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어머니라는 이름 (Mother’s Day)
어머니라는 이름 (창 3:20, 사 66:13, 딤후 1:5)
오늘은 호주 Mother’s Day입니다. Mother’s Day는 미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08년, 미국 버지니아의 한 교회에서 안나 자비스 (Anna Jarvis) 부인이 어머니의 헌신을 기념하기 위해 첫 예배를 드린 것이 Mother’s Day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후 1914년 미국 정부가 5월 둘째 주일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했습니다.
한국의 어머니날은 구세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30년 6월 15일, 구세군 가정단은 어머니의 사랑을 기념하고 가정의 가치를 회복하자는 마음으로 ‘어머니 주일’을 지켰습니다. 1956년, 국무회의를 통해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공포했습니다. 1973년, 부모 전체를 기념하는 날로 확대하기 위해 5월 8일 ‘어머니날’을 ‘어버이날’로 개칭했습니다.
어머니라는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그 이름 안에는 생명이 있고, 사랑이 있고, 눈물이 있고, 기도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 안에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희생이 있습니다. 잠 못 이루는 밤이 있고, 남몰래 흘린 눈물이 있고, 자녀를 위한 헌신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을 의지해서 ‘어머니라는 이름’이란 제목으로 피차간에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어머니라는 이름에는 ‘생명의 통로’가 담겨 있습니다.
어머니라는 이름에는 ‘생명의 통로’가 담겨 있습니다. 어머니는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생명의 통로입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우리를 품고 먹이고 기다려 준 사람이 어머니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가장 먼저 받아 준 사람, 우리의 울음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 우리의 작은 변화에도 가장 기뻐하신 분이 어머니입니다.
창세기 3장 20절에서 아담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습니다.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와라는 이름은 생명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어머니의 존재가 생명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머니의 몸을 통해 생명을 보내시고, 어머니의 품을 통해 생명을 보호하시며,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 생명을 자라게 하십니다.
흥미로운 점은 아담이 하와라는 이름을 붙인 시점이 타락 직후라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왔고 죽음이 선언되었고 에덴에서 쫓겨날 상황인데 그 순간 아담은 여자에게 ‘생명’이라는 이름을 줍니다. 성경의 이름은 정체성 (identity)을 형성합니다. 아담이 여자를 “생명”이라고 부른 것은 여성의 존재를 생명을 품고 생명을 낳고 생명을 돌보는 존재로 규정한 것입니다. 이는 성경 전체에서 어머니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이 됩니다.
하와라는 이름은 절망 속에서 주어진 희망의 이름입니다. 죽음의 현실이 선포된 자리에서 ‘생명’이라는 이름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죽음의 현실을 맞이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생명의 역사를 이어 가십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역사 속에서 어머니가 ‘생명의 통로’로 세워집니다.
아담은 원래 ‘이름’이 아니라 ‘사람’이란 뜻입니다. 창세기 2:7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흙은 ‘아다마’이고 사람은 ‘아담’입니다. 이 단어는 처음에는 이름이 아니라 ‘흙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란 의미의 ‘보통명사’가 아담이란 이름의 ‘고유명사’가 된 것입니다.
창세기 1-3장까지는 아담을 사람이란 뜻의 ‘보통명사’로 사용하다가, 창세기 4장 이후부터 ‘아담’이란 ‘고유명사’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흙에서 빚어졌지만, 하나님의 숨결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시저의 경우는 반대입니다. 원래 사람의 이름으로 고유명사였지만, 나중에는 보통명사인 로마의 황제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흙과 하나님의 숨결이 동시에 존재하는 긴장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연약함이 함께 드러납니다.
창 3:15에 하나님이 생명의 약속을 주심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창 3:20에 아담은 그 약속을 믿고 여자의 이름을 ‘하와’ 즉 ‘생명’이라 불렀습니다. 이 두 절은 성경 전체의 구속사 구조를 압축한 핵심 본문입니다. 하나님은 심판 속에서도 생명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생명의 약속을 몸으로 이어가는 ‘생명의 통로’입니다.

- 어머니라는 이름에는 ‘위로의 품’이 담겨 있습니다.
어머니라는 이름에는 ‘위로의 품’이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서 지치고 상처받을 때, 우리는 어머니의 품을 떠올립니다. 어머니의 품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자리는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품은 우리가 다시 숨을 쉬게 하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게 하는 자리입니다.
이사야 66장 13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설명할 때 어머니의 이미지를 사용하십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이라.” 어머니의 품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자리입니다. 아이가 울 때 어머니는 말보다 먼저 품으로 안아 줍니다. 그 품 안에서 아이는 세상이 다시 안전하다고 느낍니다. 하나님은 어머니의 위로를 통해 자신의 위로를 보여주십니다.
‘존 볼비’는 20세기 발달심리학과 정신의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애착이론(Attachment Theory)을 정립한 학자입니다. 그는 ‘아이와 양육자 사이의 정서적 유대가 인간 발달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설명한 최초의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정신과 의사로 일하면서 전쟁으로 부모와 떨어진 아이들 고아원, 병원에서 장기간 분리된 아이들 치료하며, ‘분리 경험’이 아이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확인했습니다. 존 볼비는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엄마와의 안정된 애착관계’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것이 ‘애착 이론’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애착에는 ‘안정애착과 불안정애착’이 있습니다. 안정애착은 아이가 양육자를 신뢰할 수 있는 존재로 경험할 때 형성됩니다. 양육자가 아이의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필요할 때 곁에 있어 주며, 감정을 안정적으로 받아줄 때 아이는 ‘세상은 안전하다’는 기본 신뢰를 갖게 됩니다.
불안정애착은 양육자의 반응이 일관되지 않거나, 지나치게 거부적이거나, 혹은 과도하게 개입적일 때 형성됩니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내가 필요할 때 이 사람이 나를 도와줄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경험이 반복되기 때문에, 관계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안정애착을 형성한 사람은 어머니를 ‘언제든 돌아가면 나를 두 손을 벌려 받아주는 자리’로 경험합니다. 어머니의 품은 아이에게 쉼을 주는 ‘안전기지(secure base)’입니다. 어머니의 품은 소의 퀘렌시아와 같습니다. 궤렌시아는 투우장에서 소가 지칠 때 힘을 회복하는 장소입니다. 어머니의 품은 높은 설산을 등반할 때 ‘Base Camp’와 같습니다. 정상을 오르다가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만날 때 다시 돌아와 쉼을 얻을 수 있는 곳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3절과 4절은 하나님을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임재의 위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언약의 위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다시 일으키신다는 소망의 위로입니다.

파리에 가면 몽마르뜨 언덕이 있습니다. 언덕 위에는 하얀 건물로 지어진 아름다운 ‘샤르레퀴르 대성당’이 있습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제단 위에 두 팔 벌린 거대한 예수님 모자이크가 눈에 들어옵니다. 마치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 어머니라는 이름에는 ‘믿음의 유산’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어머니라는 이름에는 ‘믿음의 유산’이 담겨 있습니다. 그 믿음은 말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삶으로 전해진 믿음이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 어머니의 눈물, 어머니의 인내, 어머니의 예배가 자녀의 마음속에 믿음의 씨앗으로 심어진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5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디모데의 믿음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믿음 뒤에는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신앙이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 어머니의 말씀 교육, 어머니의 삶의 본보기가 디모데 안에 믿음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하는 모습, 말씀을 붙드는 모습,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은 자녀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집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말보다 삶을 먼저 배웁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어머니는 자녀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일 뿐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복음을 보여 주는 사람입니다.
유대인의 교육은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종교교육이며, 그 중심에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유대교는 모계 혈통을 기준으로 유대인 여부를 판단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신앙과 정체성을 전수하는 핵심 존재라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모국어란 어머니 나라의 말입니다. 우리가 배운 말들은 어머니에게 배운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많은 것을 물려주고 싶어 합니다. 좋은 교육을 물려주고 싶어 합니다.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어 합니다.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게 해 주고 싶어 합니다. 좋은 인맥과 좋은 기회를 주고 싶어 합니다. 이 모든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유산이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재산은 있다가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건강도 시간이 지나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세상의 지식도 시대가 바뀌면 낡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은 자녀의 영혼을 붙드는 뿌리가 됩니다. 믿음은 자녀가 인생의 풍랑을 만날 때 붙들 수 있는 닻이 됩니다. 믿음은 자녀가 세상의 유혹 앞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방향을 잡아 주는 나침반이 됩니다.
딤후 1:6절의 말씀은 교육과 양육의 본질을 깊이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바울은 디모데에게 새로운 것을 억지로 집어넣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디모데 안에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바울의 역할은 디모데 안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심어 두신 은사를 다시 기억하게 하고, 다시 살아나게 하고, 다시 불붙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참된 교육입니다. 교육(Education)이란 단어는 밖에 있는 것을 안으로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끌어내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어머니는 생명의 통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품고, 돌보고, 세우는 귀한 통로입니다.
어머니는 위로의 품입니다. 상처 입은 자녀를 품고, 지친 마음을 쉬게 하며, 하나님의 위로를 보여 주는 품입니다.
어머니는 믿음의 유산입니다. 자녀에게 하나님을 가르치고, 기도를 보여 주며, 거짓 없는 믿음을 심어 주는 첫 스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머니께 감사해야 합니다. 생명을 품고 낳아 주신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돌보아 주신 사랑에 감사해야 합니다. 말없이 흘린 눈물과 드러나지 않은 희생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신 믿음의 수고에 감사해야 합니다.
작년 12월에 어머니가 소천하셨을 때, 문상을 왔던 둘째 손위 처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네도 이제 고아 반열에 들어섰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늦기 전에 부모님에게 사랑을 표현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사랑은 표현되어야 합니다. 감사는 전해져야 합니다. 공경은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분들은 교회의 어르신들을 부모님처럼 공경하시기를 바랍니다(옆에 있는 사람에게 서로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오늘 어머니 주일을 맞아 어머니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어머니를 생명의 통로로 세우시고, 위로의 품으로 사용하시며, 믿음의 첫 교사로 삼아 주신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주님, 우리를 낳고 길러 주신 어머니들의 수고를 기억하여 주옵소서. 말없이 흘린 눈물과 드러나지 않은 희생과 자녀를 위한 기도를 주님께서 기억하여 주옵소서.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에게 새 힘을 주시고, 지친 마음에는 위로를, 외로운 마음에는 주님의 임재를 더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가정이 생명을 살리는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서로의 마음을 꺾는 말이 아니라 살리는 말을 하게 하시고, 자녀를 소유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생명으로 존중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가정이 위로의 품이 되게 하옵소서. 상처 입은 마음이 쉬어 가고, 실패한 사람이 다시 일어나며, 눈물 흘리는 사람이 정죄받지 않고 품어지는 가정과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가정이 믿음의 학교가 되게 하옵소서. 로이스와 유니게의 믿음이 디모데에게 이어졌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믿음도 다음 세대에게 흘러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자녀들이 거짓 없는 믿음으로 자라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게 하옵소서.
생명의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 오늘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주님의 은혜로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감사로 어제를, 기쁨으로 오늘을, 기도로 내일을 (살전 5:16-18)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창립 7주년 감사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예배는 단순히 교회의 생일을 기념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오늘의 예배는 7년전 우리 교회를 세우신 에벤에셀의 하나님, 지금도 교회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그리고 앞으로도 교회를 인도하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시간입니다.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보며 후회하고, 미래를 바라보며 염려하고, 그래서 오늘을 불안하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과거를 돌아볼 때는 후회가 아니라 감사로, 미래를 바라볼 때는 염려가 아니라 기도로, 오늘을 살아갈 때는 불안이 아니라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후회는 과거에 했던 일보다는 하지 않은 일에 대한 것들이 많습니다. 현대인의 일반적인 정신적 문제는 우울과 불안입니다. 우울은 주로 현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의 삶에서 에너지가 떨어지고, 의미가 흐려질 때 찾아옵니다. 우울증은 마음만 우울한 것이 아니라 몸도 우울해집니다.
불안은 주로 미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마음이 과도하게 경계할 때 생깁니다. 인간은 시공간의 한계적인 존재입니다. 실존은 불안하다고 합니다. 내일의 불투명이 오늘의 불안을 증폭시킨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래를 하나님께서 인도한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불안 대신 기대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오늘의 본문의 말씀을 의지해서 “감사로 어제를, 기쁨으로 오늘을, 기도로 내일을”이란 제목으로 피차 간에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감사로 어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
사무엘상 7장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에벤에셀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함이더라.”
하나님은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십니다.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이라는 뜻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위협 가운데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한 후에 이 이름을 선포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승리가 이스라엘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강해서 이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군사력이 특별히 강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전략이 뛰어났던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돌아왔고, 사무엘이 번제를 드리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셔서 그들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미스바 성회는 회개의 성회였습니다.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삼상 7:6)
지난 수요일 어느 목사님을 만나서 간증을 들었습니다. 잘 나가던 사업이 망하고 먹을 것도 없을 때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먹을 것을 사달라고 할 때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이분은 날마다 무릎 끓고 하나님에게 물질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어느 순간에 달라는 기도가 회개의 기도로 바뀌면서 상황은 바뀐 것이 없는데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후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할 때마다 바로 응답을 해 주는 것을 보고 기도한 자신이 제일 많이 놀랐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부흥은 1907년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경회가 끝나도 아무런 은혜가 없었지만, 길선주 장로님이 회개하면서 교회의 부흥의 불길이 일어난 것입니다.
에벤에셀은 단순한 기념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우리의 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이 고백이 바로 에벤에셀입니다.
2019년 구세군 호주 본영에서는 한인교회가 남쪽에 하나만으로 부족하여, 북쪽에도 교회를 개척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우리는 개척사관으로 임명은 받았지만, 예배를 드릴 장소는 없었습니다.
2019년 4월 14일 사택에서 첫 번째 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과 딤후 3장 16-17절의 말씀을 의지하여 “성경과 함께 성령과 함께”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다. 사택 시대는 6개월간 지속되었다. 6개월 동안 백방으로 알아보았습니다. 그때 구세군 채스우드 교회도 갔지만, 너무 많은 프로그램이 있어서 안 된다고 했습니다.
6개월 후 라이드에서 목회하던 조진호 목사님이 은퇴하면서 저희 교회가 10월 6일 라이드로 이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로 5년 2개월이 지나고, 2025년 1월 5일 구세군 채스우드 교회 이전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지난 7년을 돌아보면, 결코 쉬운 길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개척의 설렘도 있었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기대도 있었지만 염려도 있었습니다. 기쁜 날도 있었지만, 눈물의 시간도 있었습니다. 감사도 있었지만 좌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분명히 고백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에벤에셀의 돌을 마음에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우리는 감사로 어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감사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 기쁨으로 오늘을 살아가야 합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이사야 41장 10절은 말씀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임마누엘이란 단어는 이사야서 7장 14절에 처음 등장하고, 마태복음 1장 23절에 예수님의 탄생으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성경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말은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백성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아무 문제도 없는 평안한 자리에서 주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불안과 염려 가운데 있는 백성에게 주신 위로의 말씀입니다. 바벨론 포로기의 어두운 현실과 회복의 약속 사이에서 흔들리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가장 먼저 “내가 너와 함께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고, 하나님의 임재로 유지되며, 하나님의 준비하심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백성의 공동체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기뻐해야 할 이유는 분명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가운데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기쁨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많아서만 기쁜 것도 아니고, 형편이 넉넉해서만 기쁜 것도 아닙니다. 교회의 참된 기쁨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사실에서 옵니다.
우리 교회는 ‘성부가 주인 되고, 성자가 머리 되어, 성령이 인도하는’는 교회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자신의 교회에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창립 7주년 감사예배는 과거를 감사하며, 현재를 기뻐하는 자리여야 합니다. 교회는 ‘기쁨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 기도로 내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창세기 22장 14절은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이레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시험이었습니다. 약속의 아들이며, 백세에 얻은 아들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아들이 바로 이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길에서 이삭이 묻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그때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수풀에 걸린 숫양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곳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즉, 사람이 다 알지 못해도 하나님은 이미 준비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창립 7주년을 맞이한 우리 교회는 과거를 감사하고, 현재를 기뻐하고, 미래를 기도로 준비해야 합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많은 것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교회 앞에는 여전히 많은 과제가 있습니다. 다음 세대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 지역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 더욱 건강한 공동체로 어떻게 자라 갈 것인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어떻게 더 충실히 감당할 것인가 하는 질문들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정말 감사한 것은 우리 교회는 청년부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다민족으로 함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다른 교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축복입니다. 2024년부터 청년부가 다민족으로 조직되었습니다. 청년부는 리더들이 돌아가며 성경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격주로 수요일마다 옥 사관학생 집에서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는 ‘다른 세대’(사 2:10)가 아닌 ‘다음 세대’로 성장해야 합니다. 다른 세대는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이고, 다음 세대는 하나님을 아는 세대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기도로 내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교회는 기도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결론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창립 7주년 감사예배를 드리며 우리는 세 가지 이름을 마음에 새깁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로 어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쁨으로 오늘을 살아가야 합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앞으로도 준비하시고 인도하실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로 내일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고백은 분명합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 여기까지 도우셨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지금도 함께하십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앞으로도 준비하실 줄 믿습니다.”
1) 과거를 돌아보며 후회 대신 감사
2) 현재를 살아가며 불안 대신 기쁨
3) 내일을 바라보며 염려 대신 기도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 교회가 창립 7주년 감사예배로 주님 앞에 서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지난 7년 동안 우리를 붙드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세워 주신 은혜를 찬양합니다. 우리의 힘과 지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여기까지 왔음을 고백합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 지난날을 돌아볼 때 감사가 넘치게 하옵소서.
임마누엘의 하나님,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셔서 기쁨으로 예배하게 하옵소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앞으로의 길도 주께 맡기오니 우리 교회를 친히 준비하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교회가 말씀 위에 굳게 서게 하시고, 기도가 살아 있는 교회가 되게 하시며, 사랑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다음 세대를 세우게 하시고, 이웃을 섬기게 하시며,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지나간 7년을 감사하게 하시고, 오늘의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하게 하시며, 앞으로의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선교와 헌신과 예배
본문: 로마서 12장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서론
오늘 시드니 영락교회 여선교회 헌신예배에 초대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12장 1절의 말씀을 의지해서 ‘선교와 헌신과 예배’란 제목으로 피차간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 첫째 시간에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가르치기 위해서 오지 않고 배우기 위해서 왔습니다.” 여기에서 끝나면 너무 실력 없는 교수라고 생각할까 봐 한마디 더 합니다. “배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가르칠 자격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오늘 이곳에 은혜를 받으러 왔습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중 고린도에서 쓴 글입니다. 로마서는 크게 두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1장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는가?”에 대한 구원에 대한 말씀이고, 두번째는 12–16장은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성화에 대한 말씀입니다.
구세군 군복의 견장은 S.S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인 Salvation은 신분의 변화이고, 성화인 Sanctification 삶의 변화입니다. SS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Saved to Save, Saved to Serve, Salvation and Sanctification(거룩, 성화, 성별) 등의 뜻입니다. 같은 학교에서 강의하는 목사님이 군복을 입고 싶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몇 번을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 SS가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습니까?” “잘 알지요. Super Star 맞죠”
Salvation은 헬라어로 SOZO입니다. 이 단어는 영혼구원에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육의 전인구원에 사용합니다. 거룩은 HAGIOS입니다. 하기오스는 구원받았으면 구원받은 자답게 사는 것이 거룩입니다. 구원이 신분의 변화라면, 성결은 삶의 변화입니다. 구원과 성결은 모두 성령의 역사입니다. 구원이 성령세례라면, 성결은 성령 충만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했습니다. 거룩하지 못한 인간이 거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거룩한 영인 성령 충만할 때만 가능합니다. 에베소서 5: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이란 차고 넘친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지배를 받으라는 뜻입니다. 받으라는 동사는 명령형, 현재형, 수동태입니다.
1-11장에서 대표적이 구절은 롬 1:17절의 말씀입니다. 1:17절의 말씀을 의지해서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하박국 2:4절의 말씀이며, 마틴루터가 종교개혁의 횃불을 높이 올릴 때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고, 성령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며, 그 복음에 합당한 삶으로 나아가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입니다. 신앙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가를 믿는 것입니다.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을 아십니까? 불교는 자력종교이고 기독교는 타력종교입니다. 불교는 Bottom Up이고 기독교는 Top Down입니다. 불교는 Do이고, 기독교는 Believe입니다.
혹시 부처님과 예수님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헤어스타일
로마서 12장 1절의 첫 단어인 “그러므로”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접속사가 아니라, 앞에서 말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위에 우리의 삶의 응답이 이어져야 함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구원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의무가 아니라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억지로 무엇을 해 보려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사람이 감사함으로 자신을 드리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세 가지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 헌신, 예배입니다. 자비를 입은 사람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되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며, 삶 전체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됩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자비 앞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세 가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 선교
예수님의 ‘지상최대의 계명’은 사랑이고(마 22), 지상최대의 사명은 선교입니다(마 28).
전도(Evangelism)와 선교(Mission)는 조금 개념이 다릅니다. 전도는 한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돕는 일에 초점을 맞추는 사역입니다. 복음의 핵심을 전하고,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소개하며,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 생명을 얻도록 이끄는 일이 전도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는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심의 순간을 향해 집중하는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선교는 매체를 통한 전도입니다. 선교는 그 영혼이 속한 삶 전체가 하나님 나라의 질서로 회복되도록 돕는 사역입니다. 선교는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것을 넘어, 한 사람이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관계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육체적으로도 온전히 회복되도록 돕는 전인구원의 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새롭게 하시고, 그가 속한 공동체와 문화까지 변화시키는 일을 포함합니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전도를 넘어 선교였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 9:35)
선교의 현장에는 언제나 Teaching, Preaching and Hearing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한국 선교를 1884년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1885년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1884년은 의사 알렌이 온 해이고, 1885년 4월 5일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온 날입니다. 이들을 통해서, 병원, 학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성도는 세상 속으로 파송된 선교사입니다. 복음을 아는 성도는 그 복음을 증언해야 하고, 자비를 입은 성도는 그 자비를 전해야 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변화시키면 세속화이고,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면 선교입니다.
교회는 은혜를 보관하는 창고가 아니라 은혜를 흘려보내는 통로입니다. 교회가 선교적이지 않으면 선교의 적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교인 때문이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도 교인 때문입니다.
- 헌신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헌신은 내가 가진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리빙스턴이 어릴 때 헌금 시간에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어서 종이에 ‘저를 드립니다’ 라고 썼다고 합니다.
헌신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그 향유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향유는 아주 비싼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낭비라고 보았습니다. 너무 아깝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여인의 행동을 헌신으로 받으셨습니다. 그 향유는 옥합 안에 있을 때보다, 주님께 부어졌을 때 더 아름다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깨뜨려졌을 때 비로소 향기가 퍼졌고, 드려졌을 때 비로소 가치가 나타났습니다.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100세에 얻은 이삭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시험이었습니다. 약속의 아들이며, 백세에 얻은 아들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아들이 바로 이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드릴 수 있는 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헌신은 한순간의 감정적인 결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며, 거룩한 삶을 선택하는 지속적인 순종의 태도입니다. 내가 원하는 길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따르고, 내 만족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귀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그러므로 헌신은 어떤 특별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도가 매일의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하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 예배
본문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영적 예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수가성의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자, 여인은 어떻게 유대인인 당신이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우물을 달라고 하냐고 묻습니다(9절).
이 말은 들은 예수님은 물을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네가 오히려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였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은 우물은 깊고 물을 길을 그릇도 없는데 어디서 물을 얻을 수 있냐고 되묻습니다. 예수님은 이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여인은 그런 물이 있다면 내게 달라고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했습니다. 남편이 없다는 여인에게 네가 옳다고 하면서, 과거의 5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고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라고 하자, 여자는 놀라며 19절에 내가 보니 ‘선지자’라며 예배 장소에 대해서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 드리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릴지니라”(요 4:24) 앞의 영도 프뉴마이고, 뒤의 영도 프뉴마입니다. 앞은 하나님의 영을 의미하고 뒤는 인간의 거듭난 영을 의미합니다. 영적 예배란 영이신 하나님께 인간의 거듭난 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만약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드리는 것은 예식이지 예배가 아닙니다. 대답을 듣고 여인은 놀라며, 물동이를 버리고 마을로 가서 메시아를 만났다고 증거합니다(29절).
히브리어 ‘아보다’(Avodah)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아보다(Avodah)’는 단순히 하나의 뜻만 가진 단어가 아니라, ‘일(work)’, ‘섬김(service)’, ‘예배(worship)’라는 세 가지 의미를 동시에 품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 세 의미가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1) 일(Work) 아보다는 일상에서 사람이 감당하는 노동, 일, 직업적 활동을 의미합니다. 밭을 가는 일, 집안을 돌보는 일, 공동체를 위한 수고까지 모두 아보다에 포함됩니다. 즉, 히브리적 세계관에서는 일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의 행위입니다.
2) 섬김(Service) 아보다는 또한 섬기다, 봉사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왕을 섬기거나, 이웃을 돕거나, 공동체를 위해 일하는 모든 행위가 아보다입니다. 이때 섬김은 단순한 봉사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의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3) 예배(Worship) 아보다는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로도 사용됩니다. 즉, 예배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적 사고에서는 ‘일하는 것’과 ‘예배하는 것’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일상에서의 수고와 섬김이 곧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됩니다.
영적 예배는 주일 한 시간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월요일의 일터에서도 예배가 계속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의 대화도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이웃을 대하는 태도도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고난을 견디는 방식도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눈물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예배이며,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정직하게 사는 것도 예배입니다.
결론
로마서 12장 1절은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첫째, 선교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삶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머물지 않고 보냄 받은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둘째, 헌신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기쁨으로 드리는 삶입니다.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순간이 아니라 매일을, 형식이 아니라 존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셋째, 예배는 삶 전체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영적 예배입니다. 예배당 안에서만이 아니라, 삶의 자리마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를 선교의 사람으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를 헌신의 자리로 이끄시며, 헌신의 삶은 결국 영적 예배가 됩니다.
예배와 헌신은 분리될 수 없고, 예배와 선교도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배가 살아 있으면 헌신이 살아납니다. 예배가 살아 있으면 선교도 살아납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은 자신을 드리게 되고, 자신을 드린 사람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며 살게 됩니다. 모여서 드리는 예배는 흩어져서 삶의 예배로 이어져야 합니다.

혈관과 신경을 기독교적 관점으로 보기
서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몸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몸 안에는 뼈와 근육, 장기와 피부가 있고, 그 모든 기관들이 서로 연결되어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중에서도 혈관과 신경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지키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혈관은 피가 흐르는 길입니다. 피는 산소와 영양분을 온몸에 공급하고, 생명을 유지하게 합니다. 신경은 몸의 소통 체계입니다. 뇌와 몸 사이에 신호를 주고받으며, 감각, 움직임, 반응을 조절합니다. 혈관이 막히면 생명의 흐름이 막히고, 신경이 손상되면 몸의 감각과 기능이 무너집니다.
이 관계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혈관은 생명의 흐름을 보여 주고, 신경은 말씀과 성령에 대한 영적 감각을 보여 줍니다. 건강한 몸에 피가 잘 흐르고 신경이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듯이, 건강한 신앙에도 그리스도의 생명이 흐르고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영적 감각이 필요합니다.
- 혈관은 생명의 흐름을 보여 줍니다.
성경은 피를 생명과 깊이 연결합니다. 레위기 17장 11절은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제사와 속죄의 맥락에서 주어진 말씀이지만, 동시에 피가 생명과 얼마나 밀접한지를 보여 줍니다. 피가 흐른다는 것은 생명이 흐른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혼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흘러야 합니다. 은혜가 흐르고, 사랑이 흐르고, 용서가 흐르고, 기도가 흘러야 합니다. 신앙이 건강하다는 것은 단지 종교적 활동을 많이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교회도 하나의 몸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설명합니다.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지만, 모두 한 몸에 속해 있습니다. 혈관이 온몸에 피를 보내듯이, 교회 안에는 사랑과 은혜와 섬김이 흘러야 합니다.
그러나 혈관이 막히면 몸이 병들듯이, 영적 혈관도 막힐 수 있습니다. 미움이 쌓이면 사랑의 흐름이 막힙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은혜의 흐름이 막힙니다. 교만이 들어오면 섬김의 흐름이 막힙니다. 불평과 원망이 많아지면 감사의 흐름이 막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영적 혈관을 점검해야 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고 있는가, 내 가정 안에 사랑이 흐르고 있는가, 교회 안에 용서와 섬김이 흐르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님의 생명이 막힘없이 흐르는 삶입니다.
- 신경은 영적 감각을 보여 줍니다.
신경은 몸의 감각과 반응을 담당합니다. 뜨거운 것을 만지면 신경은 즉시 위험을 알려 줍니다. 몸 어딘가에 상처가 생기면 신경은 통증을 통해 문제를 알립니다. 신경이 건강해야 몸은 위험을 피하고 바르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영적 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적 감각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반응해야 합니다. 죄를 지었을 때 마음에 찔림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실 때 겸손히 돌이킬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우리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깨우는 영적 신경과 같습니다. 말씀은 우리가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 깨닫게 합니다.
하지만 영적 감각도 둔해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죄에도 마음이 아팠지만, 반복되면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 신경이 무뎌진 상태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넘어졌는데도 아픈 줄 모르는 것입니다.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건강한 신앙인은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고, 이웃의 아픔에 민감하고, 죄의 유혹에 민감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한 사람입니다.
- 혈관과 신경이 함께 건강해야 합니다.
혈관과 신경은 서로 다른 역할을 하지만, 둘 다 몸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피가 잘 흘러도 신경이 마비되면 몸은 제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신경이 살아 있어도 혈액순환이 막히면 몸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건강한 몸은 혈관과 신경이 함께 건강해야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흘러야 하고, 성령의 감각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생명을 얻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 붙어 있을 때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랑과 순종과 섬김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실 때, 우리는 생명력 있는 신앙인이 됩니다. 성령은 우리의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막힌 관계를 회복시키시며, 무뎌진 영적 감각을 깨우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흐르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신앙은 두 가지를 함께 붙드는 신앙입니다. 하나는 생명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 감각입니다. 생명이 흐르지 않으면 신앙은 메마르게 됩니다. 영적 감각이 없으면 신앙은 방향을 잃게 됩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흐름이 있어야 하고, 서로의 아픔을 느끼는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가 흘러야 하고, 성령의 음성에 민감해야 합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흘러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결론
혈관과 신경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몸의 신비를 보여 줍니다. 혈관은 생명을 흐르게 하고, 신경은 몸을 깨우고 반응하게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건강할 때 몸이 온전히 살아 움직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흘러야 합니다. 성령께서 깨우시는 영적 감각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막히지 않아야 하고, 말씀에 둔감하지 않아야 합니다. 은혜가 흘러야 하고, 순종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