케사인데 이곳은 엘베 강과 웨서 강 사이에 있는 북 독일의 해안가이다. 이곳을 방문한 목적은 요른 슈스터라는 큐레이터가 성 박물관에 있는 수집품 중에서 내가 찾던 결정적으로 중요한 두 곳의 고고학적 유물을 보여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p. 128)
1부는 로마와 켈트 족, 동 게르만, 고트 족 그리고 훈 족에 관한 이야기로 바바리안들과 로마와의 끊임없는 싸움으로 인한 로마의 몰락을 먼저 짚고 있다.
내란으로 인한 공화정의 붕괴로 황제의 등극을 야기시킨 로마는 3세기경부터 세력이 강해진 바바리안들과 잦은 갈등을 일으키며 전쟁을 하게 되면서 바바리안들과의 경계가 점점 허물어져 갔다고 한다. 그 예로 로마군의 동의를 얻어 황제가 된 막시미누스 1세가 당시 트라키아라는 지역 태생의 바바리안이었다는 것이다.
또 저자는 고트 족은 처음으로 로마를 패배시키면서 유럽 고대세계의 질서를 무너트린 종족이었지만 로마의 생활양식을 좋아해 부분적으로 받아들여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변용했다고 주장한다. 고트 족 최고의 영웅 ‘테오도릭’ 황제가 창백하고 생명력 없는 로마풍 모자이크에 여러 가지 돌과 색깔을 사용해 생명력을 불어넣은 일과, 자신의 무덤을 1층은 로마식으로 하고 2층은 1층과 다르게 이국적으로 건설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야만인의 대명사 훈 족의 아틸라 왕이 더 이상 로마를 약탈하거나 파괴하지 않았던 이유는 훈 족의 영토에서 로마의 영향력을 몰아내고 로마가 약탈해 간 금과 보물을 다시 찾는다는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목표 이상의 것을 원치 않는, 타 부족과는 다른 독자적인 민족성을 가졌던 증거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저자는 또 로마 인이 쓴 훈 족에 대한 역사 가운데 ‘들쥐 가죽으로 옷을 만든다’거나 ‘날고기를 먹기 위해 고기를 말 등과 안장 사이에 보관했다’는 이야기는 거짓말이라고 주장한다. 유목 민족인 훈족은 그들 고유의 문화에 이란 유목민의 의복문화를 접목, 중절모와 헐렁한 바지 등 새로운 스타일의 의복을 유럽에 소개했고, 말 등 위에 날고기를 보관한 이유는 말 안장에 의해 말에게 생길 수 있는 상처를 예방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2부는 앵글로색슨 족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이는 유럽 대륙에서 영국으로 이동한 게르만 족과 켈트 족과의 교류를 말하는데, 이들의 결합은 풍성한 예술적·기술적 혁신을 낳았다. 이는 ‘야만인은 편안하거나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다’는 시각이 터무니없는 거짓임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 예로 제2차 세계대전 중반부터 시작되었던 웨스트 스토우의 발굴을 든다. 웨스트 스토우에는 7개의 강당과 70채의 집이 있는데, 이는 이 마을이 매우 조직적이었으며 폭력적이고 야만적이기보다는 여유 있고 안정적인 정착 생활을 했었다는 증거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또 잉글랜드 서퍽 지역의 작은 마을 우드브리지 외곽에 있는 서튼 후에서 발견된 석류석과 금으로 된 어깨걸이, 금으로 만들어진 주머니 뚜껑 등 수많은 보물들이 이들의 화려한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고 저자는 덧붙인다.
3부는 기독교로 개종하는 앵글로색슨 족과 바이킹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교황의 승인을 얻어 40명의 독실한 제자들을 데리고 켄트에 도착한 597년부터 앵글로색슨 족의 개종이 시작되었다. 영국에서는 673년 에그프리드 왕이 베네딕트 비스코프에게 수도원을 세우게 해주었는데, 여기서 수도사들에 의해 무수히 많은 책들이 씌어졌고, 이런 일련의 작업들과 수도사들의 정진이 부족들을 계몽시키는 새로운 교육의 시작이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로 인해 영국은 문화후진국에서 벗어나 유럽 문명의 발전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전통적으로 유럽의 진보를 중단시켰던 매우 파괴적인 집단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바이킹들의 사회는 엄격한 행동강령은 물론 ‘싱 (Thing)’이라는 자유민으로 구성된 의회를 통해 정의를 실현시켰다. 이밖에도 정착생활을 통해 농장을 유지함으로써 스스로 경제와 가족생활의 기초를 다지면서 안정적 경제기반을 이미 이룩해 놓고 있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들은 또 콜럼버스의 항해가 있기 500년 전에 뉴펀들랜드에 도착, 북미지역을 탐험했을 정도로 항해술이 뛰어났는데, 이같은 항해를 이용한 무역망의 확대는 유럽 역사의 새 장을 여는 데 기여했으며, 지도와 공예품들을 비롯한 많은 문화유산은 이들의 침략행위보다 훨씬 더 높은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 존 배그넬 베리의 ‘바바리안의 유럽침략’ (김성균 역, 우물이있는집, 2007년 12월 20일)
존 배그넬 베리의 ‘바바리안의 유럽침략’ (김성균 역, 우물이있는집, 2007년 12월 20일)은 베리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행한 일련의 강의를 엮어 펴낸 책으로 바바리안들의 침략을 받으면서 서서히 붕괴된 로마제국에 대한 고전적인 연구서이다.
저자는 바바리안이 흔히 우리가 알듯이, 단지 로마제국을 해체시키고 로마문명을 파괴한 “야만적이고 미개한 이방인 또는 이교도”가 아니라, 나름대로 국가를 건설하고 문명화를 꾀하던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비로마인들이자 비 (非)그리스도교도들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중앙아시아를 떠돌던 훈족, 갈리아의 프랑크족, 게르마니아 산림지대에서 살던 고트족과 반달족처럼 곳곳에 흩어져 살던 다양한 종족이나 부족들과의 불안한 정세는 5세기까지 지속되다가 로마제국의 라인 강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이들이 이탈리아로 물밀듯이 몰려들어 저마다 왕국을 건설함으로써 유럽대륙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렇게 로마군대가 어떤 군사적 도발이 아니라, 처음에는 국경 밖에서 수입한 용병들에게 군대를 잠식당하고, 이후에는 군대요직들을 바바리안들이 차지함으로써 무기력해졌다는 새로운 견해로 로마제국멸망연구의 역사적 공백을 메워주고 있는 책이다.
.파노라마와 같은 바바리안의 대이동
우리가 지금까지 이른바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알았던 역사적 사건의 이름이 사실은 “바바리안들의 대이동”이었음을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바바리안들 가운데서도 규모가 제일 크고 다수의 하위종족 내지 부족들을 포함하는 종족이 게르만족이었지만, 그들도 결국은 훨씬 더 다양한 비(非)로마인들로 이루어진 전체 바바리안의 일부에 불과했다. 서기 375~575년의 유럽, 그중에서도 특히 로마제국의 주변정세는 그야말로 복잡다단하기 그지없었다. 그만큼 이 시기의 유럽역사는 우리에게 마치 미싱링크 (missing link)처럼 다가온다.
이 시기에 다양한 바바리안들이 대이동을 시작하여 로마제국을 침략하거나 우회하면서 유럽 도처에 정착했고, 그 과정에서 로마제국의 서반부 즉 이른바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촉진했다는 개략적인 사실을 빼면, 그들의 정체나 성격에 대해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조차 모른다면 사실들로 이루어진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여 의미를 파악하기는 더욱 어려운 노릇이다. 『바바리안의 유럽 침략』은 그 공백을 메워주기에 충분한 연구서이다.
.바바리안은 야만적이고 미개한 이교도인가
로마인들은 바바리안들을 “야만적이고 미개한 이방인들 내지 이교도들”로 간주했다. 그것은 마치 중국인들이 비 (非) 중국인들을 “오랑캐”로 치부한 경우와 흡사할 것이다. 그들은 단지 “비 (非) 로마인들”일 뿐이다.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의 인식을 넘어서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바바리안들을 로마제국을 해체시킨 야만적인 침략자들로 규정했지만, 베리는 바바리안들이 오히려 로마제국의 구성원이 되기를 원했고, 로마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며, 로마의 군사제도와 정치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았다. 특히 바바리안들은 로마시민이 되기를 염원했고, 그리스도교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였으며, 그들의 국가와 왕들도 로마제국과 황제의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바바리안들의 목표는 본래 로마제국을 해체시키거나 파괴하는 데 있기보다는, 개인적으로는 로마시민으로 인정받고 국가적으로는 로마제국의 속국 내지 이른바 “연방구성체”로 승인받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바리안들은 처음부터 무조건 로마제국을 침략하고 약탈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요구를 거부한 제국과 황제를 압박하여 그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침략과 약탈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기번은 로마제국이 멸망했다고 보았지만, 베리는 바바리안들이 문명화 내지 로마화 (化)되었다고 보았다.
.베리의 역사학적 태도
베리는 불충분한 자료에 대한 자의적이거나 편파적인 해석을 철저히 경계하고 있다. 랑케처럼 오로지 사실만 이야기해야한다는 외고집에 매몰되지 않으면서도 비록 부족하지만 최대한 자료들을 입수하여 면밀히 검토하고 기존의 학설들도 철저히 검증함으로써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시한다. 이처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과학적이고 엄밀한 해석을 지향하는 베리의 과학적 역사관은 우리로 하여금 이른바 “동북공정”이나 “식민사관” 따위뿐 아니라 심지어 “민족사관”도 재검토해보기를 촉구하는 듯하다.
그가 수행한 고도로 전문적인 연구와 광범위한 독서는 그가 교수로 임명되기 전에 행한 다양한 강의들을 통해서 구체화되었다. 특히 그는 교수로 재직한 지 2년째 되던 해의 가을학기부터 로마제국이 중세유럽으로 이행하던 서기375년부터 575년에 이르는 약 2세기 동안 이루어진 “바바리안들의 유럽 침입”을 주제로 삼은 강의를 정기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강의들은 훨씬 세부적인 역사자료들과 부합하지 않거나 당시에 출간되던 좀더 방대한 저서들에 포함된 구체적인 주석들이나 참고자료들과 부합되지 않는 내용은 거의 또는 전혀 다루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강의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새롭게 보강되고 개선되면서 대단히 심오한 연구와 성숙한 사유가 낳은 탁월한 결론들을 생동감 넘치고 인상적인 형태로 전달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