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근 목사 칼럼
자유와 축복을 누리려면?
우리의 일상은 때로 무거운 의무와 막연한 불안 사이를 오갑니다. “얼마나 더 노력해야 인정받을 수 있을까?” 혹은 “내 삶은 왜 이렇게 답답할까?”라는 질문들이 우리를 짓누르곤 합니다. 누구나 인생의 ‘자유’와 ‘축복’을 갈망하지만, 정작 그것을 어떻게 누려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길을 잃기 일쑤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순종이란 예상치 못한 행복의 비결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억압하는 줄 알았던 규범이 도리어 우리를 가장 자유롭게 만드는 ‘축복의 울타리’라는 사실입니다.
진정한 자유와 축복을 누리는 첫 번째 단계는 “나는 충분히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확신을 얻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은혜는 우리가 무언가 훌륭한 일을 해냈기 때문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장 연약하고 부족할 때 먼저 찾아오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이 사랑의 크기는 ‘십자가의 사건’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성경은 이 압도적인 수용의 사건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우리가 대단한 성취를 이루었을 때가 아니라, 여전히 실수하고 넘어지는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독생자를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무조건적인 수용’을 마음 깊이 자각 (Awareness)할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시선이나 죄책감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에덴의 평안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축복의 시작입니다. 에덴 동산의 불순종이 불행을 자초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 축복을 지속할 수 있을까요? 참된 변화는 두려움이 아니라 감사함에서 나옵니다. 십자가의 그 깊은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억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그 사랑에 응답하게 됩니다. “나를 이토록 소중히 여기시는 분의 뜻이라면, 그 길을 걷는 것이 내게 가장 유익하겠구나”라는 신뢰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순종’은 나를 꺾는 고통이 아니라, 나를 살리는 ‘삶의 기술 (Practice)’입니다. 은혜를 자각한 마음이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아름다운 축복의 열매인 셈입니다.
한 초등학교 운동장의 이야기를 기억해 보십시오. 아이들을 보호하던 담장을 허물었을 때, 시각적으로는 운동장이 더 넓어 보였지만 아이들은 오히려 불안감을 느껴 운동장 한복판에만 모여 있었습니다. 반대로 튼튼한 담장이 다시 세워지자, 아이들은 담장 끝까지 달려가며 마음껏 소리치고 뛰어놀았습니다.
자유와 축복을 누리길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그에 따르는 순종은 우리를 가두는 창살이 아니라, 우리가 인생이라는 거대한 운동장에서 길을 잃거나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게 지켜주는 ‘사랑의 울타리’입니다. 당신에게 지금 당장 어떤 순종을 주님께서 원하실까요?
짧은 1분이 당신의 삶를 바꾼다
우리는 매번 결심만 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건 당신의 의지 문제가 아니라, 당신의 ‘뇌’가 작동하는 방식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APT (인지실천치료)의 핵심, “알았으면 즉시 하라”는 원칙 속에 숨겨진 뇌의 비밀을 소개합니다.
우리 뇌는 수많은 전선이 엉켜 있는 거대한 지도와 같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바로 행동에 옮기면, 뇌 속에서는 그 생각과 행동을 잇는 ‘작은 길’이 하나 생깁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입니다. “아, 이거 해야지!”라고 생각한 순간 바로 몸을 움직이면, 뇌는 이 둘을 강력한 본드로 붙여버립니다. 1분 안에 움직이는 것은, 뇌가 이 본드를 가장 끈적하게 내뿜는 ‘골든 타임’을 놓치지 않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 뇌에는 에너지를 아끼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새로운 일을 하려고 하면 뇌의 한쪽에서 “귀찮아”, “내일 해”라는 핑계를 만들어냅니다. 일종의 ‘망설임 귀신’이 나타나는 것이죠. 이 귀신은 우리가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커집니다. 하지만 이 귀신에게도 약점이 있습니다. 바로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인지한 즉시, 1분 안에 몸을 휙 움직여버리면 뇌는 핑계를 대기도 전에 이미 그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에는 뇌의 망설임 회로가 가동되기 전, 즉시 행동하여 역사를 바꾼 인물들이 많습니다.
아브라함: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이해하기 힘든 명령을 받았을 때, 그는 밤새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즉시 길을 떠났습니다. 그의 뇌는 망설임 대신 순종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 그들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나중에 하겠다는 계산 대신, 부르심 (인지)과 따름 (실천) 사이의 간격을 제로 (0)로 만든 것입니다.
삭개오: 예수님을 영접하라는 부르심에 그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했습니다. 그 짧은 찰나의 결단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즉각 순종에서 시작이 됩니다.
APT (행동 실천) 기법을 통해 즉시 실천했을 때 우리 뇌가 누리는 가장 큰 유익은 바로 ‘에덴의 법칙’ (유익의 동기로 움직임) 입니다. 미루는 습관은 우리 마음을 후회와 불안의 지옥으로 만들지만, 즉시 실천하는 뇌는 갈등이 사라진 평온한 상태, 즉 ‘마음의 에덴’에 이르게 됩니다.
거창한 계획은 필요 없습니다. 인지한 순간 바로 1분만 움직여 보십시오. 그 짧은 시간이 당신의 시냅스를 재배선하고, 당신의 삶에 낙원의 기쁨을 불러올 것입니다.
“주의 계명들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시편 119:60)
‘죽을 수밖에 없는’과 ‘ 죽었던’의 소고
우리는 교회에서 기도 문구 중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을 십자가로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내용을 쉽게 듣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익숙한 표현 뒤에 숨겨진 신학적 무게를 정밀하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과연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상태는 장차 죽음에 이를 ‘위기’의 상태였는가? 아니면 이미 생명력을 상실한 ‘사망’의 상태였는가?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여기서 바울은 죽을수 밖에 없었던 (sickness)으로를 사용하지 않고, 도리어 ‘죽었던 (Dead)’이라는 표현은 사용합니다. 이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이라는 표현은 자칫 인간에게 아직 스스로를 구원할 미세한 가능성이나, 하나님을 향해 손을 내밀 수 있는 최소한의 생명력이 남아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즉, 영적 상태를 ‘중병에 걸린 환자’ 정도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의 인간은 치료가 필요한 환자가 아니라, 이미 영적으로 호흡이 멈춘 죽었던 자로 정의합니다.
인간의 상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갖는 의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만약 우리가 ‘죽을 뻔한’ 존재라면, 예를 들면 우리가 낚시를 하다가 구명 쪽기를 입고 있다가 구조선이나 헬기가 왔을 때 우리가 죽음의 직전에 붙잡은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는 위기의 순간에 던져진 ‘구명조끼’ 정도일수 있습니다. 이 경우 구원의 주도권은 어느 정도 인간의 반응이나 책임도 있을수 있다는 것을 가정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죽었던’ 존재라면, 십자가는 단순한 도움을 넘어선 ‘부활의 사건’이자 ‘새로운 창조’가 됩니다. 죽은 자는 스스로 살아날 수도, 구조를 요청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죽었던 우리”라는 고백 위에서만, 구원은 100% 하나님의 주권적 자비이며 전적인 은혜라는 복음의 정수가 온전히 드러납니다.
물론 “죽을 수밖에 없었던”이라는 표현이 갖는 정서적 가치도 있습니다. 이는 종말론적으로 볼때, 죄의 결과로 맞이하게 될 영원한 형벌과 심판의 필연성을 강조하려는 성도들의 절박한 고백일 것입니다. 강렬한 긴박성을 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학적 책임감을 가지고 본질을 꿰뚫어 본다면, 우리는 운명론적인 표현을 넘어 존재론적인 고백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결국, 기독교의 구원은 죽어가는 자를 간신히 살려놓는 심폐소생술이 아닙니다. 아무 소망 없이 죽어 있던 시체와 같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전혀 새로운 피조물 (고후 5:17)로 만들어 주신 기적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깊은 감사의 고백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나”에서 “이미 죽었던 나”로 고백의 패러다임을 바꿀 때, 우리가 누리는 생명은 더욱 경이로워집니다. 나에게서 출발한 공로가 단 1%도 섞일 수 없는 이 완벽한 은혜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십자가의 참된 무게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때 우리가 매일 드리는 기도가 단순한 습관을 넘어, 복음의 핵심을 관통하는 진실한 선포가 되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염증을 알아야 한다
서울대학교병원 신경과 교수이자 뇌신경 분야의 세계적 석학, 그리고 뇌졸중 연구로 유한의학상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권위자 이승훈 교수가 최근 『착한 염증 나쁜 염증』이라는 책을 세상에 선보였습니다. 평생 뇌혈관과 신경계를 연구해온 그는 현대인이 앓고 있는 수많은 만성 질환의 뿌리에 바로 ‘염증’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우리가 그동안 오해해왔던 염증의 실체를 명확히 규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염증을 제거해야 할 ‘병’ 그 자체로 인식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교수는 염증에 두 가지 얼굴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 몸을 지키는 파수꾼인 ‘착한 염증’입니다. 외부에서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침입하거나 조직에 상처가 났을 때, 우리 몸은 이를 치유하기 위해 염증 반응을 일으킵니다. 상처 부위가 붉게 부어오르고 열이 나는 것은 몸속의 면역 군대가 치열하게 싸우며 회복을 돕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과정이 없다면 인체는 사소한 감염조차 이겨내지 못하고 생존을 위협받게 될 것입니다. 즉, 착한 염증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방어 기제인 셈입니다.
문제는 임무를 마친 염증이 제때 사라지지 않을 때 발생합니다. 싸움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꺼지지 않은 불씨처럼 몸속에 남아 있는 ‘나쁜 염증(만성 염증)’은 시간이 흐를수록 정상적인 세포와 혈관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이 교수는 특히 뇌졸중, 치매, 암, 당뇨와 같은 중증 질환들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재앙이 아니라, 수십 년간 내 몸속에서 조용히 축적된 나쁜 염증이 폭발한 결과라고 설명합니다. 나쁜 염증은 눈에 보이는 증상이 없기에 더욱 치명적이며, 혈관을 타고 온몸을 돌며 서서히 우리의 생명력을 갉아먹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나쁜 염증’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요? 이승훈 교수가 제시하는 관리의 핵심은 생활 습관의 근본적인 교정에 있습니다. 우선, 나쁜 염증의 가장 큰 먹이가 되는 과도한 당분 섭취와 가공식품을 멀리하는 식단의 변화가 시급합니다. 또한, 스트레스는 우리 몸의 면역 체계를 교란시켜 염증 반응을 만성화시키는 주범이므로,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는 심리적 자기 조절이 필수적입니다.
적절한 신체 활동 역시 중요합니다. 무리한 운동은 오히려 산화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있지만, 규칙적인 유산소 운동은 몸속의 염증 수치를 낮추는 천연 항염제 역할을 합니다. 결국 병은 운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보내는 미세한 신호에 귀를 기울이고 나쁜 염증이 머물지 못하는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관리의 결과’인 것입니다. 이승훈 교수의 조언처럼 염증의 두 얼굴을 올바르게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건강과 장수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고린도전서 6:19)

김병근 목사
시드니성시화운동 대표회장, 엠마오상담대학 학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