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초대시

고별과 석별 사이에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14:1-14)
(닫힌 문 앞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에는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은 떠나보내야 하는 순간입니다.
손을 놓아야 하는 순간입니다.
붙들고 싶지만 붙들 수 없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고별이라고 부르고,
또 석별이라고 부릅니다.
고별은 떠나는 사람의 언어입니다.
석별은 남겨진 사람의 언어입니다.
고별은 마지막 인사이고,
석별은 마지막 눈물입니다.
고별은 말하는 사람의 아픔이고,
석별은 듣는 사람의 상처입니다.
그 사이에는 인간이 평생 품고 살아가는 가장 깊은 슬픔이 있습니다.
그 슬픔은 단순히 이별의 슬픔이 아닙니다.
존재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별을 경험할 때마다 죽음을 경험합니다.
어머니를 보내는 자식도,
남편을 보내는 아내도,
아들을 보내는 부모도,
친구를 보내는 벗도,
모두 자기 안의 어떤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그런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떠나신다는 사실을 듣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부활도 모릅니다.
성령도 모릅니다.
그들이 아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주님이 떠나신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상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1,인간은 왜 이별 앞에서 무너지는가?
철학자들은 인간을 “시간 속의 존재”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영원을 살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젊음도 지나갑니다.
건강도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떠납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깊은 두려움은
죽음이 아니라 “상실”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잃어갑니다.
그리고 그 상실의 총합이
결국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할수록 두려워집니다.
사랑하는 만큼 잃을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분이 떠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영혼은 흔들립니다.
마치 태풍 속 작은 배처럼 흔들립니다.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이 말씀은
“울지 마라.” “아프지 마라.” “슬퍼하지 마라.”
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눈물을 금지하신 적이 없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던 분이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며 우셨던 분이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눈물을 모르는 초월자가 아닙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슬픔을 몸으로 살아내신 하나님이십니다.
2,하나님도 이별을 아신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너무 멀리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이별을 경험하신 하나님입니다.
에덴에서 인간을 떠나보내셨고,
광야에서 반역하는 백성을 바라보셨고,
십자가 위에서는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도 사랑하기 때문에 아파하십니다.
하나님도 사랑하기 때문에 기다리십니다.
하나님도 사랑하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눈물은
믿음 없는 사람의 눈물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입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아픈 눈물입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무너지는 눈물입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슬프지 않았을 것입니다.
3,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예수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2절)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우리는 이 말씀을 흔히 천국 이야기로만 이해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말하는 집은 단순한 장소가 아닙니다.
집은 관계입니다.
집은 소속입니다.
집은 사랑입니다.
집은 돌아갈 수 있는 품입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닙니다.
버려짐입니다.
잊혀짐입니다.
혼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네가 사랑했던 사람도 혼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집은 비어 있지 않다.”
“그곳에는 너를 위한 자리도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위로입니까?
4, 도마의 절박한 실존적 질문
도마는 말합니다.
(5절)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길을 알겠습니까?”
도마는 우리의 질문을 대신합니다.
우리도 모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왜 그렇게 빨리 떠나야 했는지 모릅니다.
왜 기도했는데 응답받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왜 하나님이 침묵하셨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답을 원합니다.
설명을 원합니다.
이해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설명 대신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는 길을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예수 자신이 길이 되십니다.
여기서 기독교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정답을 주는 종교가 아닙니다.
함께 걸어주시는 하나님을 선포하는 복음입니다.
우리는 종종 묻습니다.
“왜?”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모든 것을 이해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도 손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1) 역사적 배경
이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나누시는 자리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불안했습니다.
예수는 떠난다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자신감을 보이지만 곧 부인할 것을 예고받습니다.
도마는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나는 길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즉 이 말씀은 길을 가르쳐 주는 지도가 아니라,
예수 자신이 길이라고 선포합니다.
2) “길”(ὁδός, hodos)의 의미?
헬라어 **ὁδός(hodos)**는 단순한 도로가 아니라
삶의 방식 / 존재의 방향
인간이 걸어가는 여정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도 “길”은 윤리적 삶을 뜻했습니다.
“의인의 길” “악인의 길”
이라는 표현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는
길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라 길 자체가 됩니다.
철학적으로 인간은 언제나 길을 찾는 존재입니다.
‘어디에서 왔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디로 가는가?’
예수는 “정답을 알려주겠다.”가 아니라
“나와 함께 걸어라.”라고 말합니다.
3) “진리”(ἀλήθεια, aletheia)의 의미?
현대인은 진리를 맞는 정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헬라어 **ἀλήθεια(aletheia)**는
원래 숨겨진 것이 드러남 이라는 뜻입니다.
성서에서 진리는 명제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예수는 “내가 진리를 말한다.”가 아니라
“내가 진리다.”라고 말합니다.
철학적 의미를 살펴봅시다
플라톤에게 진리는 이데아의 세계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진리는 사실과 일치하는 판단입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진리를
“은폐된 존재가 스스로 드러나는 사건”
으로 이해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것은 요한복음의 이해와
매우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4) “생명”(ζωή, zoe)의 의미?
헬라어에는 생명을 뜻하는 말이 여러 개 있습니다.
βίος(bios) : 생물학적 삶입니다
ψυχή(psyche) : 개인의 생명입니다
ζωή(zoe) :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충만한 생명입니다
예수는”나는 ζωή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참된 존재로 살아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5) 세 단어는 하나의 구조이다
많은 사람은 길 → 진리 → 생명
이라고 순서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 세 가지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길 = 진리 = 생명
예수 안에서 걷는 것이
곧 진리를 경험하는 것이고,
진리를 사는 것이
곧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6. 바울신학과의 연결
로마서에서 바울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단순한 동의가 아니라
예수의 길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따라서
요한의 “길”과
바울의 “믿음”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존재 방식을 가리킵니다.
7. 현대 철학과의 대화를 살펴 봅시다
쇠렌 키르케고르는
“진리는 객관성이 아니라 주체성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진리는 외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입니다.
예수 역시 진리를 설명하지 않고
자신을 따르라고 부르십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에서 윤리가 시작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향한 길을
타자를 사랑하는 길로 보여주십니다.
8. 문학적 이해를 살펴봅시다
인간은 평생 길을 찾습니다.
젊음에는 성공의 길을 찾고,
중년에는 의미의 길을 찾으며,
노년에는 평안의 길을 찾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길은 멀리 있는 목적지가 아니라,
지금 우리 곁에서 함께 걷는 존재입니다.
진리는 소유하는 지식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만남입니다,
생명은 단순히 죽음의 반대가 아니라
사랑하고 용서하며 서로를 살리는 삶입니다.
종합적 해석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 선언은 배타적 구호 이전에,
인간 존재를 향한 초대입니다.
길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삶의 방향입니다,
진리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안에서 드러난 사건입니다,
생명은 그 사랑 안에서 두려움을 넘어
자유와 화해로 살아가는 존재의 충만함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올바른 교리를 선택하라”는 요구를 넘어,
예수의 삶을 따라 사랑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며,
타인을 살리는 길을 걸을 때
인간은 참된 생명을 경험한다는
이것이 요한복음이 전하고 싶은
가장 깊은 신학적 선언입니다.
9,석별의 눈물을 넘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석별은 끝이 아닙니다.
성경은 모든 이별을 영원한 단절로 보지 않습니다.
성경은 모든 눈물의 끝에 하나님 나라를 봅니다.
지금은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은 이해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너무 아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보다
더 큰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한 장면만 보고 울지만,
하나님은 마지막 장까지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무덤을 보지만,
하나님은 부활을 보십니다.
우리는 고난의 금요일을 보지만,
하나님은 주일 아침을 보십니다.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고별과 석별 사이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탄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서 계십니다.
우리보다 먼저 눈물 흘리신 분.
우리보다 먼저 상실을 경험하신 분.
우리보다 먼저 죽음을 지나가신 분.
그리고 마침내 죽음을 넘어
생명으로 일어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지막 언어는 이별이 아니라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이야기는 무덤이 아니라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소망은 죽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붙드십시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아멘.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