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3월 12일, ‘안네의 일기’ (The Diary of Anne Frank) 저자 ‘안네 프랑크’ (Anne Frank, 1929 ~ 1945) 별세
아넬리스 “아네” 마리 프랑크 / 안네 프랑크 (Anne Frank, 독: Annelies “Anne” Marie Frank, 네: Annelies “Anne” Marie Frank, 1929년 6월 12일 ~ 1945년 3월 12일)는 독일의 유대인 소녀로 나치가 네덜란드를 지배한 시기에 쓴 일기로 유명하다. 그 일기는 한국어로는 ‘안네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 안네 프랑크 (Annelies Marie Frank)
.출생: 1929년 6월 12일, 바이마르 공화국 프랑크푸르트
.사망: 1945년 3월 12일 (15세), 나치 독일 동하노버 대관구 유대인 강제수용소 베르겐 벨젠 (Bergen-Belsen)에서 병으로 사망
.종교: 유대교(개혁파 유대교)
.부모: 부) 오토 프랑크, 모) 에디트 프랑크
.가족: 마르고트 프랑크 (언니)
.주요 작품: 안네의 일기
안네 프랑크 (Anne Frank)는 1929년 6월 12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유대 인 집안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1933년 나치의 유대 인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나치에 의해 네덜란드가 점령되면서 1942년부터 은신 생활을 시작했다. 그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고, 1944년 8월 4일 누군가의 밀고로 은신처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그리고 수용소로 끌려간 뒤 1945년 3월의 어느 날, 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
훌륭한 작가와 언론인이 되기를 꿈꾸던 소녀 안네는 은신 생활 중에 쓴 일기에 ‘은신처’라는 특수한 환경과 ‘사춘기’라는 보편적인 상황 속에서 맞닥뜨려야 했던 다양한 감정과 고민들을 솔직하고 재치 있는 표현으로 그려 냈다. 그리고 이 일기는 전쟁이 끝난 후인 1947년, 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버지 오토 프랑크에 의해 책으로 출간되었다. ‘은신처’를 뜻하는 네덜란드어 ‘Het Achterhuis’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안네의 일기’는 이후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었고 안네 자신의 바람대로 지금까지 전 세계의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생애 및 활동
– 키티와의 만남
안네의 일기에 따르면 안네는 1929년 독일의 상업도시 프랑크푸르트에서 유대인 은행가 오토 프랑크 (Otto Frank)와 어머니 에디트 프랑크(Edith Holländer Frank) 사이에서 태어났다. 에디트는 독실한 개혁파 유대교 신자여서-현대 유대교는 토라의 엄격한 준수를 주장하는 정통주의 유대교, 토라의 느슨한 준수를 주장하는 개혁파 유대교로 구분된다. 큰 딸 마르고트와 작은 딸 안네도 어려서부터 시나고그에서의 유대교 예배에 참여하여 유대교 신앙을 배웠다.
1933년에 나치당의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으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교육, 교통, 거주지 등에서의 인종차별이 실시되고, 1938년 17세 소년 헤어쉘 그린츠판이 거주의 자유 박탈에 항의하다 파리주재 독일대사관 3등서기관 에른스트 폼 라트를 살해한 사건을 구실로 유대인들에 대한 집단 테러를 가한 범죄인 수정의 밤 사건을 시작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홀로코스트)이 일어나자, 삼촌들은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안네 프랑크의 가족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망명했다. 당시 대다수의 유럽국가들은 히틀러가 유대인 정책을 강제 추방에서 강제수용소 수용 및 학살로 바꿀만큼 유대인들의 망명을 좋아하지 않았고 영국의 경우 재정후원이 있는 경우에만 어린이의 망명을 허락했다. 그래서 유럽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홀로코스트를 묵인한 공범이라는 비평을 받았다.
몬테소리 학교에서 개별 자유 수업을 받았으며, 중학교는 유대인 중학교에 진학하였다. 그 이유는 1938년 이후 유대인들을 유럽사회에서 소외시키려는 나치의 인종차별 실시로, 학교 진학에서도 차별을 받았기 때문이다. 13살 생일에 (후에《안네의 일기》라고 불리게 된) 붉은 체크 무늬 일기장을 선물로 받았다. 안네는 일기장에게 ‘키티(Kitty)’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시작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 미국으로의 망명실패와 은신처 생활 시작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은 서부 유럽으로 확대되어 나치 독일은 네덜란드를 중립국가임에도 점령하였고, 곧 네덜란드 내의 모든 유대인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당시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Otto Frank)가 나치의 네덜란드 점령에 대해 그리 위험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2007년 1월 26일자 《타임》에서 공개한 편지에 따르면, 오토 프랑크는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한 사건이 가족들을 해외로 망명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일만큼 위험한 사건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미국 대사관이 나치 독일의 네덜란드 점령으로 폐쇄되어 미국으로 망명할 수 없게 되자, 고육지책으로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암스테르담의 프린선흐라흐트(Prinsengracht) 263번지에 있는 펙틴 (과일잼에 들어가는 식재료) 공장 사무실에 있는 창고를 책장으로 위장해서 교묘하게 막고 1942년 7월 5일에 자신의 가족을 그곳으로 피신시킬 준비를 하였다.
은신 계획은 비밀리에 진행되어서, 안네가 일기장에 아빠가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몰랐다고 적었을 정도였으며, 안네의 일기에 따르면 이웃들도 안네 자매가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을 보았다느니, 안네 일가가 나치에게 끌려갔다느니 하는 헛소문이 돌만큼 보안도 완벽했다.
계획을 실행할 때가 되자 안네 일가는 새벽에 일어나 옷가지같은 생필품만 챙긴 채 은신처에 갔다. 도망가는 것을들킬까 봐 트렁크는 쓸수 없었다.차별 때문에 안네는 자동 전차를 타지도 못하고 비를 맞으면서 걸어갔다. 그래서 네덜란드 사람들이 자신들을 불쌍하다고 쳐다보는 것을 알면서도 참아야 했던 비참한 상황이었다고 적었다. 이때부터 비밀 저택이라고 이름붙인 은신처에서 2년간 숨어 살면서 안네는 일기장 키티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안네의 일기》를 적어 갔다.
은신처에서 산 이들은 안네의 가족과 그의 이웃 유대인들 (오토 프랑크의 사업을 돕던 판 단과 그의 가족, 치과 의사 뒤셀) 들을 포함한 총 8명이며, 약 2년 동안 생존을 위해 투쟁하였다. 식료품(주로 감자)와 생활용품)은 당시 오토의 공장에 종사했던 3명의 사무직원이 담당하였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미프 기스(Miep Gies)라는 처녀가 심부름을 해 주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으며 안네의 표현을 빌면 쉴 틈이 없었을 정도로 행동의 자유가 없는 은신처 사람들의 심부름을 해 주었다. 나치의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압수과정으로부터 안네의 일기와 그가 습작한 글들을 몰래 빼돌린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은신처에서 안네 일가와 다른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안네의 일기에 따르면 부친의 먹거리 장사로 중산층 이상의 생활 수준을 누리던 은신생활 이전의 삶과는 달리 먹을 것, 속옷 등의 생활에 있어야 할 것들이 부족했고, 같이 살기 전에는 몰랐던 서로의 결점이 눈에 띄면서 사이가 나빠지기도 했지만, 나치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 죽지 않기 위해 불만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하지만 일기에는 자그마한 행복들도 보인다. 지하경제로 산 고기와 양념으로 소시지를 만들어서 사우어크라우트(양배추를 발효한 음식)와 같이 먹은 이야기, 불어, 영어, 지리, 역사 등을 공부한 이야기, 독후감, 딸기를 사서 먹은 이야기 등의 일상생활에서의 작은 행복들이 일기에 담겨 있다.

– 은신처 발각과 안네의 죽음
1944년 8월 4일 밤, 익명의 밀고를 받은 나치의 제복 경찰 (Grüne Polizei)은 이 은신처를 급습하여 유대인전원을 체포하고 안네의 가족을 나치 강제 수용소로 이송했다. 그래서 안네의 일기는 1944년 8월 4일로부터 불과 3일 전인 8월 1일 화요일로 끝나 있다.
범우사에서 번역한 안네의 일기 해설에 의하면, 안네의 가족을 잡아간 나치의 게슈타포 카를 실베르바우어는 훗날 검거되었다. 안네의 가족을 고발한 밀고자의 신분에 관해서 지금까지 서너 가지 추측이 있었다. 이를테면 창고지기가 한 사람당 5길더를 받고 밀고를 했다는 설이 있는데, 모두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다.
안네는 16세의 나이로 1945년 3월에 유대인 강제수용소 베르겐 벨젠 (Bergen-Belsen)에서 영양실조와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해방되기 2달 전이었다. 어머니는 정신이상으로 죽었다. 언니 마르고트도 장티푸스로 죽었는데, 그녀가 사망한 후 안네가 상심이 커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네의 가족 가운데 아버지 오토만이 옛 소련군의 수용소 해방으로 생명을 건졌는데, 네덜란드로 돌아온 그는 ‘이제 두 번 다시 이런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며 안네의 일기를 책으로 출판했다. 그외 은신처 가족들은 모두 수용소에서 병이나 가스실에서의 학살로 죽었는데, 판단 씨 가족의 경우 부인은 안네와 마르고트와 같은 수용소에서 지내면서 아이들을 돌보다가 독일이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죽었고, 판단 씨는 가스실에서 학살되었으며, 안네의 남자친구였던 페터는 독일군의 수용자 강제이주로 어디론가 끌려간 뒤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도 하고 수용소에서 죽었다고도 전해진다.
안네가 쓴 일기는 1947년에 아버지 오토 프랑크의 편집(안네의 성(性)에 대한 사춘기적 관심이 드러나는 부분, 부모와 은신처의 다른 가족을 비난하는 부분이 삭제되었다)을 거쳐 출판되었으며, 이 일기는 약 60개 국어로 번역되어 약 3천 2백만 권이 팔린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중 한국어판은 안네 아버지가 편집한 원고를 출판해오다가, 원고를 모두 번역한 무삭제판이 안네가 습작한 단편소설들과 함께 출판되었다. 안네의 가족이 피신하여 살던 집은 현재 안네 프랑크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사후
1959년에는 조지 스티븐스(George Stevens) 감독이 안네의 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만들어 세 분야에서 오스카상을 수상하였다.
2009년 6월 12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안네 프랑크 박물관(원래 명칭은 ‘안네 프랑크 하우스’)은 그동안 전쟁문서연구원에 보존돼 온 안네의 자필 문서들이 박물관으로 옮겨져 영구 전시될 것이라고 하였다. 박물관에 영구 전시될 자필 문서들은 안네가 1942년 7월 은거에 들어가기 한 달 전인 같은 해 6월 처음 쓰기 시작한 일기장, 역시 일기장으로 사용했던 2권의 학교 학습공책, 퇴고한 360매 분량의 원고이다.
안네의 취미는 영화감상이었다. 안네의 일기를 보면 명견 린 틴 틴이 나오는 영화를 생일날 친구들과 같이 봤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1947년 6월 25일, ‘안네의 일기’ (The Diary of Anne Frank) 출판
‘안네의 일기’ (The Diary of Anne Frank)는 1947년 6월 25일 출판됐다. ‘안네의 일기’는 유태인 소녀 안네 프랑크가 국외 탈출에 실패한 아버지의 결단으로 2년간 은신 생활을 하면서 남긴 일기이며, 일기장에서 ‘키티’ (Dear Kitty)라고 부르며 친구에게 말하듯이 써내려간 독특한 양식이 특징이다.
일부내용은 은신 생활에 들어가기 전의 내용 (독일과 네덜란드에서의 성장 과정)을 담고 있지만, 대다수 내용은 은신생활을 주제로 하고 있다. 1942년 6월 12일부터 1944년 8월 1일까지 썼고, 네덜란드어 판은 1947년 아버지 오토 프랑크의 일부 원고 편집에 의해서 출간되었다. 1995년 한국어판으로 무삭제 원고가 완역되어, 문학사상사에서 출판되었다. 1944년 8월 4일 독일 비밀경찰 게슈타포가 안네의 가족이 살던 곳을 급습하여 일행이 모두 붙잡혔고 그 뒤 안네는 다음해 3월 수용소에서 16살의 나이로 티푸스에 걸려 죽고 말았다.

– 출판 역사
안네 프랑크가 쓴 일기에는 두 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안네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일기장과 두 공책에 첫 번째 버전의 일기 (version A)를 작성했다.
안네는 1944년 라디오에서 전쟁 기간을 기록에 남기기 위해 전쟁 중의 일기를 모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일기를 재작성했다 (version B).
버전 B는 철 되지 않은 종이에 작성되어 있고 버전 A에서 몇몇 부분이 추가되거나 생략된 형태이다.
한국어 판으로는 1954년 일조각에서 “별은 창 너머: 안네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한국내 초역본을 내놓았다. 번역은 유효숙이었으며 영어 번역본에서 옮겨진 책이다. 참고1 참고 2 6.25 전쟁 직후 발간되었던지라 당시 사람들에게 공감을 샀다고 한다.
1978년 범우사에서 안네의 일기 (1947년판)와 기타 글들을 묶어 <안네의 청춘 노우트>란 제목으로 출간했는데, 번역은 김남석이 맡았다. 1987년 번역자를 서석연으로 갈아 단권 합본으로 내놓았다. 1999년에 개정본이 새로 나왔다.
1995년 문학사상사에서 완전판 (1991년판)을 독점출간하였다. 독일어 번역본을 중심으로 옮겼다.
2021년 책세상에서 새로운 번역판 (2001년판)을 발행하였다. 역시 독어판을 번역대본으로 삼았으며 배수아가 맡았다.
2005년 도서출판 바움에서 멜리사 뮐러가 쓴 “소녀 안네 프랑크 평전” (1998년)을 박정미가 번역하였으나 세월이 흘러 절판되었다.
그나마 2021년 국립중앙도서관이 전자책 형식으로 공개 중이다.

– 네덜란드어판 출판
안네의 일기는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랭크가 스위스에 있는 자신의 친구들과 친척들을 위해 독일어로 처음 필사됐다. 이들은 안네의 아버지가 일기를 출판하라고 설득시켰다. 그는 버전A, 버전B와 함께 안네의 에세이들을 발췌하고 출판을 위한 첫 번째 원고를 재출했다. 이 원고에는 원작자의 운명을 설명하는 에필로그가 포함되어 있다. 1946년 봄에는 이 원고가 두 역사학자 Jan Romein 박사와 그의 아내 Annie Romein-Verschoor의 관심을 끌게 된다. 이후 Anne Romein이 출판사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Romein 박사가 Het Parool에 이 일기에 관한 글을 기고 했다. 이 글을 본 출판중개인은 출판 심사를 위해 오토 프랭크에게 일기의 네덜란드어 원본을 달라고 부탁한다.
출판사는 결국 일기를 출판하기로 했지만 오토 프랭크에게 안네의 성 (sexuality)에 대한 솔찍한 언급은 특정 보수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고 조언하고 약간의 내용 삭제를 제안한다. 추가로 초반 부분 또한 삭제되었다. 일기 (버전A+버전B)는 “Het Achterhuis. Dagbrieven van 14 juni 1942 tot 1 augustus 1944 (비밀의 별관. 1942년 6월 14일부터 1944년 8월 1일까지의 일기 편지)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된다.
오토 프랭크는 나중에 안네가 지금 이곳에 있었다면 안네는 매우 자랑스러워 할 것이라고 말한다. 책은 잘 팔렸다. 첫 번째 에디션은 3000부가 팔려 매진되고 1950년에 여섯 번째 에디션이 출간된다.
1986년에는 무삭제판이 출간된다. 총 714쪽이고 세 권에 나누어 출판이 되었다.

– 진위 여부
안네는 작가를 지망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적은 일기도 퇴고해서 새로 적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일기에는 오리지널 일기와 자신이 정서한 개정판 원고의 두 가지가 있다. 이 원고들은 어느쪽이건 완전한 책의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사후에 출간된 책은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양쪽을 상호 보완하는 형태로 편집해서 만든 것이다.
이 편집의 도중에 안네가 기술한 내용 중, 사춘기 소녀다운 성적 호기심이나 지루한 에피소드, 어머니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제 3자들에 대한 비판은 일부 삭제나 정정이 있었다. 그런데 안네 프랑크가 유명해지면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안네의 일기가 허구이며 안네는 실존하지 않았거나 일기의 내용이 부친에 의해서 날조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958년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의 ‘안네가 실존했다면 안네를 체포한 인간을 찾아내라”는 주장에 대하여 나치 헌터로 유명한 시몬 비젠탈은 게슈타포 출신으로 네덜란드에서 SD 상사였던 카를 질베바우어를 1963년에 찾아내어 안네가 실존했음을 증명하는데 성공한다. 인터뷰에서 실베바우어는 그가 전시중에 SD에서 일했음을 시인했고 안네 프랑크의 사진을 보고 그가 체포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고 인정했으며 체포한 유대인들에게서 압수한 물건을 담는 가방에서 안네의 일기장을 빼내는 것을 보았다고 한 그의 진술은 오토 프랑크의 진술과 합치했다.
이후에도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끈질기게 안네의 일기가 허구라는 주장을 계속했으며 1970년대에 영국의 유명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 데이비드 어윙은 일기가 가짜라고 주장했고 1976년에 일기가 허위라는 팜플렛을 프랑크푸르트에서 배포하던 네오나치주의자 에른스트 뢰머와 에드거 가이스가 체포되었을 때 일기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쟁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 재판중에 오토 프랑크의 의뢰를 받은 역사가 팀이 원본을 정밀 조사하여 일기가 진짜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1978년 뢰머와 가이스가 상소하면서 독일 내무성 소속 범죄조사국 (Bundes kriminalamt ; BKA)은 원본의 종이와 잉크에 대한 과학 분석을 실시해서 “일기를 적을 때 사용한 잉크는 전시중의 것이지만 나중에 기입된 정정사항들은 흑, 녹, 청 볼펜으로 기록된 것이다”라는 취지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BKA는 이에 관련된 상세한 내용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일기의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볼펜은 1950년대에나 널리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것이야말로 일기가 허위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받아들였다.
1986년 일기의 원본을 보관하고 있는 네덜란드의 전시자료 연구소는 보다 상세한 과학적 조사를 진행하기 위해 BKA에게 볼펜으로 기술된 부분을 지적할 것을 요구했으나 BKA는 그 부분을 지적할 수가 없었다. 추후의 조사를 통해서 볼펜으로 기입된 종이 두 장을 발견했으며 1987년 함부르크의 심리학자로 필적 감정 전문가인 한스 오클먼은 그의 어머니인 도로시 오클먼이 미나 베커와 공동으로 일기를 조사했을 때 그 볼펜의 텍스트를 기입했음을 밝혀내어 일기의 진위에 대한 의문점은 해결되었다. 2003년에 출간된 수정판 일기에서는 논란이 된 두 장의 종이의 사진을 게재하고 있다.
– 문학에서의 언급
소설가 가람 이병주는 역사소설 ‘그를 버린 여인’에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권위주의와 폭력을 비판하는 소재로 ‘안네의 일기’와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인용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