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 : 구성적 상상력에 대한 에세이
폴 벤느 / 필로소픽 / 2023.5.10
고대 그리스, 로마사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폴 벤느의 《그리스인은 신화를 믿었는가?》가 17년 만에 새 번역으로 복간되었다.

한국내 독자에게는 미셸 푸코의 30년 지기이자 《푸코, 사유와 인간》의 저자로 유명한 폴 벤느는 그리스 신화에 대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믿음을 사례로 삼아, ‘역사적 진실이 어떻게 우리의 구성적 상상력의 산물인지를 탐구한다.
후기구조주의 담론과 역사학을 횡단하는 흥미진진한 이 책은 진실과 믿음 사이의 포스트 트루스 사회를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커다란 문제의식을 던진다.
《사람, 장소, 환대》의 작가이자 폴 벤느의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를 옮긴 바 있는 인류학자 김현경의 번역과 꼼꼼한 주석은 작가의 개성 있는 문체를 살리면서 독자가 더 풍성하게 폴 벤느의 사유를 독해할 수 있게끔 안내한다.
○ 목차
머리말
들어가며
역사적 진실이 전승이자 불가타일 때
진실한 세계들의 복수성과 유사성
지식의 사회적 분배와 믿음의 존재양식
믿음의 사회적 다양성과 두뇌의 발칸화
이 사회학의 뒤에는 암묵적인 진실 프로그램이 있다
어떻게 신화에 그 근원적 진실을 되찾아줄 것인가
판에 박힌 말처럼 사용되는 신화
자신의 프로그램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파우사니아스
위조자의 진실과 문헌학자의 진실
문화와 진실에 대한 믿음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성

○ 저자소개 : 폴 벤느 (Paul Veyne)
고대사 분야의 세계적인 거장으로 꼽힌다.
파리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프로방스 엑스 대학의 문학부 교수를 거쳐 1975년부터 1998년까지 콜레주 드 프랑스의 로마사 교수를 지냈고, 이후로는 명예교수로 있었다.
독창적인 역사 해석과 대중적인 글쓰기로 유명하다.
주요 저서로는 《빵과 원형경기장》, 《차이들의 목록》, 《그리스인은 신화를 믿었는가》, 《고대 로마의 연애비가》, 《르네 샤르와 그의 시세계》, 《고대 로마사회》와 편저를 맡은 《사생활의 역사 제1권》, 서문ㆍ주석ㆍ번역 감수를 맡은 《세네카 선집》, 그리고 대담집인 《일상과 흥미》와 공동 저서인 《규방의 미스터리》가 있다.
– 역자: 김현경
서울대학교에서 인류학을 공부하고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EHESS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5년부터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덕성여자대학교 등에서 인류학을 가르쳤으며 현재는 독립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사람, 장소, 환대》가 있고, 옮긴 책으로 《언어와 상징권력》, 《도둑맞은 손》,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가 있다.

○ 독자의 평
- 사건을 이해하는 방법
우리는 어떤 힘이 피동적인 물체를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몰아간다는 식으로 사건들을 설명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미래는 알 수 없는 법이므로 우리는 이해가능성과 우연성을 혼합하는 절충적 해결책을 택한다. 작은 자갈 하나가 이 움직이는 물체를 멈춰 세우거나 궤도에서 벗어나게 만들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우연에 의해 수정된) 어떤 원인 대신에, 모서리의 수가 정해지지 않은(사건의 회고적인 불빛 아래서만 모서리를 셀 수 있는) 다면체와 탄력성을 가정해보자. 발생한 사건은 그 자체로 능동적이다. 그것은 원인들 사이에 자유롭게 남겨진 공간을 기체처럼 점유하며, 또한 원인들을 (내버려두기보다는) 점유한다. 역사의 에너지는 특별한 필요가 있어서가 아니라, 별 이유 없이 소비된다. 예견의 가능성은 각각의 다면체의 상황적인 구성에 달려 있으며, 언제나 제한적이다. 모서리의 수가 무한하고 (또는 불확정적이고) 어느 모서리도 다른 것보다 결정적이지 않다면, 우리가 이 모서리들을 모두 고려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연성과 이해가능성의 이원적 대립-전자를 인정하면서 후자를 수정하는-은 사라진다. 또는 다른 의미에서의 우연성-클레오파트라의 코로 대표되는 우연성보다 더 풍요로운-이 그것을 대체한다. 이는 역사의 일차적 원동력 (생산관계, 정치, 권력의지)에 대한 부정이자, 원동력의 복수성에 대한 인정이다. 아니면 장애물 (다면체의 모서리들)의 복수성에 대한 인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수많은 작은 원인들이 이해 가능성의 자리를 차지한다. 다면체는 도식이 아니므로, 이해 가능성은 사라진다. 혁명을 설명하는, 혹은 문학이나 요리의 영역에서 사회적 선호를 설명하는 초역사적인 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건은 예측불가능한 발명과 얼마간 비슷하다. 사건 자체를 분명하게 서술하는 것이 작은 원인들을 나열하는 것보다 더 흥미로우며, 아무튼 더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모든 게 역사이고, 혁명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다면체들이 존재한다면, 과연 인간과학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인간과학은 그리스 신화에 관해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않는 어떤 것을 가르쳐줄 수 있을까?(93)
- 상징적 장의 발칸화
단순히 신화만이 아닌, 우리 시대의 가짜뉴스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틀.. 하지만 신화와 가짜뉴스를 동렬에 놓을 수 있을까.. 가짜뉴스는 신화가 간직한 진실을 가지고 있는가.. 가짜뉴스의 범람과 이를 믿어버리는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이런 고급한 틀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사상들의 정치는 흔히 무의식적이고 내재적이다. 예를 들어 공격이나 방어를 위해 어떤 외래의도그마와 연합전선을 구축한다면, 어느 순간부터 그 도그마를 조금쯤은 믿게 된다. 왜냐하마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말에 부합하도록 조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진짜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게 된다. 켄타우로스에 대한 대중의 믿음에 기대었을 때 갈레노스는 냉소주의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던 만큼, 관대하고 고상한 장광설의 늪에 빠졌을 것이고 자신이 그 전에 켄타우로스에 대해 어떻게 가르쳤는지 잊었을 것이다. 흔들리는 믿음의 존재양식, 지적인 혼돈의 시대를 특징짓는 이 양립불가능한 진실들을 동시에 믿는 능력은 이런 순간에 태어난다. 상징적 장의 발칸화 Balkanization가 개인의 마음에 반영되는 것이다. 이 혼돈 상태는 분파들 간의 동맹정책에 반영된다.

- 무엇을 알 수 있는 지 아는 것. 지식의 사회적 분배
사람들이 좋다고 말하는 책에 독학자들이 언제나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결정적인 것은 자기들과 같은 독학자가 그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이 책을 이해했으므로 자기들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속자”란, 비밀스러운 지식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는 부모님이 해냈던 것처럼 자기도 해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숨겨진 지식이 있다면 부모님도 그것에 도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다른 사람들이 안다는 것을 아는 일, 혹은 역으로, 더 이상 알아야 할 게 없다는 것을, 자신이 소유한 작은 지식의 영역을 넘어선 곳에 자기보다 유능한 사람들만이 탐색할 수 있는 위험지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은 접근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영역들이 있다고 믿는다면, 연구와 창작은 마비되고 만다.
우리는 혼자서는 감히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 여러 진실들이 존재한다는 믿음.
역사적 성찰은 하나의 비판으로서 지식의 자만심을 꺾으며, 진정한 정치나 진정한 학문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은 채 여러 개의 진실에 대해 진실하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 비판은 모순적인가? 진실이 없다는 게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리스인들에게 물려받은 거짓말쟁이 놀이를 하고 있는게 아니다. -거짓말쟁이가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라고 말할 때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으므로 그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식의. 사람은 일반적으로 거짓말쟁이인 게 아니라,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특수하게 거짓말쟁이가 된다. “나는 항상 공상을 늘어놓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말을 하면서 공상을 늘어놓는게 아니다. 그가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면 말이다. “나의 공상은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만물의 본질에 새겨진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만일 이 세상에 대해 내가 지금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것이 곧 진실이라면, 보편적인 문화는 허위일 것이고, 또 그렇다면 어째서 허위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지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하여 진실을 아는 배타적 특권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