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오늘
1755년 11월 2일,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Marie Antoinette d’Autriche, 1755 ~ 1793) 출생
마리 앙투아네트 (프: Marie Antoinette d’Autriche, 1755년 11월 2일 ~ 1793년 10월 16일)는 프랑스왕 루이 16세의 왕비로, 프랑스 혁명기인 1793년 10월 16일, 콩코드 광장에서 남편의 뒤를 따라 기요틴 (단두대)으로 참수당했다.
풀네임은 마리 앙투아네트 조제프 잔 도트리슈로렌 (Marie Antoinette Josephe Jeanne d’Autriche-Lorraine). 오스트리아식 (독일어) 본명은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하나 폰외스터라이히로트링겐 (Maria Antonia Josepha Johanna von Österreich-Lothringen)’. 또는 성을 ‘폰합스부르크로트링겐 (von Habsburg-Lothringen)’으로 쓰기도 한다.
‘마리 앙뚜아네뜨’, ‘마리 앙뚜아네트’, ‘마리 앙투와네트’ 등으로 많이 쓰이나, 외래어 표기법에 근거하여 표기하면 ‘마리 앙투아네트’다. 프랑스어의 ‘t’ 발음은 기식이 약하여 ‘ㄸ’로 들리나, 무성음의 기식의 유무로 뜻을 구별하는 언어가 아니면 파열음에 된소리를 쓰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에 저렇게 표기한다. 자음 뒤에 쓰인 ‘oi[wa]’의 표기도 분분한데, ‘ㅜ아’로 쓰는 게 표준. 순수 프랑스어의 w 발음은 무조건 u 발음의 변이음이기 때문이다.
– 마리 앙투아네트 (Marie Antoinette d’Autriche)
* 지위: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비
.재위: 1774년 5월 10일~1791년 10월 1일
.전임: 마리 레슈친스카
* 지위: 프랑스 왕비
.재위: 1791년 10월 1일~1792년 9월 21일
.후임: 조제핀 드 보아르네
* 이름: 휘 – Maria Antonia Josepha Johanna
.출생: 1755년 11월 2일, 오스트리아 호프부르크 궁전
.사망: 1793년 10월 16일 (36세), 프랑스 콩코드 광장
.매장: 1815년 1월 21일, 생드니 대성당
.가문: 혼전: 합스부르크 왕가 / 혼후: 부르봉 왕가
.부모: 신성 로마 제국의 프란츠 1세 (부)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모)
.배우자: 루이 16세
.자녀: 마리 테레즈, 루이 조제프 그자비에, 루이 샤를,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
마리 앙투아네트 (Marie Antoinette d’Autriche, 1755 ~ 1793)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1세와 오스트리아 제국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에서 막내딸로 태어났으며, 결혼 전의 이름은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폰 외스터라이히로트링겐 (독: Maria Antonia Josepha Johanna von Österreich-Lothringen)이며, 결혼한 후의 이름은 마리 앙투아네트 조제프 잔 도트리슈로렌 (프: Marie Antoinette Josèphe Jeanne d’Autriche-Lorraine)이다. 오스트리아와 오랜 숙적이었던 프랑스와의 동맹을 위해 루이 16세와 정략결혼을 했으나 왕비로 재위하는 동안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38살 생일을 2주 앞두고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 생애 및 활동
1755년 11월 2일에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로렌 공작 프랑수아 3세의 11녀로 빈의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란츠 1세의 외종조부가 루이 14세이다. 즉, 루이 14세의 조카딸인 ‘엘리자베트-샤를로테’가 프란츠 1세의 어머니이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태어났을 당시 오스트리아 궁정의 에티켓은 비교적 느슨했으며 쇤브룬 궁전에서 회화, 클라비코드, 춤, 피아노 등을 배우며 상당히 자유로운 어린시절을보냈다.
14세 때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우호를 증진시키기 위해, 루이 15세의 손자 루이 16세와 결혼하여 왕세자비가 되었다.
얼마 후 시할아버지 루이 15세가 천연두로 세상을 떠나고, 남편이 왕위에 올라, 마리 앙투아네트는 고작 10대의 나이로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루이 16세와의 사이에서 2남 2녀가 있었다.
– 자녀 : 직계 자녀와 입양 자녀들
.장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1778 ~ 1851)
마담 루아얄이라는 칭호가 있었다.
여담으로 프랑스 왕실은 왕비의 출산 시에 아무나 공공연하게 입회하도록 하는 관행이 있었는데, 이 때 너무 많은 구경꾼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루이 16세는 안전을 고려하여 이후의 출산은 허가받은 소수만 참관할 수 있도록 관행을 바꾸었다.
의사가 산후처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많은 출혈을 했고, 그래서 딸을 낳은 후 기절했다. 그 후에는 출산으로 인한 치질로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결혼 7년 만에 어렵게 가진 소중한 첫딸 마리 테레즈에게 모유 수유를 하려 했으나 친정어머니뿐만 아니라 프랑스 왕실 및 귀족 사회에서도 남자 후계자를 바라는 바람에 2주 만에 포기하고 유모에게 보내야 했다.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는 첫 출산을 하고 1년 만에 임신을 하나, 임신 초기에 마차 문을 닫다 배에 문을 부딪히는 바람에 유산한다.
루이 16세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배려해 이 일을 함구했다고 전해진다.
.장남 루이 조제프 자비에 프랑수아 (1781 ~ 1789)
왕위계승권자로 도팽에 책봉됐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척추결핵(척추카리에스)으로 죽었다. 위의 그림에서는 건강히 서 있는 모습으로 나오지만, 사실 저 그림을 그릴 때는 이미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병세가 심했다고 한다.
.차남 루이 샤를 (1785 ~ 1795)
.차녀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 (1786 ~ 1787)
11개월 만에 숨져 영아기를 넘기지 못했다.
자녀들은 불행한 삶을 산 맏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를 제외하면 모두 어린 나이에 죽었다. 프랑스 혁명 때 단두대에서 처형당했으며, 남편을 비롯한 가족 대부분이 혁명으로 인해 처형당하거나 몰락하게 된다. 비교적 오래 산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역시 자녀를 낳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의 직계는 단절되었다.
.입양 자녀들 (4명)
그 외에 남편과 함께 아이를 4명 입양했다. 이 아이들은 입양된 순서대로 아르망 (Armand) 혹은 자크 (Jacques)라 불린 고아 프랑수아 미셸 가녜 (Francois-Michel Gagné, 1776년 입양), 세네갈인 장 아밀카르 (Jean Amilcar, 1787년 입양), 궁전 하녀의 딸 에르네스틴 랑브리케 (Ernestine Lambriquet, 1788년 입양), 엄마를 잃은 시종의 딸 조이(Zoe, 1790년 입양)
– 최후
그녀의 사형을 결정한 재판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온갖 혐의가 걸렸다. 그녀는 혁명정부로부터 재정 낭비, 정부의 부패, 오스트리아와의 결탁, 루이 16세를 타락시킨 혐의, 백성에 대한 기만, 프랑스를 멸망시키려는 시도, 전쟁 유발으로 기소당했다. 그러나 프랑스 법정은 어떤 혐의로도 마리 앙투아네트를 사형시키기는 어려웠다.
우선 부패 혐의는 당시 정부에 워낙 만연하던 것이라 이로 사형당하지 않을 관료가 별로 없었고, 왕비로서 다소 사치를 했다고 하여 재정 낭비를 범죄로 몰아갈 수는 없었다. 소위 매국행위 및 간첩 혐의는 루이 16세에 대해서는 유죄가 인정됐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백성에 대한 기만의 경우 그 유명한 다이아몬드 사건이 있었으나 조사 결과는 아무 관련도 없다였다. 즉 모든 혐의에 대해 재판 끝에 무죄가 선고됐다.
이렇게 되자 무죄방면 외에 길이 없어진 혁명정부 측에서는 마지막으로 아들과의 근친상간이라는 혐의를 내세웠다. 물론 혁명정부도 이게 유죄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나, 근친상간의 혐의를 고발자였던 에베르가 묻자 재판정 내내 왕비의 품격을 지키면서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하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순간만큼 유일하게 입을 열어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대답하지 않은 것은, 어머니에 대한 그런 비난에 대답하는 것을 자연이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모든 어머니들에게 묻고자 합니다.”
이때 재판장에 있던 모든 여성들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동조했고, 고발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역사가 막스 갈로는, 재판정이 수치와 부끄러움에 휩싸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를 전해들은 로베스피에르는 “에베르라는 바보는 그녀에게 또 한 번 승리를 안겨주고 말았다”고 평했다.
하지만 결국은 혐의에 대해 심신미약상태였던 어린 아들 루이 17세가 어머니에게 겁탈당했다는 증언을 하고 말았다.
심신미약상태였던 어린 아들 루이 17세는 양육을 맡았던 앙투앙 시몬에게 굉장한 아동학대를 받고 있었던 데다가 마약까지 사용하는 정신개조 처분을 당해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만신창이 상태였기에 말 그대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미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져 있던 루이 17세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죽은 지 불과 2년 뒤에 사망했다.
물론 배심원들이 진심으로 이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결국 근친상간을 유죄로 인정하여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또한 같은 혐의로 루이 16세의 여동생이자 루이 17세의 고모인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 공주도 사형 판결을 받고 마리 앙투아네트보다 몇 개월 후 처형당했다. 감옥으로 돌아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혁명정부는 고해성사의 기회를 주었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혁명정부에 서약한 사제에게 고해하는 것을 거부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 사건에 대해서 좀 길게 서술했는데, 왕실의 억압된 삶에서 벗어나 새롭고 낯선 감옥 환경에서 사람들과 사귀는 학대를 받고 장난기 어린 나이의 병약한 아이가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말을 믿고 재밌게 반복한다’는 장난기 어린 증언으로 평가한다. 결국 한 어린아이가 온전치 못한 정신상태로 자기가 뭔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 말이 어머니와 고모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데에 단단히 일조하는 비극을 낳은 것이다. 특히 혁명정부에서 사형시키기로 작정하고 벌인 날림 재판이기에 이게 증거가 된 것이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워낙 프랑스 내에서 인망을 얻지 못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 루이 16세와 달리 그다지 품위있는 대접을 받으며 죽진 못했다. 왕실 전용 황금마차를 타고 정장을 제대로 차려 입고 육군 병력의 정중한 호위하에 단두대로 이동해 죽은 루이 16세와 달리, 허름한 옷차림에 머리카락을 강제로 깎인 다음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사형수를 호송할 때 흔히 쓰인 가축 수송용 마차에 실려 대중들에게 모욕을 당하며 호송됐다.
그럼에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 앞에 설 때까지 품위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근친상간으로 처형될 당시 유언은, 사형 집행자의 발을 밟고서 남긴 ‘실례합니다, 무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라며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사형 전에 그녀가 남긴 글에는 “부끄러워 할 것 없어요, 나는 죄를 지어서 죽는 게 아니니까요.”라고 적혀 있었다.
물론 마리가 완전무결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젊었을 때의 유흥 행각과 바렌 사건 같은 명백한 실책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형당할 만한 죄는 아니었다. 그래서 후대의 역사가들은 지은 잘못에 비해 너무나도 크고 큰 벌을 받은 사람으로 평가하였다.
“격한 감정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그녀의 삶이라는 특이한 여정을 살펴볼 때, 그녀의 결점들이 명백하기는 하지만 그녀의 불행과 저울질해 볼 때 하찮은 것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_ 안토니아 프레이저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해는 프랑스 파리의 생 드니 대성당에 남편, 그리고 아들의 심장과 함께 안치되어 있다.
○ 평가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평가가 매우 극도로 부정적이었으나, 최근의 연구들에 따르면, 당대 퍼져 있던 그녀에 대한 평판의 거의 대부분이 과장된 것으로 부정되고 있는 편이다. 왕정 시대 프랑스의 왕비로서는 특별히 부적합한 행동이 없었다는 평가가 주류를 잇고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당시 왕비들은 거의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적 능력을 이유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폄하하는 것 역시 지나치다고 보고 있다.
1793년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시작되면서 혁명광장에 설치된 단두대에는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았으며 프랑스 혁명에서 가장 참혹하게 꺾인 인물은 ‘베르사유의 장미’로 알려진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혁명세력은 그녀를 성적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만들었으며 로베스피에르는 그녀가 만족할 줄 모르는 ‘자궁의 충동’을 갖고 있다고 몰아붙였다. 남성 공화주의자들은 왕비의 부정한 사례를 들어 여성의 정치참여를 도덕적 타락으로 몰고 갔다. 미국의 여성 사학자 린 헌트는 “그것은 남성끼리의 새판 짜기였다. 남성 중심의 혁명, 여성을 정치에서 배제한 절반의 혁명. 이것이 프랑스 혁명에 감추어진 보수성”이라고 말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앙숙관계였고, 두 국가간의 전쟁으로 프랑스는 많은 아들과 형제들을 잃었으며 국민 거의 대부분이 오스트리아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두 나라의 화해와 동맹을 위해 앙투아네트는 프랑스로 왔지만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라는 죄를 뒤집어썼다.
그녀가 왕비로 있었을 때 국고가 파산지경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그녀의 사치 때문이 아니라 선대의 향락과 미국 독립 전쟁 지원 때문이었고, 그것은 그녀의 선택이 아니었다. 결혼 당시 정치에는 무관심한 순수한 마음을 가진 15살 행복한 소녀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와 환락의 궁전’으로 알려진 쁘띠 트리아농 궁에서 실제는 시골처럼 꾸며놓고 전원생활을 즐겼을 뿐이었다. 그녀는 프랑스 왕실에서 유일하게 소작인의 밭에 마차를 몰아 밭을 망치지 않게 배려한 사람이었으며 루이 16세가 활을 쏘다 실수로 농민을 다치게 했을 때에도 직접 치료를 해 준 사람이었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프랑스 왕비로선 이례적으로 빈민구제와 프랑스식 농경생활에 관심을 가졌다. 빈민구제를 위해서 자신의 드레스를 직접 팔고 당시 악마의 음식이라고 불린 감자에 혐오감을 없애기 위해 직접 꽃을 꽂아 나눠주거나 감자꽃을 머리에 꽂았으며 그녀는 오히려 그녀의 딸 마리 테레즈에게 사치를 도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도록 가르치다 딸의 불만을 사기도 했을만큼, 아름답게 꾸미고 자애롭게 돌보는 것을 좋아했던 여인이었다.
유명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역시, 마리 앙투아네트가 결백하다고 알려진지 오래다. 그 목걸이는 애초 루이 15세가 애첩 마담 뒤 바리의 사치를 위해 제작된 것이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목걸이 구입을 거부했다. ‘빵이 없다면 과자를 먹으세요.”라는 말도 원래는 거리에서 굶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신하에게 “저 아이들에게 브리오 슈를 주세요.”였지만 파리 코뮌은 의도적으로 그 말을 왜곡해서 퍼뜨렸다. 더구나 아들을 무척 사랑했던 앙투아네트는 파리 코뮌 측의 음모로, 재판에서 아들을 성추행했다는 누명을 쓰기도 했다. 당시 8살이었던 루이 17세는 마약까지 먹은 상태로 그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동의했고, 그것은 마리 앙투아네트 생애 가장 큰 상처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끝까지 위엄으로써 많은 오욕에도 잘 견디고 품위있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