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 해석(7)
지금은 절개 (節槪)를 구할 때: 호세아서<7>
호세아서의 구조와 관련하여 3장은 세 가지 측면에서 바라 볼 수 있다. 첫째로, 3장은 1장과 마찬가지로 이야기체다. 1장의 이야기가 2장의 선지자의 설교로 확장되는 것처럼, 3장의 이야기가 4-14장의 설교로 이어진다. 이런 점에서 1-2장과 3-14장은 병행을 이룬다고 하겠다. 둘째로, 3장은 1장의 이야기와 함께 이어서 볼 때 계기적 (sequential)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1장은 호세아가 고멜과 결혼한 내용인데, 3장은 그 고멜이 다른 남자에게 가서 음행하였음을 보여주고 야웨께서는 선지자에게 그 여자를 다시 사랑하라 명하시는 내용이기에 1장과 3장이 시간적 선후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3장은 쟝르는 다르지만 2장과도 연결되어 있다. 2장에 이 음탕한 여인은,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하였다. 또한 그녀는 하나님이 그 그릇된 애정 행각을 막으실 때, ‘내가 본 남편에게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할 것이다. 이러한 주제들 곧 ‘다른 남자를 좇음’, ‘본 남편에게 다시 돌아감’은 3장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 2장은 3장을 예시 (foreshadowing)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각 장을 편집사적으로 생각할 수 없게 본문이 인과적으로 진행 (causality)한다는 것이다. 나는 자유주의자들이 본문의 인과성을 무시하고 뭔가 기가막힌 것을 발견한 듯이 멋대로 자기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본문을 재구성하는 행위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편, 3장은 야웨 하나님의 명령과 선지자의 순종의 행동 (1-3절)과 여기에 이어진 예언 (4-5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휴대된 예언은 앞에서 본 것처럼 하나의 심판 (4절)과 하나의 회복 (5절)을 보여준다. 심판 (혹은 징계)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구원은,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우상시하던 왕과 방백 (이스라엘은 사무엘 때부터 왕이신 야웨를 무시하고 왕을 달라고 부르짖었다), 바알에게 분향함과 금송아지 상에 입맞춤, 길흉화복을 점치는 도구로 전락한 에봇 (제사장의 의복), 그리고 가정에 안치하고 복을 준다고 음란히 섬기던 드라빔 등을 오랜 세월동안 그들의 손에서 빼앗아버리시겠다는 말이다. 그 뒤에 이스라엘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 (예수아 함마쉬아흐)를 영접하고 야웨의 은총의 날개 아래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1절의 야웨의 명령 속에 벌써 그 명령의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즉, 야웨께서 선지자에게 어떤 행동을 명하시면서 그 해석을 선지자에게 분명하게 일러주신다는 것이다. 왜 야웨께서는,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고 하시는가 – 그것은 “이스라엘 자신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야웨께서 죄를 사랑하신다는 말이 아니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백성을 초지일관 사랑하신다는 말이다. 야웨의 사랑이 이와 같이 변함 없으니 나는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하면 본문을 크게 오해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음행에 대해 야웨께서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고 많은 날 동안 음행할 틈조차 주지 않으시는 징계로 처결하심이 4절에 보이지 않는가.
지난번 이스라엘에 갔을 때 나는 만나는 유대인에게 짧은 히브리어 실력이지만, “샬롬 베헤세드 레이스라엘 레올람! (평강과 인자가 이스라엘에게 영원히 있기를 바래요!)”이라고 인사하였다. 혹은, “호두 라도나이 키톱 키 레올람 하스도! (야웨께 감사하세요. 그분은 선하시고, 그분의 인자하심은 영원하니까요!”라는 말씀 (시 118:1)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공항에서, 쇼핑센타에서, 거리에서…이 말을 하면 그들은 예외 없이 “아멘!”하였다. 나는 평소에 주위에서 하도 “아멘!”을 많이 듣기 때문에, 또 나 자신도 “아멘!”을 많이 하기에 아멘은 마치 한국말인 듯 나의 뇌리에 박혀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도 자주 듣는 아멘을 유대인들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아멘할 때마다 나는 그들을 크리스챤으로 혹은 한국인으로 착각하고는 너무나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다. 내가 주 예수를 섬기는 목사로서 “야웨께 감사하라!”고 하니 듣는 자가 “아멘!”으로 화답하니 얼마나 기분이 좋고 기쁜지 얼싸 안아주고 싶은 지경이었다. 율법을 따라 까만 외투를 입고 까만 모자를 쓰고 관자놀이 근방의 머리를 길러 땋은 유대인 젊은이들, 백화점 계산대에서 다소곳이 일하는 유대인 아가씨, 추운 거리에서 만난 할아버지, 세상 모르는 듯 떠들며 지나가며 사진 한 번 찍자고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사춘기의 청소년들…이들의 입에서 하나 같이 “아멘!”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 아멘을 하는 많은 유대인들은 아직 우리 주, 그들의 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 예수아 함마쉬아흐는 그들의 마음 밖에 있었다. 소수의 사람들만, 예를 들어, 디베랴 (갈릴리)에서 만난 핀란드계 유대인 선교사 (부인은 한국인!)에게 “샬롬 베헤세드 르카 베엘로헤누 베예슈아 함마쉬아흐 아도네누!”라고 했을 때 진심으로 예수 안에서 “아멘!”하였던 것이다. “우리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과 인자가 당신에게 있길 바랍니다!” 커피 한 잔을 놓고 그와 나는 그렇게도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스라엘은 많은 날 동안 왕도 방백도 제사도 주상도 에봇도 드라빔도 없이 지냈다 (4절). 그들은 이제 야웨 뿐 아니라 그들의 왕 다윗 (=예슈아 함마쉬아흐)을 찾을 때가 되었다 (5절). 회개하고 예수를 믿을 때가 되었다. 나는 이제 이곳 시드니로 돌아와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그들이 진정 ‘예수 안에서 아멘’하도록. 예수 밖에는 이 세상에 아무 소망도 없음을 알도록. 토라와 네비임 (율법과 선지자)의 실체가 바로 예수임을 알도록—이 기도의 성취가 바로 2700년전 이스라엘 땅에서 호세아가 바라본 비젼이었음을 당신은 아십니까.
최영헌 교수 (알파크루시스 신학대학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