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음악과 말로 할 수 없는 것 (La musique et l’ineffable)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 포노PHONO / 2025.12.1
– 20세기 프랑스의 독보적인 철학자이자 음악학자 장켈레비치의 음악 에세이 국내 첫 출간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는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운 철학자다. 20세기 프랑스 사상은 마르크스주의와 구조주의라는 두 가지 큰 흐름 속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채 ‘말할 수 없는 것’과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의 형이상학, 인의 (人義)의 도덕, ‘말로 할 수 없는 것’의 미학이라는 세 축을 중심으로 독창적인 사상을 전개했다. 그래서 장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 에마뉘엘 레비나스 등 당대 스타 철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평생 ‘시간성’, ‘아이러니’, ‘윤리’, ‘죽음’, ‘용서’와 같은 주제를 탐구하면서 40여 권의 걸작을 남겼다.
살아생전에 장켈레비치는 밖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어느 주의에도 속하지 않고, 어떤 종교도 갖지 않았다. 그러나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추모하고 반유대주의를 비판하는 데 주저하지 않은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나치 치하에서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며 독일어로 쓰인 그 어떤 것도 읽지 않았고 독일 음악 역시 멀리했다고 한다. 그가 떠난 지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프랑스 대형 서점의 가장 잘 띄는 자리에 그의 책이 진열될 만큼 프랑스에서 영향력 있는 철학자로 재조명되고 있다. 지난 몇 년 사이 한국에서도 그의 저서가 서너 권 출간되었다. 그러나 음악 관련 에세이는 아직 국내에 소개된 바 없다.
장켈레비치는 음악 애호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인생 절반을 철학에, 나머지 절반을 음악에 바쳤다고 할 만큼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가 음악과 음악가에 관해 쓴 10여 권의 책은 기존 철학자들과는 다른 그만의 독특한 면모를 보여준다. 2025년 12월 포노출판사에서 출간되는 《음악과 말로 할 수 없는 것》이 국내에서 만날 수 있는 장켈레비치의 첫 음악책이다.
“장켈레비치의 음악 이야기는 아무 예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가 예술 전반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는 것도 놀랍다. 이는 중요한 지점이다. 그는 모든 예술에 대해 말하는 것을 무척 경계했다. 《음악과 말로 할 수 없는 것》은 음악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은 매우 특수한 문집 (文集)이고, 그의 주장과 성찰에서 피아노는 아주 결정적 위치를 차지한다.
음악은 언어가 아닌데, 이는 음악의 위상이 말에 종속되지 않는 동시에 표현적인 것임을 의미한다. 장켈레비치의 재능은 음악과 말 사이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음악은 표현의 가능성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표현적이지 않다.” – 프랑스 공영 라디오 방송 ‘프랑스 퀼튀르(France Culture)’에서 푸아티에대학교 철학과 교수 ‘필리프 그로소 (Philippe Grosos)’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는 탁월하고 흥미로운 철학자이자 대단히 박식한 음악 애호가였다. 이 책에서 그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말할 수 없는 것’, ‘표현할 수 있는 것’과 ‘표현할 수 없는 것’까지 좀체 접근하지 않는 개념을 눈부실 정도로 훌륭하게 다룬다. 이 책을 읽을 때 마주하는 어려움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글쓰기의 ‘조형적’ 아름다움 혹은 시적 차원에 주목하자. 이 글을 읽으면 단번에 ‘매혹당한다.’ 우리는 금세 이 ‘매력’에 굴복할 것이다.” – ‘아마존 프랑스’에서 독자 ‘피에피에르 (Pie-pierre)’
“장켈레비치는 음악철학 분야에서 중요한 저서일 뿐 아니라 매우 문학적인 저서를 남겼다. 분명 접근하기는 어렵지만, 이는 이 책의 ‘매력’을 강력하게 보여주는 어떤 것이기도 하다. 이 독특한 저서에 주목해야 할 점은 여럿 있다. 그중 철학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음악적 예시의 매우 극단적인 주관성과 각 장(章)의 낯선 배치는 간혹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엄청난 문학적 자질과 프랑스어의 구사, 각 장마다 담긴 음악에 대한 사랑은 전적으로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 프랑스 문화 비평 웹사이트 ‘상스크리티크 (SensCritique)’에서 회원 ‘아도바르뷔 (Adobarbu)’

– 목차
음악과 말로 할 수 없는 것
I. 음악의 “윤리학”과 “형이상학”
1. 오르페우스냐, 세이렌이냐?
2. 음악에 대한 악감
3. 음악과 존재론
II. 비표현적인 “에스프레시보”
1. 전개라는 신기루. 반복
2. 표현의 신기루
3. 인상주의
4. 비표현적인 것과 객관성
5. 폭력
6.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기: 짐짓 꾸민 무관심
7. 반대의 것, 다른 것, 덜한 것: 유머, 암시, 곡언법
8. 대강 기술하기, 환기하기, 이야기하기
9. 사후에 암시하기
10. 무한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11. 심각하고 경박하며 심오하고 피상적인. 음악의 모호성
12. 말을 할 수 없는 것과 말로 할 수 없는 것. 의미의 의미
III. 매혹과 알리바이
1. 시적 작용
2. 페브로니야 혹은 순수
3. 공간적 신기루
4. 시간성과 야상곡
5. 신성한 깊이 없음. 보이지 않는 키테시
6. 베르가모적 매혹. 멜로디와 화성
7. 베르가모적 알레그레토. 낭랑히 울리는 피아니시모, 약음의 포르테
8. 지혜와 음악
9. “기쁨의 동반자”
IV. 음악과 침묵
주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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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Vladimir Jankelevitch)
프랑스 철학자, 음악학자로, 1903년 프랑스 부르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박해를 피해서 프랑스로 왔다. 1922년에 파리고등사범학교(ENS)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그의 스승은 브랑슈비끄(Leon Brunschvicg)다. 1923년에 베르그송을 만나서 편지 교환을 시작하였다. 1926년 교수자격 시험을 1등으로 통과, 다음 해부터 1932년까지 프라하 프랑스연구소에서 강의하며 셸링에 관한 학위 논문 『셸링의 만년의 철학에서 의식의 오디세우스』(L’Odyssee de la conscience dans la derniere philosophie de Schelling, 1933)를 작성했다. 1936년 툴루즈 대학을 거쳐 릴 대학 도덕철학 교수로 강의하였다. 독일 점령하에 비시 정권에서 유대인이란 이유로 파면당했다. 그 후 군에 입대했으나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툴루즈에서 가명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다. 전후에 릴 대학을 거쳐 1951년에서 1979년까지 소르본에서 도덕철학 교수를 지냈다. 1968년 5월 소르본에서 그는 학생들의 편을 들었다. 많은 저술 가운데, 철학 저술로는 『제1철학 : ‘거의’의 철학 입문』 등이, 음악 저술로는 『음악과 말할 수 없는 것』 등이 있다. 우리말로는 『죽음에 대하여』가 번역되어 있다. 그가 영향을 받은 인물로는 베르그송(H. Bergson), 짐멜(G. Simmel), 체스토프(Leon Chestov), 셸링(Schelling), 플로티노스(Plotin)이며 그가 영향을 준 인물로 제르파뇽(Lucien Jerphagnon), 퐁뜨네(Elisabeth de Fontenay) 등이 있다.
.역자 : 이충훈
서강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을 공부했다. 프랑스 파리 제4대학에서 『단순성과 구성: 루소와 디드로의 언어와 음악론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양대학교 프랑스학과 교수이다. 디드로의 『미의 기원과 본성』, 『백과사전』, 『듣고 말하는 사람들을 위한 농아에 대한 편지』, 『자연의 해석에 대한 단상』, 장 스타로뱅스키의 『장 자크 루소. 투명성과 장애물』, 사드의 『규방철학』, 모페르튀의 『자연의 비너스』등을 번역했고, 『우리 시대의 레미제라블 읽기』, 『18세기 도시』를 공동으로 펴냈다.

– 책 속으로
음악은 봇물처럼 들이닥쳐 우리 내면에 자리 잡고서는 그곳을 아예 자기 거처로 정하는 것 같다. 이렇게 들이닥친 음악의 물벼락을 맞고 자기를 내주고 음악에 홀려 넋이 나간 사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니다. 그는 고스란히 진동하는 현(弦)이며 소리를 울려내는 관(管)인 것이다. 그는 기악주자가 현에 손가락을 짚거나 그 위로 활을 기막히게 그을 때 전율하고 만다. 아폴론 신이 무녀(巫女, Pythie)의 가슴을 가득 채우듯이 오르간의 우렁찬 소리며 하프의 부드러운 악센트는 청중을 온통 장악해버린다. 비이성적인 데다가 심지어 차마 입 밖에 낼 수도 없는 이러한 작용은 진리의 바깥에서 실현된다. 그래서 음악은 논증적인 과학보다는 마법을 더 닮았다. — p.11-12, 「Ⅰ. 음악의 “윤리학”과 “형이상학”」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에 대한 배움의 우월성과 배움에 대한 실천의 우월성을 동시에 부정하면서 행하기와 배우기는 동시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마톤타스 포이엔(μαθο?ντα? ποιει?ν, 배운 후에 하는 것)은 지성에 편중된 편견이며, 포이산토스 만타네인(ποιη?σαντα? μανθα?νειν, 한 후에 배우는 것)은 부조리하다. 진실한 것은 포이운타스 만타네인(ποιου?τα? μανθα?νειν, 하면서 배우는 것)이나 만타논타스 포이엔(μανθα?νοντα? ποιει?ν, 배우면서 하는 것)의 동시성이다. 선택하면서 숙고하고, 말하면서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는 키타라를 연주하면서 키타라 연주자가 된다. 또한 의지(意志)하면서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알랭은 “……시도하면서 배우는 것이지 시도한다고 생각하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시인은 시를 짓기 전이 아니라 지으면서 시를 착상한다. 시에는 사색과 행위를 나누는 빈(空) 공간이 없으며, 이 둘을 나누는 거리도 시간 간격도 없다! 창조하기 위해서는 창조해야 한다. 그리고 분명 자크 드 라 팔리스에게 합당한 이 악순환은 창조가 항상 그 자체로 시작될 뿐 아니라 그 결과로 창조하는 것을 배우는 방법이 전혀 없음을 의미한다. 창작자는 본질과 존재를 공동으로 두며 실재와 동시에 가능성을 둔다. — p.59-60, 「Ⅱ. 비표현적인 “에스프레시보”」 중에서
러시아 시인 콘스탄틴 발몬트는 “찰나의 환영에서 나는 변화무쌍한 무지갯빛 유희로 가득 찬 세상을 본다”라고 썼다. 이 기분들(humeurs)을 교대로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에는 이미 극히 적은 함량의 유머(humor)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의 기분이 있다면 여럿의 기분도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서로 번복되는 셀 수 없이 많은 기분도 있는 까닭이다. 웃음은 순간적으로 갠 하늘의 태양처럼 사라지고 눈물이 그 뒤를 잇는다. 그러므로 눈물과 웃음은 파토스적 삶(vie pathique)을 이루는 단순한 에피소드들이다. 마찬가지로 여행 중에 잇달아 떠오르는 모순적인 인상들을 굽어보는 의식은 날마다 일어나는 각각의 인상의 시작과 끝을 동시에 발견하고 그런 식으로 감정의 열정적 영원성을 초월한다. 감정은 만성적 상태인 것이니, 의식 전체가 영속적이고 지체되고 느리게 흡수된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가? “아파시오나토”며 비장한 소나타와 교향곡이 불안정한 유머레스크를 내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분은 감상적인 유머레스크에서 스스로 영원하고 절대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면, 해학적인 유머레스크(l’humoresque humoristique)에서는 스스로 일시적이라는 점을 안다. 드뷔시의 〈전주곡〉은 정서적 삶을 늦출 시간을 남겨두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스트라빈스키의 〈농담〉과 〈고양이의 자장가〉, 에리크 사티의 〈운동과 오락〉에서처럼 페데리코 몸포우의 아주 짧은 소품들, 야나체크의 〈리카들라〉에서 이 간결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강조의 두려움, 주장을 내세우려 들지 않는 근심이다. 드뷔시의 〈악흥의 순간〉이 음악적 순간(instant)이 된 것은 “인상주의”란 이미 그 자체 내부에서 조심스러운 아파시오나토였기 때문이다. — p.64-65, 「Ⅱ. 비표현적인 “에스프레시보”」 중에서
음악은 소리의 시간이고 두 테마 속에 포함된 잠재성의 시간적 실현이다. 그런데 청중이 이 잠재성을 발견하고 그 내재성 한가운데로 영혼이 침투하는 데에는 시간이 든다. 그러므로 더 깊어지는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은 연주의 시간과 수직을 이루면서(이런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면) 청중이 의미를 잃은 그 의미의 두께에 침투하게 만드는 시간이다. 우선 연주자의 구성적 의도를 포착하고, 그 의도를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변형시키는 변주 속에서 주제를 다시 알아보고, 한 작품의 심리학적 문맥과 이데올로기적 주변을 형성하는 모든 암시를 지각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색다른 아름다움과 우리의 청각적 습관과는 다른 화성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도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 불쾌하게 들리는 불협화음이 내일이면 섬세한 즐거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시간의 시련은 “깊이”의 가장 확실한 표지가 된다……. 심오한 음악은 첫 오후를 맞자 개성과 원천을 판단할 수 없게 되는 풍요로운 자연과 같다……. 아니다. 대번에 즐거움을 주는 것에 대한 불신은 그저 엄격하다거나 반(反)쾌락주의적 편집증의 결과가 아니다. 깊이를 잴 수 없는 깊이란 없지만 고갈되지 않고 지칠 줄 모르고 반(半)영구적인 감동의 가능성은 있다. 혐오에의 저항에서, 위대한 걸작들의 항구적인 싱그러움에서 영원한 젊음의 기적이 성취된다. 음악에서 되풀이는 종종 진정한 혁신이 아니던가? 요컨대 시간적인 작품의 깊이는 처음부터 모든 원천을 드러내지 못하고 단 한 번에 그것의 의미의 의미 전체를 나르지 못하는 조심스러운 영혼을 가리키기 위한 다른 이름이다. 또한 음악 작품 자체가 박자의 길이에 따라 연주되고 들리므로 음악의 무의미적 의미와 비표현적 표현성의 풍요로움은 단 한순간에 공간에 제시되지 않고 인내심 강하고 주의 깊은 귀를 위해 조금씩 펼쳐진다. 음악의 깊이가 우리의 깊이를 요청하는 것이다! — p.131-132, 「Ⅱ. 비표현적인 “에스프레시보”」 중에서
음악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명확하게 밝혀보자. 음악이 우리에게 전하는 신비는 모든 것을 불모로 만드는 죽음의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삶, 자유, 사랑을 풍요롭게 만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더 간단하게 말해, 음악적 신비는 말을 할 수 없는 것(l’indicible)이 아니라 말로 할 수 없는 것(l’ineffable)이다.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죽음이라는 검은 밤이다. 그것은 비존재를 절망시키는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어둠인데, 이는 넘어설 수 없는 벽이 그것의 신비로부터 우리를 막아 세우는 까닭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절대적으로 할 말이 전혀 없는 것이고, 이성을 짓누르고 담화를 대경실색케 하면서 사람의 말문을 막히게 만든다. 그리고 말로 할 수 없는 것은 이와는 완전히 반대로 말할 것이 무한하고 끊이지 않으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신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신비가, 사랑의 고갈되지 않는 신비가, 특히 시적인 신비가 그렇다.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시정을 고스란히 얼어붙게 하는 최면의 마법과 닮았다면, 말로 할 수 없는 것은 풍요롭게 만들고 영감을 주는 그것의 특성 덕분에 오히려 매혹처럼 작용한다. 그것은 매혹과 저주가 다른 만큼이나 말을 할 수 없는 것과 다르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이 부추기는 곤혹스러움은 소크라테스가 겪은 난처함처럼 풍요로운 아포리아다. 야나체크는 어디선가 “말이 부족하다”고 썼다. 말이 부족한 곳에서 음악이 시작되고 말이 멈추는 곳에서 인간은 노래밖에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 p.133-134, 「Ⅱ. 비표현적인 “에스프레시보”」 중에서
음악 역시 청중 전체를 시인으로 만든다. 음악은 이 설득의 힘을 고유하게 갖고 있다. 그 힘은 매혹이라고 불리며, 순수는 그 힘의 조건이다. 제작 중인 창작자의 순수에 재(再)제작 중인 연주자의 순수가 대응한다. 재창조해야 하는 작품의 연주에 흡수되고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황홀경에 빠져 온 힘으로 팽팽히 긴장하고 있는 연주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청중을 잊는다. 연주자가 자기의식(self-conscience)으로 인해 둘로 분열되거나 태도를 요란스레 꾸밀 여유가 어디에 있을까? 매혹이라는 웅변적 무언의 가르침은 수행자의 전적으로 자발적이고 눈치채지 못하는 암시를 통해서만 수행될 뿐이다. 수행자가 지나치게 많은 것을 원하더라도 수동자(受動者, le patient)는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 수행자가 애쓰기 시작하더라도 수동자는 더 이상 동의하지 않는다. 매혹이 끝나버리는 것이다! — p.160, 「Ⅲ. 매혹과 알리바이」 중에서
매혹은 오히려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라기보다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매혹은 항상 태어나는 상태에 있는 것이기에, 연속적인 상태에 있는 우리에게는 이전의 순간을 제거해야만 현재의 순간이 허락되기 때문이다. 이 교대는 고스란히 시간성의 멜랑콜리가 된다. 그래서 음악은 기억이라는 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향기를 극단적으로 펼쳐낸다. 그 향기는 제 자신의 과거의 과거성(passeite)에 영혼을 천천히 젖어들게 하여 혼란스럽게 하고 얼근히 취하게 만든다. — p.173-174, 「Ⅲ. 매혹과 알리바이」 중에서
태양빛을 받으며 몇 초간 떨리고 반짝이는 무지갯빛 비눗방울처럼 음악은 손에 닿자마자 터져버린다. 음악은 때맞은 1분의 대단히 의심스럽고 곧 사라져버리는 흥분 속에서만 존재한다. — p.212, 「Ⅲ. 매혹과 알리바이」 중에서
침묵은 존재와 연결된 배경막이었다. 그러나 이제 소음은 침묵과 연결된 소리막이다. 이 지속되는 페달음, 침묵의 순간들과 연결된 저 고집스러운 근본 베이스는 바다의 소음보다 더 지각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삶만큼 지속되고 우리의 모든 경험을 동반하고, 탄생으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귀를 채운다. 생성을 가득 채우는 소란스러운 생동감이 중단되고 잠시 공백이 생긴다. 침묵은 영원한 소란이 만들어내는 구멍들을 통과해 나타난다. 이제 우리는 조금 전에 침묵이라고 부른 것을 소란이라고 할 것인가? — p.238, 「Ⅳ. 음악과 침묵」 중에서
침묵은 다른 모든 감각이 충만할 때 감각들 중 유일한 범주의 무(無)일 뿐 아니라, 그 자체는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기까지 하다. 가장 예사로운 침묵은 말의 침묵이다. 전도서에서는 “침묵할 때와 말할 때(καιρο?? του? σιγα?ν και? καιρο?? του? λαλει?ν)”라는 두 경우를 구분한다. 말이 무겁게 짓누르는 침묵으로부터 우리를 쉬게 하는 것처럼, 침묵은 귀를 먹먹하게 하는 수다로부터 우리를 쉬게 한다. 그러므로 침묵은 그저 말의 소음과 다른 어떤 것이니, 그것은 비존재가 아니다. 설교자들의 말처럼 말(loquela)이 특히 인간의 소음인 것이 사실이라면, 이 소음을 제거하는 무언증은 특권적 침묵일 것이다. 음악은 말의 침묵이며, 이는 시가 산문의 침묵인 것과 같다. 소리의 현전인 음악은 침묵을 채우지만 음악 자체는 침묵의 방식이다. 그러므로 소음을 변화시켜서 무정형하고 우연적인 소란으로부터 소리의 질서로 나아가게 하는 상대적 침묵이 있다. 휴식이 피곤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침묵해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벌써 조금이나마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다. — p.244, 「Ⅳ. 음악과 침묵」 중에서

– 출판사 서평
.“음악이란 무엇인가?” 음악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 교양서
《음악과 말로 할 수 없는 것》은 음악의 본질을 이해하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필수 도서라고 할 만큼 음악 분야에서 중요한 서적으로 손꼽힌다. 이 책에서 저자는 모리스 라벨, 가브리엘 포레, 클로드 드뷔시 등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활동한 프랑스 작곡가들과 이고리 스트라빈스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등 20세기 주요 러시아 작곡가들을 주된 예시 삼아 음악에 대해 논한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장켈레비치는 “음악은 이중으로 착종되어 있어서, 이로부터 형이상학의 문제들과 도덕의 문제들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음악은 “표현적인 동시에 비표현적이고, 진지한 동시에 경박하고, 심오한 동시에 피상적”인 것이다. 또한 음악에는 의미가 있으면서 또 없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음악이란 별것 아닌 여흥에 불과할까, 아니면 상형문자처럼 암호화된 언어일까? 어쩌면 둘 다일까? 저자는 본질적으로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다는 점에서 도덕적 양상이 불거진다고 했다. 음악은 주술적 힘을 발휘하지만 음악적 아름다움이란 근본적으로 불명확하다. 여기서 우리는 당혹스러운 데다 아이러니하기까지 한 불균형을 느낀다. 물론 이따금 숭고하면서 명확한 성격이 적잖이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작품도 있다. 그러나 음악의 힘과 음악의 모호성 사이에서 어쭙잖지만 해결 불가능한 모순이 다시 생긴다. 그렇다면 저자는 묻는다. “음악이 실행하는 매혹은 속임수일까, 지혜의 원리일까?” 장켈레비치는 이 책에서 이런 모순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음악이 매혹이라는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작용인지, 시간을 유일한 차원으로 갖는 시적 행위의 순수함 속에 명확하게 존재하는지 깊이 고찰한다.
.“무한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한다” 아름답고 독창적인 문체로 프랑스 문학 독자에게도 사랑받아
장켈레비치는 다른 여러 저작에서와 마찬가지로 본서에서도 의미는 유사하나 뉘앙스에 다소 차이가 있는 단어를 사용한다. 일례로 “l’indicible”과 “l’ineffable”를 들 수 있는데, 이 책을 번역한 이충훈 한양대학교 프랑스학과 부교수는 “l’indicible은 신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충격 앞에서 얼어붙어 말문이 막히는 것을 가리키는 반면 l’ineffable은 무슨 말로도 모자라고 아무리 반복해도 그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하기에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뜻한다면서 “사실 이 두 단어의 어원은 ‘말하다’에서 온 것으로, 특별히 구별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이 책에서는 “말을 할 수 없는 것(l’indicible)”과 “말로 할 수 없는 것(l’ineffable)”으로 옮겼다.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어느 순간 우리 앞에 다가선 봄날의 정취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것인가? 피토레스크한 풍경을 바라보며 낯선 감정에 사로잡힌 이의 꿈과 같은 느낌을 그려내는 데는 어떤 말이 어울릴까? 누구에게도 느끼지 못한 감정에 몸이 단 연인은 뜨겁고 달콤한 감정을 그저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으로 담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오랜 바람이 마침내 이루어질 때 느껴지는 마음의 움직임은 말이라는 좁은 우리에 갇힐 수 없으며 상투성의 굴레를 단번에 벗어던진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신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충격 앞에서 얼어붙어 말문이 막히는 ‘말을 할 수 없는 것(l’indicible)’이 아니라, 무슨 말로도 모자라고 아무리 반복해도 그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하기란 터무니없이 부족한 ‘말로 할 수 없는 것(l’ineffable)’이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음악과 말로 할 수 없는 것》은 읽으면 읽을수록 장켈레비치의 문학적인 표현과 독특한 사유에 빠져들게 된다. 특히 장켈레비치의 아름답고 독창적인 문체는 프랑스 문학 독자들의 마음을 먼저 사로잡기도 했다. 각 장의 소제목은 말로 할 수 없는 음악만큼 모호하고 수수께끼 같다는 인상을 받는데, 읽다보면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한편 이 책에서 장켈레비치는 음악의 본질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기보다는 여러 질문을 던지는 방식을 취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의 심오한 물음 속에서 자기만의 답을 찾거나 성찰하는 순간과 자주 조우하게 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