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특집
21세기 기독교 인간교육의 과제로서 양심교육(3)
한상진 교수(총신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
| 1. 들어가는 말2. 양심의 의미
1) 양심의 개념 2) 양심의 정의 3. 양심의 기능과 종류 1) 양심의 기능 2) 양심의 종류 4. 양심의 도덕의식 5. 신앙과 양심 1) 아담 안에서의 양심 2) 그리스도 안에서 양심 3) 성경적 양심 이해 6. 기독교교육의 과제로서의 양심교육 1) 양심교육의 필요성 2) 양심교육의 가능성 7. 나가는 말 |
4. 양심의 도덕의식
18세기 임마누엘 칸트(I. Kant)는 “생각 할수록 불가사의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 두 가지가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하나는 내 머리 위에 있는 수많은 별이 반짝이는 저 하늘이며 또 하나는 내 마음 속에 있는 도덕률이다.”라고 했다.
모든 사람은 양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주적인 도덕률, 즉 하나님의 도덕률에 반응하는 것이다. 양심은 하나님의 도덕률에 비추어 본 것을 우리 마음에 전달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이 양심의 지시에 따르거나 또는 그것을 묵살하도록 하는 것이다.
칸트는 그의 <실천이성 비판>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창공의 별과 나의 가슴속에 있는 도덕률에 대한 경이와 경건의 마음은 더욱 새로워지며 더욱 늘어간다.” 칸트가 말하고 있는 바 인간 실존의 실천적이고 도덕적 측면에 대한 인식이란 결과적으로 경탄과 경이로 표현된다. 창공의 별에 대한 경이란 인간으로서 우주와 자연에 대한 경탄이며 이는 동시에 창조주와 맞닿아 있는 인간 존재의 본질임을 시사한다.
칼빈(J. Calvin)은 기독교 강요 1장에서 경건과 경외야말로 신의식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했다. 자연에 대한 경탄과 경이는 달리 말하면 창조주 하나님의 솜씨에 대한 찬양과 경탄인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발견하고 경탄하게 된 별과 우주의 경이로움이란 자신의 내면속에 동일하게 자리 잡은 도덕에 대한 숭고한 가치와 비견되는 것이었고 이것이 곧 피조된 인간과 자연이 창조주와 연결되어 있음을 선천적으로 자각케 하는 양심의 역할인 것이다. 따라서 칸트가 경탄해 마지않는 창공의 별과 도덕률에 대한 경이와 경건은 바로 인간의 내면에 있는 보편적 양심의 소리에 대한 반응이며 종교적 씨앗이고 또 하나님 형상의 그림자일 수 있다.
칸트 자신의 가슴 속에 있는 도덕률은 보편적 양심의 자각에 근거한다. 뿐만 아니라 그가 도덕률과 대등한 가치로 삼은 창공의 별에 대한 경건과 경이의 마음이란 창조주와 연결된 양심의 발로임을 부인할 수 없다. 실천이성의 최고의 법정인 양심을 두드리는 경이와 경건의 소리는 정언명법이 아니라 하늘의 별과 같이 초월해 계신 하나님과 공유된 내적 연결고리의 울림인 것이다.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 사이의 이러한 본질적 연결고리는 분명히 존재한다. 인간 실존의 경험적 차원에서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실재이다. 이것은 칸트 자신의 인간에 대한 정의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과 세계라고 하는 두 이념을 절대적인 전체로 결합하는 매질인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선의지는 경험세계에서는 찾아질 수 없고 이성의 세계 내지 예지의 세계에서 찾아질 뿐이다. 그것은 오로지 순수이성의 개념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윤리학의 전제이다. 필연적인 선한 행동의 기준은 오로지 보편과 관계하는 이성 존재 내지 이성적 지평에서만 물어질 수 있다. 칸트의 양심은 이성이 이러한 명령과 이에 복종해야 하는 이성 존재의 의무와 연관하여 논의된다. 양심은 실천적 의식이며 그것은 그 스스로 의무인 바의 의식이다. 현실에서의 구체적인 행위에 대한 판단은 이성의 역할이 아니라 오성의 역할이며 이러한 내용의 판단 자체를 시험하는 것이 양심이다. 도덕성의 실천적 주체로서의 양심은 경건의적 전통의 빚을 지고 있는 칸트에 있어서 오류적일 수 없으며 완전한 선의지이다. 그것은 도덕적 행위에 있어서 최종적이며 절대적인 법정이다.
다시 말해, 칸트는 순수 이성에 의해 정초되는 선의지로서의 기준을 제시하고 이것의 범주 속에서 양심을 실천적 의식이라고 정의한다. 이성은 경험세계의 행동을 정초하는 기준일 뿐이며 구체적인 행위의 판단은 이성의 역할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의 실천적 주체를 양심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것을 궁극적으로는 실천이성이라는 개념의 범주로 도식화하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실천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의지의 영역이며 양심은 의지를 아우르는 실천의 주체이다. 인식과 판단의 선험적 논리 구조가 전적으로 이성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므로 양심이 바로 선험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공유하게 된 도덕적 자각으로서의 인식과 판단이 수납, 반응, 실천되는 장소이자 힘의 원천인 것이다.
이성과 양심은 동일하게 자료를 수용하여 체계화하지만 이를 판단하고 실천함에 있어서 이성은 그 자신의 합리적 논리 구조에 의거할 뿐이다. 그래서 이성적 판단은 비양심적이고 비윤리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양심의 판단은 이와 달리 도덕에 대한 선험적인 자각을 함유하기 때문에 도덕적 가치를 항상 반영하고 있다. 이성적 판단은 그 자체로서 정당하거나 옳다는 가치를 보장할 수 없지만 양심적 판단은 그에 따르기만 하면 그 자체로서 정당성을 확보하며 도덕적 가치를 보장받는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 본연의 목소리로서 도덕적 당위성과 그런 선택의 압력을 양심의 범주로 돌리는 것이 정당하다고 본다.
인간의 삶이 있는 곳에는 어떤 교육과 관습의 규범이 있었고, 이것을 위반하고 감정과 실천하고 싶은 행위가 인간의 마음속에서 갈등을 향한 음성이 있다. 이런 마음속의 음성은 18세기에 도덕감(Moral Sense) 또는 양심(Conscience)이라고 표현하였다. 현대 철학과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의 발전 속에서 양심의 역할을 설명하는 마음속의 기능에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1) 감정적인 측면으로서 우리가 옳다고 믿는 일을 행할 때는 만족감이 있었고, 나쁘다고 믿는 행위에는 불쾌감이 따른다는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이와 동일한 현상이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적인 작용은 동시에 도덕적 행위의 동기가 되며, 양심의 근본적 힘도 이런 측면에서 검토한다.
2) 양심의 기능은 인지적 측면에서, 즉 도덕적 인식능력과 관련된 감정적인 어떤 것만이 아니라, 도덕적인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판별하게 해주는 힘이다. 이런 인지적 양심은 도덕적 행위의 의미와 도덕 법칙의 인식과 도덕법칙의 합리성의 근거이다. 실천적인 측면에서 양심은 영어로 ‘Con-science’, 독일어의 ‘Ge-wissen’은 함께 안다는 지적인 측면을 의미한다.
3) 인간이 도덕적 지식과 감정을 가지고 있더라도 옳고 선한 것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의지의 결단이 없다면 행위로 연결되지 못한다. 양심은 의지적 측면에서 이해했던 피히테(J. G. Fichte)는 양심을 삶의 과정에서 도덕적 사명감을 가지고 활동하라는 인간 마음의 명령하는 기능으로 받아 들였다.
브로드(Broad)는 양심을 이와 같이 3가지 기능과 함께 도덕적 본성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서, 일반적으로 도덕적 지식, 도덕적 숙고, 도덕적 감정, 도덕적 신념, 도덕적 노력 등으로 광범위하게 해석하였다.
칸트의 도덕관은 실천이성과 의지에 정초하고 있다. 그러한 실질적인 도덕관은 각 개인의 도덕 진리가 되는 것은 감정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는 이성에 의해 규정되고, 영향 받음으로서 이성의 보편적 법칙에 따르지만 그러나 의지는 경향성(Neigung, 감정적 욕구)에 의해 지배되는 성질이 있어서 이성이 규정해 주는 방향으로만 따라가기에는 어려움이 많으므로 도덕 법칙에 따라 행위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떤 특수한 감정이 필요하다.
칸트의 이런 도덕적 감정(das moralische Gefühl)은 도덕 법칙에 대한 존경 감정(ein Gefühl der Achtung fürs moralische Gesetz)이다. 이러한 존경 감정은 경험에서 유래하지 않고 지성적인 근거(intellektueller Grund)에서 생기는 감정으로서 선험적(a priori) 으로 인식되는 적극적 감정이다.
칸트의 이런 도덕 감정은 인간이 도덕적 존재로서 본래부터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이런 감정에 무감각하다면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 감정은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며,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교육을 통하여 계발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실천 이성을 통하여 도덕 감정에 관계하는 양심은 도덕 법칙에 대한 존경심과 관계성을 가진다. 즉 양심은 어떤 행위가 도덕적 감정에 의해 야기된 도덕적 관심에 따라 법칙을 실천했는지에 관한 판단이다.
5. 신앙과 양심
그리스도와 아담의 관계에 근거하여 인간의 양심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난 ‘아담 안에 있는 인간의 양심’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의 양심’이다. 모든 인간의 양심은 이 두 가지 중 하나이다.
1) 아담 안에서의 양심
양심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라 경건치 아니한 자, 죄인을 위하여 세운 것이 것이다(딤전1:8-9). 그러나 인간의 양심은 본성적으로 자신의 죄를 알게 하지만 그것 때문에 뉘우쳐 사함을 받고 구속의 은혜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지는 못한다. 인간의 양심에 의존하는 한 인간은 죄를 앎에도 회개치 아니하고 완악한 마음에 사로잡혀 있다. 이 양심은 아담 안에 있는 인간, 즉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않는 자, 경건치 않은 자, 타락한 죄인으로서 망령된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자신들의 죄를 핑계치 못하게 하기 위한 양심이다. 이는 자연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발견하지만 미련한 마음에 허망하여 져서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감사치도 아니한다는 바울의 진술과 동일한 맥락이다. 인간은 신의식 자체만을 가지고, 혹은 자신의 도덕적 의식만을 가지고는 누구도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2) 그리스도 안에서의 양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믿음과 세례로 말미암아 구속에 참여하게 된 인간은 이전 아담 안에서 갖고 있던 악한 양심을 벗어버리고 참 마음,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다(벧전3:21).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선하게 된 양심이 찾게 되는 하나님은 바로 온전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이것은 칸트가 말하는바 도덕적 요청에 의한 신, 절대자와는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만이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인 것 처럼 인간의 이성과 더불어 인간의 전인격 역시 그리스도에 의해 한계 지워진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인간의 이성과 인격 즉 인간의 삶 전체가 바르게 인식될 수 있다. 전인은 그리스도 예수와의 관계 속에서 총체적으로 파악된다.
3) 성경적 양심 이해
구약에서는 양심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없다. 양심과 비슷한 개념을 가진 용어를 찾는다면 마음(leb)이 양심에 가장 가까운 단어라 할 수 있다. 구약에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을 마음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한다. 신약에서는 양심을 바울과 히브리서 기자가 사용했다. 특히 히 10:2, 벧전 2:19의 말씀에는 우리나라 성경에 양심이란 단어 대신에 “죄를 깨닫는 일” “하나님을 생각함으로”로 번역되었다.
성경에 사용된 양심의 개념을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 중생되지 못한 자의 양심과, 중생한 자의 양심이다.
둘째 : 중생한 자로서의 양심의 성장과 퇴화이다.
(1) 중생되지 못한 자의 양심과 중생한 자의 양심
모든 사람은 양심을 소유하고 있다(롬 2:15, 엡 31:33). 이 뜻은 창조 시에 하나님의 법이 분명하고 명료된 형태로서 인간의 마음 판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이 법은 손상되었고 훼손되었다. 이 법은 양심의 법으로 무감각하게 되었고 인간의 오선은 희미하게 되었다.
박윤선도 양심은 훈련이나 경험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 본래의 본성으로 본다. 다윗과 나단 선지자의 사건을 해석하면서, 다윗이 양심을 소유하였으며, 또 양심을 통해 회개했다고 설명한다.
성경은 양심의 2가지 본성을 가진 것으로 해석한다. 즉 현 존재인 자신과의 충돌과, 증거의 기능(롬 1:20)의 본성이다. 충돌되므로 변명하고 송사하고 (롬 2:15), 서로 송사하고 변명하므로, 분열(롬 2:12)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이 분열은 양심 자체의 가장 심오한 표현이다.
성경은 중생되지 못한 자의 양심은 더러워진 양심(고전8:2)이며, 중생 후 타락한 양심은 화인 맏은 양심(딤전4:2) 그리고 중생한 자의 양심은 선한 양심과 깨끗한 양심(딤전 1:1, 3:9)이라 한다.
중생되지 못한 양심은 침착하지 못하고, 불확신하며, 불안전하다. 그러므로 불건전하고, 불신앙하며, 하나님의 법에 의해 불복종하여 그 법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꽉 찼고, 또 양심이 오염되고 더러워져 그들의 잘못된 광신성을 옹호하며 그들의 잘못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다른 것에 돌린다. 이것은 양심이 앞제자에 고소자라는 표현이며 또 최후 심판의 전주곡으로 이해된다. 양심 앞에 숨겨진 실체는 전혀 없다. 그러므로 최후 심판 때에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지조한 것이며, 또 벌거벗은 것 같이 심판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양심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아신다(시14:2-3). 양심이 인간존재의 죄된 근본인 마음을 변화 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참된 지식을 상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법과 뜻을 단계적인 방법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였다.
모세의 율법을 통해 의식적 방법을, 선지자들을 통하여 양심의 각성을 계시하셨다. 이 양심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계약을 주신 때까지 몽학성생(갈 3:24)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요 1:45)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것이 됐다.
율법은 인간 스스로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골 2:2).
율법이 주어지므로 양심의 각성이 있을 수 있다. 이 각성은 중생과 상용한다. 이 각성은 단계적 혹은 단번에, 즉 일회성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회개는 다르다. 각성은 전적 은혜로운 국면이며, 회개는 각성의 기적후에 얻어지는 인간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계시의 각성을 통해 회개케 하시고, 회개 한 후 얻을 때까지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영향을 주신다(빌 2:13, 행 16:14, 시 51:10).
야스퍼스의 인간론에서 인간은 혼돈적 존재가 아니라, 본래적 존재가 되기로 결정하는 것으로써 결단하는 존재(entscheidendes sein)인 책임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인간의 결단과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인간은 회개와 함께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만나게끔 되어있는 참인간인 것이다.
이 믿음은 말씀과 모든 율법이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으로 받기 때문에 “지켜야만 하는 것”으로 알고 “나는 …해야 한다”고 양심은 계속 말한다. 그러므로 중생한 양심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책임을 지는데, 그것은 형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양심 때문에 순종할 책임을 진다.
믿음과 양심 사이에 하나님의 역할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의인된 것을 믿게 하는 선물을 주는 것이다 (엡 2:8). 그러므로 믿음을 인정하는 양심이고 이 양심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한다. 즉 중생한 양심이 중생치 못했던 양심 자체를 알게 된다. 그러므로 옛사람의 양심은 비정상적이고 범죄적이다. 이제 남은 것은 그리스도 분량만큼 자라 가는데 있다(엡 4:13-16).
(2) 중생한 자의 양심의 성장과 퇴화
믿음이 어떻게 성장해 가는가? 이것은 양심이 어떻게 성장해 가느냐와 관계한다. 양심의 성장은 성령님의 조명과 그리스도에게의 순종,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이루어진다. 중생한 양심은 확신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 선한 일을 하고 또 성경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이런 양심은 중생되지 못했을 때보다 더 차원 높게 죄 의식을 전 삶에 갖게 하는 것이며 자기기만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이다.
양심의 내용에는 의지와 관계성을 가진다. 칸트는 양심을 의지에 내리는 무상명령으로 보았다. 이 무상명령의 의지가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서 양심의 미래는 결정된다. 의지가 따르면 성장이고 따르지 않으면 퇴화이다. 양심을 죽이는 행위를 창세기 3장에서 볼 수 있다. 또 딤전 4:2에는 “화인 맞은 양심”이라 하며 딤전 1:9에는 “양심을 버린 자”, 딛 1:15에서는 “마음과 양심이 더러워 진자”이다.
구원은 양심이라는 통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성경이 사람의 죄를 꾸짖어 바로 잡아 줄 수 있는(요 16:8) 양심이 불타 없어졌기 때문이다. 양심이 불탄 것을 죽음에 이르는 죄(요일 5:16), 성경모독 죄(마 12:31, 히 6:4-6)에 해명된다. 왜냐하면 성령님의 역사할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 결코 용서받을 수 없고 또한 죄를 더 이상 슬퍼하지 않고 탄식하지 않는다.
양심을 성장시키는 요소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에 좌우한다. 말씀에 의해 스스로 얼마나 깨우침을 받았는가? 이 양심이 하나님의 빛 아래서 성장하게 되어지면 훌륭한 열매(갈 5:22-23)를 맺게 된다.
양심은 의지에게 명령하고, 의지는 그 명령을 방해치 않고 순종할 때 양심은 계속적으로 우리를 경계, 심판하여 순수한 양심(행 24:16, 딤전 1:5-9; 3:9, 딤후 1:3, 히 13:18, 벧전3:16,21)이 되게 한다.
순수한 양심의 특징은 “민감해 지는 것”이다. 민감한 양심은 조심성 있는 신앙인으로 양성시켜 유혹에 넘어지지 않게 더욱 권위 있는 양심이 되게 한다. 이 권위 있는 양심은 신앙인의 의지 실천에 분명하고 정확한 선을 제공한다. 그렇게 되므로 양심적인 기독교인은 모든 것에 양심과 상의하며 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밝혀진 양심에 자신의 삶 전부를 굴복시켜 매일 매일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민감한 양심은 우리로 하여금 생산적인 삶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양심내용과 그 실천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교육인가? <다음호에 계속>
한상진 교수(총신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