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 해석(49)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 요나서(1)
요나에 대한 정보
왕하 14:25에 요나에 대한 기록이 있다. 요나는 ‘여호와의 종’, ‘가드헤벨’ 출신,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로 소개된다. 요나서 1:1에는 요나를 똑같이 ‘아밋대의 아들’로 밝히고 그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점, 그가 큰 성 니느웨에 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은 점 등을 통해 그가 선지자임이 드러난다. 따라서 이러한 성경의 증언들로 우리는 여로보암 2세 때의 요나가 바로 요나서의 요나와 동일인임을 추정한다. 요나의 사역 시기는 앗수르가 점점 강성하던 시기이며 곧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전의 시기 (8 BC)다. 선지자 호세아 (호 1:1)의 사역시기와 중첩된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
요나서는 여러 주제들을 품고 있지만, 그 하나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들고 찾아가야 하는 말씀 사역자의 고충을 그린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의 적국 (敵國)이었다. 앗수르는 남유다까지 유린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원수였다. 이는 어느 면에서 그 나라가 하나님 자신의 원수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스라엘의 원수인 앗수르를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고 싫어한 것은 요나만이었을까. 하나님은 앗수르를 싫어하시지 않으셨나. 싫어하셨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눈에도 한숨에 날려보내고 싶으신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앗수르를 말씀하실 때,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1:2)고 말씀하셨고, 요나가 나중에 니느웨에 가서 전한 말씀은 ‘심판의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3:4).
그러면 하나님은 요나처럼 앗수르를 미워만 하셨을까. 그렇지 않으셨다. 그들의 죄는 미워하셨지만 그들을 사랑하셨다.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4:11)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그러하시다. 반면 요나는 이 죄인인 니느웨가 죄인이기 때문이라가 보다도 자기 동족의 원수이기 때문에 더 싫어한 듯 보인다. 이 동족의 원수에게 누구도 아닌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마음이 가 있기에 요나는 하나님도 싫어한다.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사랑하나 자기 원수에게 마음이 가 있으신 것을 알기에 요나는 화가 나는 것이다. 요나는 하나님께 저항한다. ‘어디 해 볼테면 맘대로 해 보시라’ 하고 다시스 행 배에 오른다.
하나님의 사랑의 두 측면
혹자는 이렇게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 족속 앗수르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요나서에서 보고 요나서의 주제를 ‘하나님의 사랑 (혹은 긍휼)의 보편성’이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적어도 필자에게 있어서는 이 말은 반 정도만 맞아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앗수르 나라가 생겨서 망하기까지 여러 선지자들을 시대마다 보내셨겠지만 (추측), 우리가 성경에서 얻는 정보는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시대의 앗수르에게 ‘그’ 요나를 보내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논할 때 아주 중요한 사항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특수성’을 본다. 하나님의 앗수르의 여러 왕들의 시대에 ‘그’ 왕이 다스리던 ‘그’ 니느웨로 요나를 보내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두 측면은 다음 질문에 대답해 봄으로 정리가 된다. 요한복음을 읽으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인가, 아니면 어떤 특정한 무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신가.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으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사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누구든지’ 그분을 믿어 멸망치 않고 구원을 받기를 바라셨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보편성’이다. 한편, 같은 복음서 요한복음 17장 9절에서는 “내 (예수님)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즉,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하시지 않고 ‘그들’을 위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누구인가. 17:6에는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고 또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신” 사람들이라고 하신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특수성이다. 바로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세 전에 구원 하시기로 택정하신 사람들’이다.
누가복음을 읽어보라. 특정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주 잘 나타나 있는 대목이 있다.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느니라” (눅 4:25-27) 이 말을 들은 회당에 있는 자들은 다 크게 화가 나서 예수님을 동네 밖,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에 예수님을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였다. 이 대목에서 한번 생각해 보시라. 요나가 그 시대의 니느웨 사람들에게 보냄 받은 것처럼, 엘리야는 그 과부에게, 엘리사는 그 이방 나아만에게 보냄 받았다. 또 생각해 보라. 예수님이 당신을 해하려는 사람들을 미워하셨을까. 그들도 사랑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도 예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아버지께 속한 사람들이 받고 누린다. 이 특정한 사람들이 참 교회다. 이 특정한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안다.
사회구원, 사회복음, 만물회복, 생태신학의 오류
자유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보편성을 하나님의 사랑의 특수성과 혼동을 한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의 보편성’을 말하고, 예수님과 관련하여서는 ‘보편적 그리스도’ 곧 ‘익명의 그리스도’ 같은 것을 말하고, 성령님과 관련하여서는 만물을 회복하시는 ‘만유구원의 성령의 사역’을 말한다. 나는 이러한 사람들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두 측면을 모두 다 말했으면 좋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신 의미를 우리 모두가 알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성령 안에서 복음 전파와 아울러 사회 봉사에 적극 참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 구원’, ‘보편 구원’은 아니다. 각각의 개인이 주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지 단체적으로 구원 받는 것은 없다. 니느웨 백성들이 단체적으로 회개한 것은 개인개인의 회개의 결과가 그렇게 나타난 것이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며,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이 구원을 받는다. 죄 문제가 먼저 해결되고 사회 구조 악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죄 문제를 외면하고 사회 구조 악 해결이 모든 것의 선결점이자 종착역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적 무지다.
복음전파와 영혼 구원을 시작하여 사회봉사로 나아가고 생태계 보호 등으로 나아가는 것이 순서인데, 우리가 이 모든 봉사를 위해 힘써야 하는데, 이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오시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 전, 마귀가 불못에 빠지고 악한 자들이 영원한 불에 들어가기 전에는 이 문제가 궁극적인 해결점에 이르지 못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고, 하나님과 우주에 대하여 비성경적으로 말하는 ‘만유재신론’의 기초 위에 놓인 ‘사회 구원’이나 ‘만물 회복’은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몰트만의 요 17:21에 대한 사회적 삼위일체에 기초한 보편구원론적 경향은 극히 조심해야 한다 (이승구의 논문, “사회적 삼위일체론의 위험성과 가능성,” 413).
요나서로 돌아와서
요나서로 돌아와서 보자면, 니느웨의 회개에는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 뿐 아니라 특정 대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오버랩되어 있다. 단순히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을 사랑하시는 것에 나아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심중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을 향한 불같은 긍휼이 또 있다는 것이다. 그일을 요나가 하는데 요나는 우선 주의 종이다. 주의 종은 기도하는 자이고 주의 속내를 아는 자로서 선지자의 영성을 가진 자이다. 주의 사랑을 받은 히브리 사람들 중에 속해 있는 말씀의 사역자다. 그가 원수인 사람들,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야 하니 마음이 착잡하기 그지 없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지만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하니 마음이 괴롭다. 요나는 저항한다. 그의 발걸음이 떨어질리 만무하다. 다시스로 도망친다. 큰 폭풍의 원인을 안다. 큰 물고기 뱃속에 까지 들어간다. 니느웨로 가서 전도하면 그들이 회개할 것까지도 예상한다.
…다만 우리가 이러한 성경적 신학적 사유 속에서 할 일은 이러한 보편적 사랑 외에 특수한 사랑이 있는 것은 분명하되, 현재 우리는 누가 하나님의 특수한 사랑의 수혜자가 될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도가 필요하고 성경 말씀을 통해 주의 음성을 듣는 것이 필요하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보냄 받듯,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보냄 받듯, 사도 바울이 루디아에게 보냄 받듯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주의 전도자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잘 모를 때는 그저 사랑하는 마음으로 누구에게나 일단 나아가야 할 것이다. 다만 요나처럼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보냄 받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주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데 계속 저항만 하겠는가.
최영헌 교수(알파크루시스 신학대학교)
yunghun.choi@ac.edu.a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